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중동의 한 세력가에게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그림 한 점을 팔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왕궁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오후의 타는 듯한 열기 속에 야자수 나무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고 그 너머 깊은 푸른빛의 바다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창문을 통해 최근에 지은 듯한 이슬람 사원을 덮은 황금색 둥근 지붕과 어느 국제 은행의 로고와 코카콜라를 광고하는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고층빌딩이 보였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거리낌 없이 회전하는 왕궁의 깊숙한 내부에 위치한 로비에서 나는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조차 금가루가 뿌려진 것을 보았다. 나를 은밀한 이곳까지 안내한 제복 차림의 하인이 작동시킨 엘리베이터의 벽은 밍크 소재로 되어 있었다.
나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땅 표면은 아무 쓸모없는 불모지이지만 그 밑으로는 엄청난 가치의 석유가 매장된 그 나라의 지질학적 특성 덕분에 그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를 축적했다. 말쑥한 외모에 깔끔한 매너를 지닌 그 사람은 흠잡을 데 없는 예를 갖춘 채 나를 대했다. 그는 내가 가져온 그림을 응시한 채 물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이 경매장에서는 700만 달러에 팔린다는 말씀이지요?”
확신에 차지 않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이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는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서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실제로는 그 가격보다 더 높게 팔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클로드 모네, 그러니까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이해가 안 되네요. 저의 궁금증을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벽에 걸어 놓은 다른 한 점의 그림 쪽으로 걸어갔다.
“장 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 1824-1904의 이 그림을 저는 단 90만 달러에 구입했습니다.”
그것은 카이로의 길거리 시장을 그린 작품이었다. 사진처럼 섬세하고 꼼꼼하게 인물들을 표현했으며, 19세기 후반 프랑스 아카데미 화파의 거장인 제롬 특유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었다.
“제롬의 그림은 분명히 모네의 것보다 뛰어납니다. 걸작이지요. 얼마나 사실적입니까? 사물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는 강조해서 말했다. ‘사물이 눈에 보이는 방식.’ 중동의 이 막강한 세력가는 인상주의의 핵심을 바로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미술 이론에 관해 논쟁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재정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당신의 제롬 그림은 뛰어납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모네의 이 작품이 경매장에서는 훨씬 고가에 속한답니다.”
“하지만 모네는 제롬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것 같군요. 색채는 조화롭지 않고 인물들은 어색해 보입니다. 붓 터치는 아무렇게나 한 것 같고 정확하지 않습니다. 섬세한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군요.”
나는 그에게 1876년에 인상주의를 설명한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말을 인용할까 생각해 보았다. 말라르메는 ‘그림에서 세부적인 부분이 미리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변하고 반사되는 빛의 조화 속에서 사물들은 그 모습이 매순간 바뀌며 언제나 움직임과 빛과 생동감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늘 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말라르메의 말이 이 상황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고객은 지난 백여 년 동안 유럽 회화가 발전한 방향과는 친숙하지 않은 문화권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막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는 제롬의 사실적인 그림을 인상주의의 함축적이며 불확실한 그림보다 선호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가 인상주의를 대하는 방식이 1870년대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에서 첫 전시를 열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술 전문가들조차이 보인 반응과 같은 것임을 이해했다.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주는 충격에 익숙하다. 충격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이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에 극적인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대중을 대면한 첫 번째 화가들이다. 그런 일이 예전에는 없었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에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대체 어디에 비유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에밀 졸라Émile Zola는 아방가르드 전시회를 처음 관람할 때 그곳에 출품된 그림들을 통해받았던 충격을 1886년 자신의 소설인 『작품』?에 활용한다. ‘전에 없는 빛의 연출 방식에 관람객들은 마치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느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과연 예술이 이렇게까지 성을 돋우는 것이 타당한가? 한 점잖은 신사는 골이 잔뜩 나서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그런 형편없는 농담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 『작품 L'Œuvre』1886 에밀졸라의 이십 권으로 구성된 『루공 마카르』 총서에서 열네 번째 권에 해당하는 작품.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프랑스 예술계를 보여 준다.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실패한 화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거대한 그림을 제작하려 하지만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 앞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에밀 졸라는 고향 친구인 세잔을 모델 삼아 클로드를 묘사하는데 『작품』이 출간된 후 세잔은 에밀 졸라와 결별한다.
‘전에 없는 빛의 연출 방식.’ 우리는 1870년대 초 파리의 보통 사람들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가 얼마나 야단스럽게 보였을지 간과하기 쉽다. 그들은 제롬 등으로 대표되는 살롱전 화가들의 보수적인 색감, 즉 빛의 유희에 의해 매번 다르게 보이는 색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대로 그려진 색감에 익숙했다.
당시 풍경화가로는 ‘외광화파’라 불리는 바르비종 화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에 이미 밖에 나가서 자연 풍경을 그릴 정도로 앞서 있었지만 여전히 안정감 있는 방향을 지향할 뿐 새로운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제롬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세부 묘사에 집중할 뿐 그림의 전체적인 시각적 효과에 초점을 두지는 않았다. 궁극적으로 바르비종 화가들이 들판과 전원 풍경을 그리는 방식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회화는 여전히 바다의 해초들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 바르비종Barbizon 화가들 19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아카데미 화파, 낭만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프랑스의 미술계에서 서정적인 감성으로 소박한 시골 풍경을 그리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한다. 밀레, 코로, 루소를 중심으로 파리 교외의 풍텐블로 숲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바르비종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고 하여 이렇게 불린다.
인상주의적 기법이 도래하려면 거대한 도약이 필요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도 미처 정의 내리지 못한 개성 있는 붓놀림을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생동감 있는 시각적 효과를 연출할 수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그들의 그림이 거칠게 마무리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어떤 회화보다도 밝은 색채를 띤다는 뜻이다. 이는 빛과 색을 고유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파의 대표 주자인 제롬은 인상파 화가들의 도도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 후 이십 년이 지난 1890년대에도 그는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을 혹독히 비난했다. 반면 현대적인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는 자신이 소장한 인상파 그림들을 국가에 기증하였다. 이에 대해 제롬은 ‘프랑스 정부가 그런 쓰레기 따위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국가의 도덕적 해이를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호통쳤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중동의 어느 대리석 왕궁에서 바로 그 도덕적 해이가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르려는 참이다.
인상주의는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인상파 화가들이 외부의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당시 유럽 회화의 맥락에서 보면 인상주의는 19세기 아카데미 회화에 반기를 든 여러 다양한 저항운동 중 가장 지속적이며 중요한 역할을 한 하나의 화풍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에서 아카데미 회화는 식상하고 정체된 공식 예술이었다. 19세기 중엽 무렵 파리 살롱전에콜 데 보자르?의 보수적인 위원회가 당시 프랑스 회화를 대표하는 그림들을 모아 주최한 전시에는 역사적 사건이나 고대에서 소재를 따온, 한심할 정도로 감성적이며 과장된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고 현실을 더욱 직접적으로 담는 회화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실주의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화파와 자연주의말 그대로 자연을 거침없이 전사하는 화파가 탄생했다.
?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s-Arts 프랑스의 국립 미술학교. 1648년 마자랭 추기경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우수한 졸업생들은 주로 왕실의 공식 화가로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 초기 저항운동의 선두에 선 화가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였다. 1860년대에 들어서는 차츰 이러한 움직임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이 모이게 되었다.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참여한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 1834-1917를 꼽을 수 있다. 이 화가들은 구시대적인 고전주의의 의미 없는 전통의 굴레에 독립을 선언했다. 역사적 사건, 정해진 소재, 그리고 제롬과도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이들이 외친 것은 새로운 시선, 효과의 직접적 기록, 자연의 인상이었다. 보들레르?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자신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즉 관습적으로 아름답다고, 혹은 추하다고 여기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직접 시각적으로 경험한 것, 다시 말해 자신에 관한 것만 그렸다.
?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시집 『악의 꽃』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시인.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다. 현대시의 창시자로 불리는 보들레르이지만 정작 문단에 데뷔한 것은 스물네 살에 출판한 미술 평론집인 『1845년의 살롱』을 통해서이다. 그는 특히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화풍에 찬사를 보냈다.
1863년은 초기 인상주의 발전에 의미 있는 해이다. 그해 여름, 살롱전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행보를 내디뎠다.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에 의해 살롱전에 작품이 거부된 화가들은그 때문에 이들은 그림을 구매하는 대중을 접할 큰 기회를 잃게 된 셈인데 스스로 낙선전을 개최하여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였다. 테오필 토레Théophile Thoré라는 한 비평가는 낙선전을 본 후 이렇게 예리한 평을 써냈다.
여기 금지된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프랑스 예술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 작품의 소재는 더 이상 공식적인 화랑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화 혹은 역사가 아닌 일상생활, 대중적인 삶에서 소재를 찾는다. 고심해서 그렸다거나 고상한 취향을 지녔다고도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기품 있는 것과 저속한 것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기법 또한 이탈리아 회화의 오랜 지배 하에서 정형화된 공식과 다르다. 그들은 아카데미 화파가 ‘소묘’라 부르는 윤곽선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고, 전통적 회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완성도라 부르는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도 않는다. 화면에 부수적인 자잘한 것과 선의 정확성은 무시해 버리고 충격적인 조화에서 우러나오는 전체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오 년 후, 필라델피아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미국인 화가인 매리 카샛Marry Cassatt, 1844-1926은 흥분된 어조로 이런 편지를 집에 보낸다. ‘프랑스 회화는 중요한 국면을 맞고 있어요. 이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형식에서 탈피해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찾고 있어요. 현재는 모든 것이 그저 혼돈 그 자체입니다.’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 인상파 화가들은 정확한 세부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효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심혈을 기울여 빛과 반사를 관찰했다. 시원시원한 붓 터치와 더욱 밝고 단순한 색을 사용했다. 또한 가장 즉각적이며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렸다.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았다. 과거의 역사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검정색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림자가 실제로는 검정색이 아니라 보라색이거나 푸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고 믿는 색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에 보이는 다양한 색, 즉 빛의 상태에 따라 그 순간에 보이는 색을 칠했다.
사실 인상주의의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국의 수채화가인 알렉산더 코즌Alexander Cozens, 1717-1786은 18세기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자연에서 형태는 윤곽선이 아니라 그림자와 색에 의해 구분된다.’
하지만 역사의 교차로에 선 프랑스의 화가들은 같은 이치를 가지고 혁신적인 움직임을 일으켰다.
1866년에 지은 공쿠르Goncourt 형제의 소설 『마네트 살로몽』?에서 한 젊은 예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림을 그릴 때 색을 혼합하지 않고 그리는 것, 즉 물감을 섞지 않고 형태를 완성하는 법을 발견해야 합니다. 팔레트의 모든 면을 활용해야 하지요. 팔레트 위 물감은 햇빛의 축소판입니다. 다시 말해 햇빛을 구성하는 부분부분이지요. 회화는 그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1867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형 에드몽과 동생 쥘 드 공쿠르가 함께 쓴 소설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미술계를 배경으로 주인공 화가가 마네트 살로몽이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파괴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공쿠르 형제는 소설가이자 미술품 애호가 겸 수집가, 미술 평론가이다.
그로부터 팔 년 후, 평론가 쥘 앙투안 카스타냐리?는 1874년에 제1회 인상파 전‘인상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처음으로 언급된 바로 그 전시을 보고 이렇게 꼬집어 말했다. ‘이 화가들을 인상파 화가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들이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에서 얻은 인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 쥘 앙투안 카스타냐리Jules Antoine Castagnary, 1830-1888 19세기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정치인, 기자, 미술 평론가이다.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의 친구로 그의 예술을 지지하는 글을 많이 썼다.
인상파 화가의 회화 기법은 빠른 처리, 그리고 공쿠르 형제가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표현한 즉흥성이 특징적이다. 그들은 색을 섞지 않은 채 직접 화폭에 칠한다. 자연의 변화무쌍한 일기에 반응하는 인상을 표현하려면 오래 고심해서 그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처음 칠한 바로 그 색이 맞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고칠 시간이 없다. 말라르메는 1876년 ‘마네와 그의 화가 친구들은 단순하고 신선한 색을 가볍게 사용하는데 그 결과 그림은 처음 칠한 붓 터치에서 이미 완성된 느낌을 준다. 그들의 그림 속에 표현된 빛은 그것이 닿는 모든 사물에 생동감을 부여한다.’고 쓴다. 이러한 생각은 낭만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로 남작Baron Gros은 제자들에게 ‘포제, 레세Posez, laissez’라고 가르쳤다. 일단 칠을 하면 손을 떼라는 의미이다. 첫 붓질이 정확하다는 말인데, 처음의 것이 즉흥적이며 정직하기 때문이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도 시를 쓰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는 호랑이와도 같다. 첫 번째 도약을 놓치면 으르렁거리며 다시 나의 정글로 들어간다. 두 번째란 없다. 정정은 안 한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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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필립 후크 Philip Hook
소더비의 인상파 회화 및 현대 예술 부서의 상임감독이다. 크리스티에서도 감독을 역임하였고 국제 아트 딜러로 활동했으며 텔레비전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등 지난 30여 년간 예술 시장에서 일했다. 그는 예술 세계에 대한 풍자적 픽션인 『시각적 환상 Optical Illusions』(1993)을 썼다. 또한 네 편의 스릴러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스릴러 작품으로는 『채석장이 The Stonebreakers』(1994), 『죽음의 섬 The Island of the Dead』(1995), 『밀밭의 군인 The Soldier in the Wheatfield』(1998), 『순수한 눈 An Innocent Eye』(2000)이 있다. 현재 런던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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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유예진
학부에서 불어불문학을 대학원에서 통번역학을 공부한 뒤 도미, 미국 보스턴 칼리지에서 프루스트와 미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프루스트의 화가들』(201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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