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유럽을 너무 모른다
1997년 3월, 유럽에서 2개월 동안 지낸 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이런, 가구를 전부 어디다 치웠더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내가 변변한 가구 하나 사 놓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사무실 한가운데에 러닝머신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아마 나였을 것 같지만) 밖에 내놓으려다 깜빡 잊은 듯했다. 주인이 야반도주한 양 사무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오랫동안 비워 놓았는데도 예상외로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놀랍기까지 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 잘 알고 지내던 한 변호사는 이렇게 물었다. “두 달이나 유럽에 간다고? 사무실은 어떡하고?” 다른 변호사도 물었다. “여행 잘해. 그건 그렇고 사무실은 어떻게 할 참이야?” 또 다른 변호사 역시 물었다. “사무실 문을 아주 닫아 버리는 거 아니야?”
“나도 몰라, 모르겠어,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기일이 잡힌 재판, 날아온 출석요구서가 여러 건 있었다. 쌓아 놓으면 발목이나 무릎, 아니 어깨 정도까지 올라올 서류에 치이며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가던 중이었다. 두 달 동안 유럽에 간다고? 이렇게 할 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일단 유럽에 간다는 생각을 접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었다.
그때 변호사 친구 한 명이 전화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뒤늦게 밤중에 확인해 보니 이런 말이었다. “용기를 내서 휴가 다녀와.” 그 친구와는 흉금을 털어놓는 친밀한 사이여서 얼마든지 일을 맡기고 휴가를 갈 수도 있었다. “알았어, 그러지 뭐.”라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며칠 후 꽉 채운 두 달 동안 사무실을 비우고 유럽에 갔다 올 작정이라고 했더니 그 역시 대뜸 “사무실은 어떡하고?”라고 물었다.
변호사가 두 달이나 일을 쉰다는 것은 일반인이 2년을 통째로 쉬는 것과 맞먹는다. 업무의 성격상 사무실을 두 달 비운다는 것은 리처드 버턴(Richard Burton)이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탐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회과학자가 두 달 동안 연구한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두 달 동안 뭘 연구할 수 있겠어?” 그러나 변호사는 유럽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두 달이면 충분했다. 아니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닌 말로 하룻밤 꼬박 새워서 보고서를 대충 만든 다음 제출해 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 말은 농담이다. 유럽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고 오해할까 봐 다시 말하지만 지금 한 말은 농담이다.
당시 나는 유럽에 가기가 무척 겁이 났다. 왜냐고? 첫째, 나는 파리에 가는 게 정말 싫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둘째, 나는 어디에 가서 혼자 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파리 같은 도시에 가서 혼자 지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짓는 것, 즉 집에서 가끔 듣는 예수회 설교 테이프에서 말하는 죽을죄를 짓는 일이다. 그 테이프에서 설교자는 혼자 있을 때, 달리 말해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사람은 죄를 짓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따지면 20대 시절 파리를 여행했을 때 나는 줄곧 죄를 지으며 돌아다녔던 셈이다.
그때 나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무작정 돌아다녔다. 아는 유럽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오, 파리라고? 거기 굉장히 멋진 곳 아냐?” 맞다. 멋진 곳이다. 하지만 이틀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내 봐라. 나중에는 참다 못해 온갖 욕 같은 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무실에 파리 시내를 찍은 대형 사진을 한 장 걸어놓았다.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향하면서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포드 자동차의 모델 T를 중심으로 1927년의 파리 시내 풍경이 담긴 180도 광각의 흑백 파노라마 사진이었다. 트럭운전사노동조합의 조합원 등 나를 찾아온 고객들은 그 사진과 옆에 걸린 파리 시내 지하철 노선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가끔 “이야, 이거 대단한데. 파리를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어보았다.
하! 매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 사진은 혹시 유럽에 갈 일이 생기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벙어리처럼 지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를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걸어 놓았다.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불쌍했던 대학교 친구 짐이 생각난다. 짐은 대학교 1학년 여름 『레츠고 유럽(Let’s go Europe)』 책 한 권 달랑 들고 유럽 일주 배낭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이 심해졌고 급기야 음식을 먹는 것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중단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돌아다닐 기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간신히 보스턴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해 비행기 표 살 돈을 부쳐 달라고 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는 “아니, 얘야. 이게 웬일이니!”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짐은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3주 만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말문이 쉬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머리맡에 있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우연히 펼쳐 들었다. 첫 페이지에서 ‘전도자’가 ‘크리스천’에게 다가와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우리 조상은 자유를 찾기 위해 순례자로서 이 땅에 오지 않았나? 그런데 그 후손인 나는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구나. 최근에 휴가를 즐긴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내 생각은 마구 뻗어나갔다. 그렇다. 여기 미국 땅에서도 나는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유럽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마음이 차츰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에서 가장 ‘정치적인’ 지면은 일요판의 여행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유럽에 관한 진짜 뉴스가 담겨 있습니다.”라고 그들이 홍보하듯. 신문을 읽을 때면 유럽의 심각한 실업 문제, 사회민주주의의 붕괴 등에 관한 소식이 실린 1면을 훑어본 다음 곧바로 여행면을 펼친다. 거기서는 앞면에는 감히 싣지 못하는 기사, 즉 유럽은 점점 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고 있다는 진짜 뉴스를 볼 수 있다. <뉴욕 타임스>의 ‘진지한’ 지면들이 애써 눈감고 있는 사실, 유럽이 미국을 앞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행면은 나지막한 소리로 웅얼거린다.
여행면을 즐겨 읽다 보면 한 번쯤은 살아 보고 싶은 유럽의 도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B’로 시작되는 도시라면 바르셀로나, 브뤼셀, 볼로냐, 그리고 브루게가 있다. 그럼 미국에는 어떤 도시가 있더라. 아, 볼티모어, 배턴루지, 베이온이 있지. 그런데 ‘B’로 시작되는 이들 도시에 사는 하층 계급의 청소년들에게 ‘B’라는 글자는 곧 ‘총알’(bullet)을 상징한다. 그곳의 8세에서 20세 된 아이들은 대부분 총격전이 일상이 된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너무 미국을 깎아내리는 것인가? 그다음 글자 C와 D로 가 보자. 유럽에는 코펜하겐과 도빌이 있고, 미국에는 클리블랜드와 디트로이트가 있다. E와 F로 시작하는 도시는 뭐가 있더라?
이런 식으로 쭉 가다 보면 Z에 이르게 된다. Z? 어떤 도시가 생각나는가? 혹시 취리히(Zurich)가 떠오르지 않는가?
취리히에서 맛본 평등과 풍요
솔직히 말하자면 취리히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1993년 나는 격동기의 모스크바에 들렀다. 왜 갔느냐고? 음, 공산주의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세계 역사의 일대 사건이니까. 약간 늦기는 했지만 직접 가서 그 현장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무렵 나는 누군가와 관계가 붕괴되는 일을 겪었고, 우울한 기분에 잠겨 있던 차에 미즈(Ms.) O를 만나 모스크바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 나는 여자를 만나려고 모스크바에 갔다.
모스크바까지 가는 비행시간이 무척 길었기에 시차 적응도 겸해서 중간 기착지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공산주의가 무너졌듯 나도 무너져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취리히에 간 것은 아니었다.
서유럽에 들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막연히 취리히는 지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진정한 목적지는 모스크바였고, 그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취리히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잠깐 쉴 작정이었다.
미즈 O는 아마 웃을 테지. “취리히라니! 돈이라도 맡겨 놓았나 보군요.” 모스크바처럼 보드카에 디프테리아균을 타 마실 것 같은 도시에서 산다면 취리히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대체 취리히에서 무슨 스릴을 맛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거리를 돌아다니자 숨이 턱 막혔다. 세상에나!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부유한 도시, 단순히 부유한 게 아니라 우아하고 세련되게 부유한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유럽이 이처럼 많이 변하다니! 10년 동안 GDP가 꾸준히 성장한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봤다! 밀라노에서 스톡홀름에 이르는 유럽의 숱한 도시가 미국의 잘 사는 도시를 바짝 뒤쫓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노르웨이 같은 몇몇 나라의 1인당 GDP는 이미 미국을 앞질렀음을 실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숫자로 표현된 1인당 GDP가 아니다. 누구나 골고루 잘 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세계에서 잘 산다고 꼽히는 나라들은 대체로 좌파 성향이 강하다. 이 말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돈’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오래된 도시 쾰른에서는 곳곳에서 그 이름 그대로 향수(cologne) 냄새가 났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제일 괜찮다는 도시라 해도 공원에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
몇 가지 더 비교를 해 보자. 먼저 빈곤 노인 문제를 따져 보면, 미국의 경우 노인 인구 중 24.7퍼센트가 가난에 시달린다. 하지만 스웨덴은 7.7퍼센트, 독일은 10.1퍼센트(대부분 구동독 지역)에 불과하다. 빈곤 아동 문제는 또 어떤가? 미국의 경우 전체 아동 중 21.9퍼센트가 빈곤 아동으로 분류되는 데 반해 독일은 그 비율이 9.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이 역시 대부분 구동독 지역의 아동이다). 그래프와 표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미국과 유럽을 서로 비교해 보라. 보고, 만지고, 냄새도 맡아 보라. 사회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유럽의 경우 어디를 가든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다.
그게 내가 숨이 턱 막힌 이유였다.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여서 보고 맛보고 만질 게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또 질서 정연했다. 가난한 사람들로 인한 무질서가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완벽한 질서를 엿볼 수 있었다. 뭐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 아침에 먹는 시리얼 한 사발조차 완벽했다. 심지어 제자리를 벗어난 것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미국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물론 미국도 노력하면 안 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빈곤층이 많아서 무질서를 없애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 무질서 때문에 유럽처럼 모든 게 완벽할 수 없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취리히에서는 가능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이봐, 취리히는 원래부터 살기 좋은 도시잖아?” 물론 그렇다. 하지만 취리히 말고도 코펜하겐, 뤼베크 등 유럽에는 살기 좋은 도시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그날 오후 취리히 시내를 한 블록 두 블록 거닐며 부티크, 카페, 향수 전문점, 글로벌 은행과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 등을 둘러보았다. 모두 나름대로 완벽했다. 빈곤하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마치 미술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곤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선진국에서는 사적 영역에서 흘러넘친 행복(well-being)이 공적 영역으로 흘러들고, 그 결과 누구나 봉봉사탕을 맛보듯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종일 봉봉사탕만 먹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날 늦게 향수 전문점과 부티크 사이에 있는 온통 하얀색과 노란색 페인트로 칠한 아주 작은 서점에 들어갔다. 그 안의 책들도 하얀색과 노란색뿐이어서 책 자체가 무언가 패션을 말하는 듯했다. 점원이 나왔다. <엘르(Elle)>에서 막 튀어나온듯 하얀색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오, 뭐라고 말 좀 붙여 봐!(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 저, 저, 혹시, 영어로 된 책이 이, 있나요?”
“아, 죄송합니다만 여기에는 독일어로 된 철학책밖에 없어요.”
그렇군. 아무렴, 그렇지. 비틀거리듯 책방 밖으로 나오는데, 쇼펜하우어가 내 등 뒤에서 연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아, 아쉬워! 이런 곳을 떠나 모스크바로 가야 하다니!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미즈 O에게 전화해서 “어쩌다 보니 지금 에덴동산에서 비틀거리고 있어.”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결국 산 중턱의 호텔로 돌아와 테라스에 앉아 좌파가 득세하는 소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사방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에 머물고 싶어. 모스크바에서는 페스트가 한창 유행일 텐데. 체르노빌은 또 어떻고? 미즈 O의 아파트에서는 이 순간에도 방사능이 나오고 있을 게 분명해. 아니야, 지금 갈 수 없어. 에덴동산의 서쪽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동쪽으로 가야 해? 여기에서 며칠 더 머물고 갈 거라고 전화해야 해, 등등.
그러나 결국 모스크바로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옛 공산당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옐친은 군 병력을 동원해 옛 공산당원들이 농성하고 있던 의사당 건물을 에워쌌다. 공산당원들은 총을 쐈고, 옐친은 포격으로 맞대응했다. 취리히를 떠나 왜 이런 아수라장으로 왔지? 겁이 잔뜩 났다.
모스크바에서는 미즈 O를 비롯해서 내가 만난 사람 모두에게 취리히에서 보았던 것들을 틈만 나면 떠들어 댔다. “얼마나 멋진 곳인지 꼭 한 번 봐야 해요.” “살면서 그렇게 놀라운 곳을 보지 못했다니까요.” 그렇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공산당원의 쿠데타와 옐친의 무력 진압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취리히가 묻힌다는 것이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중산층이라면 유럽을 택하라
지금 와서 왜 새삼스럽게 유럽을 칭찬하고 나서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는 유럽이 그토록 살기 좋아졌다는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는 말밖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의 경제면에는 고실업, 고임금 때문에 서유럽 경제가 곧 무너질 것 같다는 기사가 툭하면 실렸고 나로서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래 못 가겠군. 경제 상황이 최악이야.”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서유럽의 경제 사정이 신문에 난 그대로였을 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밀라노에서 파리를 거치고 라인강을 건너 노르웨이 최북단에 이르는 서유럽 곳곳의 실제 모습이 어떤지 똑똑히 보았다.
유럽보다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사정이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시아에 가 본 적이 없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곳은 유럽뿐이다. 미국인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는 경제 자료를 통해서는 파악하기 힘든 것을 나는 직접 보고 겪었다.
유럽이 붕괴하고 있다고? 그래, 논쟁할 생각은 없다. 직접 거기 가서 눈으로 보라. 그런 다음 돌아와서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내게 미국의 GDP, 혹은 1인당 GDP가 높다는 말이나 고용 사정이 괜찮다는 따위의 말은 하지 마라.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니까. 신문의 경제면이나 여행면에 실린 유럽에 관한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으려고 하는가? 사진은 보되 글은 읽지 마라. 내가 취리히에 머물던 당시 인상 깊었던 것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었다. 두세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어딘가 교양 있어 보이는 얼굴 표정 말이다. 그걸 몰랐더라면 좋았을걸. 반면에 여기 미국에서는 연예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아이들의 얼굴만 보게 된다.
더군다나 유럽은 물가도 싼 편이다. 통화가치의 변동은 일단 생각하지 말자. 취리히에 들렀을 때 산 중턱에 있는 리조트처럼 보이는 곳을 숙소로 정했다. 포도덩굴이 난간을 휘감은 테라스에서 취리히 시내를 내려다보며 저녁 식사를 했는데, 하룻밤에 겨우 125달러밖에 들지 않았다. 1993년은 달러화 가치가 지금처럼 높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때 미국에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원에 앉아 웨이터를 두고 식사하려면 1000달러가량 들었다. 그렇다. 유럽에서는 나와 같은 노동 변호사도 한껏 호사를 부리며 지낼 수 있었다!
그날 밤, 미국인은 미국이 중산층을 위한 곳이라고 믿지만, 내 친구 ‘리(Lee)’가 말했듯 유럽이야말로 중산층, 유럽식으로 말하면 부르주아를 위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말이냐고?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미국은 월마트에서 고양이 화장실도 살 수 있고 휘발유 가격도 저렴하다. 그러나 나처럼 돈이 많지 않은 전문직에게 알맞은 곳은 아니다. 나와 리 같은 사람에게는 유럽이 훨씬 살기 좋은 곳이다.
또 노동 변호사로서 보건대, 유럽은 내 의뢰인인 노동자들을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묻겠다. 연봉이 3만~5만 달러로 가난하지는 않지만 매달 100~200달러 정도 적자를 보는 내 노동자 의뢰인에게 어디가 정말로 살 만한 곳이겠는가? 당연히 유럽이다. 환자가 건강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의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듯, 변호사인 나 역시 내 의뢰인에게 유럽이 왜 더 살기 좋은 곳인지 설명해 줄 수 있다. 최하위 계층의 미국인 중 3분의 2 정도는 유럽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하위 미국인이란 지난 40년 동안 시급이 단 한 차례도 인상되지 않은 사람들, 퇴직연금 401(k)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거나 2000달러 이상의 자기 부담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장담하건대 이런 사람들은 유럽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다. 실업자라 해도 유럽에서 사는 게 더 낫다. 어디 이뿐인가? 유럽에서는 독신자도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 듣는 바와 달리 유럽에는 미국보다 실업률이 훨씬 낮은 곳이 수두룩하다.
부르주아가 유럽에서 살기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연간 5만 달러 이하를 버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 살기에 내 친구 리 같은, 혹은 독자 여러분 같은 부르주아들이 정치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유럽에서는 명문 사립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일반 노동자나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리 같은 부르주아들도 종종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조합원이 되면 6주의 휴가를 얻으며 ‘황금 낙하산’에 비유되는 연금도 받기 때문이다.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이런 것들의 가치는 더욱 더 커진다.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든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유럽식 모델이 최상류층은 몰라도 그 바로 아래 중상류층에까지 상당히 이익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려 주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제1장 부분)
--------------------------------
저자 소개
토머스 게이건
미국 시카고의 노동전문 변호사로 하버드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1975년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데스프레스, 슈워츠, 게이건’ 로펌의 대표이며, 운송노동조합 팀스터 등 노동자와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한 공익 소송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기초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주말에도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소득이 올라가면 정말 잘 사는 것일까? 미국보다 소득은 적을지라도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고 다양한 복지 혜택을 누리는 사회민주주의 유럽이야말로 살 만한 곳이 아닐까? 그 대답으로 자신이 독일에서 체험한 ‘진짜 복지’를 이 책에 소개했다.
--------
역자 소개
한상연
대학에서 서양사학을 공부했다. 종합 지식을 갖춘 번역가를 지향한다. 인간을 성찰하면서 당면한 현실 문제를 담아내는 책을 기획·편집하는 데 관심이 많다. 현재 번역그룹 ‘펍헙’에서 활동 중이다. 『꿈과 대화하다』『아버지의 탄생』『뇌내폭풍』『강철의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