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나는 대략 이렇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 다음 나한테 이 탁월한 작가적 역량과 표현력 및 여타 자질이 없었다면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묘사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묘사할 게 아예 없었으리라는 점에 독자의 주의를 돌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독자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소리일지는 몰라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은 오직 삶의 술수를 꿰뚫어 보는 나의 재능에, 부단한 창작에 대한 나의 타고난 애착에 힘입어 일어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피가 조금만 흘러도 야단법석인 법규의 위반자를 시인에, 배우에 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불쌍한 왼손잡이 녀석이 말하곤 했듯이 철학은 돈 많은 족속의 발명품이다. 타도할지어다.
나는 단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중년의 남자가 볼살을 출렁이며 힘찬 걸음으로 달려가 막차를 따라잡는다. 하지만 머뭇머뭇하다 움직이는 버스에 뛰어오르지 못하고 겸연쩍은 미소만 짓는다. 겁을 내다 결국 무기력하게 뒤처진다. 꼴이 참 우습다. 정말 나는 뛰어오를 수 없는 걸까? 울부짖는다. 속도를 낸다. 내 이야기의 기운찬 버스. 지금 모퉁이를 돌아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갈 것이다. 꽤 거대한 형상이다. 나는 여전히 뛰어간다.
고인이 된 내 아버지는 레발(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옛 독일어 지명) 태생의 독일인이었는데 농학을 공부했다. 어머니 역시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순수 러시아인으로 오래된 공후(公侯) 가문 태생이었다. 그래, 더운 여름날이면 어머니는 연보라색 비단옷을 입고 기운 없는 모습으로 흔들의자에 반쯤 누워서 부채를 부치며 초콜릿을 마셨다. 연자주색 커튼이 풀 내음 머금은 바람에 돛처럼 잔뜩 부풀곤 했다. 전쟁중에 나는 막 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한 상태였는데 독일 국적이었던 관계로 구금되어 모든 것을 내팽개쳐야 했다. 1914년 말부터 1919년 중엽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세어보니 1018권이었다. 독일로 가는 길에 모스크바에 석 달 동안 발이 묶였고 그곳에서 결혼했다. 1920년부터는 베를린에서 산다. 1930년 5월 9일 내 나이는 이미 서른다섯을 넘겼다…
작은 일탈. 어머니에 관한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 그녀는 소부르주아의 딸로, 지저분한 카차베이카(러시아 전통 의복으로 짧고 헐렁한 털 재킷)를 입은 단순하고 천박한 여인이었다. 물론 나는 부채와 관련된 꾸며낸 이야기를 지울 수도 있을 테지만 일부러 남겨둔다. 나의 주된 자질들 중 하나인 영감에 찬 가벼운 허위를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그건 그렇고, 1930년 5월 9일, 바로 그날 나는 일이 있어 프라하에 있었다. 초콜릿 사업이었다. 초콜릿은 좋은 물건이다. 오직 쓴 부류만을 사랑하는 숙녀들이 있다. 오만한 미식가들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어조를 취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가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태연자약할 것. 주지한 바와 같이 초콜릿은… (초콜릿 생산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우리 제품의 포장지에는 연자주색 옷을 입고 부채를 든 부인이 그려져 있다. 체코에 진출하는 방편으로 우리는 파산 지경에 이른 외국 회사를 설득해서 초콜릿 생산 설비를 넘겨받으려고 했다. 이 일로 나도 프라하에 오게 되었다. 5월 9일 아침, 나는 택시를 타고 호텔을 출발했다… 아, 이딴 걸 다 기록하는 건 따분하다. 견딜 수 없이 따분하다. 나는 서둘러 중요한 대목에 다다르고 싶다. 하지만 실로 약간의 사전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가! 요컨대 사무실은 도시 외곽에 있었고,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아마 그는 한 시간쯤 후에 올 거라 들었다…
나는 방금 긴 간극이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후지 산을 닮은 산 위에 떠 있는 연노란색 구름들을 불태우며 길을 가던 태양이 졌다. 무거운 피로감에 잠겨 한동안 나는 앉아 있었다. 소음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여백에 코를 그리기도 하고, 선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내면을 긁는 느낌이, 참을 수 없이 가려운 느낌이 다시 자라났다. 지독한 의지박약. 끔찍한 공허. 나는 등불을 켜고 새 펜촉을 끼우는 데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낡은 펜촉은 갈라지고 구부러져 이제는 맹금의 부리를 닮아 있었다. 아니다. 이건 창작의 고통이 아니다. 이건 전혀 다른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한 시간 후에 올 거라 했다. 할 일도 없는데 좀 거닐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날은 쾌청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부는 바람의 먼 친척뻘인 바람이 좁은 거리를 따라 날아다녔다. 구름이 부단히 태양을 휩쓸었고, 태양은 마술사의 동전처럼 다시 나타나곤 했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던 공원에는 라일락이 한창이었다. 나는 간판들을 보았다. 낯선 의미가 멋대로 웃자라 있긴 했지만, 내겐 익숙한 어근이 숨어 있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새 장갑을 끼고 손을 흔들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주택가가 끝나고 공터가 펼쳐졌는데, 무척이나 매혹적인 자유로운 시골의 대지를 만난 느낌이었다. 백마를 밖으로 끌어내는 중인 병사가 있던 병영을 지나치자, 나는 이미 푹신하고 질척거리는 땅을 따라 걷고 있었다. 민들레들이 바람에 몸을 떨었고, 구멍 난 구두 한 짝이 담장 곁에서 태양의 온기에 나른해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멋지게 생긴 가파른 산이 벽이 되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의 장관은 눈속임이었다. 계단이 난 오솔길이 키 작은 너도밤나무와 딱총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떤 장소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멋대가리 없이 헐벗은 식물들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관목들은 벌거벗은 땅 위에서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다. 종잇조각에 넝마 조각에 쓰레기까지 주위는 온통 오물투성이였다. 산속 깊숙이 난 계단을 벗어나자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양옆의 흙벽에는 뿌리와 주접이 든 썩은 이끼가 낡은 가구의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자 비뚤비뚤한 작은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빨랫줄 위에서 속바지들이 허위의 삶으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옹이투성이인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저 아래 옅은 안개에 덮인 프라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지붕들, 연기 나는 굴뚝들, 병영, 작은 백마.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그만 판잣집들 뒤에서 발견한 한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풍경이 지닌 유일한 아름다움은 저 멀리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가스탱크였다. 거대한 축구공을 닮은 둥근 가스탱크는 푸른 하늘에 감싸여 불그스레했다. 나는 한길을 벗어나 풀이 듬성듬성 난 비탈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음산한 불모의 땅. 내가 벗어난 길에서 트럭이 내는 굉음. 트럭의 반대편에서 연이어 오는 마차와 자전거 탄 사람. 이어 래커 공장의 몹시 흉한 무지갯빛 자동차.
한동안 나는 비탈에 서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계속 걷기 시작했다. 낙타 혹을 닮은 헐벗은 두 언덕 사이에서 흡사 오솔길 같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앉아 쉴 만한 곳을 눈길로 찾았다. 좀 떨어진 곳에 가시덤불이 있었다. 그 근처에 챙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다리를 뻗은 채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그의 누운 자세에는 이상하게 내 주의를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처럼 무릎이 벌어져 있었다. 반쯤 구부러진 팔은 나무 막대기 같았다. 그는 해진 무명 바지와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얼빠진 생각 마.”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자고 있어. 그냥 자는 거야. 뭘 살펴봐. 귀찮게 할 필요 없어.”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가가서 내 멋진 구두코로 그의 얼굴에서 모자를 벗겨냈다. 역겨웠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여, 팡파르! 아니 이게 낫겠다. 곡예를 할 때처럼 숨을 헐떡이며 쪼개져라고 북을 쳐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이게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본 건 미스터리였다. 내가 보는 동안,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야단법석을 떨다가 10층 높이에서 맹렬히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 난 기적을 보고 있었다. 너무도 완벽해서, 원인도 목적도 알 수 없어서, 기적은 내 안에 일종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일단 벌써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고 가려움증을 가라앉혔으니, 자, 이쯤에서 내 이야기에 이렇게 명령하는 게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어! 조용히 되돌아가! 그리고 그날 아침 내 기분이 어땠는지, 계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산책하러 나선 길에 언덕을 기어올라서는,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사이로 저 멀리 둥글둥글하고 불그스레한 가스탱크를 바라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되돌아가서 밝히자. 자! 아직 나는 목적 없이 배회하고 있다. 아직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과연 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다름 아니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받아들여야 할 내용물을 기다리는 투명한 용기같이 나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나의 일, 얼마 전 손에 넣은 자동차, 내가 걷고 있는 곳의 이런저런 특색 등과 관련된 생각의 연무(煙霧). 이 생각들의 실안개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만약 광활한 내 내면의 황무지에서 무언가가 울림을 지니기도 했다면, 그건 단지 나를 유혹하는 어떤 힘의 알 수 없는 느낌일 뿐이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알고 지내던 영리한 한 레트인(라트비아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민족. 발트족)이, 때때로 나를 휘감는 까닭 모를 우수는 내가 정신병동에서 삶을 끝낼 징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의 말은 지나쳤다.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발달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내 정신이 골몰해 세운 저 논리의 집이 지닌 놀라운 명확성과 조화를 철저히 시험했다. 직관의 유희, 창작, 영감, 내 생을 치장해온 고상한 모든 것이, 말하자면 문외한에게는, 심지어 똑똑한 문외한에게도 가벼운 광기의 서곡으로 비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하시라. 내 건강 상태는 완벽하다. 내 몸은 겉도 속도 깨끗하다. 걸음은 가볍다. 술은 마시지 않고 담배는 적당히 피운다. 방탕한 생활도 하지 않는다. 잘 차려입은, 아주 젊어 보이는 건강한 내가 방금 묘사한 곳들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영감은 나를 기만하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던 것을 찾아냈던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적을 보고 있었다. 너무도 완벽해서, 원인도 목적도 알 수 없어서, 기적은 내 안에 어떤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그때 그 순간에 내 이성은 완벽함을 시험하고, 원인을 찾고, 목적을 규명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생의 파문이 얼굴에 일었다. 그로 인해 약간 흐릿해지긴 했지만,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름진 어두운 금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이 인간은 내 또래로 비쩍 말랐고 지저분했다. 한 사흘 면도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핀은 꽂혀 있지 않았지만 핀을 꽂는 작은 구멍 두 개가 나 있는, 부드러운) 겉옷 옷깃 아래쪽 가장자리와 셔츠 위쪽 가장자리 사이로 분홍빛 피부가 언뜻 보였다. 얇은 니트 타이는 헝클어져 있었다. 셔츠 앞부분에 단추라곤 하나도 없었다. 재킷 단춧구멍에 꽂힌 흰제비꽃 몇 송이가 시들어 있었다. 삐져나온 한 송이는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끊어진 부분을 다른 끈으로 묶은 가죽 끈이 달린 서양배 모양의 해진 배낭이 곁에 놓여 있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부랑자를 살펴보았다. 그는 마치 조야하고 어리석은 가면무도회에 가려고 일부러 그렇게 차려입은 듯했다.
“담배 있습니까?” 체코어로 그가 물었다. 예기치 못하게 낮고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가락을 벌려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커다란 가죽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조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의 귀와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았다.
“독일제구먼.” 그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나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다행히도 미소는 이내 사라졌다. (이제 나는 기적과 헤어지기 싫었다.)
“당신 독일 사람이오?” 담배를 손가락으로 돌려 밀도를 높이며 그가 독일어로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 다음 그의 코앞에 라이터를 대고 딸깍거렸다. 그는 심하게 흔들리는 작은 불꽃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감쌌다. 애를 태웠다. 손톱은 검푸르고 네모졌다.
“나도 독일 사람이오.” 연기를 내뿜고는 그가 말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독일인이고, 어머니는 플젠(체코 서부 보헤미아 지방의 도시. 독일어로 필젠) 출신 체코인이지요.”
나는 그가 돌연 놀라서 소리치지 않을까 기대했다. 폭소를 터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미 그때 나는 이 작자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아차렸다.
“음, 푹 잤다.” 얼빠진 만족감에 젖어 그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멋 부리듯 침을 뱉었다.
내가 물었다. “당신 뭐요, 하는 일 없소?”
그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침을 뱉었다. 하층민은 침이 어쩌면 그리 많이 나는지 나는 항상 놀란다.
“나는 내 부츠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지요.” 자기 두 발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신발은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엎드려 눕더니 저 멀리 있는 가스탱크와 초원에서 날아오른 종달새에게 차례로 눈길을 건네며 꿈꾸듯 말을 이었다.
“작년에 작센 주에서 좋은 일을 했었소.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정원사로 일했지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다음에는 제과점에서 일했지요. 일이 끝나면 동료와 함께 매일 국경을 넘었어요. 맥주 한잔 하려고 9베르스타(1베르스타는 약 1.067킬로미터) 거리를 왕복했지요. 맥주는 체코가 더 쌉니다. 한때 바이올린도 켰지요. 그리고 하얀 쥐도 길렀어요.”
우리 이제 측면에서 바라보자. 하지만 얼굴은 들여다보지 말고 대충 훑어보자. 여러분, 얼굴은 들여다보지 말자고요. 얼굴을 봤다간 놀라 자빠질 테니까. 뭐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알게 되었다. 아, 인간의 시력이란 얼마나 나쁘고 불완전한지.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시들시들한 풀 위에 있다. 노란 장갑으로 자기 무릎을 연신 치고 있는 잘 차려입은 신사와 엎드려 누워 생을 한탄하는 얼빠진 부랑자, 심하게 바스락거리는 가시덤불, 달려가는 구름, 말가죽이 떨듯 바람에 움찔하는 5월 한낮, 멀리 도로 쪽에서 들려오는 트럭의 굉음, 하늘의 종달새 소리. 부랑자는 간혹 침을 뱉으며 말을 끊었다 이었다 했다. 이러쿵저러쿵 이러니저러니…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엎드려 누워 다리를 까딱거리곤 했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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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나보코프는 1899년 4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래된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다방면에 걸쳐 최상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17세에 자비로 『시집』을 발간하며 문학에 입문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조국을 등진 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스위스를 전전하며 평생을 집 없는 떠돌이로 살았다. 첫 망명지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며 러시아문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1922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 ‘블라디미르 시린’이란 필명으로 러시아어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마셴카』『킹, 퀸, 잭』『루진의 방어』 등으로 가장 뛰어난 젊은 망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1936년 『절망』을 출간하며 확고한 작가적 명성을 얻는다. 1937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다가 1940년 첫 영어 소설 『세바스찬 나이트의 참 인생』을 들고 미국으로 재차 망명길에 오른다. 코넬 대학과 하버드 대학 등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시린’이 아닌 ‘나보코프’라는 이름으로 미국 작가로서의 삶을 개척한다. 1955년 ‘롤리타 신드롬’을 일으킨 소설 『롤리타』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강의를 접고 문학에 전념한다.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지만 여전히 집 없는 떠돌이였던 그는 1977년 7월 2일 스위스의 작은 휴양도시 몽트뢰에서 생을 마감했다. 러시아문학과 미국문학에서 동시에 고전이 된 작가 나보코프는 러시아어로 쓴 『절망』을 훗날 손수 영어로 옮기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 책은 작가의 문학적 뿌리가 보다 생생히 담긴 러시아어판 『절망』을 완역한 것이다. 나보코프가 쓴 러시아어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망』은 그의 서사와 유희의 마법이 충만하게 펼쳐진 초기 대표작이다. 1931년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단초로 쓴 소설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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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최종술
「알렉산드르 블로크와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기억과 암시의 시학」으로 러시아 학술원 러시아문학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상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파우스트적 세계지각과 반(反)휴머니즘」「황홀경과 낭만주의적 혁명의 구조」「인텔리겐치아와 그리스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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