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에 앞서
• 역자 서문
지금까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사상은 마치 그 시대가 고대와 중세라는 거대한 악장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짧은 간주곡과도 같이 대수롭지 않게 소개되어왔는지도 모른다. 과연 학문(이론) 수립과 그 체계의 탁월한 구축으로 정신사에 여전히 그 위용을 과시하는 고대의 입장과 이성에 더하여 신앙이란 독특한 관점을 부각·발전시킨 중세의 입장에 비해 헬레니즘 시대는 그 평범한 소재와 관찰태도로 인해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는 비록 고대와 중세에 비해 많은 이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할지라도, 그런 흥미로운 특징 이전에 아주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체험’을 바탕으로 절박하게 고뇌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러한 고뇌 섞인 노력은 그렇듯 소박한―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만큼, 헬레니즘 시대를 단순히 ‘과도기적’이라는 말로 지나쳐버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예컨대 헬레니즘 시대의 소박한 미시적-실천적(윤리적) 관점이 곧이어 다가올 중세로 하여금 고대의 거시적-철학적인 원칙과 체계를 재고하도록 이끌었다는 추론을 말하기에 앞서, 헬레니즘 시대가 고대의 풍부한 이론적인 지식을 실제적인 ‘삶’에 구현코자 노심초사했던 점에서 여전히 ‘이론과 실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무언가 되새기게끔 하는 유익한 교훈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조정함으로써 발견(창조)할 수 있다”(G.B. Vico, La scienza nuova, 349)고 볼 때, 거기에는 ‘우연’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 번역 소개하는 책은 바로 이와 같은 시각에서 본격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은 Die Philosophie der Antike 3: Stoa, Epikureismus und Skepsis란 제명을 달고 『세계철학사』(볼프강 뢰트Wolfgang Röd가 편집을 주관하는 연구총서) 제3권으로 1985년 독일 뮌헨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저자 호센펠더(Malte Hossenfelder)는 가장 먼저 우리의 정신사에서 ‘헬레니즘 시대’를 최대한 명료하게 규정하고(여는 말의 「헬레니즘의 시대구분」 참조), 그다음 “실천적 혹은 윤리적인 관점”을 헬레니즘 시대의 고유한 관심사로 제시하고는, 그 실천적인 관점에 근거하여 당시 학파들의 사상이 각각의 착안점을 따라 발전되었음을 비교·설명한다(여는 말의 「실천이성의 우위성」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그 세 학파들의 배치」 참조). 특히 저자가 어떤 과정을 따라 자신의 연구를 전개하는지 또는 어떤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맺는 말」에 재차 요약 소개하고 있기에 이 뒷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을 듯하다.
저자 호센펠더에 따르면, 헬레니즘 시대에 속한 사상가들은 “비록 서로 극단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따라 저마다의 견해를 해명코자 했지만, 실상 하나의 공통된 사유형식 및 주제를 좇고 있었으니”, 이것은 그들 모두 한결같이 실천적인 관심사로서 “고전적인 행복이념”과 헬레니즘 시대에 “새롭게 당면한 개인적인 처지”가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개인적인 목적설정과 관련하여 인간이 손수 처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가치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을 이 시대의 윤리적 원칙으로 수용하고, ‘개별적인 행복실현과 성취’에 대한 공통적인 물음을 과연 각 학파별로 어떻게 해결하고자 애썼는지를 추적한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시대에 속한 이들의 사상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이상적인 ‘행복’ 이념을 구현하려고 했지만, 현실적인 한계상황 앞에서 결국 인간의 순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이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바라본다. 따라서 “이성적 통찰”을 통해서 행복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스토아학파의 경우나 ‘쾌락’ 혹은 ‘불쾌감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느낌”을 강조한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 나아가 극단적으로 행복성취에 대한 미련을 아예 떨쳐버린 퓌론학파의 경우 모두 다 인간이 스스로 취해야 할 근본적인 태도는 결국 ‘태연자약’(泰然自若, Gelassenheit)에 있다고 풀이한다.
이 태연자약은 저자가 ‘비서양적’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과연 서양으로서는 이색적인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그리스 사상에 자리하는 견유학파의 입장 역시 그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엿보게 된다. 저자는 이 태연자약의 자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물러나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이런 태도는 외적으로 ‘체념’하는 모습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마치 실망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태도가 아니며, 행복을 세상 저편으로 옮겨놓으려는 태도도 아니요, 혹은 문명의 발전된 생활양식에 진저리쳐서 기피하려는 태도 또한 아니라, 마치 세상과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는” 태도로서 헬레니즘의 시대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고 저자는 내다본다. 다시 말해 헬레니즘 시대에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세상에서의 이탈”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고전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서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저자의 입장을 모두 수용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런 글을 대하며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그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게끔 주저 없이 원천자료들을 제시하고(ad fontes), 동시에 그것들을 단순히 나열하고 종합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난해한 이론과 사상의 실체를 세밀히 분석하고 비교함으로써 좀더 명백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는 노력일 것이다. 나아가 그 모범적인 사례가 우리의 연구태도에서도 재현될 수 있도록 기억해야 한다. 옮긴이는 독자가 그러한 노력과 모범적인 사례를 이 책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1년 3월에 봄내에서
옮긴이 조규홍
헬레니즘의 시대구분
역사학자 드로이센(Johann Gustav Droysen)이 처음 지적한 이래로 이른바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 331년까지 지중해 연안국을 제패하여 323년까지 통일대국을 일으킨 왕) 이후의 시대를 ‘헬레니즘 시대’라 일컫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를 드로이센의 [정치적] 관점을 넘어 그리스의 고대 문화적 전통의 정신적 변혁기라고도 이해한다. 물론 그리스의 고대 문화적 전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중해 연안국 및 소아시아의 점령과 무관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시대를 정확하게 말할 경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해인 기원전 323년으로부터 대왕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디아도케(Diadoche)가 이집트의 남은 한 영역을 마침내 로마 영토에 편입시킨 기원전 30년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같은 패권국가의 정치-문화적인 정책에 따른 형식적 판단기준이란 인간의 정신-내면적인 성숙과정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사상가들에게 어느 한 시대를 구분하는 특성이나 근거로 삼기에 탐탁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달리 정신적 측면에서 헬레니즘 시대를 구분할 경우, 과연 그에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물어볼 만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궁극적인 목적은 정신사에서의 시대구분과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든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실제적인 역사 기술(記述)을 위해 최소한 보장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으리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비록 그 자체로 결코 합당하지도 않고 또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역사 발전이란 꾸준히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단단히 고착된 한 시대가 급변하는 움직임에 편승하듯 갑작스레 벌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통칭하고 다른 시대와 뚜렷하게 구분할 만한 하나의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누구보다도 철학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려는 정신사가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시대를 구분하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술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려는 역사가들에게는 그래도 시대마다 특징적인 예술양식이 관찰되기에, 한 시대를 통틀어 반복되거나 자주 적용될 만한 가시적인 기준점이 마련될 수 있다. 이는 문학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려는 역사가들에게도 해당된다. 또한 자연과학의 역사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어떤 주된 형식을 규정함으로써 시대구분이 규범화되고, 오랜 기간을 거쳐 모든 학자에게 구분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는 이런 형식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양식적(樣式的)인 요소가 철학사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하며, 어떤 한 시대에만 적용될 만한 주된 형식이란 것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한 시대에 적용시키는 주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복잡한 상황을 따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발전된 것들 가운데 임의로 선택되고 의도적으로 유형화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철학사 역시 시대를 따라 구분해왔으니, 어떤 의도적인 종합적 체계를 지속적으로 적용하되, 그때마다 (각 시대마다) 변화하는 관점들을 각별히 주목하여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도 시대구분을 위해 도대체 어떤 기준을 선택했는지 앞서 밝히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철학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최대한 올바른 성과를 거두려면, 결국 한 시대를 관철하는 어떤 일관된 사상을 꾸준히 지목하는 ‘근본 물음’을 통해 [시대를]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토록 다양하고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론들을 두고도 많은 철학자들이 한동안 크게 골몰했던 문젯거리에서만큼은 서로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대체 어떤 물음들을 통하여 [한 시대가]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애썼던가 하는 점에서 연구가들 사이에 일치하는 관점 하나가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 시대에 속한] 학파들이 제각기 추구하는 해답이 논리적일 수는 있으나 결국 학파들 간의 논쟁거리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저마다의 이론이 서로에게 충돌을 일으키는 대립적인 상황에 놓이는 까닭은 그 주제가 알력을 일으킬 만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해결을 위한 시도는 결코 우연하게 벌어지지 않고, 제기된 이론적인 물음에서 출발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제각기 성장하고 발전한다(예컨대 Theodizee, 곧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물음은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이러한 이론의 발전을 그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철학자들이 어떤 동일한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이들이 그 물음을 해결하고자 나름대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해명하려고 애썼으리라는 추정을 넘어 이미 역사적인 관점에서 시대를 구분할 만한 하나의 본질적인 초석이 마련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해도 전혀 빗나간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한 시대를 구분 짓기 위하여 아마도 가장 먼저 진단해야 할 것은, 설령 서로 반목하는 이론들이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추구된다 하더라도 실상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실현코자 하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동일한 문제의식’을 알아내게끔 이끌어주는 단서로서 그 어떤 공통된 “[이론형성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시대를 통틀어 공통된 기본과제, 혹은 좀더 정확히 표현해서, 한 시대의 공통된 기본 관심사를 일별(一瞥)하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통된 기본 관심사와 더불어 정신-철학적인 시대구분만이 아니라, 나아가 예술적인 시대구분에도 적절한 근거를 통일된 관점에서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본다면,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 역시 정신-철학사적인 의도에서 더욱 진지하게 고려된 어떤 통일된 관점이 발견될 것이며, 그래서 철학사에서도 타당성을 지닌 시대적 구분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본 헬레니즘의 시대정신은 따라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퓌론학파가 서로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저마다 특징을 갖는 이론들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규명될 것이다.
과연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이론형성의] 과정’을 따라 관찰되는데, 이는 그들 모두 동일한 기본과제를 붙들고 있음을 웅변한다. 다만 저마다 뚜렷이 차이가 나는 결론 때문에, 그 결론에 이르는 방법 역시 서로 다르게 제시됨으로써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다른 한편 동일한 문젯거리에 대한 이들의 상호 결속관계가 [서로 이질적인 방식에 의해] 쉽사리 간과될 수 있겠는데, 이는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극단적인 논리의 무게로 인해 그것을 분간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극단성은 그래서 차라리 서로 간의 가까운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말해 일찍이 각 학파들이 서로 더 가까운 관계에 놓일수록 더욱 더 치열하게 다툰다는 사실이 오랜 사회학적인 연구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학파의 독자성이나 고유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전문적인 특징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자 정당하게 노력하는데, 실상 그러한 인상이란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점들을 더욱 첨예하게 강조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미 뚜렷한 구별이 자명하게 드러나는 학파들은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헬레니즘 시대의 학파들이 가졌던 ‘공통관심사’를 파악해서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정신사 차원에서 헬레니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시대의 전후 상황을 몇 가지 소개하는 동시에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이 「여는 말」에서 간략하게 밝히고자 한다.
철학사에서 행해지는 시대구분은 어떤 정복자의 죽음이나 통치형태의 해체와 관련된 특별한 시기를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며, 이는 정신사를 연구하는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사의 경우와 비교하여 철학사의 경우는 어떤 새로운 시대가 돌연히 다가오거나 갑자기 종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전환과 발전이 점진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략적인 정보로 만족해야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내용을 싣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철학적인 관점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개벽과 관련하여 그 시기를 언급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이는 이 시대의 학파들이 모두 대략 기원전 300년경 정도의 시기에 발생했고, 그 후로 철학적인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던 것이 뚜렷하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 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이 막을 내리는 상황은 그 출발에 비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따라 시대를 구분하고자 한다면, 헬레니즘 시대를 일컬어 이른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나아가 ‘회의주의 퓌론학파’가 철학적으로 용호상박하는 논쟁기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끝을 기원전 1세기로까지 산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장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는 흔히 정치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또는 문학사적으로 구분된 시대와 일치하며, 이로써 하나의 통일된 용어활용이나 시대구분을 여전히 유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사를 이해할 때 이와 같이 시대구분을 한 것이, 마치 헬레니즘의 정신적 발전이 이러한 시점을 따라 마침내 종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기 위해 나눈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학사 전체 구도에서 한 시대의 본질적인 측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유익한 의미가 있음에도, 그러한 시대구분이 온전하게 타당성을 인정받기까지 새로운 물음이 계속해서 무겁게 던져질 수 있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고대 후기 철학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본다. 곧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1세기), 고대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약 200년간의 전환과 공존시대(기원후 1~2세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新)플라톤주의 시대(기원후 2~3세기)가 그것이다.
위의 세 가지 고대후기 철학사상을 『세계철학사』 시리즈 제3권[이 책]과 제4권[‘고대 후기에서 중세 초기로의 과도기적 철학’이란 제목 아래 준비 중]에 나누어 소개하는데, 그저 시대적으로 세분하여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때마다의 학파들을 중심으로 알아보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 때문에 제3권은 헬레니즘 시대의 학파들(예컨대 스토아, 에피쿠로스 그리고 회의주의학파)에 대한 전체적인 역사를 각 학파별로 마지막 대표자들에 이르기까지 다루고자 한다.
한편 신플라톤주의의 선구자로서 이해되는 학파들, 특히 신(新)피타고라스학파, 중기플라톤주의와 유대, 그리스 철학의 절충적인 학파들은 다음 제4권에서 다루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역자 서문, 여는 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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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말테 호센펠더 Malte Hossenfelder, 1935-
독일 튀빙겐, 함부르크, 기센 대학교에서 철학과 고대 수사학을 공부하여 1964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1973년 철학전공 교수자격논문을 통과했다. 1976년부터 1991년까지 독일 뮌스터의 베스트팔렌 주 빌헬름스-대학교Westfälischen Wilhelms-Uni. in Münster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1991년부터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에 초빙되어 강의를 하다가 2003년 은퇴한 다음 현재까지 고전번역과 철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에피쿠로스』(2006), 『의로움을 실현의지와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2000), 『섹스투스 엠피리쿠스』(1993), 『불확실성과 영혼의 안식』(1964) 등이 있다.
엮은이 소개
볼프강 뢰트 Wolfgang Röd, 1926-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른 직후 입대하여 1944년 전쟁포로가 되었다. 1947년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철학과 역사를 수학하고, 1977년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선험철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경험’에 대한 분석 이론을 발전시키며 칸트와 데카르트, 17세기 철학과 철학사 연구에 집중했다. 주요 저서로는 『경험과 반성』(1991), 『간추린 고대철학사』(1998)가 있다. 전 12권의 『세계철학사』 시리즈 가운데 제3권 『헬레니즘 철학사』 외에도 제1권『고대 철학: 탈레스로부터 데모크리토스』, 제7권『베이컨으로부터 스피노자까지』, 제8권『근대 철학』의 편집과 집필 책임을 맡았다.
역자 소개
조규홍
독일 뮌헨 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밤베르크의 오토-프리드리히-대학교Otto-Friedrich-Uni.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교원대학교, 명지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배재대학교, 대전가톨릭대학교와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시간과 존재에 관심을 갖고 철학에 뛰어든 만큼 하이데거에 매력을 느꼈지만, 플로티노스에게서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 지금도 플로티노스와 그 이후의 영향사(신플라톤주의 사상, 위爲-디오뉘시오스, 쿠사누스, 피치노)에 주목하면서 옛 철학자들의 작품 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플로티노스』『플로티노스의 지혜』가 있고 역서로는 바이어발테스의『플라톤주의와 독일관념론』, 플로티노스의『플로티노스의 ‘하나’와 행복』『엔네아데스』, 피치노의『사랑에 관하여: 플라톤의 ‘향연’ 주해』『플로티노스의 중심개념: 영혼-정신-하나』와 쿠사누스의『다른 것이 아닌 것―존재 및 인식의 원리』를 펴냈다. 윌리엄 잉에의『플로티노스의 신비철학』과 쿠사누스의『박학한 무지 선집』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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