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 모더니티로서의 내셔널 아이덴티티
3. ‘소세키’라는 문제
메이지의 청년들이 『스케치북』을 영어로 읽으면서 서양 문체를 내면화하고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내용의 ‘문학’을 꿈꾸었다는 것은, ‘일본’ ‘근대’ ‘문학’이 결코 일본 ‘고유’의 것일 수 없으며 따라서 ‘순수’한 것일 수도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문학’의 침투 현상이 일어나던 시기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내셔널 아이덴티티 속에서 발견하려 했고 ‘서양’과는 다른 ‘고유’한 것을 ‘일본’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 고심한 작가가 있었다. 다름 아닌 나쓰메 소세키이다.
소세키는 ‘문학’〓문화의 특수성을 발휘하는 것이 ‘일본’의 힘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세키의 저 유명한 ‘자기본위’란 바로 그런 것이었고, 소세키는 ‘민족’으로서의 ‘자기’가 희박해지는 것을 특히 두려워한 작가였다. 말하자면 오늘날 여전히 볼 수 있는 내셔널리즘과 전통 만들기의 메이지 판이기도 했다.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는 ‘문명화’로 대표되는 기존의 ‘근대’ 개념 대신 그와 같은 ‘접촉’ 개념으로 ‘근대’를 설명하고 있는데, 소세키는 그런 ‘근대’를 가장 잘 보여준 작가였다.
니시다니 오사무(西谷修)는 “근대일본의 공식 문학사에는, 근대화라는 프로세스 속에서 눈뜬 개인이 사회와의 갈등을 통해 자기를 확립해나간다는 시나리오가 항상 존재하고, 실제로 그 드라마에 참여한 작가만이 근대문학의 정통 작가인 것처럼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근대적 주체로 살면서, 그 의식을 스스로 책임지는” 이가 “서양 체험을 거쳐 작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소세키의 경우는 ‘사회와의 갈등’이 아닌 ‘서양과의 갈등’을 통하여 ‘자기를 확립’한 작가였고, 그 같은 의미에서 지극히 ‘근대적인 주체’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그러한 사실이 주목받은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소세키의 ‘자기본위’ 자세는 그저 높이 평가되면서 그의 작품은 이른 시기부터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각종 교과서 문학 교재의 중심”이 되었다. 말하자면 소세키는 ‘교과서’라는, 집단 기억을 형성하는 매체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의 ‘기억’의 ‘중심’을 만들어간 작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늘 20세기 일본의 정신적인 ‘중심’에 존재해온 작가였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소세키를, 문명화를 향해 맹목적으로 치달았던 ‘근대일본’을 비판하고, ‘자기본위’라는 말로 ‘서양’에 대해 의연한 자세를 보이면서도 일본의 제국주의나 군국주의를 비판했고 나아가 천황에 대해서도 거리를 둘 수 있었던 반체제주의자, 진보적인 문학자로 간주하는 움직임이 강해진다. 그 결과, 현재는 소세키를 비판하는 스가 히데미(?秀美)가 “국민문학으로서의 소세키 문학은 당분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 탄식”할 만큼 진보적인 소세키 상은 견고해졌다.
예컨대, ‘소세키’ 독해를 에토 준(江藤淳) 식의 ‘윤리적’ 읽기에서 탈피시키면서, 소세키 독법에 신선한 자극을 가해온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는, 소세키에 대한 비판에 대해 “모든 소설 담론에서 똑같은 태도가 관철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지적당한 소세키 텍스트의 문제점을 (그것은) “모순을 내포한 소세키의 담론”으로 간주하고, “소세키의 담론에 내재된 소세키 비판”을 읽어내려 한다. 이 같은 상황은, 그 이전의 ‘윤리적’인 해석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일본에서도 여전히 ‘소세키’라는 존재가 맡아온 ‘기억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쇠퇴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근현대일본에서 ‘소세키’가 그와 같은 존재로서 기능해왔다면,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소세키’ 텍스트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해서,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하는 근현대 ‘일본’의 ‘문학’ 텍스트를 대상으로,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과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 문제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 시도는 결과적으로 소세키 비판이 되겠지만, 이 책의 관심은 소세키 비판 자체보다도 오히려 동시대가 필요로 했던 ‘소세키’ 독법이 후대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는 데 있다. 또한 여전히 강력한 민족주의적 사고를 재검토하는 데 있다.
제1장부터 제3장까지는, 소세키가 ‘런던’ 유학 시절에 남긴 일기·메모, 이 시기의 체험과 사상이 남긴 훗날의 강연 「나의 개인주의私の個人主義」와 「현대일본의 개화現代日本の開花」를 대상으로, 소세키가 ‘서양’이라는 타자를 만나 경계의식을 품고, ‘일본인’이라는 주체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소세키는 이제까지 이해되던 식의 문명비판자가 아니라, 오히려 ‘발전’을 지향하는 발전주의자였고, 소세키의 작품이 강자주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밝혔다. 소세키의 ‘개인주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구조적으로는 국가주의적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문화’ 발전에 대한 욕망이 ‘문명’ 추구에 대한 욕망을 은폐해가는 양상과 ‘개인’적인 취향을 ‘일본’ ‘국민’의 취향으로 인식해가는 과정을 통해,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관리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남성 엘리트였음을 지적했다.
제4장에서는 『만주·한국 이곳저곳滿韓ところどころ』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향한 소세키의 시선을 분석하고, 위생사상에 기댄 소세키의 제국주의적 감성에 대해 지적했다. 그와 같은 ‘문명주의’뿐 아니라, 중국이나 조선에서의 ‘남성’의 활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것이 다름 아닌 (국가를 위한) ‘공적인 일’로 가치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혔다.
제5장 이하부터는, 소설 텍스트를 대상으로, 소설 이외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사상과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했다. 『풀베개草枕』와 『도련님坊っちゃん』에서 도회지의 엘리트는 주변부를 ‘시골’이라는 지시 대상으로서 차이화시켰고, 그때 동원된 것이 ‘국가’의 시각이었다. ‘시골’은 ‘옛날’〓전통을 남아 있는 ‘태고’의 장소로서, ‘근대’ ‘문명’의 장소인 ‘서양’에 대항할 수 있는 ‘문화’의 장소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국가를 지향하는 한, ‘시골’은 배제되어야 하는 곳이었고, 그와 같은 모순을 은폐시킨 것이 내셔널 아이덴티티 개념이었다. 또한 ‘문명인’으로서의 ‘남성’들이, ‘문화’의 관리자가 되어 ‘전통’을 ‘시골’이나 ‘여성’의 것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그후それから』『문門』을 둘러싼 고찰에서는, 공동체의 ‘규범’에 대한 도전으로서 개인주의가 시도되면서도, 동시적으로 그와 같은 일탈에 대한 단죄도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 배경에 이성애주의에 근거한 근대국민국가의 질서사상이 존재했음을 밝혔다. 이후에 집필된 『행인行人』의 세계는 뿌리 깊은 여성 혐오를 공유하는 남성공동체의 세계이며, ‘자기’를 잊고 절대적 ‘초월적 자아’를 완성하는 일을 지향하는 정신주의가, 필연적으로 ‘죽음’의 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지적했다. 소세키 텍스트의 남성들은 ‘지(知)’의 세계를 획득하는 것이 ‘강한’ ‘남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세계는 ‘개인(個)’ ‘자기’의 포기를 재촉하는 것이었으며, ‘죽음’을 칭송하는 것으로, 중심(국가)에 대해 종속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こころ』론에서는 이른바 ‘메이지의 정신’이 ‘현대’를 비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과거’(전통)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그와 같은 ‘정신’을 위한 순사(국가를 위한 죽음)가, 신체적 아버지(개인·혈연)가 아니라 정신적 아버지를 우선시하는 전도의 인식론적 계기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한 전도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공(公)’적인 영역의 일로 평가받으며 ‘근대’의 이념이 되어갔다.
소세키에 이어 모리 오가이의 『무희舞姬』론을 수록한 것은 이 작품이 소세키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사랑’〓‘사적 공간’의 감정을 배제하고 ‘일’이라는 ‘공적 공간’을 우선시하면서 ‘국가의 사람’이 되어가는 남성들의 양상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서양 여자’를 버리는 형태로 행해지는 주인공의 일본 귀국은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된 ‘일’〓‘공(公)’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사랑’의 영역에 서 있는 여성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것은, 남성들이 국경을 넘어서 의식 저변에서 공모한 결과였다. 메이지 문학이란, 이제까지 ‘근대적 자아’(개인의 영역)를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왔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구조적으로 국가중심적이고, 내셔널한 ‘근대적 자아’를 창출한 것이었다.
제9장에서는 식민지 말기 한국문학과 『들어라, 해신의 소리きけ、わだつみのこえ』의 분석을 통해, 여성을 배제한 ‘국민되기’의 욕망을 종주국뿐 아니라 식민지 국가의 남성들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국가〓천황을 위한 죽음(국민되기의 완성)이 남성들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가에 대립하는 것으로 적대시된 ‘개인주의’나 ‘효행주의’가 ‘서양’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낡은 전통’으로 치부되어 배제되는 모순과 혼란이 있었음을 밝혔다. 이는 소세키뿐 아니라 대부분의 근대국민국가가 자신의 시스템 유지를 위해 문화주의와 문명주의를 은밀한 형태로 구분해 사용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근대국가 언설’이 ‘국민’들에게 깊이 내면화되면서, ‘죽음’에 이르는 사상을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제10장에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동정적 담론들이, 실은 제국주의를 유지시키는 담론이었음을 밝혔다. 야나기는 ‘조선’에 대해 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오키나와’와 ‘아이누’에 대해서도 반복했는데 이는 ‘일본’이라는 주체를 구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른바 ‘문화’ 담론들은 저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형태로 그 정치성이 은폐되는데, 야나기의 경우 교육받지 못한 계급을 ‘특수’화하여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포섭〓배제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소세키 텍스트와의 일치성을 볼 수 있다, 그런 야나기에 대해 현대한국은 반발했지만 그 반발이 만들어낸 주체창출 역시 성의 계급화를 수반한 것이었다.
종장에서는 그러한 현대일본의 소세키 평가를 굳건히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보수 평론가 에토 준의 소세키 평가 분석을 통해 에토 준 이후의 ‘진보적인 소세키’라는 평가보다는 오히려 에토의 평가가 소세키의 본질을 보다 정확히 드러낸 것이었으며, 그러한 평가가 깊숙이 젠더화된 내셔널 아이덴티티 창출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를 밝혔다.
이 책에는 수록하지 않았지만 재일교포 김학영은 그러한 ‘근대’의 억압에 의해 자살에 이른 작가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조차, 깊숙한 곳에서는 근대적 강자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둘러싼 국가의 담론이 얼마나 가슴속 깊이 현대인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피부색/문화라는 시니피앙을, 인종유형, 피의 분석, 인종적·문화적인 지배 혹은 퇴화 이데올로기라는 시니피에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차이와 순환의 가능성을 인정했을 때”라고 한다면, 이 책은 ‘젠더’라는 팩터를 추가해 시도한, 또다른 ‘해방’의 모색이기도 하다.
(서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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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박유하
게이오 대학교 문학부 국문학과(일본문학) 졸업 후 와세다 대학교 문학연구과에서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고 「일본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일어 저서로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소세키?문학?근대』『좌담회 쇼와문화사 5』(공저) 『문학의 어둠?근대의 침묵』(공저) 『동아시아 역사인식논쟁의 메타히스토리』(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인생의 친척』『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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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석희
김사량 연구로 오사카외국어대학교에서 200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을 중심으로 식민지시대를 연구해왔으며, 최근에는 권력과 지배의 구조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의 번역은 연구자로서의 옮긴이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번역서로는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분신』 등이 있으며, 현재 인하대 BK21 동아시아한국학사업단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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