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서문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 작품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탐정 소설이며, 따라서 독자들은 한 범죄가 어떻게 저질러지며 그것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모두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그 범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마지막 단락에서야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외 작품은 환상 소설이다. 그중 하나인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상징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쓴 작가가 아니다. 이 작품의 역사와 내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잡지 <수르> 59호의 해당 페이지를 참고할 수 있다. 그곳에는 레우키포스(Leukippo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원자론의 창시자)와 라스비츠(Kurd Laßwitz(1848~1910), 독일의 작가이자 과학자), 루이스 캐럴(본명은 찰스 덧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의 작가이자 수학자. 대표작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원형의 폐허들」에서는 모든 것이 공상적이다. 그리고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집하는 운명에서 비현실성이 나타난다. 내가 그의 것으로 밝히는 글들의 목록은 아주 흥미롭지는 않지만,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자취를 보여 주는 도표이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 영국의 역사가이자 비평가)이 『의상 철학』에서, 버틀러(Joseph Butler(1692~1752), 영국의 성직자)가 『좋은 피난처』에서 쓴 수법이다. 그런 작품들 역시 책이라는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중언부언한다.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와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의 주석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1941년 11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1
내가 우크바르를 발견한 것은 거울 하나와 어느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다. 그 거울은 라모스 메히아 지역의 가오나 거리에 있는 어느 별장의 복도 끝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고, 백과사전은 『영미 백과사전』(뉴욕, 1917)이라는 헷갈리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02년 판을 그대로, 하지만 뒤늦게 찍어 낸 것이었다. 사건은 약 오 년 전에 일어났다.
그날 밤 비오이 카사레스(Adolfo Bioy Casares(1914~1999),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와 여러 작품을 공동 저술했으며 그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는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고, 우리는 일인칭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광범위한 논쟁을 벌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모순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직 몇 명의 독자들, 즉 극소수의 독자들만이 잔혹하거나 진부한 현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저 멀리 있는 복도 끝에서 거울이 우리를 쫓아다니며 노리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들에 기괴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늦은 밤에는 그런 발견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바로 그때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그에게 그 잊기 힘든 격언의 출처를 물었고, 그는 『영미 백과사전』의 ‘우크바르’ 항목에 그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별장(가구까지 통째로 빌린)에는 그 백과사전이 한 질 구비되어 있었다. 46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웁살라’에 관한 글을 발견했다. 그리고 47권의 첫 페이지에는 우랄 알타이어에 관한 글이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우크바르에 관한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소 당황한 비오이 카사레스는 색인을 뒤졌다. 그는 우크바르라고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철자들을 뒤졌다. Ukbar, Ucbar, Ookbar, Oukbahr…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떠나기 전에 그는 그곳이 이라크 혹은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나라와 익명의 이교도 지도자는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비오이가 겸손하게도 즉석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했다. 유스투스 페르테스(1785년 설립된 독일의 지도 전문 출판사)의 지리부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런 노력 역시 헛되었다. 그러자 나의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
다음 날 비오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지금 바로 자기 앞에 백과사전 46권에 수록된 우크바르에 관한 글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과사전에는 그 이교도 지도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교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으며, 문학적 관점에서는 아마도 격이 낮아질지 모르나 자기가 인용했던 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성교와 거울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했다. “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궤변이다.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나는 비오이에게 진심으로 그 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며칠 후에 그가 그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상세한 지명 색인을 담고 있는 리터(Karl Ritter(1779~1859),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와 함께 근대 지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의 『지리학』에도 우크바르라는 이름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오이가 가져온 책은 틀림없는 『영미 백과사전』 46권이었다. 거짓 책 표지와 책등에는 46권에 담겨진 항목이 알파벳 순서(Tor~Ups)로 적혀 있었으며, 그것은 별장에 비치된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917페이지가 아니라 921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가된 네 페이지에는 우크바르에 관한 항목이 담겨 있었지만 그 글은 알파벳 순서상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독자들도 아마 이런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비오이가 가져온 책과 우리 별장에 있는 책을 비교했고, 그것 이외에는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두 책은 (내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0판을 재인쇄한 것이었다. 비오이는 그 판본을 수없이 열리는 경매 가운데 한곳에서 샀다고 했다.
우리는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그 글을 읽었다. 놀랄 만한 대목은 아마도 비오이가 기억했던 그 부분뿐이었다. 나머지는 상당히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고, 사전의 일반적인 말투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심지어 약간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우리는 그 엄정한 글의 저변에서 근본적인 모호함을 발견했다. 지형에 관한 부분에 나타난 열네 개의 이름들 중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호라산, 아르메니아, 에르제룸이라는 단지 세 개의 이름뿐이었다. 그마저도 글에는 애매하게 삽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 중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가짜 마법사 스메르디스(Smerdis(기원전 6세기~ ?), 페르시아의 왕자, 왕위 쟁탈에 져서 살해당했다)로,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처럼 언급되어 있었다. 그 글은 우크바르의 국경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 지역의 강과 분화구, 그리고 산맥들에 관한 판단 기준은 매우 불투명했다. 예를 들면 차이 칼둔의 저지대와 악사 삼각주가 서쪽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삼각주의 섬들에서는 야생마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들은 918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실린 내용이었다. 역사와 관련된 부분(920페이지)에서 우리는 13세기의 종교적 박해로 인해 정교회 신자들이 그 섬들을 피난처로 삼았으며, 거기에는 아직도 오벨리스크들이 남아 있고, 그들이 썼던 돌 거울이 자주 출토된다고 적힌 것을 읽었다. 언어와 문학에 대한 내용은 간략했다. 기억할 만한 특징은 딱 한 가지였다. 그 글은 우크바르 문학이 환상적이며, 전설과 서사시는 현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믈레흐나스와 틀뢴이라는 두 환상적인 지역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참고 문헌은 이제 와서야 우리가 발견한 네 권의 책을 열거하고 있었지만, 세 번째 책인 실라스 하슬람(하슬람은 『미로의 모든 역사』를 출판하기도 했다(저자 주), 가상의 인물, 보르헤스의 조모인 패니 하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역자 주))의 『우크바르라 불리는 지역의 역사』(1874)만이 버나드 콰리치(Bernard Quaritch(1819~1899), 영국의 서적상, 외서와 고문서에 관한 여러 목록을 발행함)서점의 도서 목록에 실려 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책은 1641년에 발간된 『소아시아의 우크바르라는 지역에 관한 알기 쉽고 읽을 만한 소견』으로 요하네스 발렌티누스 안드레아(Johannes Valentinus Andreae(1568~1654), 독일의 신학자, 드퀸시는 안드레아가 장미 십자회의 기본 서적을 쓴 익명의 작가라고 주장한다)가 쓴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삼년 후 내가 뜻하지 않게 그 이름을 드퀸시(Thomas De Quincey(1785~1859), 영국의 평론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으로는 자신의 아편 중독 체험을 바탕으로 쓴 『어느 아편 중독자의 일기』가 있다)의 책(『저작들』, 13권)에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그가 17세기초 ‘장미 십자회’라는 상상적 단체에 관해 쓴 독일 신학자이며,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예시한 것을 모방하여 실제로 그런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국립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지리부도, 색인 목록, 지리 학회에서 발행하는 연감, 여행자와 역사가의 비망록 따위를 샅샅이 살폈지만 허사였다. 그 누구도 우크바르에 있었다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비오이가 갖고 있는 백과사전 총 색인에도 그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다음날, 내게 우크바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카를로스 마스트로나르디(Carlos Masrtonardi(1909~1976), 아르헨티나의 언론인이며 시인, 프랑스 상징주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가 코리엔테스 거리와 탈카우아노 거리가 만나는 길 모퉁이의 서점에서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책등의 『영미 백과사전』 한 질을 발견했다…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46권을 들춰 보았다. 물론 그는 우크바르에 관한 언급을 단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2
남부 철도 회사의 기술자였던 허버트 애시에 관한 몇 안 되는 희미한 기억들은 아드로게 호텔에, 그러니까 인동덩굴 속에 파묻혀 있으며 거울들이 거짓된 깊이를 만들어 낸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많은 영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환상에 시달렸다. 이미 죽어 버렸기에, 살아 있었을 때의 유령 같은 모습조차 온데간데없다. 그는 키가 컸고 늘 무기력한 모습이었으며, 늘어진 네모 모양의 구레나룻은 한때는 붉은빛이었다. 나는 그가 자식이 없는 홀아비였다고 알고 있다. 그는 몇 년마다 한 번 해시계와 떡갈나무 몇 그루를 찾아 (우리에게 보여 준 사진들로 추측해 볼 때) 영국에 가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와, 속마음을 감춘 채 시작했으나 이내 대화조차 필요 없어지는 그런 영국식 우정을 무척 깊이 나누었다.(여기서 첫 번째 부사는 아마도 지나친 것 같다.) 그들은 항상 책과 신문을 서로 돌려 보곤 했다. 또한 늘 말없이 체스라는 전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호텔 복도에서 손에 수학 책을 들고서 순간순간 덧없이 변화하는 하늘의 빛깔을 올려다보던 그를 기억한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12진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12진법에서는 12가 10인 셈이다.) 애시는 우연히도 그때 12진법 표를 60진법(60진법에서 60은 10으로 표기한다.) 표로 바꾸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노르웨이 사람이 리우그란데두술(브라질 남단에 있는 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에서 자신에게 그 작업을 의뢰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지 팔 년이 되었지만, 그는 자기가 브라질에 있었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목가적인 전원 생활과, 카팡가스(노예나 반노예 상태에 있는 농장 노동자들의 감독이나 십장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과라니나 아프리카에서 유래하지만, 보르헤스가 지적하듯이 브라질을 통해 스페인어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목동을 의미하는 가우초(남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 유역과 우루과이 강, 파라나 강 하류 등의 광대한 목축 지대인 팜파스의 주민 또는 목동. 우루과이의 노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우’에 강세를 주어 발음한다)라는 단어가 브라질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12진법의 기능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1937년 9월(나와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호텔에 머물지 않고 있었다.) 애시는 동맥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며칠 전 그는 브라질에서 온 봉인된 등기 우편물을 하나 받았는데, 8절판 크기의 책이었다. 애시는 그 책을 술집에 놓고 갔고, 나는 몇 개월 뒤 그 술집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책장을 대충 넘기며 살펴보던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지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나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크바르와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밤 중의 밤’(『코란』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천국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성스러운 밤, 라마단의 마지막 밤이다)이라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는 천국의 비밀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욱 달콤해진다. 하지만 그런 천국의 문들이 열렸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저녁에 느꼈던 그런 황홀감을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책은 영어로 쓰여 있었고, 1001페이지나 되었다. 나는 그 노란색 가죽 장정본 책등에서 날조된 책 표지에도 똑같이 반복되어 있던 단어들, 즉 『틀뢴 제1 백과사전 11권 — Hlaer에서 Jangr까지』를 보았다. 출간된 장소와 날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첫 번째 페이지와 컬러 화보들 중의 하나를 덮고 있는 얇은 반투명지에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책 제목과 함께 파란색의 둥근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 년 전 나는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 국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발견했다. 이제 우연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공들인 무엇인가를 내게 제시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자료 일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행성의 건축과 카드 패, 소름 끼치는 신화와 그 언어의 속삭임, 그곳의 황제와 바다, 광석과 새와 물고기, 그곳의 수학과 불꽃,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이 눈에 띌 정도의 교리적 의도나 패러디적 요소 없이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서문 전문, 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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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 대신 영국계 외할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언어적 재능을 보였다. 1919년 스페인으로 이주, 전위 문예운동인 ‘최후주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각종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1931년 비오이 카사레스, 빅토리아 오캄포 등과 함께 문예지 <남쪽>을 창간, 아르헨티나 문단에 새로운 물결을 가져왔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과 본인의 큰 부상을 겪은 후 보르헤스는 재활과정에서 새로운 형식의 단편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픽션들』(1944)과 『알레프』(1949)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이후 많은 소설집과 시집, 평론집을 발표하며 문학의 본질과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천착한다. 1937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도서관에서 근무했으나 1946년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을 비판하다 해고된 그는 페론 정권 붕괴 이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아르헨티나 국민문학상(1956), 세르반테스상(1980) 등을 수상했다. 1967년 68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어린 시절 친구인 엘사 미얀과 결혼하였으나 삼 년 만에 이혼, 1986년 개인 비서인 마리아 코다마와 결혼한 뒤 그해 6월 14일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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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지은 책으로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거미여인의 키스』『콜레라 시대의 사랑』『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모렐의 발명』『천사의 게임』『붐 그리고 포스트붐』『탱고』『꿈을 빌려 드립니다』『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염소의 축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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