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누가 콜리어 저택의 형제를 죽였을까
1947년 3월 21일 금요일 오전, 할렘 경찰서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콜리어 저택에 시체가 있어요.” 이웃 주민의 신고였다.
경찰은 괴짜로 통하는 콜리어 형제와 관련해 여러 해 동안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 한때 부유층 거주지였던 할렘 지구에 자리한 콜리어 저택에는 동생 랭글리 콜리어와 형 호머 콜리어가 살고 있었다. 3층 규모의 방 열두 개짜리 브라운스톤으로 사람들은 그곳을 콜리어 저택이라고 불렀다. 신고가 들어왔으니 경찰로선 확인을 안 할 수 없었다.
오전 열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관들은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결국 쇠지레와 도끼를 가져와 지하실로 통하는 쇠창살문을 땄다. 문을 열자 신문지가 벽처럼 쌓여 있었다. 단단히 묶어놓은 작은 신문 꾸러미의 벽이 너무 두꺼워서 도저히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하실 뒤쪽의 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폐품들로 봉쇄돼 있었던 것이다. 소방서에 지원을 요청했고, 급기야 사다리가 동원됐다. 경찰관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2층과 3층의 창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방책으로 막혀 있어 역시 진입은 불가능했다. 그때쯤 호기심이 동한 구경꾼 수백 명이 저택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사태는 일대 소동으로 번져갔다. 두 시간 만에 경찰관 윌리엄 바커가 2층 정면 창문으로 들어가는 데 겨우 성공했다. 집 안 내부 모습을 들여다본 그는 대경실색했다.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문, 빈 깡통, 잡지, 우산, 낡은 난로, 관管 , 책, 기타 등등. 각 방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통로는 마치 미궁 같았다. 종이 더미, 상자, 자동차 부품, 골동품 유모차가 통로 주변을 따라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어떤 통로는 막다른 길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비밀 통로가 나왔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어떤 통로에는 방심한 침입자를 공격하는 장치가 숨겨진 경우도 있었다. 한 통로에 매달린 판지 상자를 건드리자 침입자를 향해 빈 깡통이 우수수 쏟아졌다. 더 위험한 부비트랩도 있었다. 위에 놓인 상자 속에 무거운 물체가 들어 있기도 했는데, 가령 그것이 돌일 경우 맞으면 실신할 수도 있었다.
바커는 천장 높이가 3미터인데 24미터 높이까지 폐품이 쌓인 방 하나에 진입했다. 그 방 한가운데 작은 빈 공간에 65세의 호머 노인이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바커가 몸을 숙여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후 외쳤다. “사람이 죽었어요!”
여윈 상태의 시신은 해진 실내복 차림이었다. 앉은 자세로, 머리는 무릎을 향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호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지난 20~30년 동안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보도만도 여러 차례였다. 동네 사람 대부분은 호머가 죽은 상태로 여러 해 동안 방치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에 따르면 그는 불과 열 시간 전에 사망한 것이었다.
호머는 1933년부터 앞을 못 봤고, 류머티즘으로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동생 랭글리가 형을 먹이고 돌봤다. 랭글리는 이웃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의료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이다.
랭글리는 형 호머의 질환을 식이 요법(매주 오렌지를 100개씩 먹였다)과 수면 휴식(호머는 항상 두 눈을 감고 지냈다)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부검 결과 호머의 사인은 심장 마비로 밝혀졌다. 심장 마비의 원인은 굶주림인 듯했다. 호머의 시신은 들것에 옮겨서 소방 사다리를 이용해 2층 창문으로 빼내야 했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만 정작 랭글리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목격된 때는 며칠 전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 퇴락한 브라운스톤의 계단에 앉아 있던 랭글리의 모습을 봤다고 증언하고 나섰다. 그가 아직도 집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이웃들이 많았다. 아마도 숨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콜리어 형제의 변호사 존 맥멀린은 랭글리가 안에 있다면 당연히 밖으로 나오지 않겠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가 되자 랭글리의 소재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경찰은 실종자 경보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 시민들은 랭글리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지하철에서 랭글리를 목격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그러자 경찰은 역사를 막 벗어난 기차를 세우고 객차를 전부 수색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랭글리의 소재를 제보해주면 보상하겠다는 신문사들까지 나왔다. 경찰 역시 랭글리가 정말로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호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며칠 동안 뉴욕에서 발행되던 각종 신문은 이 사건을 1면에 실었다. 3월 22일자 「데일리 뉴스」는 “쓰레기 궁전”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또 다른 신문의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유령의 집’에서 시체가 나오다.” ‘콜리어 형제’는 이내 대중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사가 되었다.
사흘이 지나도 랭글리가 나타나지 않자 경찰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펼쳤다. 모여든 구경꾼이 수천 명이었다. 그들은 어떤 비밀이 밝혀질까 궁금해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콜리어 저택의 거주 여건은 실로 비참한 수준이었고, 건축주택부 당국은 그곳에 사람이 살려면 철거하고 새로 짓거나 대대적인 개보수가 요청된다고 진단했다. 지붕의 누수로 위층의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다. 시 소속의 건물 감독관이 조사를 하던 중 3층이 무너지는 바람에 추락했는데,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보 덕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수색과 청소 작업은 지하실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며칠 후 시 소속의 토목 기사들은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수 톤의 쓰레기를 치웠다가는 건물 벽이 위층 물건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릴 거라고 진단하고, 맨 위층부터 발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경찰은 천장에 난 채광창을 통해 저택에 진입했다. 그렇게 들어간 방 안은 천장까지 남은 공간이 60센티미터 이내에 불과할 정도로 쌓인 온갖 잡동사니로 빽빽이 차 있었다. 동원된 인부들은 그 비좁은 공간을 기어다니면서 작업해야 했다. 창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물건을 내던지면서 방을 치웠다. 가스 샹들리에, 마차 지붕, 녹슨 자전거가 마당에 내팽개쳐진 첫 번째 물건들이었다. 낡은 침대 용수철과 톱질 모탕이 다음 차례였다. 군중은 끝없이 불어났다.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저택에 보물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업을 개시한 후 이틀간 일꾼들은 19톤의 쓰레기를 치웠다.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한 물건은 학교로 쓰였던 인근 건물로 옮겼다. 청소 작업이 진행될수록 X선 촬영기 초창기 모형, 자동차, 머리가 둘 달린 태아의 유해 등 새롭고 이상한 물건들이 계속 나왔다. 수색 작업에 참여한 경찰관들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악몽이었다. 집 안은 바퀴벌레와 쥐가 드글거렸고, 서른 마리 이상의 떠돌이 고양이가 그 저택에 살고 있었다.
일꾼들이 랭글리의 시신을 우연히 찾아낸 것은 거의 3주가 지나서였다. 형이 죽은 자리에서 3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내부 통로를 기다시피 해 형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랭글리의 망토(랭글리가 즐겨 착용한 옷으로, 역시 괴상했다)가 뜻하지 않게 부비트랩을 건드린 것이었다. 랭글리는 신문 더미에 깔렸고, 서랍장과 침대용 용수철 사이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질식사했다. 이미 쥐들이 얼굴, 손, 발의 일부를 뜯어먹은 상태였다. 랭글리가 먼저 사망한 게 분명했다. 호머는 눈이 보이지 않았고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 것이다. 아마도 동생에게 일어난 불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즈음 청소 작업 일꾼들은 약 120톤의 잔해를 치운 상태였다. 그랜드 피아노 열네 대와 포드자동차 모델T도 그 속에 있었다. 콜리어 저택에서 나온 쓰레기의 총분량은 170톤 이상이었다. 집을 전부 수색하고 청소했지만 랭글리가 어디서 잤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미궁과 같은 통로 말고는 그가 누울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랭글리 콜리어와 호머 콜리어가 내내 이런 식으로 산 건 아니었다. 형제는 뉴욕에서도 부유하고 저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증조부 윌리엄 콜리어는 이스트 강변에 대단위 조선소를 지었고, 윌리엄의 형제 토머스 콜리어는 허드슨 강에서 최초로 증기선 회사를 운영했다. 호머와 랭글리의 어머니는 존경받던 또 다른 문중 리빙스턴 가의 일원이었다. 두 형제는 빅토리아 여왕한테서 피아노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들이 모은 열네 대의 그랜드 피아노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아버지 허먼 콜리어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고, 어머니 수지 게이지 프로스트 콜리어는 아름다운 미모로 명성이 자자한 오페라 가수였다. 그러나 사촌지간였던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콜리어와 리빙스턴 문중은 체면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가문 사람들 대다수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부부는 1909년 할렘의 브라운스톤으로 이사했다. 허먼 콜리어 박사는 블랙웰 섬(지금은 루스벨트 섬으로 불린다)으로 이스트 강을 따라 직접 카누를 타고 출근했다. 그가 근무하는 시립 병원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밤 브라운스톤 자택으로 카누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이 카누 역시 콜리어 저택에서 발견됐다.
수지 콜리어는 두 아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형제가 2만 5천 권 이상의 장서를 수집하는 데 일조했다. 두 사람 모두 컬럼비아 대학교를 다녔고, 특히 호머는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에 선발될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호머는 법학 학위를 여러 개 취득했고, 해사법海事法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활동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 동생 랭글리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기사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각종 기록을 보면 공학도로서의 그의 역량을 알 수 있다. 자동차 부품으로 손수 발전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지하실에서 가동시켰다 공들여 만든 통로들을 보면 그의 재능이 반영되어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랭글리는 꽤 이름난 피아노 협주자가 됐다. 직업 피아니스트로 카네기 홀의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호머가 시력을 잃게 되자 랭글리는 형에게 쇼팽을 연주해주고, 고전 명작을 읽어줬다.
콜리어 형제는 부모가 사망한 1920년대 이전부터 바깥세상과 점점 더 담을 쌓고 지내기 시작했다. 1917년에 전화를 끊었다. 1928년에는 도시가스를 차단했다. 1930년대쯤에는 전기가 끊겼다. 랭글리는 부동산 매매 중개인 클레어몬트 모리스에게 앞에서 말한 것들을 없애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실현하겠노라고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를 겁니다.” 형제는 우편 제도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유일한 경로는 랭글리가 직접 만든 광석 라디오뿐이었다.
집 밖으로 나온 호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때는 1940년대 초였다.
존 콜린스 경사가 나뭇가지를 저택의 지하실로 옮기는 형제를 보았던 것이다. 랭글리는 잡동사니로 인해 집 안이 어수선하다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집의 상태 때문에 지저분하고 게을러 보이지만 사실 그는 항상 바빴다. 해야 할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자주 불평했다. 그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집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랭글리는 경찰에게 거듭 주장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이다.
콜리어 형제는 계속해서 법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들이 ‘자유’를 행사한 게 문제였다. 형제는 세금을 안 냈다. 주택 대부금도 갚지 않고, 공공요금도 내지 않았다. 은행 계좌까지 방치했다. 법원의 강제 명령, 퇴거, 압류 처분이 이어졌다.
콘솔리데이티드 에디슨Consolidated Edison사의 직원들은 몇 번 문전박대를 당하자 마침내 1939년 법원 명령서를 들고 와서 회사가 설치한 미사용 전기 계량기를 뜯어갔다. 그들이 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신문지와 상자, 자갈돌 주머니, 통나무, 쓰레기가 벽을 이룬 채 버티고 있었다. 격분한 랭글리는 2층 창문에서 자기 집에 함부로 들어올 권리가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들은 계량기를 떼어갔고, 랭글리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은행은 콜리어 형제가 6,700달러의 담보부 어음을 갚지 않았다며 저택 압류 조치에 들어갔다. 수지 콜리어가 사망한 후부터 11년 동안 변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콜리어 저택은 법률상 은행 소유로 넘어갔고, 시 보건 당국은 무너진 정면 장식을 소유권자인 은행에게 수리하라고 명령했다. 인부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랭글리가 나타나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몇 달 후 은행과 시청의 직원들이 콜리어 저택을 찾아갔다. 저택을 압류하고 형제를 퇴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손도끼로 문을 때려 부쉈다. 그러나 종이 뭉치로 쌓은 견고한 벽이 진입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령의 집’에서 소동이 일어날 때면 항상 있는 일이었다. 은행 직원들은 2층 창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세 시간 동안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집 안으로 고작 0.6미터 나아가는 데 그쳤다. 은행 측의 침입에 불안감을 느낀 랭글리가 마침내 변호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한때 콜리어 형제의 변호사로 일했던 존 맥멀린은 그들의 기벽을 잘 알고 있었다. 변호사는 허약하고 나이도 많았지만 소방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갔고, 내부의 통로를 지나 거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 뒤에 랭글리가 숨어 있었다. 맥멀린이 퇴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6,700달러를 갚는 것뿐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랭글리는 호주머니에서 돈다발을 꺼내 건넸고, 펜을 빌려서 자기 집을 구제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1942년 가을, 호머가 죽었다는 소문이 이웃 주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 풍문이 123번가 파출소의 콜린스 경사 귀에까지 들어갔다. 콜린스는 콜리어 형제를 잘 알았다. 그는 콜리어 저택에 찾아가 호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게 해달라고 랭글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이 부비트랩을 조심하면서 물건들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데 족히 30분은 걸렸다. 마침내 작고 어두운 빈터가 나타났다. 콜린스가 회중전등을 켜자 호머가 보였다. 낡은 외투를 걸친 수척한 형체가 접이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변호사 호머 콜리어요. 보다시피 죽지 않았다오. 마비가 와서 움직이지 못하고 앞을 못 보는 처지지만.” 이것이 호머가 랭글리 말고 다른 사람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랭글리는 다음 날 이 일과 관련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콜리어 저택은 1947년 7월에 철거됐다. 꺼낸 물건들은 경매로 팔렸지만 경매 총액이 2,000달러에도 못 미쳤다. 집이 서 있던 부지는 1951년에 팔렸다. 그리고 1965년 그곳에 작은 공원이 만들어졌다. 공원 조성 위원회 위원 헨리 스턴이 그곳을 ‘콜리어 형제 공원Collyer Brothers Park’이라고 이름 붙였다
2002년 ‘할렘 5번가 주민 협의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공원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그들의 첫 번째 사업은 공원 이름 바꾸기였다. 협의회 회장은 콜리어 형제가 “이 지구에 긍정적인 기여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이미지도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리딩 트리 파크Reading Tree Park 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위원회는 그 요청을 물리쳤다. 공원 조성 위원회 위원 애드리언 베넵은 이렇게 답변했다. “역사는 때로 우발적으로 씌어집니다. 모든 역사가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도 역사입니다. 뉴욕의 많은 어린이가 부모님의 꾸중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방을 깨끗이 청소하지 않으면 콜리어 형제처럼 되고 말거야’라고 말입니다.”
콜리어 형제의 행동은 기괴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니다. 현재는 콜리어 형제와 같은 행동을 ‘저장 강박hoarding’이라 정의한다. 사실 온갖 물건을 수집하고 저장하는 것은 아주 흔한 강박 행동이다. 콜리어 형제처럼 심각한 경우는 드물어도 많은 사람이 물건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삶에 간섭을 받는다.
우리는 저장 강박 행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수천 통의 이메일과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저장 강박 행동을 하는 사람의 친척과 친구, 저장 강박이 공공 보건과 안전에 미치는 위해적 요소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심하는 공무원, 저장 강박 증상을 보이는 본인이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사회 복지사 및 기타 복지 활동 종사자 등 전문가들을 상대로 저장 강박 문제에 대해 강연할 때면 다음 질문을 한다. “여러분 가운데 심각한 저장 강박 사례를 개인적으로 접한 분이 계십니까? 본인, 가족, 친구, 직업상 찾아오는 환자 말고 다른 사람 중에서 꼽는다면요?” 손을 들어보라고 요청하면 거의 매번 모인 사람 가운데 최소 3분의 2가 손을 든다. 모두가 그 규모에 약간은 충격을 받는 분위기다. 그리고 강연이 끝나면 많은 사람이 다가와서 실토한다. 자기들한테 통제가 안 되며 쉬이 사라지지도 않는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간다고 말이다.
당신도 저장 강박 문제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의 2~5퍼센트가 저장 강박증을 앓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인 600~1,500만 명이 저장 강박으로 고통을 겪거나 삶이 저해되고 있다는 얘기다. 약간의 징후가 있지만 저장 강박 행동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관한 사례들을 읽으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 혹은 주변의 저장 강박 행동을 깨닫게 될 것이다. 콜리어 형제 이야기가 별나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저장 강박 증상자가 물건에 보이는 애착은 우리의 애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신이 저장 강박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당신도 얼마간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게일과 나는 이 책을 함께 썼다. 사례 조사와 면담 등 현장 연구의 대부분은 내가 했다. 일인칭으로 서술된 인터뷰와 사례들이 그 결과다. 하지만 개념은 전적으로 협력을 통해 도출해냈다. 우리는 책에 소개한 것보다 더 많은 ‘수집 저장광’을 만나고, 대화했다. 그 과정에서 외경심을 느꼈고 발견의 흥분을 체험했으며 그들에게 공감하기도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 대다수가 지능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저장 강박은 정신 장애로 간주되지만 비상한 재능에서 유래하는지도 모른다. 저장 강박 증상자들은 모든 물건에서 풍성한 정보를 읽어낸다. 보통 사람들은 잡지의 기사를 보면서 잡지 표지의 빛깔과 색조를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주의해서 보면 그 색상들이 발휘하는 위무 효과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잡지의 의미는 확대된다.
이렇듯 저장 강박 증상자들의 물리적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각하는 물리적 세계와 다르고 훨씬 포괄적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도 물건에서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정보, 무한한 효용, 무한한 무가치를 본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저장 강박 증상자들이 물건을 대하고 취급하는 통상적인 규칙에서 더욱 자유롭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저장 강박증을 고백함으로써 고통스런 오명을 쓰게 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위해 용감하게 나서서 각자의 삶을 공개해준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과 신분 등 기타 세부 정보를 바꾸어 익명으로 처리했음을 밝혀둔다. 이 모든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저장 강박의 동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 자신까지도.
랜디 O. 프로스트
(머리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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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랜디 O. 프로스트 Randy O. Frost
스미스대학교 심리학교 교수로, 강박-충동 장애, 저장 강박, 병리적 완벽주의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140개가 넘는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의 연구는 내셔널 퍼블리 라디오, BBC 뉴스 등에도 소개되었다. 현재 국제저장강박재단의 과학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저장 강박 관련 강의도 하고 있다.
게일 스테키티 Gail Steketee
보스턴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교수이자 학장으로, 저장 강박을 포함한 강박-충동 스펙트럼 장애 치료의 국제적 전문가다. 프로스트 교수와 함께 지난 20년 동안 저장 강박 문제를 연구하여 함께 저술 활동을 했다. 공저한 책으로는 『저장 강박과 획득』(Compulsive Hoarding and Acquiring), 『쓰레기 보물: 저장 강박 치료 가이드』(Buried in Treasures: Help for Compulsive Hoarding), 『노년의 저장 강박 증상』(Age of Onset of Compulsive Hoarding) 등이 있으며 『잡동사니의 역습』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해온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자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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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정병선
영어로 된 책을 읽거나 번역한다. 영문법 책을 한 권 쓰고 있고, 한국어로 옮긴 책으로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타고난 반항아』『브레인 스토리』『게임 체인지』『건 셀러』『렘브란트와 혁명』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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