다섯 번째 신화
원자력은 기후보호를 위해 존재한다?
원전의 수명연장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사고위험성’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연장된 원전들이 에너지 수급체계의 구조개편에 제동을 걸고, 나아가 전적으로 이런 구조개편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중요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관찰되는 기상이변들과 이를 토대로 밝혀진 과학적 진실은 ‘이제 기후변화는 의심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인류공동체는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를 억제하려고 노력 중이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 절실하다.
기후전문가들은 21세기 중반까지 산업국가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지금보다 적어도 80~95퍼센트까지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구가 많고 고속성장 중인 신흥산업국들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들 국가에서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일단 꺾여야 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동결하거나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과 같은 신흥산업국들이 화석연료에 의존해온 북반구 산업국의 에너지집약적인 발전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흥산업국들은 기존의 산업국에 비해 훨씬 적은 에너지로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원자력 옹호론자들은 원자력기술이 ‘지구온난화’라는 위기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거침없이 원자력에너지가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시킬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바로 그것이 미래의 원자력기술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원자력기술의 미래 역할(온실가스 배출의 감축 역할)은 기존의 산업국가와 신흥산업국, 개발도상국에서 새롭게 불붙은 원자력의 미래 역할에 관한 논쟁을 해결할 요소라는 것이다. 정체와 몰락의 수십 년을 보낸 원자력기술 옹호론자들이 ‘핵에너지의 부흥기’를 독촉하고 희망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이런 원자력의 미래 역할이었다.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될 때는 실질적으로 이산화탄소(CO2)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원자력 추종자들이 ‘원자력의 사용이야말로 기후온난화 방지에 절대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뒤셀도르프(Dusseldorf)의 거대 전력회사인 ‘에온’의 회장 불프 베르노타트(Wulf Bernotat)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미래를 위한 에너지 의제에서는 두 개의 목표, 즉 ‘원자력 포기’와 ‘이산화탄소 배출의 급격한 감축’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다뤄져야 한다. 동시에 두 개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몽상에 불과하다.”(Berliner Zeitung, 2005. 12. 3.)
세계 최대 민영전력회사의 회장이 이렇게 말했듯이 ‘원자력을 통한 전력생산’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 논거는 대다수 전통적인 에너지 경제권의 사업자들과 마찬가지다. 즉, 이들의 주장은 원자력 활용이 없는 기후보호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력 로비스트들이 이제껏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광고 캠페인의 표제어 역시 ‘사랑받지 못한 기후보호자’이다. 이 매혹적인 모티브는 우리에게 한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
뒤에는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브룬스뷔텔 원자력발전소가 멀리 있고, 앞으로는 엘베 강둑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천천히 자막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 기후보호자는 ‘교토 의정서’를 지켜내기 위해 하루 24시간 싸우고 있습니다.”
이 광고내용의 진실을 말하자면, 이 낡은 원자력발전소는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안전관리상의 심각한 결함이 문제로 제기된 가운데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2007년 여름 이래로 2년 넘게 말이다. 그리고 이 원자력발전소는 그 사이에 단 1킬로와트시(kWh)의 전력도 공급하지 않았다.
여론은 원자력에너지를 기후보호자로 둔갑시킨 이 선동적인 광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너지는 광고내용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 지구를 뒤져봐도 피부로 느낄 만한 문제해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 세계의 전력수급에서 원자력에너지의 영향력은 향후 10년 동안 급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9년 가을에 바젤(Basel)의 컨설팅회사인 프로그노스(Prognos AG)에 의해서도 전망되었다.
독일 연방방사선방호청(Bundesamt fur Strahlenschutz)이 분석을 의뢰한 한 보고서에서, 프로그노스의 미래학자들은 부흥의 취기에 젖은 원자력 경제를 확 깨울 만한 다음과 같은 관측을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전체의 전력수요를 충당하는 에너지원 가운데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6년 14.8퍼센트에서 2020년 9.1퍼센트로, 2030년에는 7.1퍼센트까지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었다(Prognos AG, 2009).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지속 가능한 기후보호의 걸림돌이 되는 원자력에너지
이런 소수의 조사결과만으로도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원자력에너지는 국제적인 기준에서 기후문제 해결의 일부를 담당할 만큼 큰 규모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 임박해 있는 세계 에너지 체계의 구조개편으로 원자력에너지는 결코 문제해결의 열쇠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에너지 전환(태양, 풍력, 수력, 바이오에너지, 지열 등)을 위해서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에 기초한 에너지 체제를 지향할수록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기 시대에 새로운 원자력발전소의 경쟁력이란 없다. 오히려 원자력발전소는 기후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불프 베르노타트(Wulf Bernotat)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 전력공급회사 ‘에온’이 아주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물론 에온이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니며, 사태의 전후맥락은 다음과 같다.
2009년 초에 영국 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 청문회에선 영국 정부가 2008년에 발표한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충 전략이 논의되었다. 이 전략은 유럽연합 기준에 부합하도록 자국 내의 전체 전력수급 가운데 생태전력이 차지하는 비율을 일단 3분의 1로 끌어올리고, 지속적으로 이 비율을 높여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서면으로 이루어지는 청문회 절차에서 에온과 전적으로 원자력 의존적인 프랑스의 거대 국영전력회사 엘렉트리시테 드 프랑스(EDF―줄여서 ‘프랑스전력’이라고 칭함)가 공문을 보내면서 발언권을 신청하고 들어왔다(UK Department for Business, Innovation and Skills, 2008).
공문에서 두 회사는 먼저 경보를 울렸다. ‘에온’과 ‘프랑스전력’은 재생가능 에너지를 끝없이 지원하는 것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만약 끝없이 지원할 경우에는 이 섬나라에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에온의 로비스트들은 사실상 영국 정부에 생태전력 비율을 최대 3분의 1로 제한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이는 보수파인 기민당-자민당 행정부의 계획을 살펴보아도 독일에서는 2020년에 도달이 가능한 수치이다.
‘프랑스전력’은 자신들이 보낸 공문을 통해, 전체 전력수요에서 차지하는 생태전력 비율이 25퍼센트를 넘어가게 되면 계획 중인 원자력발전소의 신축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반면 독일에서는 에온과 에온의 소속회사가 소위 불연속적으로 매입되고 있는 풍력과 태양전력과 원자력에너지 사이의 ‘시스템 갈등’ 자체를 부인한다(전력생산이 일정하지 않은 재생에너지 시스템과 항상 일정한 전력생산이 용이한 원자력 시스템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옮긴이). 이렇게 이중적인 잣대를 대는 동기는 분명하다. 영국에서 원자로 신축을 막게 될 요소들로 인해 독일―2009년 기준으로 이미 전체 전력의 16퍼센트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얻는―에서 원자력발전소 운영회사들의 낡은 원자력발전소 수명연장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원자력발전소가 경제적인 이유와 안전공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요동치는 전력 수요 변동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런 수요 변동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생태전력량에 의해서도 가속될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는 수개월 동안 언제나 최대 출력을 공급한다. 이를 위해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이러한 점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는 운영업자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다.
물론 오늘날 몇몇 원자력발전소들은 상층 용량 범위 내에서 출력 조절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도 원자력발전소의 경제성에는 손실이 된다. 왜냐하면 소위 전력부하에 따라 출력을 조절하는 방식(load follow operation)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적은 양의 전기를 생산해서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안전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원자로 출력의 끊임없는 변화는 발전소의 핵심 구성요소들에 기계공학적·열역학적·화학적인 의미에서 추가적인 부담과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프랑스전력이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 전략에 관한 영국 정부의 청문회에 보낸 공문에서도 확인된다. 유럽형 가압경수로(EPR)의 예를 들면서 프랑스전력의 공문 작성자는 아주 상세하게 ‘왜 생태전력이 영국 전체 전력생산량의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조절의 한계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형 가압경수로와 같은 초현대적인 원자로조차 재생가능 에너지가 전력수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지 않을 경우에만 생태전력 생산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출력변화 진동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속 가능성과 기후보호를 겨냥한 전력수급 체계에서 원자력기술과 생태전력 기술은 불가피하게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영국의 생태전력 비율은 2010년에도 겨우 몇 퍼센트에 불과해서 지속 가능한 에너지 수급체계와는 한참 멀어져 있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독일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두 에너지 수급체계가 벌이는 ‘시스템 갈등’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이 갈등이 해가 갈수록 첨예해진다.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조절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는 앞으로 계속 증가하는 풍력과 태양력에서 생산되는 전력량에 상응하여 전력 네트워크에서의 전력량을 보정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이 빚어내는 결과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전력거래소(EEX)’에서 이미 여러 차례 아주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2008년 가을 이래로 점점 더 빈번하게 이 거래소에선 소위 ‘부정가격(negative strompreise)’이 등장했다. 다시 말해 전력공급 회사들이 생산한 전기에 대해 자신들이 돈을 지불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것처럼 들리는 이런 상황은, 특히 독일에서 강한 바람이 불고 이와 동시에 전력수요가 줄어드는 날(전형적으로 주말 또는 공휴일)에 주로 발생한다.
예를 들면 2009년 성탄절 기간이 그랬다. 이때 놀랍게도 11시간 동안이나 전기의 국제시장 가격이 ‘0’ 아래였다. 다시 말해 전력공급 회사들이 오히려 구매자에게 돈을 주고 전기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무려 11시간이나 지속된 것이다. 1메가와트시(MWh)당 가격이 ‘-120유로’로 떨어지자, 전력공급 회사는 오히려 자신들이 생산한 전기에 대해 1메가와트시당 120유로씩 돈을 내고 팔았던 것이다. 12월 26일의 경우, 전력가격은 종일 1메가와트시당 평균 ‘-35유로’에서 왔다갔다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전력망과 거래시장에 전기를 제공할 수밖에 없는 거대 발전소 운영자들은 그 기간 동안에 수십만에서 수백만 유로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전력공급자들이 소위 원자력발전소를 몇 시간 동안이나 가동시키고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남아도는 전기를 전력거래 시장에서 마이너스 가격으로 팔게 되는 것―옮긴이)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육중한 원자로 입상들의 출력을 저하시켰다가 몇 시간 후에 다시 상승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지불하면서 전기를 파는 것이 아직까지는 비용이 훨씬 덜 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에너지는
어떻게 재생가능 에너지의 성장을 방해하는가
원자력과 재생가능 에너지 사이에는 분명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스템 갈등’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재생가능 에너지의 전력생산량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이고, 기상 조건만 맞는다면 재생에너지 생산량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또한 전력공급망에서 생태전력 우선권의 규칙이 유지되는 한, 거대 원자력발전소가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출력을 낮춰 가동하는 경우에는 재생에너지 생산이 점점 빈번해질 것이다.
독일에서 2009년 말에 발생한, 거대 전력회사들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았던 성탄절 선물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원자력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자주 일어날 수도 있다.
독일 연방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전체 전력공급량 가운데 16퍼센트를 차지하는 생태전력 비율은 2020년을 기점으로 두 배가 된다. 독일의 ‘재생가능한 에너지연맹(Bundesverband Erneuerbare Energien, BEE)’은 심지어 이 비율을 세 배까지 늘릴 수 있다고 내다본다. 카셀(Kassel)에 있는 프라운호퍼연구소(Fraunhofer)의 ‘풍력에너지와 에너지시스템기술연구소(Institut fur Windernergie und Energiesystemtechnik: IWES)’는 이런 관측에 기초해 독일의 전력수급 모델을 구성하고 모의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상시 운영을 전제로 건설된 거대 발전소는 미래의 독일 전력수급 시스템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것으로 전망되었다(Fraunhofer IWES, 2009).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거대 전력회사들이 부득불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로비를 총동원하는 것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전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로비의 성과가 빠르게 나타날수록 전력망에는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들의 잔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을 허가해준 독일 연방정부와 이들이 비호한 거대 전력회사 사이에는 이미 심각한 갈등이 예정돼 있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사고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연장된 원전들이 에너지 수급체계의 구조개편에 제동을 걸고, 나아가 전적으로 이런 구조개편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중요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태양과 우라늄 사이의 ‘시스템 갈등’은 이웃 섬나라 영국보다는 독일에서 훨씬 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갈등이 정치가들에게는 여전히 충분해 보이지 않는 듯하고, 반면에 경제학자들에겐 그렇지 않다. 컨설팅 회사인 프로그노스는 향후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산으로 인해 원자력발전소의 출력 저하가 더욱 빈번할 것으로 내다보았다(Prognos AG, 2009).
한편 연방정부가 설치한 ‘환경전문가 자문회의(Sachver-standigenrat fur Umweltfragen: SRU)’는 2009년에 발표한 논제 정리 보고서에서 원자력과 재생가능 에너지원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 자문기관은 “석탄 또는 우라늄을 원료로 삼는 거대 발전소의 유지와 확대는 재생가능 에너지를 최대 전력생산 주체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과 정책적으로 호환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자문회의는 또 “시스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며, 재생가능 에너지 수급체계로 확실하게 가닥을 잡기 위해서라면 “두 노선을 동시에 걷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거대 전력회사들은 이 발표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러한 발표로 인해 원전의 수명연장 논쟁의 부조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연방정부가 수명연장을 결정하는 즉시 그들은 독일의 전력망에서 집행되는 재생가능 에너지의 법률적 우선권의 철회를 위해 강력한 투쟁도 불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제 다음의 사실들이 분명해진다. 미래의 에너지 시스템을 두고, 즉 재생가능 에너지와 원자력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원자력 광고물이 우리에게 거짓으로 꾸며대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양립과 공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과 결단’의 문제이다.
거대 에너지 공급회사들이 그 알량한 수사로 우리에게 들이대는 ‘폭넓은 에너지 혼합’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생가능 에너지가 에너지 공급의 전반을 책임지는 시스템에서는 결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에너지 수급체계는 2009년 독일 연방정부가 체결한 연정각서에 따라 추구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거대 전력회사들에게도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중 전략은 제대로 실행되기 어렵다. 연방정부는 원으로 사각형을 만들겠다는 것처럼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2050년까지의 기후보호―모범사례 독일’이라는 연구를 통해 어떻게 독일이 장기적으로 에너지정책적 목표와 기후정책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조사했다(WWF Deutschland, 2009). 이 연구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기후보호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모든 에너지 부문들에서 근본적인 구조개편이 이루어지고, 몇몇 부문(전력 부문이 이에 속한다)들이 40년 안에 이산화탄소 배출에서 점차 벗어나는 것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반드시 전제될 것은 정치적인 의지이다. 전통적인 경제의 저항에 부딪치더라도 구조개편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정치적인 의지 말이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면에서 더 큰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관건이다. 이때의 효율성은 산업생산 과정과 교통 부문은 물론이고 건설 분야와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문들을 아우른다. 중간 단계로 석탄을 천연가스로 전환해야 하고,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이 점점 더 증가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재생가능 에너지가 모든 에너지 수급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석탄과 천연가스 사용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즉 이산화탄소를 분리수거해서 지표 밑의 지질층에 저장한다는 ‘청정석탄기술(Clean-Coal-Technology)’도 효과가 있는 것인지, 언제 어디서 가능한지도 앞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 연방정부의 ‘환경전문가 자문회의’가 밝히는 것처럼, 앞으로 새로운 에너지 시대를 여는 전면적인 구조개편 과정에서 원자력에너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단지 대규모의 기저부하 발전소(Base-load Power Station)10)들이 전력 부문에서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방해할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재앙적인 위험 가능성’ 외에도 원자력발전에 엄청난 규모의 공학적 능력들이 동원되고, 여기에 재정 수단들도 병행되면서 시스템 개편에 필요한 재정 수단들이 잠식되기 때문에 원자력은 ‘방해기술’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그 어떤 기술도 원자력에 견줄 만한 위험성에 처해 있지는 않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심각한 사고 한 번, 혹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한 번으로도 이 기술의 사회적 수용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민주국가라면 서둘러 원자로의 가동을 중지시켜야 할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가지 문제
― 기후변화와 재앙적인 원전사고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기후보호 목표를 달성하려면 화석과 핵을 주된 에너지원으로 삼는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에서 벗어나 완전히 재생가능 에너지 공급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러한 재생가능 에너지 시스템은 오늘날 알려진 기술들과 지금 당장이라도 상용화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술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시작할수록 나중에 치러야 할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 이행의 끝에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가지의 위험(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와 재앙적인 원전사고)을 최소화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원자력 옹호론자들이 수없이 떠들어온 소위 ‘효과적인 기후보호냐, 원자력에너지의 포기냐’라는 ‘목표 갈등’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날조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악마와 사탄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현재의 독일 행정부는 전력생산 부문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40퍼센트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만약 원자력발전을 확대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이것은 독일에 적어도 10기 이상의 원자력발전소들이 새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일부 원자력발전소들은 그 사이에 수명을 다하고 폐쇄될 것이기에 이를 보충하는, 즉 추가적인 원전 건설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2002년에 연방의회 내에 설립된 ‘앙케트위원회(Enquetekommission)’는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를 원자력발전소에만 의지한다고 가정하고 2050년까지의 이산화탄소 감축 시나리오를 도출해 보았다. 과학자들은 2050년까지 적게는 60기에서 많게는 80기까지 새로운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2010년까지 독일에서 운영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모두 17기라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60~80기의 위험성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독일에서만도 사정이 이러할진대, 기후보호라는 명분 아래 전 세계가 원자력이라는 전략을 선택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선택의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누구도 원치 않는 미래의 일을 떠올리는 데에는 이제 상상력도 필요하지 않다.
세계기후자문회의인 IPP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가 요구하는 이산화탄소 감축 요구에 부응하며 확연한 기후보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천 기의 새로운 원자로가 건설돼야 할 것이다. 전력과 동시에 대재앙의 위험성을 생산하는 나라는 지금처럼 30여 개의 나라만이 아니라 50~60여 개의 국가 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천 기에 이르는 ‘재앙의 화덕’들이 지구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분쟁지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적 공격과 아울러 테러리스트들의 새로운 공격목표가 생겨나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종 핵폐기물처리장 문제와 제어되지 않는 핵무기 확산의 위험은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 퍼지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차원으로 도달할 것이다. 이미 빠듯한 우라늄 매장량으로 정말 머지않은 시대에 지극히 위험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 플루토늄 경제가 지구상에 도래할 것이다.
또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경수로들은 빠르게 재처리시설과 고속증식로들로 교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빈곤 퇴치 대신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정수단이 원자력 기반시설의 확대를 위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제5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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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게르트 로젠크란츠
대학에서 금속학을 전공한 뒤 70년대 말에 스투트가르트에 있는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 금속을 연구했고, 1979년에 스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스투트가르트에 있는 호엔하임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타케스차이퉁(=매일신문)에서 편집장으로 일했고,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의 대표적인 잡지 슈피겔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이후에 남독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디 보헤(=더 위크지), 디 차이트에서 프리랜스 기자로 일했다. 2004년부터 베를린에 있는 ‘독일 환경단체(Deutschen Umwelthilfe)’에서 정치&언론 부서를 이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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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진희
환경, 에너지 기술 분야의 역사와 관련 정책에 대한 과학기술사적 연구와 기술과 여성의 연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현대 과학기술과 삶의 변화》(공저), 《초록눈으로 세상 읽기》(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적 경제 기적》, 《환경의 세기》 등이 있다.
정계화
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정치학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 《빛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책》(공역),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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