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쿤스가 두 팔을 열정적으로 내뻗으며 막 자리에서 일어선 참이었다. 맞은편에서는 부분적으로 실크를 씌운 하얀 가죽소파에 다소 구부정하게 앉은 데이미언 허스트가 이의를 제기하려 하고 있었다. 불콰한 안색에 침울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 다 검은 양복에 흰 셔츠를 받쳐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쿤스의 양복은 가는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둘 사이에 놓인 낮은 탁자 위에는 설탕조림과일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허스트는 버드와이저 라이트를 마시고 있었다.
두 남자의 뒤쪽에 있는 유리창 너머로는 복잡한 고층건물들이 지평선 끝까지 거대한 다각형의 제국을 이룬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밤은 환하게 빛났고, 공기는 더없이 청명했다. 카타르나 두바이 분위기라고나 할까. 실제로 실내장식에 독일판 럭셔리 잡지에 실린 아부다비의 에미리트 호텔 광고사진을 참고하긴 했다.
제프 쿤스의 이마가 약간 번들거렸다. 제드는 붓으로 쿤스의 이마를 문지르고는 세 발짝 물러났다. 확실히 쿤스가 문제였다. 허스트는 특징을 잡아내기가 수월했다. 거칠고 시니컬하게, 즉 ‘난 내 돈 더미 꼭대기에서 당신들한테 똥을 싸지를 거야’라는 식으로 표현하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죽음을 주제로 한 음울한 작업을 계속하는 반골 기질의(하지만 역시 부유한) 예술가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요컨대 그의 얼굴은 아스널의 팬처럼 생겼다고 할 법한, 다혈질인데다 어딘가 꽉 막힌 듯한 전형적인 영국인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른 면이 있음에도 그 세대의 전형적인 영국인 예술가를 대표하는, 통일된 초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반면 쿤스에게는 이중적인 무언가가, 전문 영업자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교활함과 고행자의 희열 사이에 존재하는 극복 불가능한 모순 같은 것이 있었다. 제드가 허스트를 설득하려는 듯 두 팔을 내밀며 열정적인 기세로 일어서는 쿤스의 표정을 붙들고 씨름한 지도 벌써 삼 주째였다. 모르몬교 포르노 작가를 그리는 것만큼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제드는 쿤스가 로만 아브라모비치(러시아 출신의 석유재벌, 잉글랜드 축구팀 첼시의 구단주), 마돈나, 버락 오바마, 보노, 워렌 버핏, 빌 게이츠 등과 찍은 사진들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을 상대로 시보레 오픈카를 팔아먹기로 작정한 판매원 같은 인상을 뛰어넘는 그 무엇, 쿤스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표정은 어느 사진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하긴 제드가 사진작가들에게 절망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이른바 거장이란 자들이 특히 더했다. 그들은 모델들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포부로 충만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저 모델 앞에 서서 셔터를 눌러대며, 킥킥거리는 웃음이나 흘리는 실없는 행복을 담은 수백 장의 사진들을 찍어댈 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개중 덜 나쁜 것들을 골라내는 식이다. 이것이 이른바 거장 사진작가들의 천편일률적인 작업방식이었다. 제드는 그중 몇몇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는데, 그가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경멸뿐이었다. 그들의 창의성은 하나같이 지하철 즉석사진 부스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몇 발짝 뒤에 있는 부엌에서 온수기가 연방 삐걱거렸다. 제드의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벌써 12월 15일이었다.
∫∫∫
일 년 전 이 무렵에도 온수기가 이렇게 연방 삐걱거리더니 아예 가동을 멈춰버렸다. 몇 시간 만에 작업실 온도가 섭씨 3도로 떨어졌다. 잠깐씩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잠을 잤다기보다는 졸았다는 편이 맞았다. 새벽 여섯시경 제드는 온수통에 마지막 남은 몇 리터의 물로 대충 씻고는, 커피를 끓이며 ‘종합배관공사’의 인부를 기다렸다.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터였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종합배관공사는 ‘배관사업을 3000년대로 진입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약속이나 잘 지킬 것이지, 열한시경 제드는 여전히 몸을 덥히지 못한 채 작업실을 맴돌며 투덜거렸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건축가 장 피에르 마르탱’이라는 제목을 붙인 아버지의 초상을 작업하던 중이었다. 기온이 떨어지면 칠이 마르는 속도도 당연히 더뎌질 것이었다. 이 주 후 크리스마스에 예년처럼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터라 그 전에 완성하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배관공이 속히 와주지 않는다면 계획을 그르치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림을 선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왜 뜬금없이 아버지의 초상화 완성에 이토록 집착하게 된 걸까? 확실히 요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여섯 점의 작업에 동시에 착수해, 지난 몇 달간 쉬지 않고 그려왔다. 무모한 짓이었다.
오후 세시가 되자 제드는 결국 종합배관공사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내내 통화중이었다. 오후 다섯시가 조금 지나서야 통화에 성공했다. 상담원은 급작스런 한파로 서비스 요청이 밀렸다며 다음 날 아침에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제드는 전화를 끊고서 오귀스트 블랑키 대로에 있는 메르퀴르 호텔에 방을 예약했다.
다음 날도 종일 그는 종합배관공사의 인부를 기다렸다. 동시에 막간에 연락을 넣은 ‘충실배관공사’의 인부도 기다렸다. 충실배관공사는 전통을 지키는 숙련된 장인의 솜씨를 내세웠지만,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데 특별히 뛰어난 면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들이 그린 초상화에서 제드의 아버지는 임직원 오십여 명에게 둘러싸인 채 연단에 서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환송연은 그의 건축사무소 로비의 오픈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었다. 흰색 벽에 큰 유리창이 있어 채광이 좋은 30×20미터 넓이의 널찍한 공간으로, 컴퓨터 부스와 현재 진행중인 건축물 모형을 얹어놓은 사각 받침대들이 번갈아 배치돼 있는 곳이었다. 직원 대부분이 너드(두뇌는 명석하나 한 분야에 빠져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로, 최근에는 컴퓨터와 인터넷 중독자를 일컫는 은어로 쓰인다) 같은 외양의 젊은 3D 제작자들이었다. 연단 발치에는 사십대로 보이는 건축가 세 명이 있었다. 로렌초 로토(중세의 이탈리아 화가,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심리를 나타내는 표정과 시선 처리로 유명하다)의 범작에서 차용한 듯한 구도로 선 이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두 명의 시선을 피하며 아버지의 눈길을 끌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저마다 제드의 아버지에게서 회사 경영권을 물려받으려는 꿈에 부풀어 있음이 한눈에도 훤히 보였다. 모인 사람들의 머리 위 허공에 고정된 제드 부친의 시선에는 마지막으로 자기 사람들을 곁에 모아두고픈 바람과 미래에 대한 분별 있는 확신이 담겨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슬픔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설립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친 회사를 떠나는 슬픔, 불가항력에 대한 슬픔이었다. 영락없이 인생이 끝장난 자의 모습이었다.
반나절이 지나서 제드는 통화연결음으로 ‘리르 에 샹송’이 나오는 충실배관공사와 달리 ‘스카이록’이 나오는 ‘Ze배관’에 십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허사였다. (‘리르 에 샹송’은 개그와 팝음악이 주로 나오는 프랑스의 라디오 채널이고, ’스카이록’은 힙합, 랩, R&B를 주로 방송하는 프랑스의 FM 라디오 채널이다)
오후 다섯시 무렵 제드는 메르퀴르 호텔로 갔다. 오귀스트 블랑키 대로에는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노숙자들은 진작부터 인도에 불을 지펴놓고 있었다.
이어지는 날들도 거의 비슷하게 흘러갔다. 도시 마를 기미가 없는 그림 옆에서 갈수록 더해가는 냉기에 오들오들 떨며 배관공사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흘러나오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
해결책은 12월 24일 오전, 집 근처 스테팡 피숑 대로에 사는 크로아티아인 기술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메르퀴르 호텔에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간판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크로아티아인은 한가했다. 그렇다, 바로 올 수 있다고 했다. 검은 머리칼에 안색이 창백하고 단신이었지만 체격이 호리호리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사내로,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의미로, 19세기 말엽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유럽이 평화롭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흥했던 시기)의 유행을 연상시키는 짤막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사실 콧수염을 제외하면 제드와 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크로아티아인은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난방기 제어판을 뜯어내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복잡한 배관망을 훑어내리며 오랫동안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밸브니 사이펀이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가 인생 전반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십오 분 남짓의 검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고칠 수는 있지만, 수리비 오십 유로 이내의 간단한 보수 차원에 그칠 것이다.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아니라 문제가 있는 곳만 손보는 정도로, 수명은 몇 달, 길어야 몇 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 기간을 장담할 순 없다. 총체적으로 보건대, 이 난방기는 오래갈 것 같지 않다.
제드는 한숨을 내쉬고서, 예상 못 한 바는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 집을 사기로 결정했던 구 년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다부진 체격의 부동산 중개인이 떠올랐다. 그는 이 집이 채광만큼은 탁월하다고 떠벌리면서 더러 ‘보수’가 필요한 부분도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으며 제드는 부동산 중개인이나 산부인과의사가 되어야 했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얼마간 적당히 싹싹하기만 하던 다부진 체격의 부동산 중개인은 제드가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는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흥분했다. 그는 예술가의 아틀리에를 진짜 예술가에게 팔아보기는 처음이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순간 제드는 불안해졌다. 부동산 중개인이 괜히 아틀리에 가격이나 올려서 정작 예술가들이 아틀리에를 구할 기회를 앗아가는 ‘보보스’나 그 비슷한 문화 속물들을 비난하며 진정한 예술가들의 옹호자를 자처하면서도, 어떻게 시장 현실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 시장을 바로잡는 게 내 일은 아니지 않냐고 선수를 칠까봐서였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부진 중개인은 집값을 10퍼센트 할인해주겠다고만 했다. 아마도 가격 흥정에 대비해 미리 감안해놓은 협상액일 터였다.
말이 ‘예술가의 아틀리에’일 뿐, 실은 전면 창과 구분이 모호한 독립 공간 몇 개로 이루어진 다락방에 불과했다. 전면 창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공간 구분은 위생관념이 까다롭지 않은 제드에게도 불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전망만큼은 훌륭했다. 알프 광장 너머 고가철도가 다니는 뱅상 오리올 대로까지 내다보였고, 더 멀리로는 1970년대 중반 속속 건설된 사각형의 아파트들이 요새를 이룬 지점까지 보였다. 아름다운 파리의 전반적 풍경과 극명하게 배치되는 풍경이었지만, 제드는 건축적 측면에서 멀리 보이는 저곳이 파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수리를 끝낸 크로아티아인이 오십 유로를 챙겼다. 그는 영수증을 주지 않았고 제드 또한 기대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인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금세 다시 노크를 했다. 제드가 문을 빠끔히 열었다.
“크리스마스 인사를 잊어서요.” 남자가 말했다. “즐거운 성탄절 보내십시오.”
“아, 그렇군요.” 제드는 당황스러웠다. “선생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십시오.”
제드는 그제야 택시가 걸림돌이 되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예상대로 ‘아투트’ 사는 랭시까지 갈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스피드탁스’ 사는 기차역, 한발 더 양보해 시청까지라면 몰라도 시갈 단지 근처까지는 갈 수 없다고 못박았다. 전화기 너머의 직원이 약간 나무라는 투로 속삭였다. “안전상의 문제라서요, 손님… 저희는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된 지역들만 서비스합니다.” 안내원은 자기 딴에는 정보를 준답시고 유들유들하고도 심각한 조로 ‘부아튀르 페르낭 가르생’ 사의 연락처를 일러주었다. 애초에 시갈 단지 같은 엉뚱한 곳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려 하다니. 제드는 점점 자책감이 들었다. 매년 그래왔듯이 드넓은 공원에 둘러싸인 그 부르주아 저택을 한사코 떠나려 하지 않는 아버지도 원망스러워졌다. 갈수록 위험해지면서 사람들의 발길도 점점 뜸해지고, 사실인즉 얼마 전부터는 조직폭력배들이 완전히 장악해버린 지역에 있는 집이었다.
우선 담장을 보강하고 그 위에 고압전기 철조망을 두르고 경찰과 연결된 비디오 감시카메라 시스템을 설치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방문하는 제드를 제외하면 아무도 찾지 않을뿐더러 난방도 되지 않는 방 열두 칸짜리 집에서 제드의 아버지가 고독을 즐기며 어슬렁거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근의 상가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가까운 곳도 걸어다닐 수 없었다. 차가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조차 봉변을 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랭시 시청에서는 아버지에게 가사도우미를 지원해주었다. 파티라는 이름의 세네갈 여자였는데, 심술궂고 괴팍한데다 첫날부터 대놓고 싫은 티를 내더니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침대시트도 갈아주지 않았고 장본 물건은 십중팔구 슬쩍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실내 온도는 점차 오르고 있었다. 제드는 작업중인 그림의 사진을 찍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 보여줄 뭔가는 될 수 있으리라. 제드는 바지와 스웨터를 양복으로 갈아입고 맨바닥에 깔린 침대 대용의 좁은 매트리스 위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호흡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뿌연 어스름 속에서 늑장을 부리며 서서히 퍼져나가는 물결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영혼을 평화로운 지대로 이끌고자 함이었다. 또다시 아버지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비한 나름의 정신적인 준비였다.
이 정신적인 준비는 결실을 맺었다. 그날 저녁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갔고, 얼마간은 화기애애하기까지 했다. 오래전부터 그는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곱시 무렵, 제드는 조직폭력배들도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는 했을 거라 믿으며 랭시 역까지 걸어갔고, 별 탈 없이 파리 동역으로 돌아왔다.
(본문 부분)
----------------------------
작가 소개
미셸 우엘벡 Michel Houellebecq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이 시대 최고의 논쟁적 작가. 1958년 프랑스 해외영토 라 레위니옹에서 태어났다. 파리국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전산 관련업, 국회 행정비서 등 다양한 이력을 거쳤다. 스무 살 무렵부터 다양한 시 창작 모임을 통해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행복의 추구』와 『투쟁의 의미』로 각각 트리스탕 차라 상과 플로르 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 『투쟁 영역의 확장』을 시작으로, 이후 『소립자』 『플랫폼』 『어느 섬의 가능성』을 차례로 출간했다. 『소립자』로 노방브르 상을, 『어느 섬의 가능성』으로 앵테랄리에 상을 수상했다. 2010년,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 소비사회와 현대예술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낸 『지도와 영토』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
역자 소개
장소미
학부와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뒤 파리3대학에서 영화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런 사랑』『10월의 아이』『포기의 순간』『우리 안의 어둠』(근간)을 우리말로 옮겼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