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자연, 생태사상, 건축
자연, 기술, 존재 의지
현대의 생태 위기는 20세기 이후만의 현상, 즉 공시적共時的현상인 것으로 알기 쉬우나 서양 인류의 오랜 역사와 늘 함께 있어오던 통시적通時的인 현상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문명의 등장과 함께 생태 위기의 양상과 정도가 심해진 차이는 있으나 ‘생태 위기’라는 개념은 서양에서는 문명의 시작과 함께 있어왔다. 물론 20세기 이전에는 생태 위기보다는 자연 위기라는 말이 더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또한 위기 옆에는 그 해결책도 항상 함께 고민하고 찾아왔다. 생태 문제는 위기의 발생과 이에 대한 해결책의 제시라는 일정한 패턴에 따라 진행되어왔다.
그 중심에 자연이 있다. 생태 위기와 해결책은 자연을 둘러싸고 벌어진 숨바꼭질 같은 것이었다. 생태 위기는 항상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보거나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삼을 때 발생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자연을 독립적인 것, 나아가 성스러운 것으로 보면서 인간을 그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은 자연을 둘러싼 기술과 존재 의지 사이의 균형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존재 의지를 기술에 의존한 물질적인 것으로 잡을 때에는 항상 위기가 발생했으며 이에 대한 치유로서 본래의 순수한 존재 의지로 귀환할 경우 해결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순수한 존재 의지의 중심에 정신, 즉 사상이 있다. 사상은 자연 자체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 모두에 해당된다. 자연에서 정신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자연을 물질로만 대할 때 항상 생태 위기가 발생했다. 해결책은 이런 정신적인 부분을 복원할 때, 즉 자연을 종교나 사상의 대상으로 삼을 때 찾을 수 있었다. 현대의 생태 위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기계를 너무 많이 사용한 데에서만 근인近因을 찾고 그 결과도 지구 온도가 몇 도 올라갔고 이산화탄소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의 문제로만 보기 쉽지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사상적인 부분을 제외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들이다. 해결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생태운동은 이런 근인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대처하는 방향으로만 전개되고 있다. 해결책을 기술에 의존해서 기술에서만 찾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른 문제를 낳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해결책은 사상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따라 현대 생태 위기를 불러온 사상의 고갈을 찾아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태 위기-해결의 반복으로 진행되어온 서양 생태운동과 생태사상의 패턴과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패턴의 전개를 쌓으면 곧 서양문명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자연이 정의되고 나타났다. 이 가운데 시대를 새롭게 정의하고 문명의 전환점을 이룬 대표적인 자연을 일곱 개로 요약할 수 있다. 그 마지막 일곱 번째 위기가 현대의 생태 위기이며 일곱 번째 자연이 해결책인 것이다.
자연, 참으로 가슴 떨리는 말이다. 자연은 오지의 원시림에서 일상생활까지, 철학의 대상에서 야유회 장소까지, 참으로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돌아가며, 자연스러움은 제일 중요한 인성인 동시에 종교적 수양의 경지이기도 하다. 우주까지 자연에 포함시키면 자연은 그야말로 ‘모든 것, 전부’가 된다. 이런 이유로 자연은 동서양 모두 가장 오랜 기간 인간과 절대적 관계를 맺어왔다.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경외의 대상으로, 예술적 표현과 감성적 감상의 대상으로, 경제와 기술에 의한 개발의 대상으로, 인간의 모든 문명 활동의 한가운데에 자연이 있었다. 인간은 때론 자연에 안겨 의지하기도 하고, 때론 자연에서 상처받고 맞서기도 했다.
이제 자연은 너무 포괄적이고 다양해서 그 경계를 한정 짓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런 현상은 서양에서 더 두드러진다. 범위의 방대함과 내용의 분량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동양에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고민하고 사유한 기록이 분명 서양보다는 적다. 자연에 맞서며 자연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일관해온 서양문명은 반대로 자연에 대해 방대한 고민의 흔적을 남겼다. 철학에서 현장의 결과물까지 종류와 내용도 방대하다.
자연의 포괄성을 보여준 러브조이의 연구
아서 러브조이Arthur Oncken Lovejoy의 연구는 이런 내용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연과 관련한 서양사상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인데,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고대 문명에서 원시주의와 관련 사상Primitivism and Related Ideas in Antiquity』(1935)이라는 책의 부록에 보면 “자연의 몇 가지 의미”라는 항목에서 서양에서 자연의 의미를 66가지로 분류해놓았다. 이마저도 방대한 양의 극히 일부라는 뜻에서 제목을 “몇 가지 의미”라고 붙였다. 물론 자연과 관련된 서양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자연의 의미를 몇백 가지로 정리하는 일쯤은 그리 어렵지 않겠으나, 어쨌든 러브조이의 연구는 이런 정리를 처음 한 작업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러브조이의 분류는 주로 고대 그리스 사상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번 항목을 ‘탄생’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본성과 육체, 숲과 나무 같은 좁은 의미의 자연, 우주와 신과 동의어인 종교적 의미, 선에 이르는 목적론, 법의 근간이 되는 상식적 규범, ‘자연에 따른다’는 의미의 자연스러움 등 서양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른 대표적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이라 하면 흔히 나무와 강과 비와 해 같은 물리적 조건만 생각하기 쉽지만 서양사상에서 자연은 이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양에서 바라본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에서 자연을 물질적 정복 대상으로만 봤다는 것은 우리의 편견일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외부 환경에 대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동심원 구도를 이루기도 한다. 자기 마음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육체와 주변의 인간관계, 사회적 규범 등의 인공적 자연을 거쳐 숲과 강과 해의 대자연에 이른 뒤 마지막으로 우주까지 나아가는 개념이다.
동심원의 작동 방향이 나를 주체로 삼는 구심적일 때 생태 위기가 일어났다. 자연을 나의 물질적 이익을 실현하는 대상으로 보면서 내게 종속시키기 위해 정복하려 들기 때문이다.그림 1 반면 내게서 전 우주로 확장되어 나가는 원심적 방향으로 자연을 대할 때 자연 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책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자연에서 최소한의 존재조건만을 누리려 한다는 뜻이다.그림 2
자연의 포괄적 개념은 생태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생태란, 단세포 미생물에서 대우주에 이르는 모든 존재 요소 사이의 다층적 위계와 유기적 관계를 의미한다. 물론 제일 핵심은 인간과 원생림 사이의 관계겠지만, 이것도 결국 대우주를 구성하는 무한대로 다양한 존재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생태운동은 자연에 담긴 포괄적 전체 구도의 일부로 접근해야 한다.
포괄성은 생태 문제를 기술에만 국한시켜 접근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주제의 종류나 범위 모두에서 의외일 수 있는데, 자연을 다룬 서양사상을 들춰보면 실제로 포괄적이고 다양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은 서양문명이 시작할 때부터 철학, 시학, 윤리학, 신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사회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대상이었다. 이런 포괄성을 이해하는 것은 생태사상을 이해하는 데 첫 번째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이는 최근의 생태 경향과 관련해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근의 생태 위기 해법은 태양열을 이용하고 생물학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등 자꾸 기술과학의 대상으로 좁혀가는 방향으로 치중되는데, 이는 결국 자연을 수단이나 도구로 보려는 매우 편협한 시각의 연장일 뿐이다. 이런 접근은 큰 성공을 거두기 힘들다. 자연을 둘러싼 다단계의 복잡한 동심원 구도에서 앞뒤를 뭉툭 떼어버리고 원생림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라는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만 집착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인간중심적이고 물질적이며 이기적인 태도이다.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은 태양열 집열판의 효율을 높이고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는 것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것도 구체적 실천으로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술에 국한된 수단적 행위일 뿐이다.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은 이것을 포함한 훨씬 포괄적인 문제이다. 한마디로 안으로는 인간 스스로의 본성을 찾아 그것에 순종하면서 밖으로는 우주를 포함한 대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 위치를 확인하고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사상적 뒷받침이 있어야, 사상운동으로 전개해야 가능하다. 기술에 의존하는 좁은 의미의 구체적 실천전략도 사상적 뒷받침이 있어야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고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기술적, 수단적 태도로 시작하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보존론과 개발론 사이에 갈등만 커질 뿐이며, 실제로 이것이 생태 문제를 둘러싸고 전 세계, 특히 한국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그림 3, 4
국내적으로는 규제 완화를 통해 공장 부지와 택지 공급을 대폭 늘리고 4대강에 콘크리트 공사를 벌이려는 개발론과 이를 저지하고 가급적 자연에 순응하며 살자는 보존론 사이의 대립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와 얽히면서 나라를 둘로 가르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초대형 국가들이 이기심에 사로잡혀 온실가스 감축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는 가운데 그나마 선진국 대열에서는 유럽 정도가 여기에 맞서는 형국이다.
표피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이런 난맥상은 생태의 의미를 사상으로까지 확대하지 못하고 기술적 차원에서 수단과 도구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생활이 바뀌지 않는 한 생태운동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아니면 위험의 극단까지 가서 인류의 생존이 걸린 화급한 문제가 된 다음에야 뒤늦게 심한 규제를 통해서 해결하려 들 테지만 이런 무리한 사이클 자체가 생태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반反생태적이다. 생태운동을 생태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말로는 안 봐도 뻔하다. 친환경적 삶을 규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묻는 훨씬 심각하고 기본적인 문제이다. 그 근원을 캐가다 보면 인간의 존재를 근원부터 새롭게 정의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단순히 전기 좀 아끼거나 천연가스 버스를 도입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사리 깨닫게 된다.
이제 인류, 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갖는 존재 의미를 다시 물어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에 따른 거대한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이런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그것을 규제가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에 의해 체험적이고 자발적으로 실행할 때에만 인류와 한국 사회는 비로소 미래의 존재를 담보 받을 수 있다. 생활이 바뀐다는 것은 곧 큰 깨달음을 얻어 일상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큰 깨달음을 얻고 나면 기술에 의존한 수단적 대응은 그 하부구조로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지금보다 효과적인 방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도 있다. 건축을 중심으로 한 생태사상의 연구는 이런 지난한 작업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생태운동의 중심, 건축
생태운동의 중심에 건축이 있다. 좁게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에너지와 오폐수 문제 때문이다. 넓게는 지구 위에 문명을 일구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건축이기 때문이다. 건축물과 도시는 에너지 소비와 오폐수 배출을 제일 많이 하는 주범이기에 이것을 줄여 지구온난화를 막고자 하는 힘든 싸움에서 주요 승부처가 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기술 발전의 속도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정작 이런 기술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 구체적 결과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효과를 못 내고 있다. 아직도 실험실 내에서만 시행되며 잘해야 일부 실험적 건물에만 적용해서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마을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계문명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거나 여러 가지 현실적 이익을 포기하는 등 성격이 이상한 특수집단이 모여서 행하는 실험운동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지금 지어지는 건물과 신도시는 여전히 99.99퍼센트 과거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머릿속부터 청소하지 않고, 즉 제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인 밖으로부터의 규제와 기술 의존만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자연을 향한 인간의 기본 인식과 건축에 대한 기본 의미부터 대전환하기 전에는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결국 파국을 향해 계속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중심에 건축이 있다.
자연과 생태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해야 한다는 위의 논리는 건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건축을 기술의 산물, 나아가 신기술의 결정체로 보면서 생태건축도 이 범위 내에서 정의하려는 기술 의존적이고 도구론적인 접근은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데 너무나 지엽적이고 피상적일 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건축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결과 건축이 기술 이외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가득 찬, 인간의 존재 의미를 근원적으로 묻고 정의하는 작업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그런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 단계에 도달 하면 기술에 의존한 도구론적 접근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건축은 거친 자연에 맞서 땅 위에 인간만의 삶의 터전을 일구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자연은 그 혜택을 받아들이되 가혹함에는 싸워 이겨야 하는 이중의 대상이었다. 인류에게 자연은 존재를 결정 짓는 제1조건이었다. 건축은 자연에 맞서 존재 의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정의하여 표현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인류 문명의 탄생 이래 이런 시도는 물리적 보호막과 정신적 상징체라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물리적 보호막은 기술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1차 요소에 불과했다. 1차 요소로서의 기술은 존재 의지를 향한 더 큰 가치에 의해 지배받고 포용당했다. 존재 의지는 자연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자연에 편입되는 과정에 확보되는 것이다.그림 5, 6 비바람을 막아 자연을 극복한 기술의 승리는 그 자체로서는 완성된 편안함을 줄 수 없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완성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술 위에 정신적 상징체라는 더 큰 가치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때였다. 기술이 존재 의지를 결정 짓고 삼켜버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기술은 산처럼 물처럼 더 큰 자연의 계획을 땅 위에 인간의 매개로 옮겨 실현하기 위한 중간 수단에 불과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기술은 항상 첨단 경쟁의 대상이었다. 왜 그런가? 첨단기술이 나올수록 우리 생활이 그만큼 더 편리해지고 인류를 괴롭혀온 여러 부정적 주변 상황이 극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생활은 과연 진정 더 편리해지기만 하는가? 단편적 차원에서 그 기술 한 가지에만 집중시켜보면 물론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심장이 터져나가고 근육이 찢길 것 같은 힘든 육체노동을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기계가 다 해주니 분명 편리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 발달은 항상 일정한 반대급부를 추가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문명 전체 차원에서 총합을 냈을 때 기술 발달이 오히려 불편을 가중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영악한 인간이 이것을 모르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인류가 기술의 첨단적 발전에 매달리는 이유가 단지 편리라는 공리적 실용적 이득만을 위해서라는 얘기는 옳지 않아 보인다.
기술과 자연 사이의 이중적 역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 경쟁이 편리라는 단순한 공리성 이상의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자연에 복종하고 편입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싶다. 이것은 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자연을 더 많이 극복하게 된다는 상식에 반대되는 역설이다. 기술이 첨단화될수록 더 많이 극복하게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이 설정하고 부가하는 제한적 상황이다. 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오히려 자연에 복종하고 편입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기술은 원래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복종하고 자연에 가까이 가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서양에서도 적지 않은 사상가들이 기술 발전의 역사를 자연사의 일부로 본다.
역설로 들릴지 모르지만 중세 때까지 기술의 의미는 그랬다. 그리스 시대에는 ‘테크네techne’가 기술의 의미였는데 이는 요즘 우리가 아는 예술과 기술을 합한 장르였다. 예술과 기술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 목적은 자연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인간을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한 데 있었다.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면서 현상 환경으로서의 자연과 점점 멀어지는 반면 사유의 힘을 빌려 자연을 자꾸 원리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심화되어갔다. 이에 예술의 힘을 빌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시도도 함께 커져갔으며 이를 실제로 실행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둘을 합한 것이 테크네였다.
이런 사실은 기계문명 시대인 지금에도 변함이 없고 기술이 더 발전하게 될 미래에도 변함없을 것이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표면적으로는 기술과 자연이 완전히 분리되어 보이지만 기술 발전의 목표는 늘 인간이 자연에 완전히 편입되는 데에 있다. 이런 사실을 사람들은 본능으로 안다. 그러나 이것은 숨겨진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기술과 기계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의 불안이 커져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술이 순전히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기만 하다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불안감은 줄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인류 전체를 보더라도 불안 증세는 날로 커져가고 있다. 기술이 본래 의미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그림 7 원 궤적에서 이탈했음을 무의식적인 본능으로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발달한 기술이 가져다줄 혜택을 생각해볼 때 들뜬 기대 옆에는 항상 또 무슨 더 큰 폐해가 따라나올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과 불쾌감이 함께한다. 이것은 어떤 기술이 개발될 때에라도 항상 있는 것이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기술의 영원한 불완전성이다. 기술이 발전해도 항상 무슨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 발전에 비례하여 더 커져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안감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항상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본능적 열등의식이다. 기술 발전이란,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열등의식을 없애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기술이 발전할수록 열등의식에서 나오는 불안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자연을 극복하여 존재 의지를 확보하기 위해 탄생한 기술이라는 것이 발달하면 할수록 불안감이 더 커져가는 반비례의 역설은 편리라는 단세포적 가치로는 절대 설명될 수 없다. 불안감이 더 커진다는 이야기는 존재 의지 확보라는 기술의 본래 목적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안감이 더 커짐에도 인류가 기술의 첨단 발전에 더 매달리는 이유는 편리 이외에 더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연에 복종하고 편입될 가능성이 더 커짐으로써 존재 의지의 안정성을 그만큼 더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숨은 본능으로 안다. 이런 사실은 원시 시대 이래 인류가 척박한 자연 속에서 건축 문명을 일구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초기 조건의 절대성을 가지고 인류의 유전자 속에 늘 존재하며 전수되어왔다. 기술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며 기술을 포괄하는 더 큰 정신적 가치에 의해 자연에 복종할 때에 비로소 존재 의지가 확보되고 자연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오는 불안감이 해결될 수 있다. 기술 단독으로 문명을 이끌고 문명사적 가치를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인류는 오히려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 극복된 것 같을수록 자연에 대한 열등의식이 주는 불안감은 커져간다. 이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존재 의지의 확보라는 본래의 목적에는 더 철저히 실패함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기술을 포괄하는 더 큰 정신적 가치와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해 인류가 갖는 존재 의지는 기술을 포함하는 더 큰 정신적 가치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의 본능은 조금도 잊지 않고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 생생히 살아서 엄연한 현실로 전수되어 우리의 존재를 위한 조건들을 결정한다. 이런 본능에 어긋날 때 자연에 대한 열등의식은 한없이 커지고 막연한 불안감 역시 따라서 커져가는 것이다. 본능은 숨어 있고 가려져 있으며 잊기 쉽다. 기술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이라는 표피적 가치에 매달릴 때 곧 잊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떨쳐버릴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표피적 가치에 매달려 잊을수록 불안감은 저 깊은 본능 속에서 더 크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어 있는 본능의 교훈을 모른 채 기술이 가져다주는 눈앞의 단것에 자신의 존재 의지를 팔아버린다. 존재 의지가 팔려 정신이 비어 있는 사람은 조그마한 환경 변화에도 불안해한다. 주변에서 오는 자극을 흡수하여 중화해낼 탄력성을 상실한 병적인 마음 상태에 빠진다. 주변에서 자극이 들어올수록 당장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기술의 표피적 열매에 더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안의 원인은 깊어만 가고 다시 기술의 표피적 열매에서 그 치유를 찾으려는 악순환의 고리에 강하게 천착하게 된다.
표피적 가치에 현혹되어 이상의 교훈을 잊을수록 인류의 생활과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불안한 정서는 난폭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낳는다. 생활 속에서 자잘한 충돌과 마음속 증오는 커져만 간다. 존재 의지를 얻기 위한 마음의 안정은 기술이 더 큰 정신적 가치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본능적 교훈에 충실할 때 얻어진다. 기술이 첨단화되고 치열해질수록 이것을 포함하는 정신적 가치도 그만큼 더 커지고 치열해져야 한다. 기술이 첨단화된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 문명이 진행되어온 역사에 비추어 경험적으로 볼 때, 자연에 대해서 더 난폭해지고 폭력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포괄하는 정신적 가치 역시 폭력성을 가두어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열해져야 한다.
(프롤로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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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임석재
학부와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뒤 도미,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1호 교수로 학과를 창설했다. 전공은 건축 역사와 이론, 비평 등이며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 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그간 연구를 실제 설계 작품에 응용할 준비도 하고 있다. 『추상과 감흥』『미니멀리즘과 상대주의 공간』『건축, 우리의 자화상』『서양건축사』(전5권) 『서울, 골목길 풍경』『교양으로 읽는 건축』『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계단, 문명을 오르다』『한국의 간이역』『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등 44권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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