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동서를 나누는 상상의 경계선을
번갈아 넘나드는 움직임으로 규정된다.
_ 헤로도토스, 『역사』
들어가며 | 역사의 굴곡
° 진짜 동양을 찾아서
몇 년 전 여름, 도쿄 시내의 아파트에 살던 때다. 보스턴에 사는 친구 두 명이 도쿄에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한 명은 변호사, 한 명은 디자이너였는데 둘 다 아시아는 처음이었다. 최초로 태평양을 건너는 그들의 아시아 관광 일정에서 일본은 첫 번째 정거장이었다.
두 친구는 며칠간 도쿄의 큰길, 샛길, 뒷길을 탐험하더니, 이제 진짜 일본을 좀 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도쿄는 하나의 현대 도시이지 일본이 아니었다(파리가 프랑스가 아니고 뉴욕이 미국이 아니듯, 도쿄가 일본이 아닌 것은 사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경로를 정하고 도쿄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푸른 논과 계단식 차밭을 지나 수풀 우거진 높은 산을 향해 달렸다.
슬슬 점심시간이었다. 시골동네 언저리에 맑은 시내가 흘렀고 거기에 갈 만한 식당이 보였다. 돈가스 집이었다. 돈가스 집에서는 보통 돈가스만 파는 경우가 많다. 그날 야마나시 현에서 발견한 그 집도 그랬다. 여름철 음식으로 돈가스가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가 있다. 19세기 말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럽 음식이 일본식으로 재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맥주를 시키며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다(물론 일본의 맥주양조 기술도 독일을 통해 들어왔다).
친구들은 돈가스의 기원을 듣더니 다소 실망한 듯했다.
“이거 지금 우리가 정말 일본식으로 먹고 있는 것 맞아?”
변호사 친구가 물었다. 그러자 친구들의 눈동자가 식당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식당 입구에 마련된 진열장에는 플라스틱 돈가스 모형이 메뉴별로 들어 있었다. 식당 뒤로 낸 전깃줄은 냇가에 매단 등불로 이어졌다. 천장에는 줄을 잡아당겨서 켜고 끄는 원형 형광등이 달려 있고, 유리문 달린 냉장고에는 아사히, 삿포로, 기린 등 갈색 맥주병이 가득했다. 음식이 나오자 옆자리 손님은 우리에게 혹시 젓가락 말고 포크와 나이프가 필요한지 정중하게 물었다.
“여기 진짜 일본 음식점 맞아?”
변호사 친구가 또 물었다.
몇년간 이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별로 특별한 기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몇년이 지나 일본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캘리컷에서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캘리컷은 인도양 말라바르 해안 남쪽 끄트머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곳으로, 바스쿠 다 가마가 1498년 상륙한 지점이다. 500여년 전 해변을 딛는 묵직한 가죽 장화와 함께 동서양의 근대적 만남이 시작됐을 이곳을 보려고 나는 한참을 별러 왔다.
캘리컷 시내에서 존 오찬투루트 교수를 찾아갔다. 역사학자인 존은 이 근방의 역사와 지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지도, 문헌, 일기 등의 자료와 수년간의 해안탐사를 통해 바스쿠 다 가마가 닻을 내린 날짜와 장소(5월 20일 저녁, 카파드—이곳에 기념비가 있다), 포르투갈 선원들이 상륙한 날짜와 장소(이튿날, 인근 마을 판다라니), 튼튼한 다리를 자랑하는 이 탐험가가 캘리컷 일대를 다스리는 토후 자모린을 만나러 간 경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존은 해안으로 가는 도중에 내게 몇 가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캘리컷은 포르투갈인이 오기 전까지 세계 후추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는 바로 그 후추 시장을 보여준 뒤, 힌두교 사원을 닮은 14세기 이슬람 사원, 고대 그리스식 기둥과 아치가 설치된 이슬람 사원을 차례로 구경시켜주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기독교 교회를 닮은 도로변의 힌두 사원을 지나쳤다. 우리는 모계를 따르는 무슬림과 인도 남부에 정착한 고대 유대인과 시리아계 그리스도교도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파시교도들의 묘지와 시내 곳곳에 아랍어로 새긴 글귀와 이곳 방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서사의 큰 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힌두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네스토리우스교도, 알렉산드리아인, 아비시니아인, 베니스인, 약간의 중국인, 약간의 자바인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이곳에 와서 캘리컷과 말라바르 해안을 싱크레티즘(syncretism, 혼합주의)의 눈부신 결정체로 만들어 놓았다. 인도인이 즐겨 지적하듯, 바스쿠 다 가마는 무엇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원래 융성하고 활기차던 곳에 어쩌다보니 도달했을 뿐이다. 다 가마에게 풍향을 읽어주고 뱃길을 안내한 사람은 다 가마가 동아프리카에서 만난 아랍인 항해사였다.
그러나 이 땅딸막하고 볼품없던 포르투갈 출신의 탐험가가 온갖 인종이 뒤섞여 시끌벅적하게 살아가던 이곳을 바꿔놓았다. 독점무역 제안을 거절당한 다 가마는 1503년 총칼로 뜻을 관철시켰고, 불과 몇 년 만에 수많은 향료 상인들이 오늘날 아랍에미리트연합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피신했다. 종교나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환영받던 이곳은 순식간에 피비린내 진동하는, 분열시켜 정복해야 할 장소로 변했고, 이전에 볼 수 없던 인종?종교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캘리컷에 살던 무슬림들이 선언한 ‘지하드’는 근세 최초의 지하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구의 동진은 어떤 의미에서 근세로 이어진 십자군 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직접 찾은 바스쿠 다 가마 기념비는 해변에 놓는 파라솔 크기의 작고 초라하게 이끼 낀 콘크리트 오벨리스크였다. 부서진 울타리 안에 들어앉은 기념비에는 조그만 명판이 붙어 있고, 주변은 쓰레기 천지였다. 그런데 근처 해안가에는 흥미로운 건물이 서 있었다. 무슬림 주민들이 지어놓은 작은 이슬람 사원이었다. 건물 벽은 햇볕에 바래 창백한 녹색이었고, 물결처럼 주름진 지붕에는 자그마한 첨탑 두 개가 달렸다. 보아하니 지금은 찾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커 보였다. 포르투갈 선원들을 기리는 명판과 그들을 이리로 실어온 바다의 중간지점에 버티고 서 있는 무슬림들의 예배당.
존과 나는 해안가를 거닐었다. 존이 희한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년 전 바스쿠 다 가마의 캘리컷 상륙 500주년을 맞아 학자들이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연구자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뉴델리 중앙정부와 포르투갈 재단 몇 곳이 지원해 다 가마가 타고 온 배의 모형을 만들어 진짜 항로를 따라 띄울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정작 각종 행사를 주관해야 할 이곳 마을과 말라바르기독대학에서 잡음이 일었다. 식민지를 삼으려고 온 유럽인의 상륙을 기념하다니 있을 수 없으며, 학회나 모형선박도 싫고, 정부와 포르투갈 재단이 주는 돈 또한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동하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북쪽 고아(Goa, 인도 남서 해안 지방의 휴양지)에서까지 시위대가 원정을 왔다. 결국 계획은 무산되고 다 가마의 상륙을 기념하는 행사는 취소됐다.
존이 유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위대가 저 기념비에 똥까지 뿌렸어요.”
그는 말을 멈췄다. 당시를 회상하는 듯 다소 멍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텅 비어 고요한 이슬람 사원 옆 해변에 서 있었다. 모래는 이미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사실 계획하던 행사는 뭘 기리고 축하하자는 게 아니었거든요. 과거를 분석하고 이해하자는 취지였어요.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기억하다니, 뭘요?”
“우리 자신을요.”
야마나시 현의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 인도 남부의 해안 마을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왜 나는 말라바르 해변에서 야자수 이파리를 깔고 앉아 오래전 일본 시골에서 먹던 점심을 떠올렸을까?
한마디로 ‘관점’과 관계가 있다. 관점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며 ‘보는 것’과 관련된다. 아니 거꾸로, ‘보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다 해도 좋다. 보지 못하는 이유는 눈이 멀어서가 아니라, 선입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혹은 선입관이 있다거나 선입관에 지배된 삶을 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흐려진 시야는 질병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이다. 그 병의 원인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서구인에게 일본은 목조건물과 초가집의 나라, 신사에 금줄이 걸려 있는 나라, 비단과 화선지와 대나무의 나라다. 거기에 유리, 강철, 유치한 색의 플라스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적이면 일본적이지 않다. 근대적이면 서구적이므로 일본까지 찾아온 보람이 없다. 일본에서 다른 서구인과 마주쳐서도 안 된다. 도착했을 때 오로지 ‘타자’들만 사는 완전히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 별세계에 입장한다는 느낌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퇴장’할 때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서 놀러온 친구들은 자기도 모르게 바로 그런 태도를 보였다. 캘리컷에서 발생한 기념식 거부 사태도 또 다른 측면에서의 의식적인 ‘서구 삭제’ 행위다. 서구인이 오고부터 아시아인 본래의 정체성이 파괴되고 궤도를 이탈했으니, 이를 극복하고 본궤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테마는 늘 똑같다. 조화로운 과거, 외부의 침범, 과거에 대한 향수, 프랑스 철학에서 말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잃은 것을 되찾고 새로 출발하려는 욕망. 이런 식의 서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홍콩의 어느 개인 클럽에 초대받아 갔다가 접했다. 그날 저녁행사 주최자는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개혁가 캉유웨이의 손자, 폴 호였다. 당시 중국으로 장기간 여행을 떠날 예정이던 내게 폴은 본토 출신인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이 친구 나름의 독특한 관점이 있어요.”
저녁식사가 나오고 다양한 요리만큼이나 다양한 대화가 오갔다. 우리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 음양의 원리, 1920년대 신문화운동, 마오쩌둥에 대해 이야기했다. 폴의 친구 조 푼은 연약한 몸집을 지닌 수염이 하얗게 센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다. 나는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각지에서 목격한 온갖 종류의 향수鄕愁에 대해 물었다. 상하이에 대한 향수, 시안에 대한 향수, 베이징에 대한 향수, 쑤저우에 대한 향수, 1920년대?1950년대?19세기에 대한 향수, 명나라에 대한 향수, 송나라에 대한 향수…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각각의 향수마다 ‘중국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은 중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향수도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씨실이다. 향수야말로 수많은—대다수라 해도 좋을 것이다—아시아인의 감정을 특징짓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저는 중국인의 향수병이 그렇게까지 심하다고 보지 않는데요.”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향수에는 지금보다 옛날이 좋았다는 감상적인 향수가 있는가 하면, 지금보다 옛날이 낫다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향수가 있지요.”
“단어 하나만 바꾸셨을 뿐 같은 얘기 아닙니까.”
내가 항의하자 조 푼이 갑자기 흥분해서 말이 많아졌다. 그는 일본말로 ‘혼네’(本音, 본심)에 해당할법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 시골에 관해 말해 드리리다. 옛날에 중국 시골이 어땠는지 좀 아시오?”
“네, 사실…”
“내가 말해 드리지. 옛날에 중국 시골에는 말이죠, 뽕나무가 있었어요. 그게 제일 먼저야. 그리고 그 뽕나무에 누에가 살았어요. 누에가 뽕나무 옆 호수에 똥을 싸면 그 똥을 물고기가 먹어요. 그 물고기가 싼 똥이 호수바닥에 가라앉으면 우리는 그걸 건져서…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왜 밭에다가…”
“비료요?”
“그렇지. 물고기 똥으로 밭에다 비료를 줬어요. 인분은 비료로 주면 안 되고, 그러려면 먼저…”
“처리요?”
“응, 처리를 해야 돼요. 그렇게 자연환경 속에서 한 바퀴 순환이 일어나는 거지요. 물은 늘 깨끗하고, 공기도 좋고,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있고, 마을 안에 분열도 없었어요. 소비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보존하고 아끼는 사회였지요. 남편, 아내, 가정이 온전하고 이혼 같은 건 없었어요.”
조 푼이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곧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뭘 가지고 왔는지 아시오?”
이 대목에서 조 푼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고, 분위기가 험해졌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편!” 조 푼이 소리 질렀다. “공해! 소비!”
잠깐 침묵이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외국인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난 그저 당신에게 역사를 말하려는 것뿐이오. 거 뭐더라? 별에서 지구를 내려보 듯 큰 그림을 보여주려는 거예요.”
조 푼은 좀 진정되는 듯했지만 폴은 이쪽을 쳐다보다 엉뚱한 데로 눈길 돌리기를 어색하게 반복했다.
“흥미롭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흥미로웠다. 그가 묘사하는 중국의 옛날은 부채나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을 떠올렸다. 중국은 온전하고 순수하고 행복한 곳이었는데, 서구가 와서 다 망쳐놓았다는 줄거리. 이야말로 중국인의 향수이자 르상티망—이 용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의 순수한 결정체였다.
° 미시마 유키오의 착각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아시아에 대해 자기 나름의 이미지가 있다. 보스턴에서 온 친구들도 그랬다. 일본을 처음 여행하는 이들에게 약간의 실망은 공통되는 감정이다. 조 푼에게도 아시아에 대한 자신만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는 새가 내려다보는 조감도도 아닌 “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큰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설명이 정확하다고 믿었다. 캘리컷의 무슬림들도, 도널드 리치도, 미시마 유키오도, 전부 아시아에 대한 일정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 일본, 인도 및 다른 아시아 사회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만큼 다른 대륙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을 일으키는 곳도 없는 듯하다. 미국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시아에는 상대가 안 된다.
아시아 특파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나는 아시아에 대한 부정확한 관념(완전히 틀린 것, 일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 맞기는 한데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있는 것 등)을 타파할 용어를 하나 고안했다. 그리고 어색하나마 이를 줄여서 수첩 여기저기에 AAII, 혹여 과학자적인 감상에 젖었을 때는 A²I²라고 적어 넣었다. ‘Asia as it is’, 즉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라는 뜻이다. 단순한 외양이나 통념을 뛰어넘어 아시아를 바라본다는 의미다.
이 용어를 이 책에서 종종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독립된 의미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영리한 칼럼니스트들이 만들어내는 각종 신조어와 경쟁하기 위해 만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특정한 목적을 지닌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거나 더하는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용어는 근대화된 아시아도 여전히 아시아임을 지적할 것이다. 근대성을 아시아와 무관한 것으로 보는 습관, 동서양이 만나면서 아시아성은 상실되고 이후 전개된 모든 것은 지워야 할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몹쓸 습관을 버리도록 종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는 근세 이후부터 확고하게 아시아의 일부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아시아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시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금기를 없애야 한다. 특히 지금 중국 정부가 하는 식의 검열은 곤란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외면하거나 있지도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캔자스시티에 있을 법한 빌딩이 오사카나 마드라스에 서 있다고 해서 그게 일본 빌딩이나 인도 빌딩이 아니라고 우기지 말 것이며, (조 푼처럼) 현실을 만화영화 수준으로 단순화하거나, (내 보스턴 친구들처럼) 아시아에서 서구를 지우려 들거나, (캘리컷의 무슬림들처럼) 액자를 움직여 그림의 일부를 가리려고 해서도 안 된다. 특히 내 친구이자 아시아 문화평론가인 도널드 리치처럼, 아시아가 옛날 같지 않다고 애통해 하는 일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한다. 아시아를 세상의 다른 지역보다 특별히 더 (또는 덜) 애석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처럼 “보존할 만한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미시마는 일본의 이국적인 면을 추구하던 오리엔탈리스트였다. 옹호할 여지가 없는 입장이었는데도 미시마는 이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일본 저널』The Japan Journals에 실린 리치와의 인터뷰 직후 자결했다. 1970년대 일본에서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의 전경 및 배경 개념은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득히 먼 과거와 비교적 최근의 과거를 각각 한 그림의 배경과 전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서구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은 이 그림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서구는 벌써 150년 이상 아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그림 속 전경에 펼쳐지는 역사는 바로 동서 간 관계맺음의 역사다. 아시아와 서구가 연루되지 않은 부분은 전혀 없다. 이런 상태를 일컫는 강렬하고도 유용한 용어가 하나 있다. 아시아는 ‘이종교배’miscegenation 된 곳이다.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해야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를 파악할 수 있다.
모든 과거는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그런 점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내 시각이다. 과거를 거슬러 오르면 결국 모든 것의 시초는 같다고 봤을 때, 이런 생각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아시아는 서구와 구별된다. 아시아 역사에도 다른 곳 못지않게 커다란 사건이 많이 있지만, 아시아에는 ‘새 출발’departure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와 유리된 ‘별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대대적인 전환기에도 과거를 뒤로 하고 떠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는 불가분이며 역사적 사건은 하나의 사슬처럼 길게 이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아시아에서 ‘먼’ 과거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반면에 서구인은, 역사란 중대한 사건들이 불연속적으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이 어떤 일을 두고 “이제 그건 역사가 됐다”It’s history고 말하면 ‘다 지나가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의미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역사를 그렇게 부정적인 어조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시아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서구식 관념을 배운 것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하지만 유연하고 유동적인 시간 관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는 여전히 유효하며 때로는 현재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군중 앞에서 유교를 비판했던 마오쩌둥도 저녁이면 유교 고전을 읽으며 통치자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인도의 구자라트 주는 남아시아와 서아시아가 만나 수천 년 동안 뒤섞인 지점이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종교갈등에 관해 인도인에게 물어보라. 인도인의 답변은, 1026년 힌두교 사원 약탈사건이나, 인도 북부에 있는 16세기 이슬람 사원 건물이 원래 힌두 사원이 서 있던 자리를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다고 굳게 믿은 신도가 여기에 불을 지른 1992년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억’으로, 근대적인 것들에 장악된 아시아에서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한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포괄성과 흡수력은 아시아의 과거를 특징짓는 두드러진 속성이다. 캘리컷의 자모린 토후국* 역시 그런 성향을 보였다. 토후는 바스쿠 다 가마와 선원들을 위해 환영행사를 마련했고, 주민들은 일행이 토후의 궁전으로 가는 동안 길가에서 열렬히 환호했다. 선원들이 묵직한 장홧발로 육지를 디딘 지 불과 여드레째 되는 날, 다 가마는 그렇게 아시아의 일부가 됐다. 다 가마가 아시아에 처음 온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상륙에는 분명히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그 순간 꽤 중요한 ‘새 출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다 가마가 일을 처리한 방식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의 접근법은 당시 아시아가 물질적으로 덜 발전한 상태였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표면은 소란스러워도 본질은 그대로였다.
* 12~18세기 인도 서남부 해안을 통치하던 힌두 국가. 말라바르 해안 최고의 무역항인 캘리컷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의 일부가 되는 일은 피부색이나 눈동자색, 가족 사이의 유대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근대 이후의 개념인 국경선과는 더욱 상관이 없다. 아시아인에게 국경이라는 관념은 부자연스럽다. 실제로 국경은 아시아 여러 지역의 육지와 바다를 어색하게 가르고 있다. 아시아는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항상 유동적이고 정의가 아예 불가능한 큼직한 땅덩어리 하나를 상상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는 사실상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고정성은 서구의 수사법이다. 21세기를 맞아 우리는 이 점을 더 잘 인식해야 한다.
중국은 (중국인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에게 매우 고정적이고 동질적인 지역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저명한 미술가 아이 웨이웨이艾未未는, 중국을 논하려면 우선 어느 중국을 말하는지부터 규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나라냐(사실 꽤 작은 나라였다), 당나라냐(나라를 서쪽으로 상당히 넓혔다), 만주냐(1911년에 멸망한 청나라)에 따라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현재 중국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1700년경까지, 즉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상촨(중국 광동성에 위치한 섬)에 도착한 (그리고 그곳에서 사망한) 이후 한 세기 반이 지나도록 중국령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중국은 자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티베트인과 위구르족까지 아우르는, 역사가 불과 반세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 국가다. 여러 가지 ‘중국’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타고나길 근시안적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위치 지으려면 이 근시안을 극복해야 한다.
“중국은 다원적이고 파편화되고 교란된 상태입니다. 일부 전통은 이미 오래전에 소멸됐고, 살아남은 전통은 동서양 어느쪽 관점으로 보아도 ‘중화된’ 형태를 띱니다.”
은퇴한 하버드 대학 교수 리어우판(李歐梵)이 내게 한 말이다. 그나 나나 홍콩에 살았고, 우리의 화제는 늘 중국이었다. 리어우판의 의견은 아시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 그도 틀림없이 내 입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의 설명에는 전경과 배경이 담겨 있다. 물론 전경과 배경은 우리가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구별되며, 이는 캔버스 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아시아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먼 옛날의 일, 근래에 발생한 일, 미래에 생길 일 사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의 과거가 지녔던 (시리아계 기독교도, 베니스인, 기타 각종 요소를 아우르는) 포괄성은, 아시아의 현재가 갖고 있는 (우리 서구를 끌어안는) 포괄성과 닮아있다. 따라서 배경과 전경을 구분하는 미적 감각은 유용하지만, 일단 활용한 후에는 전체적인 그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옆으로 치워둘 필요가 있다.
(들어가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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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패트릭 스미스 Patrick Smith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뉴요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특파원으로 20년 이상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도쿄 지국장으로 근무했고, 최근에는 아시아판 편집을 담당했다. 영미권에서 가장 뛰어난 일본 입문서로 손꼽히는 전작 『일본의 재구성』(2008)은 환태평양 도서상 ‘키리야마 상’을 수상하고 해외언론클럽 국제문제 분야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올해의 주목할만한 책’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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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노시내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일본의 재구성』『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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