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2008년 초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급속하게 치솟는 식료품 가격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사망자도 발생했다. 튀니지에서는 경찰에 의해 두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시위 가담자 200명이 형사소송을 당했다. 인권기구인 국제사면위원회는 서아프리카 카메룬에서 100여 명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밝혔다.
두 경우 모두 식량에 대한 권리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시위였다. 그러나 정부는 시위대의 권리와 요구를 짓밟았다. 이는 두 경우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시위의 물결은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를 거쳐 아시아까지 이어졌다. 선진국 국민들도 식료품 공급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세계는 그때까지 경작지와 가축우리가 식량을 무한히, 그리고 언제나 저렴한 가격에 시장에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로 우리는 이런 시절이 지나갔음을 알고 있다. 이것이 달갑지 않은 현상의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를 극복한 20세기 중반 이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2008년 식량 시장에 닥쳤던 위기는 지구 어딘가에서 수확이 좋지 않아 일시적으로 나타난 부족 현상이 아니었다. 의학계에서 치명적이라고 여기는 일종의 다발성 장기부전 같은 것이었다. 정밀검사 결과 기후와 토지, 물이나 종의 다양성과 같은 세계 식량의 ‘장기들’이 쇠약해졌고, 일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전한 공급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세계 인구의 증가로 갈수록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유가 상승으로 인해 경작지가 에너지 공급의 원천으로 점점 더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세계 에너지 시장은 이미 바닥나버린 농산물 수출국의 저장고를 박박 긁어대고 있다. 이제 유가는 일용할 양식의 가격마저 결정하기 시작했다.
공급 부족과 수요 증가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2008년 식료품 시장에서는 숨 가쁜 가격 경주가 벌어졌다. 식량의 원천인 토지와 물을 둘러싸고 격렬한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농지는 21세기에 들어와서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의 부자들은 경작지와 비축 식량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돈도, 땅도 없는 사람들은 완전히 무일푼이 되었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식료품 구입에 지출하는 수백만 명은 빈곤이라는 상황에서 굶주림이라는 상황으로 추락했다. 이제 식량 확보 문제는 국가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식량 시장에 발생하기 전, 다가오던 세계경제 위기가 갑자기 완화되었다. 산업 바퀴의 굴러가는 속도가 전 세계적으로 줄어들었다. 유가가 내리자 세계시장에서 밀과 쌀 그리고 옥수수 시세도 하락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환점이 아니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식료품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 세계의 빈곤 가정들은 여전히 궁지에 처해 있다. 기아에 시달리던 인구는 8억 명에서 10억 명으로 증가했다. 이 모든 사실은 세계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기아와 영양실조로 내몰리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예상에 따르면, 증가하는 세계 인구가 배불리 먹으려면 21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 경작지에서 2008년보다 두 배나 많은 식량을 수확해야 한다. ‘개발을 위한 농업과학기술에 대한 국제평가IAASTD’는 전환점이 될 새로운 세계 식량정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압력단체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올바른 길과 세계 식량의 미래를 둘러싸고 비밀리에 교전이 진행 중인 것이다.
상황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경기가 다시 좋아지고 유가가 다시 오르며 기후변화로 수확량이 계속 하락한다면, 전 세계의 정치적 안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폭풍이 식료품 시장에 몰아칠 것이다.
국제정치는 아직 이러한 사태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세계 금융 위기와 경제 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후자와는 달리 기아 문제는 수조 달러를 쏟아붓는다 해도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말라버린 식량의 원천을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솟구치게 할 수는 없다. 즉 세계 식량 위기는 정치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정작 정치는 지금까지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세계 식량 위기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1장 곡창지대의 침체: 위기의 징조
뉴욕의 급식소
2008년 5월. 마천루들이 석양빛에 반짝인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이곳 선진국의 금융 중심지에서는 수십억 달러가 움직인다.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면서 누군가는 수백만 달러를 번다. 그러나 맨해튼 고층 건물들 아래에 위치한 어떤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바로 수많은 급식소 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은 유통기한이 다 되어 슈퍼마켓에서 더 이상 팔 수 없는 과일과 요구르트, 소시지와 빵 등을 나눠준다. 급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는 추세다. 매주 더 많은 뉴요커가 배를 채우기 위해 줄을 선다. 2007년, 뉴욕 ‘푸드뱅크’는 생존에 필요한 것을 거의 소유하지 못한 130만 명에게 급식을 제공했다. 2009년 초, 줄의 길이는 훨씬 늘어났다. 도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300만 명가량은 가난하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급식소의 무료 급식에 의존하고 있다.
타임스퀘어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살던 칼 맥킨니도 노숙자가 되었다
그는 인터넷 회사 직원이었으나 실직한 뒤 졸지에 여자 친구와 함께 거리로 내몰렸다. 두 사람은 이제 방송사 카메라 앞에 서서 불시에 덮친 추락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은 이런 운명이 미국인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중산층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 식료품 가격 상승과 유행 산업의 몰락이 이들을 빈곤층으로 만든다. 푸드뱅크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을 살 수 없는 뉴욕 빈곤층은 지난 5년 동안 100만 명이나 증가했다. 세계 금융 위기 때문에 이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베를린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독일에서는 현재 70만 명이 슈퍼마켓에서 처분되는 수프와 빵을 먹는다. 이런 사람들은 늘어나는 반면, 부유층의 쓰레기통에서 건질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든다. 식료품 콘체른(생상, 유통, 금융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이 법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특정 은행이나 기업을 중심으로 긴밀하게 결합된 형태-옮긴이)들도 돈에 주목한다. 즉 쓰레기를 통해 낭비되는 돈을 줄이는 것이다. 구호단체인 ‘테이블’의 식탁에는 노인이나 몰락한 성인뿐 아니라 아이들도 앉아 있다. 빵 바구니를 채우기 위해 온 가족이 오는 것이다. 빵과 기름, 가스와 전기, 차비 등 물가가 너무 올라 가족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3년 전만 해도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자립이 불가능해서 ‘테이블’이나 그 외 다른 원조에 의존한다. 급격히 오르는 물가는 빈곤의 문턱에 서 있던 사람들을 빈곤 속으로 완전히 몰아넣었다. 2008년 독일의 빈곤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가정들이 특히 이런 상황에 많이 처해 있다. 이른바 중산층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생필품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빈곤에 대한 불안은 주택 소유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부유한 국가들이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었던 일들을 가난한 국가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아이티: 굶주림이 분노를 불러오다
2008년 4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와 기타 여러 도시에서 몽둥이와 돌로 무장한 무리가 거리로 몰려나왔다. 건물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검은 연기가 눈을 따갑게 했다. 거리에는 뜯긴 양철 지붕과 큰 통들이 바리케이드를 이루었고 관공서와 부유층의 고급주택들은 약탈당했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상승하는 식료품 가격이 빈곤과 분노의 원인이었다. 아이티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부패와 권력 남용 그리고 폭력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게다가 식료품 가격이 4주 만에 거의 50퍼센트나 상승했다. 아이티 인구의 80퍼센트는 하루 1유로 30센트로 살아야 한다.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넉넉하게 먹지 못했습니다. 모래를 먹기도 합니다. 황토와 기름, 소금과 물로 비스킷을 굽는 요리법이 돌고 있습니다.” 한 언론사 특파원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통령의 호소도 소요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무장한 무리가 포르토프랭스와 여러 도시의 거리를 장악했다. 비상사태였다.
아이티만이 아니다. 식료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여러 국가들 역시 폭동 위협에 처해 있다. 빈곤이 곧 닥쳐올 것이라 예감하는 54개국은 세계 곡물 경제에서 떨어지는 얼마 안 되는 수혜에 매달린다. 이들은 단지 수입에 의존해 살아가므로 식료품 시장에서 벌어지는 물가 인상의 악순환을 무조건 견뎌내야 한다. 세계는 이런 상황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전 세계로 퍼진 굶주림은 정의를 요구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대재난들이 보통 그렇듯이 현재 전 세계에 나타나는 비극은 개별적으로 볼 때 서로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문제들이 불행하게 결합된 결과다. 비축 식량의 소진, 늘 높은 유가, 바이오 연료를 향한 욕구, 중국의 육류 소비와 시카고 곡물거래소에서 벌어지는 투기의 결합은 엄청나게 강력한 폭발물을 만들어낸다.
게으름뱅이의 천국에서 위기 상황으로
수십 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구 선진국들은 굶주림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다. 언젠가는 극복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는 풍요롭던 시대의 믿음이었다. 유럽은 게으름뱅이의 천국과 비슷했다. 버터와 곡물이 산을, 우유와 포도주가 바다를 이루었다. 냉동 창고에는 반으로 잘린 소들이 천장까지 쌓였고, 산더미 같은 설탕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달콤하게 해주었다. 한마디로 풍요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다르게 인식했다. 특히 정치가들은 이를 처치해야 할 짐으로 보았다. 자업자득인 짐이었다.
그 짐은 1957년 3월 25일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을 나타내는 파란색의 안락의자들이 카피톨리노의 화려한 홀(6개국 외무장관이 카피톨리노 언덕의 로마 시청 호라티어 홀에 모여 이른바 ‘로마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출범했다 . 옮긴이)에서 6개국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유럽의 별 왕관이 반짝였고, 탁자 위에는 가죽으로 싼 서류가 놓여 있었다. 역사를 창조할 ‘로마조약’ 서류였다. 벨기에,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대표가 서명만 하면 되었다. 펜이 긁히는 소리가 멎고 잉크가 마른 뒤 유럽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다. 유한책임으로 묶인 경제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독일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루어진 짧은 평화에 정치적인 안전조치를 취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상호 이득이 되는 공동시장으로 유럽의 접합제 역할을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일종의 물물교환이었지만 나중에 밝혀졌듯이 이는 추악한 거래였다. 공동시장에서 곡물과 우유, 고기를 거래하기로 했는데, 농업국으로서 새로운 유럽의 식량 저장고로 승격하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특히 잘 부합했다. 아울러 철강 산업과 자동차 산업에서 고객이 필요했던 독일의 이해와도 잘 맞았다. 실제로 이 조약은 밀과 자동차를 교환하는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다. 밀의 배경에는 농부들, 다시 말해 프랑스 정부의 유권자들이 있었다. 당연히 곡물 가격은 높게 매겨졌고, 지속적으로 가격을 상승시킨다는 목표도 세웠다.
당대 사람들 모두가 이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주간지 <차이트>의 브뤼셀 특파원 헤르만 볼레는 유럽인들에게 불행을 안길 물가 상승 기미를 이미 1966년에 알아챘다. “유럽경제공동체의 1억 8000만 유럽인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는 숫자 하나가 보여준다. 유럽경제공동체의 밀 가격은 세계시장 수준보다 60퍼센트나 높다. 이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공동시장의 농부들, 특히 프랑스 농부들은 유럽공동체가 이미 너무 많은 밀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이제 본격적으로 밀농사를 짓게 될 테니까.”
프랑스에서 밀 가격은 30퍼센트 상승했다. 농부들은 돈을 벌었고, 독일은 자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수출할 거대한 시장을 얻었다. 이는 다시 컨베이어벨트에서 일하는 독일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자동차 산업만이 아니었다. 하청업자들도 이득을 보았고, 결국 유럽경제공동체 내의 경기가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여기까지가 긍정적인 결과였다. 부정적인 면은 이제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높은 가격에 자극을 받은 농부들이 곳곳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경작지와 가축우리에서 우려내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의결한 대로 유럽 부엌에서 소비되지 않은 모든 것은 유럽공동체가 정해진 가격으로 사들여야 했다. 농림부장관들은 잉여 식량을 보관할 창고와 냉동 창고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잉여 식량은 흉작에 대비한 비축 식량으로 간주되었다. 흉년이 정말 발생한다면 모두 소비될 터였다. 그러나 흉년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수확량은 점점 늘었고, 식량의 산과 바다도 더 높아지고 넓어졌다. 유럽공동체는 유럽 농촌의 창고들이 포화 상태가 되자 창고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곡물을 수출하기로 했다. 어디로든, 어떤 가격으로든 상관없었다. 쌓아둔 식량을 없애야 했다. 보조를 받은 수출 가격은 부분적으로는 생산비보다 낮았다.
유럽인들의 이런 수출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가격 파괴가 일어났다. 유럽 화물선과 냉동선이 정박하는 곳마다 그곳의 농산물 가격은 무너졌다. 국내 곡물은 유럽에서 오는 저렴한 수입품과 경쟁할 수 없었다. 소떼는 구매자를 찾지 못해 사바나에 모두 그대로 남았다. 도시는 말도 안 되는 싼 값으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유럽의 잉여물로 살았다. 많은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이는 경제적인 파멸을 의미했다. 유럽의 게으름뱅이 천국이 몰고 온 부수적인 피해였다.
그 결과 분노가 일고 정치적 역풍이 불었다. 유럽의 잉여 정책에 대항하는 결정타는 미국이 주도했다. 미국은 거대한 경작지와 목초지를 통해 세계에 식량을 공급하려 했고, 적어도 수출을 통해 세계시장을 지배할 비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덤핑 가격은 이 비전에 방해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유럽에 압력을 가했다. 세계무역기구는 저렴한 농산물 수출을 종식하라고 유럽에 촉구했다. 뒤로 물러선 유럽위원회는 유럽의 농업을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산더미는 이제 그만!’이 정치적 구호가 되었다. 잉여물 수출은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효과가 나타났다. 1998년부터 유럽의 곡물과 고기와 버터의 양이 매년 점점 줄어들더니 1600만 톤에서 800만 톤으로, 그러니까 절반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더 많이 줄었다. 800만 톤이었던 것이 2006년에는 200만 톤만 남았다. 창고들은 2008년 4월에 거의 비었다.
그러자 브뤼셀에서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 유럽공동체의 비축 식량이 30일 분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루 드 라 르아에 있는 농림부는 혼란에 빠졌다. 덴마크 출신으로 2004년부터 재임 중인 유럽연합 농업 담당 집행위원 마리안 피셔 보엘은 정면 돌파에 나섰다.
(서문 전문, 제1장 부분)
--------------
저자 소개
빌프리트 봄머트
독일 본대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했다. 1979년부터 서부독일방송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서부독일 라디오방송 최초의 환경편집부 부장이다. 몇 년 전부터 유전공학과 기후변화 그리고 세계 식량문제와 인구통계의 변화 등의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
역자 소개
전은경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고대 역사 및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출판 편집자를 거쳐 현재 독일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16일간의 세계사 여행』『철학의 시작』『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커피우유와 소보로빵』『리스본행 야간열차』『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들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