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 혹은 미지에 준하는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면 달리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마르셀 프루스트
(Y. K. 카라오스만오울루(1887~1974, 터키 소설가)의 번역본에서)
1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이었다. 터키 함대가 우리 길을 가로막았다. 우리 배는 모두 세 척이었고,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그들의 갤리선 대열은 끝이 없었다. 우리 배 안은 순식간에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 터키인과 무어인 들로 구성된 노 젓는 노예들은 함성을 질러 댔고, 우리는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탄 배는 다른 배 두 척과 함께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돌렸지만 다른 배들처럼 속력을 내지 못했다. 포로로 잡힐 경우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한 선장은 노 젓는 노예들을 더 혹독하게 채찍질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 오랫동안, 선장이 그렇게 겁을 먹은 순간 내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져 버렸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지금에 와서는, 선장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버리면서부터 내 인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쓰려 하면서,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터키 함대들의 색깔을 그려 보는 지금 이 순간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맺기에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다른 배 두 척이 터키 함대 사이를 지나 미끄러지듯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선장은 희망을 가졌다. 우리도 온 힘을 다해 노예들을 채찍질하려는 용기를 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게다가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흥분하고 있는 노예들에게는 채찍질도 소용없었다. 열 척이 넘는 터키 함대가 불안한 안개의 벽을 형형색색으로 뚫고 나와 갑자기 우리에게 덮쳐 왔다. 선장은 이번에는 적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이기기 위해 전투를 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물론 내 생각이었지만. 노예들에게 가혹하게 채찍질을 해 댔고, 대포 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지만, 뒤늦게 타오른 전의는 잠시 후 다시 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강렬한 폭음과 불길에 휩싸였고, 즉시 항복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탄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백기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터키 함대를 기다리면서 나는 선실로 내려갔다. 나의 모든 인생을 바꾸어 놓을 적들이 아니라, 손님으로 올 친구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은 궤짝을 열고 무심히 책을 뒤적거렸다. 피렌체에서 많은 돈을 주고 산 책의 책장을 넘기려니 눈물이 났다. 바깥에서는 고함소리와 분주한 발소리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면 내 손에 들려 있는 책과 멀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책 속에 쓰인 것들을 생각하고 싶었다. 마치 책 속에 있는 사고와 문장, 방정식 사이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모든 과거가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구절들을 기도하는 것처럼 중얼중얼 읽으면서 모든 글을 머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들이 오면, 그들 혹은 그들이 내게 가할 고문이 아니라, 즐겁게 외웠던 책의 단어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나의 과거의 색깔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와 약혼녀 그리고 친구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다른 사람이었다. 한때는 나였던, 또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을 때로 꿈속에서 보고 땀에 젖은 채 깨어난다. 빛바랜 색들을, 나중에 몇 년 동안이나 우리가 꾸며 낸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을,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을, 가공할 무기의 환상적인 색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 사람은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천체학, 수학, 물리학 그리고 그림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자만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이미 이룩된 것들은 대부분 섭렵했으며, 그 모든 것에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으며, 자신을 따를 자도 없거니와, 누구보다도 영리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간단히 말하면, 평범한 젊은이였다. 약혼자와 열정, 서로의 계획, 세상 그리고 학문을 토론하고, 그녀가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젊은이가, 나의 과거를 조작할 필요가 있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이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읽을 몇몇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사실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어쩌면 그 인내심 많은 독자들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인생을 보내던 젊은이의 이야기가 어느 날 중단된 부분부터 이어져 다시 계속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터키 선원들이 우리 배에 도달했을 때, 나는 책들을 궤짝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배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모두를 모아놓고 발가벗기고 있었다. 한순간, 그 혼란을 틈타 바다로 뛰어들까 했지만, 그들이 내 뒤에서 화살을 쏴서 사로잡은 다음 바로 죽여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육지가 얼마나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들은 처음에는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쇠사슬에서 풀려난 무슬림 노예들은 즐거운 함성을 질렀고, 어떤 노예들은 채찍질했던 사람들에게 벌써 앙갚음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나를 선실에서 찾아낸 후 안으로 들어와서 내 물건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금을 찾으려고 궤짝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 몇 권과 나의 물건을 모두 가져갔으며, 내가 남은 책 한두 권을 무심히 뒤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잡아 어떤 함장에게 끌고 갔다.
함장은 내게 잘 대해 주었는데, 그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제노바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다. 노 젓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즉시 천문학에 관한 나의 지식에 대해, 그리고 밤에도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함장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게 남겨진 해부학 책을 믿고 의사라고 주장해 보았다. 잠시 후, 그들이 데려온 팔이 부러진 사람을 보고서야 나는 외과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이 화를 내면서 나를 노 젓는 노예들이 있는 쪽으로 보내려 하는데, 나의 책들을 본 함장이 소변과 맥박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했고, 노 젓는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며, 한두 권의 책도 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특혜 때문에 나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노 젓는 노예로 전락한 다른 기독교인들이 나를 혐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밤마다 우리가 함께 창고에 갇히는 틈을 타서 나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터키인들과 금세 관계를 맺어 놓았기 때문에 후환을 두려워했다. 우리의 겁쟁이 선장은 말뚝에 박혀 죽었고, 노예들에게 채찍질하던 사람들은 본보기로 코와 귀를 잘라 뗏목에 실어 바다에 내버렸다. 해부학 지식이 아니라 머리만을 써서 치료해 준 몇몇 터키인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자 모두들 내가 의사라고 믿었다. 나를 시기하며 터키인들에게 내가 의사가 아니라고 고자질했던 사람들조차 밤이면 창고에서 내게 상처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화려한 의식을 거행하며 이스탄불에 입성했다. 어린 파디샤(지배자, 통치자, 이슬람교 국가의 군주를 일컫는 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배의 기둥 꼭대기마다 깃발을 매달았고, 그 깃발 밑에 우리의 깃발과 성모 마리아 그림,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고 장사들을 시켜 밑에서 활을 쏘게 했다. 그때, 대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훗날 내가 슬픔과 지루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육지에서 구경하곤 했던 이 의식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뙤약볕에선 기절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저녁 무렵 카슴파샤(이스탄불 바닷가의 한 지역)에 정박했다. 우리를 파디샤에게 데려가기 위해 쇠사슬로 묶고, 우리 병사들은 우스워 보이도록 갑옷을 거꾸로 입혔다. 선장들과 장교들의 목에는 동그란 족쇄를 채웠다. 우리 배에서 탈취한 나팔과 트럼펫을 놀리듯이 즐겁게 불면서 흥겨워하며 우리를 궁전으로 데려갔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즐겁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구경했다. 파디샤는 우리를 보기도 전에 자기 몫의 노예를 따로 뽑아 나누어 놓았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갈라타(이스탄불의 한 지역)로 이송되어 사득 파샤(‘파샤’는 오스만 제국 당시 고위직 공무원이나 군 지휘관에게 주어지던 칭호. 이 소설에서는 군 지휘관)의 감옥에 수용되었다.
감옥은 끔찍했다. 작고 습한 감방에서 수백 명의 포로가 오물과 함께 썩어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내 새로운 직업을 실험할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실제로 내가 치료하여 회복시킨 사람도 몇 있었다. 등과 다리가 아프다는 보초들에게도 처방을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다시 나를 다른 노예와 구별하게 되었고 햇빛이 들어오는 나은 감방으로 옮겨 주었다. 다른 노예들의 처지를 보며 내 상황에 감사하려고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다른 포로들과 함께 나를 깨우더니 일을 하러 가라고 했다. 내가 의사이며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하자 나를 비웃었다. 파샤가 사는 집의 정원 담장을 높이는 데 일손이 필요하다고 했다. 매일 아침, 우리는 해가 뜨기 전에 사슬에 묶인 채 시외로 나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돌을 모았고, 저녁이 되어 서로 사슬에 묶인 채 다시 감옥으로 돌아올 때면, 이스탄불은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이곳에서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평범한 노예는 아니었다. 이제는 감방에서 썩어 가는 노예들뿐 아니라 내가 의사라는 걸 듣고 찾아오는 다른 이들도 돌보게 되었다. 치료비로 받은 돈은 나를 몰래 바깥으로 내 보내는 노예 담당관이나 간수에게 대부분 주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숨긴 돈은 오스만어를 배우는 데 썼다. 오스만어 선생은 파샤의 잔일을 하는 사람 좋고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내가 터키어를 빨리 배우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내가 곧 무슬림이 될 거라고 했다. 그는 내가 지불하는 수업료를 부끄러워하면서 받았다. 나 자신을 잘 돌봐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먹을 것을 가져와 달라고 그에게 돈을 주곤 했다.
안개 낀 어느 날 밤, 하인이 와서 파샤가 나를 보고자 한다고 전했다. 나는 놀라고 흥분했으며 곧바로 만날 준비를 했다. 내 나라의 수단 좋은 친척이, 어쩌면 아버지가, 아니면 장인이 될 사람이 나를 구해 내려고 몸값을 보낸 거라고 생각했다. 안개 속으로 펼쳐진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걸으면서 문득 내 집에 당도할 것이고, 또한 꿈에서 깨어나듯이 가족들이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며, 즉시 나를 안개 속에 떠 있는 배에 태우고 고국으로 보낼 거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파샤의 저택에 들어서면서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구조되지는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발끝으로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먼저 현관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곳에 잠시 세워 두더니 다시 어떤 방으로 집어넣었다. 작은 보료에 왜소하나 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담요를 덮고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몸집이 우람한 남자가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이 파샤라고 했다. 그는 나를 곁으로 불렀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나는 사실은 천문학과 수학과 공학에 대해서도 약간 공부했으며, 의학도 알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다고 말했다. 더 많이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는 내가 오스만어를 이렇게 빨리 배운 것으로 보아 영리한 사람일 거라고 하더니, 다른 의원들이 치유하지 못하는 병을 자신이 앓고 있는데, 나에 대해 소문을 들어 내게 한번 보이고자 불렀다고 했다.
파샤는 자신의 병에 대해 굉장히 과장되게 설명했고, 그래서 마치 그것이 이 세상에서 오로지 파샤만이 걸린 특별한 병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적들이 모함을 하고 신을 꼬드겨서 자신이 그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지만 병의 증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해소천식일 뿐이었다. 나는 증상에 대해 신중히 묻고 기침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여러 재료를 섞어 박하가 첨가된 초록빛 알약을 만들고 기침 시럽도 준비했다. 파샤가 독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가 보는 앞에서 내가 먼저 시럽을 한 모금 마시고 알약도 하나 삼켰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저택에서 나가 감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인은 그 이유를 나중에 설명해 주었다. 다른 의원들이 질투하는 것을 파샤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 날도 파샤의 저택에 갔다. 기침 소리를 듣고 다시 같은 약을 처방했다. 그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색깔 있는 알약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감옥으로 돌아와서 그가 완치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 다음 날은 북동풍이 불었다. 산들바람이 불었으므로 이런 날씨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한 달쯤 후, 다시 나를 한밤중에 불렀을 때에 파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편히 호흡을 하면서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무척 기뻤다.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내가 그의 병을 완치했고, 유능한 의원이라고 칭찬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를 즉시 풀어 주거나 내 나라로 보내 주지는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감옥과 쇠사슬에 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의술과 천문학 같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힘든 노동이 나를 공연히 지치게 한다고도 했다. 그가 내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내게 건네주었던 쌈지에 든 돈은 보초들이 대부분 빼앗아 갔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하인은 밤에 나를 찾아와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받은 후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그 뒤로도 노역에 나가기는 했지만, 노예 담당관은 내가 일을 안 해도 눈감아 주었다. 사흘 후에 하인이 내가 입을 새 옷을 가지고 왔을 때 파샤가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밤 파샤의 저택으로 불려 갔다. 류머티즘에 걸린 늙은 해적들에게, 위산 과다로 괴로워하는 병사들에게 약을 주었다. 가려움증이 있거나 안색이 창백하거나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혈액도 채취했다. 한번은 어떤 하인의 말더듬이 아들에게 시럽을 주었는데, 일주일 후에 말을 하게 되어 내게 시를 읽어 주었다.
겨울은 이렇게 지나갔다. 초봄, 몇 달 동안 나를 찾지 않던 파샤가 함대를 몰고 지중해로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 내내 내가 절망과 분노로 어쩔 줄 몰라 하자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처지에 불평하지 말라고, 의원 노릇으로 꽤 돈을 벌지 않느냐고 했다. 노예였다가 몇 년 전에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결혼을 한 사람은 도망가라고 충고했다. 쓸모 있는 노예에게는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 일 저 일을 시킬 뿐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처럼 무슬림이 되면 풀어 줄 거라고 했다. 단지 그 정도라고 했다. 어쩌면 나의 본심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전혀 도망갈 의향이 없다고 대꾸했다. 사실 의향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다. 도망치는 노예들은 멀리 가기도 전에 붙잡혀 버렸다. 몰매를 맞고 감방에서 신음하는 운 없는 노예들의 상처에 밤마다 연고를 발라 주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다.
파샤는 가을이 올 무렵 함대와 함께 출정에서 돌아왔다. 대포 소리로 파디샤에게 경의를 표했고, 지난해 그랬던 것처럼 도시를 흥겹게 하려고 애썼지만, 이번에는 별 성과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포로도 소수만 감옥으로 데려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베네치아인들이 배 여섯 척을 불살랐다고 한다. 어쩌면 고국 소식을 들을까 하여 새로 온 노예들과 말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조용하고, 무식하고, 겁 많은 자들이었다. 내게 도움을 청하거나 음식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명이 내 관심을 끌었다. 팔은 잘려 나갔지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조상 한 명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지만 결국 구조되어 성한 나머지 팔로 기사(騎士) 소설을 썼다고 했다(『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서 왼팔에 부상을 입었고 알제리에서 오 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 자신도 구조되어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 후, 살기 위해서 이야기를 꾸며 내어야 했던 시기에, 이야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기를 꿈꾸던 이 사람을 떠올렸다. 얼마 되지 않아 감옥에 전염병이 돌았다. 보초에게 뇌물 공세를 한 덕택에 나 자신은 보호할 수 있었지만, 이 전염병은 노예들을 절반 이상 죽인 후에야 물러났다.
살아남은 노예들을 새로운 일터로 데려갔다. 나는 가지 않았다. 저녁에 돌아온 그들은 저 멀리 할리치 만(灣) 끝까지 가서 목수와 재봉사, 페인트 공의 명령에 따라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배와 성, 탑의 모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파샤의 아들이 총리 대신의 딸과 혼인하게 되어, 휘황찬란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파샤의 저택으로 불려 갔다. 해소천식이 다시 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샤는 업무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하인이 방으로 안내했고 나는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 방의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갑자기 두려워졌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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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오르한 파묵 Orhan Pamuk
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다가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출간했고 이 소설로 ‘오르한 케말 소설상’과 <밀리예트> 문학상을 받았다. 다음 해에 출간한 『고요한 집』 역시 ‘마다라르 소설상’과 프랑스의 ‘1991년 유럽 발견상’을 수상했으며, 『하얀 성』(1985)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 방문교수로 지내면서 집필한 『검은 책』(1990)은 ‘프랑스 문학상’을 받았으며, 이 소설을 통해 대중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작가로 터키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새로운 인생』(1994)은 터키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내 이름은 빨강』(1998)은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 이탈리아 ‘그란차네 카보우르 상’,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 등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 소설’이라 밝힌 『눈』(2002)을 통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소설을 실험했다. 2005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상’과 프랑스 ‘메디치 상’을 받은 데 이어,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특유의 문체와 서술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주제에 접근한 『순수 박물관』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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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난아
터키어를 공부한 뒤 터키 국립 이스탄불 대학(석사)과 앙카라 대학(박사)에서 터키 문학을 전공했다. 앙카라 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5년 간 외국인 교수로 강의했으며, 현재 한국외대 강사로 있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검은 책』『이스탄불』『내 이름은 빨강』『눈』『새로운 인생』을 비롯해 다수의 터키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한국 단편소설집』『이청준 수상 전집』을 터키어로 번역, 소개했다. 지은 책으로는 『터키 문학의 이해』『오르한 파묵과 작품 세계』(터키어), 『한국어-터키어, 터키어 한국어 회화』(터키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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