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우리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내 이메일의 받은편지함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음경이나 유방을 확대하라거나, 정력과 쾌락을 증진시켜주는 비아그라를 구입하라거나, 최신 허브요법이나 조제약으로 체중감량에 도전하라고 권유하는 메일들로 매일 가득 찬다. 그런 권고메일들은 스팸필터를 교묘히 통과하고, 대중과학 지면으로 침투한다. 그래서 요즘 신문이나 잡지에는 몸과 뇌의 능력을 향상시켜준다는 이식물이나 알약을 찬양하는 기사, 기존 생물학을 우회하는 새로운 생식방법을 소개하는 기사가 넘친다. 한편 소녀들은 ‘미스 빔보’(www.missbimbo.com, 자신의 아바타를 아름답게 꾸미는 온라인게임—옮긴이) 웹싸이트에서 가상의 인형을 만든 뒤, 그것에 다이어트약을 먹여 ‘비쩍’ 마른 몸매로 만들고 가슴 확대수술이나 주름살 제거수술을 해준다. 그런 소녀들이 자라면 잡지를 넘겨보면서 허벅지나 코나 가슴을 성형하고 싶어하는 10대가 된다. 그 잡지에 페이지마다 실린 뼈만 남은 모델들의 사진은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정부는 비만이라는 전염병을 음울하게 경고한다. 이런 현상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당신의 몸은 고치고, 개조하고, 증강해야 할 캔버스다. 그러니 동참하라. 즐기라. 뒤처지지 마라.
현재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는 심리치료사이자 정신분석가로서 나는 신체 변형, 증강, ‘완성 가능성’에 대한 압박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충격을 매일 목격한다. 환자들이 늘 특정한 신체적 문제를 안고 나를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감정적 곤란이나 갈등이 무엇이든, 그 안에는 거의 언제나 몸에 관한 걱정이 은근히 끼어 있다. 신체적 불만족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크고 작은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개조하기를 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서 흠을 찾아내고, 그것을 개선하면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내 환자들은 자신이 외부 압력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이 조작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설명에 반감을 느낀다. 패션이나 건강 분야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든 아니든, 우리는 어쨌거나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기분좋은 일이라는 명제를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그렇지만 우리 몸들과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압박이 교묘하게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불만족스러울 때가 많다.
생물학적 조건이 개인의 운명을 더는 좌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짐에 따라, 신체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얼마든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퍼지고 있다. 하지만 몸은 완성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우리가 몸을 개선하는 작업을 즐겨야 한다거나 적어도 기꺼이 용인해야 한다는 믿음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도리어 문제를 격화시켜 몸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현상, 달리 말해 몸이 심각한 괴로움과 무질서의 장소가 되어가는 현상에 기여할 뿐이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실로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갈수록 우리의 몸은 갈고닦아야 하는 대상으로 경험되고 있다. 남성들은 스테로이드, 성적 보조도구, 남성성을 지향하는 다이어트상품에 노출되어 있다. 아이들의 몸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사진관에서 아이들의 사진에 디지털 수정을 해준다. 미소를 교정하고, 치아 사이의 틈을 메우거나 오히려 만들고, 휜 무릎을 곧게 펴주면서 어린 소녀들을 똑같은 모양의 사기인형으로 만들어낸다. 이런 마법사들의 웹싸이트 주소는 절대로 아이러니를 의도한 표현이 아니다(일례로 다음 웹싸이트 주소의 뜻은 ‘자연미’다. www.naturalbeauties.homestead.com). 그들은 보정한 사진 또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한 형태이고, 진실된 것이라고 믿는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섹시함을 강조하는 문화에 매료된다. 몸을 남들 앞에서 전시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가꾸는 것은 재미있고, 바람직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선전된다. 아름다운 몸이라는 가치와 몸의 완성이라는 목표는 이미 민주화되었다. 사는 곳이나 경제적 여건과 무관하게 누구나 옳은 몸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그 옳은 몸은 개인이 오늘날 이 세상에 온전하게 소속되는 한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누구에게나 민주적으로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이 경향은 점점 더 단일한 형태로 사람들을 획일화시킨다.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들의 이미지와 이름은 전세계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그다지 젊지 않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입에 오르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향에 쉽게 동참할 수 있을 테고 나아가 즐기기까지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민주적 사상이 다양한 미적 변이들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화는커녕, 사람들의 미의식은 지난 몇십년 동안 줄곧 편협해져왔다. 남성에게는 가슴근육을, 여성에게는 풍만한 유방을 요구하는 현재의 편협한 미의식은 그 기준에 합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고민에 빠뜨린다. 요행히 기준에 맞는 사람조차 자신의 몸에 불안감을 느낀다. 정말로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내 안절부절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몸들은 늘 긴장한 상태다.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처럼 되었다. 이전 시대라면 우리는 이런 불안들을 질병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전염병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다르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신체적 집착에 이미 길들어 있다. 소녀들과 여성들은 특히 더 사로잡혀 그런 집착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 그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너무 당연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런 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심란한지 알 수 있다. 몸에 대한 집착은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거의 평생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뛰어난 운동선수의 민첩함을 모방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열망은 이제 근사한 복근을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 집중된다. 네살밖에 안된 어린 여자아이들이 신체적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거울 앞에서 섹시한 포즈를 연습하는 것은 귀엽기보다 오싹한 광경이다. 한편 양로원에서는 장기적으로 식이장애를 겪는 여성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죄다 외부 압력 때문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더 완벽한 몸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더없이 개인적인 욕망으로 경험하고, 그것은 실제로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들이 우리 몸을 보고 말하고 묘사하는 방식과, 우리가 자신과 타인의 몸을 개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을 분리하여 이야기할 수는 없다. 몸은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에서 새로운 초점으로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의 몸은 더이상 안전하거나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디톡스, 근력운동, 치아관리, 장세척, 세정에 대한 새로운 수사들이 끊임없이 나오면서, 우리는 몸에 관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전에는 패션이나 건강에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들도 요즘은 발을 뺄 수 없다. 누구나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제 개인이 자신의 몸에 책임을 지고 몸으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도덕적 가치가 되었다. 몸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개인적 프로젝트나 다름없다.
전문기고가들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을 조언하는 기사들을 끝도 없이 쏟아낸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건강과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면 왜 좋은지, 왜 그래야 하는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우월한 일인지 이야기한다.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기꺼이 개인적 책임을 지라고 촉구한다. 한편 우리 주변의 시각적 세계는 몸 전체나 일부를 재현한 이미지들에 의해 점차 변형되고 있는데, 그런 이미지들은 당장 우리 몸들을 개조하고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뜻을 교묘하게 전달한다. 우리는 그런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흔쾌히 초대를 받아들이고, 최신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달한다.
날씬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사람들의 자존감을 해치는 가운데, 최근에는 또다른 고착현상이 생겼다. 바로 비만율의 증가다. 몸이 보내는 정상적인 식욕에 따라 먹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된 듯하다. 대신 식사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몸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애쓰면서 늘 꼼꼼히 따지고 좌절하는 일이 되었다. 다이어트회사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신생기업인 뉴트리씨스템(NutriSystem)은 <포춘>(Fortune)이 선정한 500대 초고속 성장기업에 꼽혔는데, 회사의 이윤은 2004년에 100만 달러였던 것이 불과 2년 만에 8,500만 달러로 늘었다. 새로운 헬스클럽이나 건강식 전문식당도 속속 문을 열고, 새로운 음식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근력운동, 몸매관리, 건강을 다루는 잡지들의 발행부수는 갈수록 늘어난다. 몸을 개조하려는 부단한 욕망들이 어디에서나 표출된다. 몸을 다시 만드는 일이 쉬울 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성형수술은 점점 텔레비전 화면과 사람들의 지갑을 장악해간다(연간 성장규모가 10억 달러나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식(生殖)이 재구성되고 있다. 미래에 쓰기 위해 난자를 얼려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아지고, 체외수정을 택하는 부모들의 나이가 갈수록 어려진다. 성전환한 남성이 임신을 시도하는 현상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즈> 2008년 6월 22일자에 실린 토머스 비티(Thomas Beatie)의 이야기를 보라)
후기자본주의 덕분에 우리는 생존, 종족 번식, 주거지 확보, 허기 충족에 집중했던 과거 수백년 동안의 신체적 관행에서 벗어났다. 물론 출산, 질병, 노화는 여전히 삶의 정상적인 주기의 일부지만, 그것들은 이제 개인이 발전된 의학이나 외과적 수술기법을 총동원해 노력하면 얼마든지 중단하거나 바꿀 수 있는 사건들이 되었다. 몸은 개인의 생산물로 평가된다. 인공기술을 이용할 수도 있고, 유기농제품 같은 자연주의적 경로를 택해서 빚어낼 수도 있고, 두가지 방법을 조합해서 쓸 수도 있다. 방법이야 어떻든, 몸은 곧 우리의 명함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신경 쓴 결과를, 혹은 게으름 부리고 실패한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때는 육체노동자들의 몸만이 쉽게 구별되었다. 근력과 근육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중산층 사람들이 헬스나 요가 같은 갖가지 신체단련을 통해 그런 몸을 가져야 한다. 육체적 단련의 목표는 꾸준한 운동을 통한 개인적 성취를 자랑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더 신경 쓰고 주의해야 한다. 쏘셜네트워크 싸이트(온라인, 주로 인터넷상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싸이트—옮긴이)의 사용자가 간혹 호감가지 않는 사진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부정적인 ‘악성댓글’을 단다. 월드 와이드 웹을 통한 이미지 유포가 쉬워짐에 따라 몸에 대한 대중의 혹평도 늘고 있다.
쎌러브리티 문화나 브랜드산업은 현대인의 몸을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그런 상업적 압력 때문에 사람들은 몸을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몸들은 더이상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서구에서는 로봇공학, 기계화된 농장설비, 식품에서 건축자재까지 반가공된 상품들, 자동차, 첨단무기 등이 일상적인 육체적 활동과 노동을 대부분 대체했다. 이제는 물건을 고쳐 쓰는 일도 거의 없다. 대량생산시대에는 고치느니 새것으로 바꾸는 게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노동자계급의 몸에 고된 육체적 작업으로 인한 근육이 형성되었지만, 요즘의 저소득 써비스산업 종사자들이나 계급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있는 컴퓨터 관련업 종사자들에게는 그런 육체적 표식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나 일터에서 일부러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해야 할 지경이다. 재미나 사회적 표지(social marker)를 위해 스스로를 꾸몄던(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던) 유한계급층의 습관이 업그레이드되고 민주화됨에 따라, 요즘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런 활동을 권유받는다. 그리하여 아주 새로운 현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몸이 일의 한 형식이 된 것이다. 즉, 몸이 생산의 수단에서 생산 그 자체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들로 인한 부작용이 심리치료사, 심리학자, 카운슬러, 정신분석가, 의사 들의 상담실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신체적 불안정성’과 ‘신체 수치심’이라고 이름 붙인 사례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추세다. 몸을 이해하는 새로운 설명과 이론의 필요성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음경, 유방, 엉덩이, 배의 크기와 모양을 바꾸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든, 환각지(幻覺肢, 수술이나 사고로 갑자기 손발이 절단되었을 경우, 없어진 손발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일—옮긴이)를 지닌 남성의 경험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든, 심각한 심신의 증상들을 해독하는 데 있어서든, 거식증?폭식증?신체이형장애(실제로는 정상적인 외모인데도 자기가 흉하거나 장애가 있다고 느끼는 심리현상—옮긴이)를 다루는 데 있어서든, 기존의 데까르뜨나 프로이트적 신체관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과 몸의 관계는 변하고 있다. 때문에 마음이 몸을 장악한다는 전통적인 정신분석 이론의 견해로는 한계가 있다. 요즘 같은 신체 불안정성의 시대에 점점 더 확연해지는 사실이 있다면, 자연스러운 몸이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몸들을 철저히 재고해야 한다. 그것은 시급한 과제다.
물론 전세계의 다채로운 몸짓언어들과 몸을 치장하는 풍습들을 둘러보노라면, 몸은 언제나 특정 시대, 지리, 성, 종교, 문화를 반영하는 수단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목을 늘이고, 얼굴을 장식하고, 머리를 천으로 가리고, 발목을 드러내고, 정장을 입고, 머리를 염색하고, 팔에 문신을 새기고, 소녀의 발을 묶어 전족을 만들고, 금니를 끼우고, 정수리를 가리고, 할례를 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손톱을 칠하는 것은 모두 몸에 표지를 새김으로써 그 개인이 특정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직접 드러내는 기호다. 몸은 복장이나 태도를 통해 인식되고, 복장이나 태도는 그 사람의 출신집단 혹은 그 사람이 소속되기를 바라거나 동일시하는 집단에 따라 달라진다. 신체적 암호들과 행위들이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설령 그런 관행들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우리가 당연시하는 몸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순수한 몸이 아니고, 특정 문화의 사소한 관행들이 무수히 많이 축적됨으로써 각인되고 형성된 몸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몸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그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사회적?문화적 지시에 의해 형성된 몸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몸에 대한 현재의 문화적 담론을 볼 때 우리는 신체 불안정화의 시대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고, 우리의 몸은 뭔가 새로운 광란의 분위기에 둘러싸였다는 것이다. 사회적 힘들이 이끌어낸 그 분위기를 우리는 가족을 통해 흡수하고 전달한다. 우리가 최초로 신체적 감각을 습득하는 공간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의 신체적 관행을 낯설게 경험한다는 뜻은 아니다. 운동을 하거나 머리를 다듬거나 옷을 고를 때,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한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단장을 한다. 신체적 관행들은 무슨 교리문답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침이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은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아기와 부모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달된다. 그것은 부모 자식 관계의 핵심내용이다. 부모나 유모, 조부모가 아기를 안고, 기르고, 말을 걸고, 쓰다듬고, 먹이고, 관계 맺는 방식은 그들이 과거에 흡수했던 특정 문화적 관행들의 재현이고, 그것이 이제 아이의 신체적 경험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상황이 늘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거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소년들은 전사로 키워지면서 그에 필요한 육체적?감정적 속성들을 발달시켰고, 소녀들은 다리를 오므리고서 조용히, 예쁘게 앉아 얌전하게 행동하도록 키워졌다. 아이들의 몸은 그에 따라 적절하게 표현을 했고,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60년대 영국의 남학생은 그의 자세와 옷차림과 그의 몸이 차지한 육체적 장을 통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고, 독일 남학생이나 중국 남학생과는 쉽게 구별되었을 것이다. 소년이 몸으로 체현한 것이 곧 그의 자의식을 구성한다. 몸은 영아기에 처음 만들어지고, 그가 속한 가족 특유의 사회적?개별적 관습에 따라 형성되어나간다. 그러면서 그가 앞으로 살게 될 삶에 적합한 종류의 몸을 반영하게 된다.
물론, 몸들도 가끔 실수를 한다. 의학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어쩐 일인지 몸들이 주어진 목표대로 행동하기를 거부할 때가 있다. 적절한 작동을 멈춰버리는 것이다. 가령 팔다리가 마비되는 경우도 있고, 여성이 수태는커녕 성교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부처럼 배가 부풀어오르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성은 하이힐에 성적으로 집착하게 되어, 하이힐을 눈으로 보거나 만져야만 사정할 수 있었다. 그런 현상들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이 바로 19세기 말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였다. 그는 마음과 몸의 관계에 매료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마음의 작동과 관계를 맺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신체적 구성이나 유전 면에서 이렇다 할 의학적 근거가 없는 육체적 증상들이 왜 나타나는지 그 기원을 추적해보았다. 프로이트는 결국 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을 구성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그가 자신의 무의식적 갈망이나 갈등에 비추어 그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과 관계있다고 결론 내렸다. 프로이트는 마음이 몸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연구를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연구는 마음과 몸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프로이트의 통찰은 100년 넘게 우리를 인도해왔고, 그럴 만했다. 그것은 정신분석가들에게 유용한 시각과 도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의료계 전반에 침투했다. 그래서 요즘은 스트레스가 면역계, 내분비계, 소화계, 나아가 몸에서 가장 큰 기관인 피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습진이 심리적 고통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가려움과 발진의 원인이 화학적 자극물질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신체의 다양한 기관들이 감정이나 개인적 사연과도 관계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들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섹슈얼리티란 개념은 잘못이라는 사실이다. 성적 욕망은 갈등과 갈망, 환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몸 그 자체가 프로이트시대의 섹슈얼리티만큼이나 복잡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내 주장의 핵심이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몸도 부모나 다른 보호자와의 최초의 접촉을 통해 올바로 형성되거나 잘못 형성된다. 그 보호자들의 몸에도 우리 문화의 영향력과 명제들이 담겨 있다. 몸을 드러내고 관리하는 방식에 대한 문화적 지령들이 그들의 몸에도 갖춰져 있다. 어른들이 의식하는 자기 몸의 결핍과 장점, 신체적 특징에 대한 기대나 두려움은 아이를 대하는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고, 아이의 신체적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신체적 불안정성을 낳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상담실에서 똑똑히 목격한다. 내가 볼 때 최근의 우려할 만한 경향은, 성인환자의 신체경험에 그 부모의 괴로운 몸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는 점이다. 불안의 체현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들어가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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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수지 오바크 Susie Orbach
194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0대에 임신을 해서 퇴학당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30세에 런던 여성치료센터를 열었고, 이후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하면서 페미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이자, 10년 동안 런던경제대학에서 방문교수로 강의했다. 오바크는 고(故) 다이애너 왕세자비의 폭식증을 치료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영국에서는 ‘프로이트 이래 가장 유명한 정신분석가’로 평가받는다. 도브(Dove)가 주관한 ‘리얼 뷰티’ 캠페인의 공동 발의자이자 자문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 『비만은 페미니즘의 주제다』(Fat is a Feminist Issue) 『단식투쟁』(Hunger Strike) 『섹스라는 불가능성』(The Impossible of Sex) 『먹는 것에 관하여』(On Eating)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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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명남
학부에서 화학을, 대학원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전업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버자이너 문화사』『시크릿 하우스』『지상 최대의 쇼』『자연자본주의』『우리는 언제가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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