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짐 크로 법과 지긋지긋한 숫자 10
클로뎃: 백인 앞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네 살 무렵에 처음 알았어요. 잡화점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린 백인 남자애가 내 앞으로 새치기를 했어요. 잠시 후 그 아이보다 조금 큰 아이들이 문으로 들어와 웃기 시작했어요. 나는 아이들이 뭘 보고 그러는지 주위를 둘러봤어요.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어린 남자애가 말했어요.
“손 좀 줘 봐. 나도 볼래.”
어쩐 일인지 아이들은 내 손을 보고 싶어 했어요.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펴 보였어요. 그랬더니 남자애가 자기 손을 내 손에 대보는 게 아니겠어요. 남자애 손이 내 손에 닿았죠. 나이 먹은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엄마가 우리를 봤어요. 그다음엔 우리를 빤히 보는 남자애 엄마를 바라봤죠. 이윽고 엄마는 가게 안을 가로질러 오더니 손등으로 내 얼굴을 때렸어요. 나는 눈물을 터뜨렸어요.
엄마가 말했어요.
“백인이랑 닿으면 안 되는 거 몰라?”
남자애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메리, 당신 말이 맞아요.”
다음부턴 절대로 백인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여러분이 클로뎃 콜빈처럼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앨라배마 중부에서 흑인으로 성장했다면 짐 크로 법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흑인 아기와 백인 아기는 서로 다른 병원에서 태어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 분리되어 살아가고, 죽어서는 서로 다른 묘지에 묻혔다. 법률, 간판, 칸막이, 화살표, 조례, 불평등한 기회, 규정, 모욕, 위협, 종종 폭력을 등에 업은 관습이 거미줄처럼 빽빽하고 면밀하게 얽혀 인종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인종 분리 정책을 아우르는 전체 체계를 짐 크로 법이라고 했다.
짐 크로 법의 목적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뿐 아니라 흑인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950년에 앨라배마 주의 수도인 몽고메리 시에 사는 흑인 여성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했고, 일자리가 있는 흑인 남성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잔디를 깎거나 다른 허드렛일에 종사했다. 흑인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백인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했다.
“흑인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전문직은 흑인 교회 목사나 인종 분리 정책으로 흑인만 다니는 학교 교사뿐이었어요.”
1950년대에 몽고메리에서 제일 침례교회 목사로 일했던 랠프 애버내티가 당시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짐 크로 법 때문에 흑인은 백인과 함께 공부하거나, 놀거나, 식사를 하거나, 일하거나,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지 못했다. 흑인과 백인 시민은 서로 다른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서로 다른 화장실을 이용했다. 흑인과 백인은 한 팀에서 운동할 수 없었고, 결혼을 할 수도 없었으며,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할 수도 없었다.
흑인 시민의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규제하지 않는 인종 분리법도 있었지만, 버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버스에 타는 건 고통이 멈추지 않는 치통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클로뎃 콜빈의 부모처럼 가정부나 정원 청소부로 일하는 흑인들은 백인 가정에서 날품을 팔고 푼돈을 벌었다. 몽고메리의 집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백인 고용인의 집에 갈 때 버스를 타야 했다. 수많은 흑인 학생들도 어려서부터 환승 정류장과 시간표를 외워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흑인 학생들은 녹색과 황금색 버스들이 칙칙 소리를 내며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와 문을 열 때까지 구석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장난치고, 벼락공부를 했다. 흑인들은 대부분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인 승객들은 버스를 타며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모든 승객은 앞문으로 탄 뒤 운전사 옆에 있는 요금통에 차비를 넣었다. 하지만 앞쪽의 백인 전용 좌석이 모두 비어 있지 않으면 흑인들은 버스에서 내려 뒷문으로 다시 타야만 했다. 때로는 미처 타지도 못했는데 버스를 몰고 가 버리는 운전사도 있었다.
애틀랜타나 내슈빌, 모빌 같은 남부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흑인 승객은 뒷좌석에 앉고, 백인 승객은 앞좌석에 앉았다. 앞뒤 좌석이 모두 차면 가운데 좌석에 섞여 앉았고, 빈 좌석이 없으면 흑인과 백인 승객이 모두 서서 갔다.
하지만 몽고메리에는 독자적인 규칙과 전통이 있었다. 몽고메리 시내버스는 좌석이 모두 서른여섯 개였다. 앞쪽 네 줄에 열 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모두 백인 승객을 위한 자리였다. 매일같이 피곤에 지친 흑인 승객들은 앞쪽에 빈자리가 있어도 서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자리에 못 앉은 승객들로 붐비는 통로에서 짐과 어린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싸움을 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앞쪽 열 좌석 뒤에 앉고 못 앉고는 운전사한테 달려 있었다. 운전사는 승객이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 살피려고 머리 위쪽에 달린 뒷거울을 계속 흘긋거렸다. 백인용 좌석 열 개가 모두 차면 운전사는 버스 중간과 뒤쪽에 앉은 흑인 승객들에게 새로 탄 백인 승객한테 자리를 양보하라고 지시했다. 백인 승객 한 명이 흑인 승객 네 명이 앉은 줄에 앉고 싶어 하면 운전사는 뒷거울을 흘낏 올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거기 모두 일어나쇼!”
그러면 흑인 승객 네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가야만 했다.
흑인 승객이 나이가 많거나, 임신을 했거나, 환자이거나,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있거나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시내버스 법률이나 조례에 따르면 1900년부터 흑인 승객은 옮겨서 앉을 자리가 없다면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운전사들은 말 한마디로 흑인 승객들의 자리를 옮기는 게 관례가 될 때까지 시내버스 법률을 다짜고짜 무시했다. 운전사는 자신이 일어나라고 말하면 흑인들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고, 흑인들은 실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 빈자리가 없다면 흑인 승객들은 그저 운을 탓해야만 했다.
몽고메리 시티 라인즈 버스 회사는 거친 사람을 운전사로 채용했다. 그리고 몽고메리 시 조례는 버스 운전사에게 경찰권도 부여했다. 버스 운전사들은 고용된 첫날부터 자기의 주요 임무가 버스 운전 말고 짐 크로 법을 강제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운전사들도 있었다.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빈자리가 뻔히 보이는데도 서 있어야 하는 건 우울하고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빈자리 열 개는 피곤에 지친 흑인 노동자들에게 강박이 되었다. 흑인들 사이에서 숫자 10은 지긋지긋한 숫자였다. 아무도 10과 관련된 물건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앨라배마 주립 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조 앤 로빈슨이 쓴 글이다.
흑인들은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인종 분리 정책의 야만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흑인 운전사는 없었습니다. 운전사가 흑인 승객들을 ‘검은 젖소’나 ‘검은 원숭이’라고 부르는 게 다반사였죠.”
마틴 루터 킹이 몽고메리 시내버스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한동안 몇몇 흑인 승객들이 운전사의 횡포에 맞서기도 했다. 1946년에 저니버 존슨은 버스 운전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저니버 존슨이 소란 행위로 고발되어 벌금을 낸 뒤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바이올라 화이트와 케이티 윙필드가 백인 좌석에 앉았다가 체포되었다. 두 사람도 유죄를 선고받고 벌금을 냈다.
1949년 여름, 뉴저지 주에 사는 열여섯 살 소녀 에드위너 존슨과 한 살 아래 남동생 마셜 존슨이 친척을 만나러 몽고메리에 왔다. 몽고메리에 머무는 동안 시내버스를 탄 남매는 백인 남자와 그 아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인 아이가 마셜한테 다른 자리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기분이 잔뜩 상한 마셜은 백인 아이의 명령을 거부했다. 버스 운전사가 존슨 남매에게 뒷자리로 가라고 두 번 명령했지만, 남매는 꼼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뉴저지 주와 몽고메리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난 버스 운전사가 경찰관에게 무전기로 연락했고, 경찰관이 다음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남매를 체포했다. 전화를 받은 친척이 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와 벌금을 내고 남매를 유치장에서 꺼냈다. 겁에 질린 존슨 남매는 바로 뉴저지 주로 돌아갔다.
더 험악한 경우도 있었다. 엡시 워디라는 여자가 환승역에서 추가 요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자 운전사가 욕을 마구 퍼부어 댔다. 엡시 워디가 추가 요금을 내는 대신 버스에서 내리는 쪽을 택했지만, 운전사는 쫓아와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엡시 워디가 운전사에 맞서 주먹다짐을 하자 운전사는 그녀를 때리면서 침을 뱉었다. 경찰관이 나타나 운전사와 엡시 워디를 떼어 놓은 뒤, 엡시 워디만 소란 행위로 입건했다.
1952년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브룩스라는 남자가 시내버스에 올라 요금통에 동전을 넣고 통로를 따라 뒷자리로 가고 있을 때 벌어졌다. 운전사가 브룩스에게 앞문으로 내렸다가 뒷문으로 다시 타라고 소리를 질렀다. 브룩스는 차라리 걸어가겠다며 차비를 돌려 달라고 했다. 운전사는 브룩스의 요청을 거절했고, 말싸움이 심해지자 경찰관을 불렀다. 잠시 후, 경찰관이 버스에 올라와 브룩스한테 내리라고 했다. 브룩스는 차비를 돌려받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경찰관이 브룩스한테 총을 쐈고, 브룩스는 나중에 총상 때문에 사망했다. 조사관은 경찰관이 브룩스를 쏴 죽인 걸 정당방위로 판결했는데, 브룩스가 체포에 불응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운전사한테 대든 승객들은 대개 경찰서로 연행되어 벌금을 내고 나온 뒤 치욕적인 경험을 잊으려고 했다.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백인 판사, 위협적인 경찰관, 무례한 운전사, 시도 때도 없이 죄어드는 관습과 법률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1954년 5월 17일 월요일,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 위원회 소송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공립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짐 크로 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남부 여러 주에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이 판결 이후 흑인 학생들은 그때까지와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용기를 내어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행동했다.
그런 학생 가운데 열다섯 살 소녀 클로뎃 콜빈이 있었다. 클로뎃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흑인 역사를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가르치고 있었다. 1955년 3월 2일 3시 30분경, 호리호리하고 안경을 낀 고등학교 3학년 클로뎃 콜빈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하이랜드 가든스 버스에 올라 백인 전용 좌석 뒤의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클로뎃은 무릎 위에 교과서를 올려놓고 파란 원피스의 주름을 편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섯 블록을 지나면 클로뎃은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클로뎃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을 촉발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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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필립 후즈 Phillip Hoose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에서 태어나 인디애나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산림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성인을 위한 작품을 썼지만, 딸들과 친해지려고 어린이·청소년책을 쓰기 시작했다.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에세이, 논픽션, 어린이책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활약을 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딸과 함께 쓴 『안녕, 꼬마 개미』로 1998년 제인 애덤스 어린이 도서상을 수상했다. 『우리 세상이기도 해요! - 세상을 바꾼 아이들』로 1994년 크리스토퍼 상을 받았고, 『우리도 거기 있었어요! - 미국 역사 속 아이들』로 2001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이 책 『열다섯 살의 용기』는 2009년 전미도서상, 2010년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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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민석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뒤 청소년들에게 정의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손도끼』『바람의 딸, 샤바누』『넌 자유롭니?』『내 사랑 옐러』『시타델의 소년』『모스 가족의 용기 있는 선택』『손도끼를 든 아이』『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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