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_ 하나의 ‘그림’과 두 개의 ‘주석’
여기 하나의 그림이 있다. 한 사람(남자)이 앉아 있는 측면도가 그것이다. 사지는 없고 몸통만 있는데, 선의 굴곡이나 터치가 상당히 ‘나이브’하다. 당연히 미적으로도 좀 거시기하다. 서양 해부도에 나오는 쭉 뻗은 팔등신, 다비드 조각상이나 비너스상이 주는 깔끔한 포스 따위는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등을 타고 흐르는 세 개의 관이 보인다. 등이 저렇게 중요한 곳이었나? 모든 생명체는 ‘뒷면이 먼저 결정되어야 앞면이 결정된다’고 하는 생물학적 명제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폐와 심장, 소장과 대장, 간과 담, 신장과 방광 등의 내장기관이 나뉘어 있다. 장기의 위치와 모양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구역을 대충 분할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방광 밑에 곡도(대변이 지나가는 길)와 수도(소변이 지나가는 길)를 표시해 두었다. 더욱 가관인 건 배꼽이다. 해부도에 배꼽이 떡 하니 나오는 것도 황당하지만 거기다 배꼽 주변에 흐르는 저 주름들은 또 뭔가. 주름의 양이 상당한 걸 보면 그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이것이 바로 『동의보감』의 첫 장 「내경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형장부도」다. 그림으로 시작하는 책이라? 문득 푸코의 『말과 사물』이 떠오른다. 『말과 사물』은 「시녀들」이라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이 그림 역시 구도가 아주 독특하다. 그림 안에서 화가가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의 중앙엔 거울 속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왕과 왕비가 있다. 그림의 안과 밖이 중첩되고 화가의 시선과 왕의 시선, 그리고 그 왕을 비추는 거울의 시선이 다중적으로 교차한다.
이 시선들의 중첩과 교차를 설명하면서 『말과 사물』의 향연이 시작된다. 『동의보감』 또한 장장 25권(번역본은 총 2,500여 페이지)을 자랑하는 방대한 의서다. 스케일도 엄청날뿐더러 여타 의서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담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표상의 배치’라는 고전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 특정 시대 사회의 인식체계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이 「신형장부도」 역시 『동의보감』의 담론적 비전에 대한 서곡에 해당한다.
먼저, 왜 몸통만 있는 것일까? 생명의 핵심은 얼굴과 오장육부에 있기 때문에 사지말단은 굳이 그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리라. 아, 물론 경락의 유주流注, 흐름를 그릴 때는 사지를 포함하여 몸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표현한다. 이 그림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흐름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다. 옆으로 새는 감이 있지만 그래서 사지가 없이 몸통만으로 태어났는데도 ‘오체대만족’을 외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에 반해 인체의 모든 것을 세세히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구식 해부도는 그러한 비율을 갖춘 신체만이 정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셈이다.
그럼 등 뒤에 있는 관들의 행렬은? “양생을 위해 기를 수련할 때 정기가 오르내리는 길이다. 척추 맨 아랫부분을 미려관, 중간부분을 녹로관, 맨 윗부분을 옥침관이라 한다. 옥침관은 정신활동을 주관하는 뇌로 연결된다.”(신동원, 『조선사람 허준』, 한겨레신문사, 2001, 34쪽) 아하! 그래서 측면도였던 거구나. 옆으로 앉아 있어야 이 세 개의 관을 명확하게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관들이 주욱 이어지는 꼭대기, 즉 머리 부분엔 ‘수해뇌’髓海腦, ‘니환궁’泥丸宮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다. 뇌가 중요한 기관인 건 말할 나위도 없는데, 여기선 그것들이 등을 타고 오르는 관들과 이어져 있다는 데 포인트가 있다. 뇌는 척수의 연장이라는 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내부의 장기들이 구역처럼 느슨하게 표시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서양의 해부도가 형태와 조직을 중심으로 한다면, 여기서는 기운의 흐름과 분포가 더 중요하다. 한의학에서 장부는 장기만이 아니라, 그 기운이 작용하는 특정 ‘구역’zone과 ‘회로’를 지칭한다. 경락의 개념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의 정기가 호흡을 통해 드나드는 곳이 바로 단전, 곧 배꼽이다. 배꼽의 주름들은 바로 숨을 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지금 열심히! 단전호흡 중이다. 주름들의 출렁거림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시선이다. 미적으로는 좀 머시기하지만 눈동자는 분명 아래를 향하고 있다. 배꼽을 통해 숨이 들고 나는 것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단학의 최고경전이라고 하는 북창 정렴의 『용호비결』에 나오는 단전호흡의 기본자세 그대로다.
진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머리를 살짝 숙여 아래를 보되, 눈은 콧등을 보고 코는 배꼽 언저리를 대하게 되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정렴, 『윤홍식의 용호비결 강의』, 봉황동래, 2009, 70쪽)
요컨대, 이 그림은 서양의 해부도와는 달리, 살아 숨쉬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처럼 늘 호흡이 가쁜 ‘저질체력’이 아니라, 깊이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활발발活潑潑한 신체다. 살아 있으려면 신체의 모든 세포는 활동을 해야 한다. 그 활동들은 쉬임없이 접속하고 변이한다. 그것을 표현하자니 그림의 선이 이렇게 터프한 게 아닐지. 또 생명이란 유형의 생리와 무형의 정신이 결합해야만 가능하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오버랩시키려다 보니 그림이 좀 ‘웃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옆으로 새면, 이 해학성도 매우 중요한 특이성이다. 서양의 해부도는 정교하고 멋지다. 하지만 그래서 비장하다. 이 비장미에는 인체와 건강에 대한 ‘이데아’적 표상이 깔려 있다. 그에 반해 동양의 신체는 유머러스하다. 48가지의 호상을 지녔다는 부처님 상像도 카리스마가 넘친다기보다는 원만하고 태평스럽다. 특히 ‘포대화상’ 같은 부처님은 천진난만한 표정에 몸매는 4등신에 가깝다. 이런 안면성과 비율에서 핵심은 정교함이 아니라 변용력이다. 직선으로 각이 서 있으면 멋지긴 하지만 변용이 불가능하다. 너무 잘생겨서 연기가 어려운 꽃미남 스타들처럼. 변용력이란 몸과 외부의 교감이 왕성하다는 뜻이다. 동양의 해부도는 이런 점에 착안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터치가 거칠면서 해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물론 이 그림은 허준이 독창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을 포함하여 『동의보감』에 수록된 장부의 형상은 이미 전통적인 의서와 양생서에 다 등장했던 것들이다. 허준의 독창성은 이 그림을 서두에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저서가 다른 의서들과는 달리 질병과 치료가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위주로 한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는 데 있다. 생명활동이란 몸 안과 밖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생명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순간 바로 생명의 외부, 곧 우주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몸이면서 곧 우주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다.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十二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5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 (「내경편」, 10쪽)
「신형장부도」 바로 다음에 나오는 손진인의 말이다. 손진인, 이름 손사막孫思邈. 당나라 때의 전설적인 명의로 특히 양생술에 뛰어났다. 진인眞人이란 “천지를 손에 넣고 음양을 파악하며 정기를 호흡하고 홀로 서서 신神을 지키며 기육이 한결같”(17쪽)은 존재다. 한마디로 도가양생술의 최고경지에 이른 인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손진인의 멘트는 「신형장부도」에 담겨 있는 몸과 우주에 대한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주석이다. 물론 근대적 에피스테메에 입각해서 보면 황당무계할 것이다. 머리가 둥근 게 하늘을 닮았다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는 거랑 팔다리 사지가 있는 게 같은 맥락이라고? 십이경맥과 수혈 같은 건 전문적인 말이니까 넘어간다 치자. 다음 대목은 더 가관이다. 우레와 번개가 있으니 기쁨과 분노가 있고, 비와 이슬이 있으니 눈물과 콧물이, 풀과 금석이 있으니 털과 치아가 있다고? 좋게 말하면 시적 상징이거나 상징적 농담, 정직하게 말하면 헛소리거나 미신처럼 보일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섣부른 결론은 금물이다. 적어도 동아시아 5천 년의 지혜가 그 정도 수준이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언급에 동의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동의한다고 한들 바로 이 원리가 터득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이 언급을 통해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전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의 배치에선 인간과 자연, 천지의 흐름과 희로애락은 어떤 연관성도 없다. 사람 따로 동물 따로 식물 따로. 계절 따로 공간 따로 인생 따로. 정말 ‘따로주의’의 극치다. 실제로 근대주의는 ‘Individualism’,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누는 것을 갈망한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마치 인생의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는 듯이. 하긴 이제는 그것조차도 잊은 듯하다. 처음엔 명석판명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고매한 뜻이 있었을지 모르나 이젠 그냥 습관적으로 나누고 또 나눌 뿐이다. 이 맹목적 분할에 제동을 걸기 위해선 정말로 강렬한 질문이 필요하다. 정말 그런가? 계절의 변화와 우리의 감정은 어떤 연관성도 없는가? 우리 몸의 구조와 자연의 사물들은 정말 무관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얼마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만 있어도 일단은 대성공이다. 이 질문의 힘으로 그 입구까지는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어지는 주단계의 글은 두번째 주석에 해당한다. 주단계朱丹溪. 역시 손진인 못지않은 의학사의 ‘레전드’에 해당한다.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금·원시대에 활약한 4명의 의학자를 이름의 하나로 성리학의 이치를 의학으로 변주하여 일가를 이룬 명의다. 중국 남쪽지역 출신이라 ‘남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의 형은 긴 것이 짧은 것만 못하고 큰 것이 작은 것만 못하며 살찐 것이 마른 것만 못하다. 사람의 색은 흰 것이 검은 것만 못하고 옅은 것이 짙은 것만 못하며 엷은 것이 두터운 것만 못하다. 더욱이 살찐 사람은 습이 많고 마른 사람은 화火가 많으며, 흰 사람은 폐기가 허하고 검은 사람은 신기腎氣, 신장의 기운가 넉넉하다.”(「내경편」, 10쪽) 여기까지는 사람의 몸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다. 일단 우리네 통념과는 많이 다르다. 길고 큰 것이 짧고 작은 것만 못하다고? 사실 그렇다. 롱다리는 허리와 신장 기능에 무리를 줄 수 있다. 얼굴색도 무조건 흰 것이 좋은 게 아니다. 폐와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로 미루고 일단 여기까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사람마다 형색이 이미 다르면 오장육부 역시 다르기 때문에, 외증外症,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비록 같더라도 치료법은 매우 다르다.” 그렇다. 차이와 다양성, 이것이 한의학의 임상적 원칙이다. 지극히 단순한 말이지만 여기에 비춰 보면 현대 임상의학의 성격이 단번에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임상의학은 정상성과 균질성을 추구한다. 모든 신체를 단일한 척도에 따라 구획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의료기술이 발달할수록 내 몸의 특이성은 침묵, 봉쇄되어 버린다. 남는 것은 통계적 수치와 평균뿐.
요컨대, 손진인의 멘트가 몸의 우주적 비전이라면 주단계의 말은 병증과 치료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이치를 밝힌 것이다. 솔직히 너무 쉽지 않은가? 이보다 더 간결하고 쉬울 순 없다. “『동의보감』을 읽으세요”라고 하면 지적 수준에 상관없이 한목소리로 하는 대답이 있다. 그 어려운 책을 어떻게? 너무 무섭게 생긴 책이에요! 그걸 우리가 읽어도 되나요? 등등. 두껍다고 다 무서운(?) 건 아니다. 두께는 사실 둘째고, 더 큰 장애는 의학에 대한 마음의 벽이다. 즉, 의학적 앎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고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아주 유머러스한 그림 한 장, 그리고 간결하고 평이한 두 거인의 멘트. 이 정도면 그 권위의 벽을 허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아무튼 좋다! 하나의 그림과 두 개의 주석, 이 지도를 가지고 우리는 지금부터 아주 역동적인 비전탐구의 길에 나설 것이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에 대한.
(인트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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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고미숙
고전평론가.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수유+너머’를 떠나 또 다른 공부와 공동체를 실험 중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나비와 전사: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이 영화를 보라』『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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