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알몸에 대하여
어떤 미인이라도 알몸 그 이상을 드러낼 수는 없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늘에 대하여』에서
알몸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 문제다. 어디서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알몸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공중목욕탕에서는 알몸인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목욕탕에 불이 나서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면 문제가 된다. 해수욕장에서는 거의 벗다시피 하고 있어도 별문제 없다. 그런데 해수욕장에서 조금 떨어진 시장이나 길거리를 수영복 차림으로 걸어 다닌다면 문제가 된다. 해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문제도 그만큼 커진다.
알몸이 문제라면, 그리고 수영복 차림처럼 거의 벗다시피 한 것도 문제라면, 어디까지 드러내면 괜찮은 걸까? 대도시의 젊은 여성들은 매해 여름 그 미묘한 경계를 탐구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요즘처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옷차림이 이렇게까지 유행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젊은 날의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애인이 진창길을 걷느라 치마를 걷어 올려 발목을 드러내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위고가 오늘날 서울에 살았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가벗기’라는 행위
아주 작은 노출이라 해도 때로 강렬한 자극이 된다. 네덜란드 미술의 이른바 ‘황금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얀 스텐Jan Steen, ?1626~1679의 <아침 단장>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여름날 서울의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허벅지보다 이 그림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림 속 여성의 무릎이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내밀한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느낌 때문이다.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공개적인 영역과 내밀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여성과 남성이 벌이는 애정 행각을 교묘하고 야릇하게 묘사했고, 그런 그들의 수법을 다음 세기의 프랑스 화가들이 더욱 풍성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계승했다. 장 앙투안 와토Jean Antoine Watteau, 1684~1721가 그린 <단장하는 여인>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림 속 여성은 옷을 입으려는 걸까, 벗으려는 걸까? 그녀의 팔에만 살짝 걸쳐진 옷은 지금 그녀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녀가 여유롭고 느긋한 만큼이나 관객은 스스로가 그녀를 은밀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흔히들 알몸은 내밀한 공간에서 드러내고 보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런 만큼 공개적인 자리에서 드러나는 알몸은 충격적이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 살았던 고급 매춘부 프리네는, 당시 엘레우시스에서 열린 데메테르 제전 때 알몸으로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신성모독죄로 법정에 섰다. 프리네의 애인 히페리데스가 변론을 맡아 열변을 토했지만 재판은 프리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자 히페리데스는 갑자기 그녀의 옷을 벗겨 알몸을 배심원들에게 드러냈다.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프리네의 알몸을 눈앞에서 본 배심원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녀가 알몸을 드러낸 것은 신을 모독한 행위가 아니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프랑스 화가 제롬Jean-Leon Gerome, 1824~1904의 작품은 프리네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옷이 벗겨진 프리네는 부끄러워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애초에 그녀가 이 법정에 선 이유가 군중 앞에 부끄러움 없이 알몸을 드러낸 일이었음을 떠올리면 아귀가 안 맞는다. 신적인 아름다움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는 그럴싸한 구실일 뿐이다. 프리네의 부끄러움이야말로 알몸이 지닌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결정적인 행위는 발가벗기이다. 나체는 폐쇄적 상태, 다시 말해서 존재의 불연속적 상태와는 대립적이다. 그것은 자신에의 웅크림 너머로, 존재의 가능한 연속성을 찾아나서는 교통交通의 상태이다. 우리에게 음란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밀스러운 행위에 의해서 육체는 연속성을 향해 열린다. 음란은 동요를 의미한다. 그것은 확고하고 견고하던 개체, 자제自制되던 육체를 뒤흔들어 어지럽힌다. … 나체가 충분한 의미를 갖는 문화에서의 발가벗기는 유사 죽음, 아니면 적어도 가벼운 죽음과 맞먹었다.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에서
비너스와 올랭피아
굳이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한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만 펼쳐도 알몸의 여성을 다룬, 그리고 성적인 분위기를 자못 야릇하게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실컷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미술품에도 암묵적인 관례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신화나 전설, 여타 텍스트에 의지해야 했다.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안젤리카를 구출하는 루지에로> 같은 그림이 그 모범적인 예이다. 여성의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널리 알려진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의 한 장면을 옮겨 그린 것이다. 앵그르가 그린 알몸은 살이 물컹하게 잡힐 것 같은 느낌은 없고, 오히려 색칠한 대리석 조각처럼 창백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온갖 음행과 치정으로 가득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런 미술품에 좋은 구실이 되었다. 알몸의 여성이라도 ‘바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라거나 ‘조각 작품이 갑자기 진짜 여성으로 변한 갈라테이아’라고 하면 용인되었다. 서양미술사에서 ‘비너스의 탄생’이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같은 제목을 단 나체화가 많은 것도 이런 때문이다.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은 그 좋은 예이다.
하지만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은 19세기 중반 파리의 예술계를 일대 소동으로 몰아넣었다. 오늘날 이 그림들을 보면 과연 뭐가 문제였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카바넬을 비롯하여 당시 미술계에서 승승장구하던 화가들이 발표한 우아하고 환상적인 나체화와는 달리 투박하고 노골적인 분위기가 강한데, 바로 이 점이 당시 파리의 부르주아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림 속 여성의 알몸, 그리고 알몸이 드러난 정황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제르벡스Henri Gervex, 1852~1929가 그린 <롤라>는 잠에 취해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성과, 우울하고 허무감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며 창가에 서 있는 남성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78년 공식적인 전람회인 ‘살롱’에서 냉대를 받았다. 그림 속 여성의 자세가 카바넬의 그림 속 여성과 흡사한데도, 카바넬은 호평을 받고 제르벡스는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침대 앞쪽에 뒤섞여 있는 남녀의 겉옷이 문제였다. 이것이 두 남녀가 지난밤 격렬한 정사를 치렀다는 암시로 읽힌 것이다.
그러니까 나체화라 해도 ‘지금 여기’라는 느낌이 들어선 안 되고, 성적인 정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서도 안 되는 것인데,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은 그런 기준에 어긋났던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 그림을 놓고 난리를 피웠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음란한 삽화와 판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은밀해야 마땅할 요소를 공식적인 영역, 소위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만약 마네의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이 개인적인 공간에 걸렸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 내보이기 위해 제작한 벽화와 유화는 음란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선 안 되었고, 앞서 말한 대로 신화나 전설, 성서 이야기 등을 구실로 삼아야 했다. 그래서 공개적인 벽화나 유화와 달리 화가가 연습하거나 간직하기 위해 그린 소묘, 개인이 혼자서 보기 위해 주문한 유화, 대중에게 판매된 판화와 삽화에는 노골적인 그림이 많았다.
알몸과 누드의 차이
알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가 ‘알몸’과 ‘나체’를 나누어 설명한 글을 피해갈 수 없다.
영어는 알몸naked과 누드nude를 정밀하게 구별한다. 알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으로, 이 단어는 대개의 사람들이라면 그런 상태에서 느끼는 약간의 당혹감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누드란 단어는 교양 있게 사용하면 그다지 거북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어렴풋한 이미지는, 움츠린 무방비한 신체가 아니라 균형 잡힌 건강한 자신만만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다. 실은 이 단어는, 18세기 초기에 비평가들이 예술적인 교양이 없는 섬나라[물론 영국을 가리킨다] 주민들에게, 회화나 조각이 정당하게 제작되고 평가되는 나라들에서는 알몸의 인체가 항상 예술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영어 어휘 속에 억지로 추가한 것이다.
-케네스 클라크, 『누드의 미술사』에서
알몸과 나체에 대한 클라크의 정의는 성적인 의미가 완전히 제거된, 보는 이에게 미학적으로 투명한 알몸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또 거꾸로 클라크의 이 말은 그러한 믿음의 근거가 되어 왔다. 하지만 클라크 스스로도 인정했듯 이러한 구분은 작위적이다. 왜 미술의 형식과 주제가 계속 바뀌는 중에도 나체화는 지칠 줄 모르고 제작되어 왔겠는가? 왜 나체화에는 남성의 성적 취향이 짙게 반영되어 왔겠는가? 왜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여성이 남성의 벗은 몸을 그리는 걸 금지해 왔겠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만약 누드모델이 성적 암시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술 활동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겠는가? 성적인 의미에서 초연한 알몸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을 이데올로기와 분리할 수 없듯 알몸 또한 이데올로기와 떼어 놓을 수 없다.
오히려 클라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소극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나마 온당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온통 성적이고 이념적인 기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알몸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어떤 초연한 미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라고.
내가 미술대학을 다닌다고 하면 “누드모델을 볼 수 있겠다”며 부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인터넷 따위를 통해 알몸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아직도 누드모델이 등장하는 수업은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화면으로 보는 알몸과 실제로 보는 알몸은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배우들이 알몸을 드러내는 연극은 여전히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다.
서구에서 아카데미의 미술교육 체계가 확립된 이래 누드모델을 그리는 일은 수업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에겐 알몸의 모델을 그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당시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는 ‘역사화’였고, 역사화에선 나체화가 필수 요소였다. 결국 나체를 그릴 수 없었던 여성들은 초상화나 풍속화, 정물화 같은 ‘주변적’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알몸의 모델을 그리는 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건 19세기 말의 일이다.
왜 미술계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알몸의 모델을 그리는 걸 싫어했을까? 이러한 금압禁壓의 심리를 더듬어 보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알몸의 모델을 그리는 행위에 성적인 요소가 개입해 있음이 분명해진다. 무슨 말을 갖다 붙인대도 야릇한 성적인 분위기를 피해 갈 수는 없다. 만약 성적인 것과 무관한 ‘예술’ 활동이라면, 여성들에게 금지할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남자 모델들은 명목상 누드모델임에도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가린 채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사타구니 가리개는 최근까지도 사용되었다.
누드모델의 옷
누드모델 수업에서는 이따금 두 사람 이상의 모델이 함께 포즈를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한 사람의 모델이 여러 사람 앞에서 알몸으로 나선다. 앞서 프리네의 이야기에서도 언급했듯 알몸의 개인이 옷을 입은 뭇사람 앞에서 받는 압력은 매우 크다. 이 때문에 누드모델 수업에서는 모델을 심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젠가 오르낭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할 때, 우리 선생님께서 모델을 불렀지. 스무 살가량의 젊은 갈색 머리 여자였어.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서 옷을 벗었어. 거기에는 아마 남학생이 열 명쯤, 그리고 여학생이 두셋 정도 있었지. 그 여자는 꽃무늬가 있는 천 위에 길게 누웠어. …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 꽃무늬 천으로 자기 몸을 둘둘 마는 거였어,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키면서. 거기에는 어떤 화가가, 한 남학생이 우뚝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녀는 막 뛰어가 버렸어. 그 남자는 그녀에게 겁을 주었던 거야. 그 사람은 그 시간에 들어오지 못했어.
-크리스틴 오르방, 『세상의 근원』에서
화가 쿠르베가 미술학교에서 본 것을 애인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모델이 가리킨 남학생은 쿠르베와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였는데 이날 지각을 했기 때문에 창밖에서 교실 안쪽을 바라봤다. 한데 모델에게는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방 밖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별개였다.
나도 대학 시절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누드모델을 그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모델이 실기실 문 쪽을 쳐다보며 황급히 가슴을 가렸다. 모든 학생의 눈이 실기실 입구로 꽂혔는데, 거기에 다른 과 학생이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아마 실기실에 둔 자기 물건을 찾으러 무심코 문을 열었으리라. 그 학생은 얼른 문을 닫고 사라졌고 수업은 이어졌다. 나는 모델이 그처럼 당황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 그 학생 역시 미대생이었으니 그 모델을 봤거나 앞으로 볼 테고, 이미 모델은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 서 있는데 거기에 한 사람을 더한다고 그리 큰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모델은 약속된 공간과 약속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엄격히 차단된 영역에서만 수치심을 관리하며 일할 수 있다. 보는 눈이 불어나면, 즉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면 수치심을 제어할 수 없다. 모델은 학생들 앞에 옷을 벗고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입고 있던 옷을 학생들이 자리한 공간의 바깥쪽 벽까지 넓게 펼친 것이다.
중국 위진 시대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유영劉伶은 술에 취하면 옷을 몽땅 벗고 알몸이 되고는 했다. 사람들이 나무라자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삼고 방을 옷으로 삼는다. 그대들은 왜 남의 옷 속에 들어왔는가?”
눈꺼풀 안쪽의 천국
수년 전, 연예계 소식을 전하는 TV 프로그램 리포터가 어느 여배우를 짤막하게 인터뷰하는 장면이었다. 남성 리포터가 여배우에게 “잘 때 뭘 입고 자느냐”라고 물었고, 여배우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잔다”라고 대답했다. 리포터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리포터가 왜 당황해 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노릇이다. 알몸으로 잔다고 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왜 그처럼 쩔쩔맸던 걸까?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만약 어떤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가 “방금 샤워를 하고 난 참”이라고 하면 금세 야릇한 상상을 하게 된다.
“샤넬 No.5만 입고 잔다”는 마릴린 먼로의 말이나, 브룩 쉴즈가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내민 사진에 따라붙은 “나와 청바지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같은 카피도 이런 효과를 낸다. 여성이 별생각 없이, 혹은 능란하게 암시를 하면 남성의 눈동자는 방아쇠가 당겨진 총에서 총탄이 날아가듯 튀어나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넘어 그녀의 벗은 살갗에 가 닿는 것이다.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서 애초에 친구 사이였던 레이첼과 로스는 어찌어찌하여 연인이 된다. 한참 서로에게 빠져 정신이 없을 무렵, 로스가 레이첼에게 농지거리를 건넨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너의 알몸을 볼 수 있어. 그냥 눈만 감으면 돼.” 그러고는 눈을 감고 말한다. “오, 끝내주는데.” 아마도 남자들의 천국은 눈꺼풀 안쪽에 있는 듯싶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로스처럼 굴면 여자는 레이첼처럼 마치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자기 알몸을 보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가 그린 나체화는 치모恥毛까지 묘사한 파격으로 유명한데, 정작 그림 속 여성들은 어딘지 먼 곳을 쳐다보는 듯, 꿈을 꾸는 듯 초연한 표정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야릇하고 요염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큰 누드’라는 별명까지 붙은 <소파에 앉아 있는 누드>에 대해 어떤 평자는 몸이 있는 부분을 가리고 얼굴만 보더라도 이 여성이 알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글에서도 연관된 사례를 볼 수 있다. 어느 날 열아홉 살 소녀가 문학에 관한 자문을 구하러 투르니에를 찾아왔다. 그녀는 투르니에의 집에 있는 여러 카메라와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투르니에는 그녀의 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승낙했다. 그리고 여기서 오해가 생겼다. 촬영을 준비하던 투르니에의 앞에 그녀가 알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투르니에는 잠깐 당황했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어깨 위쪽만을 찍었다.
투르니에는 자신이 찍은 그녀의 사진들을 펼쳐 놓고 보다가 ‘나체 초상’이라는 영역을 새로이 발견했다. 알몸을 찍지 않았음에도 화면 속 얼굴에는 화면 바깥에 있는 알몸의 ‘광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일종의 광휘, 마치 벗은 몸이 얼굴 쪽으로 열기와 색채의 안개를 피워 올리기라도 하듯, 일종의 필터처럼 작용하는 육체적 발현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이제 막 떠오르고 있는 태양의 존재로 인하여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지평선을 연상시킨다. … 바야흐로 우리의 몸이라는 이 뜨겁고 연약하고 친근한 큰 짐승이 낮에는 여러 겹의 옷들로 된 감옥에, 밤에는 누에고치 같은 이불 속에 갇혀 지내다가 마침내 대기와 빛 속에 놓여나서 우리의 두 눈 속에까지 반사되는 유쾌하고 순진한 현존감으로 우리를 감싸는 것만 같다.
나체 초상이 포착하여 그 얼굴 속에다가 분리시켜 놓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반사광이다. 이리하여 얼굴은 바로 그 반사광을 받아 빛난다.
-미셸 투르니에, 『짧은 글 긴 침묵』에서
알몸은 여기 아닌 곳에서 여기에 힘을 행사한다. 종종, 불현듯, 끈질기게.
(제1장 전문)
--------
저자 소개
이연식
미술사가.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학부에서는 그림을 그렸고, 현재 미술책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며 미술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도 하고 있다. 영화와 소설 등에 등장하는 미술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탐구한 『미술영화 거들떠 보고서』, 미술계를 뒤흔든 위작과 도난 사건을 입체적으로 파헤친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 우키요에를 섬세한 필치로 펼쳐 보인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말 그대로 ‘눈을 속이는 그림’ 트롱프뢰유를 소개한 『눈속임 그림』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무서운 그림』(1권·3권), 『맛있는 그림』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