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지 못한 지 며칠째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 일이나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 않느냐고. 단식광대가 먹을 게 없어서 굶은 건 아니다. 그에게는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나, 서른두 살의 무명작가. 아직 책을 한 권도 내지 않았으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 지망생.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글을 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나의 일은 그저 쓰고, 쓰고, 또 쓰는 일일 뿐.
춥다. 가스와 전기가 끊겨 온기라곤 없는 방에서 내가 기다리는 것은, 두 달 전에 공모한 신인문학상의 당선 통지서다.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달력에 붉은 사인펜으로 쳐놓은 동그라미는 오늘이 발표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전화나 인터넷이 불통이면, 우체부가 전보를 가지고 오겠지. 다섯 번째로 완성한 이번 장편소설은 꼭 당선되어야 한다. 상금이 자그마치 5,000만 원이다. 자꾸 주문을 건다. 이번으로 무명작가 노릇은 끝이야, 무명작가와는 결별이야, 5,000만 원은 내 것이 될 거야. 우체부는 내 방 문을 두드리는 순간, 무명작가와는 전혀 다른 것을 만나게 될 거야.
내가 써 보낸 소설을 복기하듯 검토해 본다. 언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우선, 나는 무엇을 썼던가? 단순하거나 그저 잊어버려도 되는 평범한 것을 쓰지나 않았는가?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다. 어쩌면 너무 지나친 게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나는 『모비딕』 같은 소설을 쓰고자 했다. 독자들을 내가 만든 막막하고 캄캄한 바다에 데려다 놓고, 그들로 하여금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고래를 찾아 헤매도록 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패스. 아니, 잠깐. 스티븐 킹이 가장 좋아했던 소설 가운데 하나인 『모비딕』은, 멜빌의 생전에 고작 12부밖에 못 팔지 않았는가.
잊어버리자.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번 신인문학상의 예심과 본심 심사위원은 모두 12명이다. 그러니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자. 내 운명을 결정할 12사도들에게 잠시 기도(저 좀 살려 주세요). 내가 평범한 것을 쓰지 않고, ‘쇼킹’한 것을 썼다는 것을 믿자. 작가가 자기 이름을 처음 알릴 때는, 누구나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들고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 문제는 만족되었으니, 소설의 서두가 어땠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중국의 병법가인 손자가 말했다지. 적들이 미처 준비를 마치지 못한 때를 노리고, 예상할 수 없는 길로 진군하라고. 사람들은 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첫 줄, 첫 문단에서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내 책은 죽은 거나 같다.
나는 날씨나 꿈 이야기로 소설을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행복한 나라에 사는 행복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묘사하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시시한 일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다음 ‘나 임신했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여주인공에게 담배 한 개비도 채 태우지 못할 정도의 틈만 주고 난 다음, 곧바로 ‘나 임신했어’라고 말하는 게 독자의 눈을 잡아채는 요령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요컨대 이번에 낸 소설에서도 내 작품의 서두는 독자들과 등장인물이 단 한 문단 만에 정서적 연결고리로 묶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첫 줄이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을 곤란스러운 처지에 빠트린 것이다. 내 주인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납치당하자마자 관 속에 밀봉되고 트럭의 짐칸에 던져진 채, 자갈이 튀어 오르는 시골길을 몇 시간째 달린다. 독자란 고난 받는 주인공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는가.
내가 쓴 소설의 모든 것을 검토하면 할수록, 나는 희망찬 앞날을 확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 주인공은 사랑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 주었지, 결코 ‘사랑합니다’ 같은 뻔한 대사를 읊지 않았다. 그리고 독자들이 질문을 품을 만한 의문 사항과 힌트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초고를 쓸 때부터, 주인공의 외부와 내부를 비교하는 표를 만든 다음, 균형 있고 신뢰할 만한 주인공을 만들려고 했다. 외부가 ‘행위/동작/목표/성취’와 같이 가시적인 것이라면, 주인공의 내부는 ‘반응/감정/성장/~되다’와 같은 자아를 드러낸다. 주인공이 외부/내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의 양면성이면서, 행동(플롯)과 인물(성격)이라는 이야기의 두 가지 층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나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외부/내부를 철저하게 ‘크로스 체크’ 했다. 그게 안 되는 것은, 나 자신 뿐.
이번 글은 진짜 빠르게 썼다. 1,200매나 되는 원고를 딱 두 달 만에 썼으니 신들린 듯 쓴 거다. 물론 헤밍웨이나 윌리엄 포크너만큼은 빠르지는 못했다. 그 사람들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같은 장편 소설을 단 6주 만에 썼다. 천재가 아니고 괴물들이다. 그래. 작가들은 집중해서 글을 쓸 때, 천재가 아니라 다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빠른 속도로, 집중적으로 몰두할 때만 뭔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있다면, 그게 바로 글쓰기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든 게 준비되지 않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내게, 어떤 선생이 가르쳐주었다.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 칸을 비워두고 나중에 써넣으라고. 그러면서 700여 권이 넘는 소설을 썼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예를 들려주었다 만약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시모프는 “더 빨리 써야죠”라고 답했단다.
두 달 만에 소설을 다 쓰고 나서, 초고를 쓴 기간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원고를 다듬었다. 빠른 초고 쓰기와 그보다 더 긴 세밀한 수정. 나는 폭발물 제거반이라도 된 듯 초고의 약점을 찾아내고, 애초의 대전제와 인물 성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소설이 다 뭐겠어? 소설은 장면이라는 개개의 벽돌로 구성되는 또 한 채의 집이다. 그러니 초고를 쓸 때에 그랬던 것처럼 퇴고를 할 때도 ‘이 장면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라는 질문을 놓쳐서는 안 되지. 그러면서 초고에서는 불완전했던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부족했던 감정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눈부시게 살아나는 나의 분신들! 나는 창조를 하고 있었다. 자꾸만 들여다보고 고칠수록 문장은 반듯해지고, 묘사는 정확해졌으며,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간략하면서도 핵심만을 드러냈다.
가스도 전기도 끊긴 방에서, 밥을 먹지 못한 지가 며칠 째인가. 나는 두 달 전에 공모한 신인문학상의 당선 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다. 상금 5,000만 원만 생기면, 밀린 세금을 내고 쌀과 김치를 사야지. 그런데 우체부는 오지 않는다. 오른손가락 다섯 개를 하나씩 꼽았다가 펴면서 내 소설을 검토하는 중간에, 두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채웠다.
하나. 나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래. 나는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소설 작법 책들을 샅샅이 찾아 읽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것은 외우기까지 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나더러 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와서 소설을 가르치라면 당연히 가르치고도 남지. 둘. 차고 넘치게 배우고도 이렇게 불안한 것은 왜일까? 원인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나의 불안은 다름 아닌, 내가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소설 작법 책을 다 읽어 치웠다는 것. 그리고 나처럼 언 방에 웅크리고 있을 다른 무명작가들도 내가 읽은 소설 작법을 다 읽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깨우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말하지 않던가. 아무리 똑같은 방법으로 글을 써서 누군가처럼 대박을 터뜨리려고 해도, 그 방법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그렇다면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두 알고 있는 것에 부족한 2퍼센트를 더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창조일까? 영감일까? 혹은 운일까? 아니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파우스트의 거래’처럼 악마에게 내 혼을 팔기까지 해야만 되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그저 쓰고, 쓰고, 또 쓰는 일이 나를 작가로 완성시켜 주는 걸까? 그리하여 다시, 나의 양식은 두려움과 불안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글쓰기를 목표로 잡고 우리는 또 냅킨 위에라도 끼적거려야 하는 것일까
누가 방문을 두드린다. 301호 아주머니일까? 나는 어제 저녁 301호 문에 메모지를 붙여 놓았다. 하지만 301호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은데다가, 그녀는 항상 내 이름부터 먼저 불렀다. 그러면 우체부일까? 오토바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방 문 앞에 와 계신이, 누구신가?
사족•이 글은, 제임스 스콧 벨의 『작가가 작가에게』에 붙인 발문이다. 이 발문은 소설 작법 서적에 붙인 발문이면서, ‘이런 책을 읽어봤자, 작가가 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글을 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편집자 입장에서는 싣기에 난처한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발문의 임무는 출간의 전후사정을 밝히고,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지은이가 강조했던 사항들이 상당부분 요약되어 있는 이 발문은, 두 번째 임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역설적으로 밝혀 보이려고 했던 것은, 소설 작법 서적들의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다. 하므로 이런 책은, 아무거나 한 권만 보면 족하다. 바로 이것이 작가 지망생들에게 『작가가 작가에게』를 권하는 가장 큰 이유다.
마지막 문단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301호 아주머니’는 나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와 상관되고, 첫 문단의 ‘단식광대’는 당연히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가리킨다.
(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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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장정일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시를 발표한 이래로 여러 장르의 글을 써왔다.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 희곡집 『고르비 전당포』『긴 여행』, 장편소설 『구월의 이틀』『중국에서 온 편지』『아담이 눈뜰 때』 등이 있다. 그 외에 장정일의 삼국지(전10권), 일곱 권의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그리고 에세이집 『공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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