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노벨상의 역사와 의의
오늘 하루에만 7만 4,000헥타르의 우림이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된다. 오늘 하루에만 25만 명의 인구가 새로 태어난다. 오늘 하루에만 2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한다. 오늘 하루에만 1억 톤의 온실가스가 전 세계의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오늘 하루에만 7만 가지 화학물질이 자연으로 배출되고 서로 뒤섞여 지구에 사는 생명들을 괴롭힌다. 오늘 하루에만…
이 경악스러운 수치의 보고서는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 아마 당신은 그런 뉴스는 될 수 있는 한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 듣는다 해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여길 만큼 너무 심각해 보이는 소식들이다. 우리의 문화, 학문, 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는 걸 알려주는 소식들이다. 분명한 것은, 지하자원이든 화석 연료든 혹은 자연환경의 이용이든, 물, 공기, 토양이 견딜 수 있는 하중이든 그렇지 않든, 지금 우리가 마땅히 다음 세대에게 할애된 몫까지 마구 갈취하여 써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시도에서 성공하면 우리는 그것을 경제성장이라 부른다.” 얼마 전 고인이 된 브라질 전 환경부 장관 호세 루첸베르거가 비꼬아 한 말이다. 그 역시 남미 환경 운동의 아버지로서 대안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어 “보잉 747기가 추락하면 국민총생산이 2억 달러 늘어난다. 보험회사에서 손해액을 지급하는 데다, 새 비행기를 구입하는 데 돈을 쓰기 때문이다(보험회사에서 손해액을 지급하면 ‘생산’ 총액이 늘어나고 새 비행기를 구입하는 데 쓴 돈 역시 국가 전체의 생산 활동이 늘어난 것으로 잡히기 때문이다―옮긴이). 그러니 지금의 산출 개념에서는 비행기가 많이 추락하면 할수록 좋다. 이 얼마나 황당한 계산법인가. 우리가 완전히 생각을 달리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완전히 생각을 달리한다? 아인슈타인도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야기한 수단으로는 해결을 시도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언가 확 뒤바꾸고 싶다면 개념과 틀부터 완전히 새롭게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선도적인 해법들은 기존에 있었던 생각을 뛰어넘는다. 다음 세대를 위해 세계를 보존하려고 불가능한 것을 감행하는 용기 있는 개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수백 년이 지나 다시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하면 우리의 후손들은 과연 누구를 떠올릴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생태계 보존, 인권, 평화, 사회정의를 솔선수범해서 지키라고 가르칠 때 어떤 모범적인 인물들과 사연을 예로 들 것인가? 누가 미래의 로빈 후드와 잔 다르크, 디트리히 본회퍼(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 나치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사형됐다―옮긴이), 조피 숄(‘백장미’라는 결사를 조직해 나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뿌리며 저항한 어린 여대생. 오빠 한스 숄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됐다―옮긴이)이 될 것인가? 모르긴 해도 이 시대에 이름을 날린 조지 부시, 토니 블레어, 앙겔라 메르켈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바로 지금 우리 옆에 사는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예컨대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항구에 정박한 거대한 핵 잠수함 때문에 위축돼 사는 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영국의 도자공예가 앤지 젤터가 그런 인물이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핵 무장해제를 직접 실행하리라 마음먹었다. 드라이버와 절단기를 들고 통제 구역을 당당히 뚫고 들어간 그녀는 흉물스런 군사 장비를 바닷물 속에 간단히 밀어 넣어 버렸다.
아니면 이스라엘이 국가기밀로 감추고 있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진실을 밝힌 핵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는 어떤가. 그는 신념을 위해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정보부에 납치되어 18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혹은 드라마틱한 요소는 훨씬 적지만, 자신이 사는 도시인 오악사카에 그림, 문학, 도서관, 화랑, 출판사, 공방을 들여와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예술, 문화, 신화를 다시 알게 해준 멕시코 예술가 프란치스코 톨레도도 있다.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강화한 오악사카 시민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채,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획일화의 광풍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권익을 주장하고 세계화된 시장의 공격에서 지역사회를 지키는 능력을 키웠다.
이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발언권을 갖고 이야기를 한다. 파괴와 불의, 잘못된 개발과 위협을 보고 모랫속에 고개를 파묻은 채 숨기보다는 오히려 똑바로 현실을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제 발전과 자연 보호, 인권, 좋은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길, 그리고 모든 이에게 용기를 북돋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다른 미래를 향한 그러한 여러 궤적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들이 지난 26년간 바른생활상을 통해 조명을 받아왔다. 세인들은 이 상을 대안 노벨상이라는 이름으로 즐겨 부른다. 그것은 제정자 측에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에 견주어 이 상을 칭송하려는 공공의 의식이 에둘러 발현된 것이다.
모든 것은 한 우표수집가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도 더 전에 독일계 스웨덴 우표수집상이었던 야코프 폰 윅스퀼은 어느 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계는 자꾸만 산산조각 나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록달록한 종잇조각이나 모으며 별 거리낌 없이 생을 보내도 괜찮은가 하고 말이다. 그 길로 그는 자신이 소장한 컬렉션을 모두 팔기로 마음먹고, 그 돈으로 스웨덴 노벨 재단에 환경 및 인권상을 새로 제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재단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야코프는 인디언 금언인 ‘Walk your talk!’, 즉 ‘말한 대로 행하라’는 말처럼, 직접 재단을 세우고 바른생활상을 제정했다. 1980년, 임시로 빌린 데다 난방도 안 되는 썰렁한 체육관에서 첫 번째 시상식이 열렸을 때만 해도, 이 사업이 ‘원조’ 노벨상조차 별 기대 않는 경의와 존중을 받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바른생활상은 그야말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망라하여 이미 나이가 먹을 대로 먹은 ‘큰 형’과 당당히 비교될 만큼 위풍당당한 면모를 지니게 됐다. 대안 노벨상은 이른바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들, 평화·환경·사회에 기여한 프로젝트에 수여되었다. 또 이 상을 통해 재생가능 에너지 이용이 장려되고 그에 관한 기술 개발, 유기농업, 통합적인 보건 체계 등이 촉진되었다. 생물학적·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 일, 민주주의 확립, 인권 보호 활동 역시 이 상을 통해 높이 평가되고 칭송되었다. 이 상은 현재의 세계에서 새로운 해법을 촉구하고 지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후원을 베풀었다. 제정자인 야코프 폰 윅스퀼은 “이 상은 물론 수상자에게 영예를 안겨주고 그(들)을 지원하고 유명하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이 모든 일이 더욱 확산되고 세상에 알려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상은 전혀 동떨어진 영역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전을 구상하고, 본보기를 제시하고, 새로움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은 바른생활상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다른 미래’로 도약하는 3단계다. 실제로도 바른생활상은 매 시기마다 늘 한 발자국 앞서 있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그러니까 리우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가 미래의 표어로 제창되기 10년 전부터, 지속가능한 삶의 형태를 성공리에 실험해온 사람들을 국제사회에 알린 것이 바른생활상이었다. 케냐의 생태 운동가 왕가리 마타이가 일찌감치 바른생활상을 받은 1984년으로부터 무려 20년이나 지난 2004년이 되어서야,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뒤늦게 그녀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20세기의 거창한 발명이 무엇이었나 느릿느릿 돌아보는 사이, 우리의 소박한 대안 노벨상은 이미 새천년을 대표할 미래 관련 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2003년 바른생활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양 에너지 전문가인 마틴 그린을, 그보다 몇 년 전에는 그리스 대체의학자인 요르고스 비트홀카스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 사이 노벨 물리학상은 여전히 대규모 프로젝트에, 노벨 의학상은 늘 그렇듯 기존 보건 관리 체계 안에서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기능인들에게 수여되었다.
바른생활상을 통해 영예를 안은 십여 명의 인물들이 2005년 3월 독일 괴테 연구소의 뮌헨 지부에 모였다. 그것도 토론회라는 형태로는 최초로, 비판적인 공공사회가 지대한 관심을 갖고 던지는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공사회는 벌써 오래전에, 자기들을 뽑아만 주면 모든 걸 다시 되찾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정치가들의 약속 따위는 믿지 않게 되었다. 어떤 문제든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해법으로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만능주의자들의 말 역시 점점 더 신용을 잃어갔다. 이 공공사회는, 다음 세대가 살 수 있는 세계를 보전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문화를 필요로 하는지 꾸준히 궁금증을 품어온 이들의 집합이다. 이에 괴테의 유산임을 자처한 한 문화 기관은 ‘대안’이라는 이름의 토론회로 뚜렷한 이정표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거기엔 의심할 여지없이 책임자들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용기가 요구되었다. 활동가들과 혁신가들, 인권 운동가와 생태학자들, 평화 운동가와 비판적인 과학자,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기업가와 경제학자들이 한 지붕 아래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문화 개념을 드넓게 확장하는 용기 말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그런 활동가들이 공공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대안 노벨상은 사반세기가 지난 다음에도 커다란 문화적 변혁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존의 정치, 경제,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주었다. 종종 이 상은 테러나 탄압 등에 대해 일종의 생명보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바른생활상을 받은 100여 명의 개척자들을 더 이상 간단히 무시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예전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들고 주무부처의 수반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당하곤 했던 이들이, 이 상을 받은 이후엔 도리어 높으신 어른들이 찾아와 한 번만 만나달라고 간청하는 대상이 되었다. 30년 남짓 동안, 이 상으로 영예를 안은 여러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는 ‘지금의 난국에서 벗어난 다른 미래’라는 큰 그림을 색색의 모자이크처럼 차츰 채워나갔다. 대안 노벨상은 더 이상 불평꾼들이나 괴짜들, 혹은 말도 안 되는 몽상을 좇는 이들에게 주는 상이 아니게 됐다. 이 상은 벌써 오래전부터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내는 운동의 거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을 갖기 전에는 항상 세계가 입은 상처를 바라보는 솔직한 시선, 다시 말해 일상적인 광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필요하다. 독일의 양자물리학자이자 대안 노벨상 수상자인 한스 페터 뒤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는 금고를 차례로 부수기 위해 용접기를 개발하는 데 온 정력을 다 쏟는 은행 강도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끝내주지 않아? 다들 따라 해봐!’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런 생활 방식 역시 이 금고의 잔고가 얼마냐에 따라 좌우되겠죠. 언젠가 금고는 텅 비게 될 테니까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은 체념한 채 눈을 돌리고 팔자려니 하면서 전처럼 그냥 사는 대신, 주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생태계의 위험, 전쟁의 공포에 온 마음으로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이 하도 깊고 커서, 문제를 방치한 채 보기만 하느니, 차라리 견딜 수 없는 그 상황을 개선하는 편이 더 편하고 건강하게 사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지금껏 억눌리기만 했던 분노와 절망이 오히려 변화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지구의 현 상태를 보며 기꺼이 고통을 느끼겠다는 의지가 공감의 포문을 열었다. 그들의 행동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에서 흘러나왔다. 이것이 필리핀 환경 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인 니카노르 페를라스가 말한 ‘혁명의 가슴은 곧 가슴의 혁명’인 이유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산도 옮긴다는 말은 이것과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다.
수상자들 중에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사연을 겪은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20여 년 전 케냐에서 그린벨트 사업을 펼쳐 대안 노벨상을 받은 생물학자 왕가리 마타이다. 30여 년 전 나이로비 대학교의 젊은 강사이자 케냐 여성연합의 정력적인 활동가였던 마타이는 빠른 속도로 번지던 아프리카 동부의 사막화를 케냐 여성들의 힘으로 막을 수 있으리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시작은 간단했다. 여성들 각자가 몇 그루씩 나무를 심기만 하면 됐으니까. 마타이가 맨 먼저 한 일은 그래서 자기 스스로부터 나무 한 그루를 심은 일이었다. 그리곤 해당 부처를 설득해서 몇 톤의 종자를 제공받은 뒤,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여성들, 특히 메마른 땅 한가운데 있는 가난한 마을이나 대도시 빈민가에서 희망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처음엔 그냥 식물을 어떻게 심고 나무 묘포를 어떻게 운영하면 되는지 말해주는 게 다였어요”라고 회상했다.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 단 한 가지 일이라도 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로 인해 분명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심으면)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테고 나라 곳곳이 더 예뻐지겠죠. 먼지폭풍이 잦아들고 황폐화도 점점 지연될 테고요.”
여자들은 여기저기에 나무 묘포를 조성하고 소규모 사업가들로 변신했다. 거기서 일자리도 새로 생겼고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사반세기가 지나자 이 움직임이 ‘그린벨트 운동’을 일으켰고 사막화에 제동을 걸었다. 그들은 모두 합쳐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결국 독재 정권마저 무너뜨렸다. 머릿속이 내일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했던 생물학자는 이제 조국의 환경부 차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지금껏 대안 노벨상으로 화제가 된 백여 가지의 사업들 가운데에는 작은 기적이라 부를 만한 사연들도 있다. 지속가능한 경제의 세계적인 모델이 된 유기농 농장 세켐이 딱 그런 예다. 2003년 대안 노벨상을 수상한 이집트 사업가 이브라힘 아볼레시는 사막 한가운데 철저히 생태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를 여러 개 세웠다. 사원들의 건강과 개인적인 발전, 근로자의 권리와 공정 거래 원칙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이 기업들은 그 덕에 매년 30퍼센트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이 회사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모두 새 사업과 더불어 점점 늘어나는 사원들을 위한 문화·사회 설비 확충을 위해 재투자되었다. 동시에 이 사업은 이슬람에서 민주주의, 생태, 인권, 전체론적 교육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남과 북의 근본주의자들이 서로 점점 더 큰 폭력을 써가며 ‘문화 전쟁’을 치르는 이 시대, 세켐의 사례는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때로 이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투쟁에서는, 딱 적당한 타이밍에, 그것도 유례없는 방식을 시험할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꽉 움켜쥐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때가 있다. 1990년대 초, 반정부 인사이자 환경 운동가였던 미하엘 주코프는 쇠락한 구동독의 환경부 차관을 맡아달라던 제의를 수락했고, 단 몇 주 만에 수천 헥타르의 땅을 (국립) 자연공원으로 지정해버렸다.
“그 당시엔 자문을 구할 곳도 일을 위탁할 곳도 없었고, 심지어 봉급조차 없었어요.” 그라이프스발트 출신의 주코프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 모든 일이 겨우 몇 주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이제 주코프는 예전 소련에 속했던 변방의 신생 독립 국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최근 10년 사이, 그 공화국들 안에 프랑스 전체 면적을 능가하는 넓이의 자연 보호 구역이 십 여 곳 넘게 조성, 관리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연은 대안 노벨상의 수상 횟수와 맞먹을 만큼 많다. 그리고 이들 사업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분열되고 망가지는 듯 보이는 이 시대에서 희망을 발굴한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들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권 운동가들은 억압에 대항해 싸우고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한다. 과학자들은 점점 세상을 잠식하는 방사능 오염에 대항해 싸우며 재생 에너지를 개발하고 확산시키려 애쓴다. 사회 개혁가들은 사회적 공동체를 재건하고 상생의 생활양식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화 운동가들은 오랜 숙적들이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하고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며 무장해제를 외친다. 제3세계의 단체들은 원주민의 권익과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려 고군분투한다. 피해를 입은 ‘다윗’들이 국제적인 ‘골리앗’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화학물질에 의한 중독과 덩치만 큰 대규모 사업들, 생물 다양성을 해치는 파괴 행위들에 대항해 많은 활동을 펼친다.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지속가능한 사회 모델, 대안경제 형태, 통합적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구상한다. 자급자족을 지향하는 전 세계의 단체들 각자가 더 나아지기 위해 나름대로 모든 방식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미래’로 가는 모든 노선의 중심에는 애초부터 이윤 대신 삶의 질과 인간의 잠재력 계발에 가장 큰 무게를 두는 성장의 비전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세계화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대부분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서 유래한다는 점도 어찌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의 표어는 다르다. 인간을 모든 피조물의 왕으로 보거나 불완전한 자연을 개선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대신, 모든 생명 위에 군림하고 가혹하게 착취하는 대신, 언제나 ‘자연에서 배우자’가 그들의 모토였다. 자연은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이어나가고 자급자족하는 체계를 토대로 한다. 만약 정치적 현실을 자연의 규칙과 한계에 맞게 수정하고 싶다면, 단순히 일부분을 조금 수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예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체계를 자연과 비슷하게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순환과 네트워크 안에서 조직해야 하며, 언제든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스 페터 뒤르는 말한다. 물리학자이자 기초과학자인 그는, 살아 있는 세계의 복잡한 규칙 체계에는 반드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현대과학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것을 역설한다. 경제와 테크놀로지는, 규모만 커지고 통제는 되지 않아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곤 하는 지금의 모습 대신 구체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며, 실수와 오류가 기꺼이 인정되는 체계로 거듭나야 한다. 한 시스템의 안정성 역시 경쟁과 고립에서 유래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이루는 여러 부분들의 다양성과 협력, 상호 의존성을 기틀로 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그 시스템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자급자족하며 위기에도 창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지금처럼 언제 어디에나 경쟁이 난무하는 대신 협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이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자연을 지배하는 대신 사려 깊게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구의 상징이자, 의약 산업에 의존하는 대신 자기 치유를 믿는 연구의 상징이다. 또, 획일적인 세계화 대신 지역에 뿌리를 둔 해결책과 다양성에 승부를 걸고, 제3세계의 전통 지식을 제 1세계의 과학처럼 인정하는 정책과 경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안 노벨상 제정자인 야코프 폰 윅스퀼은 “대안 노벨상은, 북반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과학에 맞는 지혜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남반구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지혜를 보완해줄 만한 과학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을 받은 프로젝트마다 발상과 계기가 다르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작은 공통분모가 있다. 평화 사업이든, 환경 프로젝트든, 인권 단체든, 제3세계 사업이든, 대안경제 형태 운동가든, 재생 에너지 운동이든, 유기농업이든, 통합론적 의료 개혁이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통치자가 아니라 생명의 그물을 이루는 끈과 줄로 이해되었다. 각 프로젝트마다,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과 배려를 잃지 않으면서도 기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드러났다. 칠레의 경제학자이자 대안 노벨상 수상자인 만프레트 막스 네프는 “이 욕구는 오직 지역적 기준 혹은 현장의 기준에서 충족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서는 성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 교수직을 박차고 남미의 빈민 거주지를 찾아가, 가진 것은 없지만 창의성은 누구 못지않은 빈민들이 탄탄한 경제 시스템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환경 보호, 경제, 평화 정책, 인권, 민주주의, 평등, 개발 정책, 보건 정책, 문화적 다양성, 교육, 건강한 공동체… 지속가능성이라는 원칙의 손이 베틀의 북을 이끄는 순간, 빽빽이 짜인 인간사회라는 양탄자를 이루는 새로운 무늬가 생겨난다. 지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은 그런 식으로 항상 각자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 지구 곳곳에서 각 지역의 해법을 찾아낸다면, 저절로 그 결과는 진정 ‘전 지구적’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대안 노벨상은 ‘능력’, ‘성공’, ‘성장’을 가리키는 기존의 기준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안 노벨상은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높게’를 추구하지 않는다. 아니, 정반대로 ‘더 작게, 더 느리게, 더 섬세하게’가 이들의 소중한 기준이다. 여기선 부유한 ‘제1세계’를 세상만사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그저 너무 힘들어서 먹고살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하거나 전해 내려오는 옛 지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제3세계’가 훨씬 더 자주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 그러니 제3세계에서 이 상이 더 큰 영예를 뜻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안 노벨상의 원래 이름인 ‘바른생활상’이라는 표현부터가 가치와 의미의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이 상의 수상자들이 몰고 온 변혁은 고전적인 정파적 프로그램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변혁은 문제의 뿌리로부터 해결을 시도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종종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념, 즉 현대 문명사회가 아직까지 품고 있는 종교적인 근본 신념과 신화에 가 닿을 때까지 아래로 깊숙이 파고들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수상자 중에 정신적이거나 윤리적인 방향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잡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변혁은 구성원들 개인 각각에 영향을 끼치며 직접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변화들이 모여서 결국 사회 전체에 효과를 미친다. 개인들이 마주치는 변혁은 일종의 ‘결별’이다. 눈먼 소비지상주의나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돌아서는 것, 혹은 감정이라곤 일체 허용하지 않는 냉혹함과 통제강박증, 권력과 이윤을 맹목적으로 좇는 심리, 모든 것을 상품과 소비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효율만능·성공만능의 사고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은, 이 세상을 언제든 분해가능하고 조종가능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바라보기보다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계를 스스로 창의성에 의해 진화를 거듭하며 늘 새로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본다. 단순한 효용성보다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그들에겐 더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그저 커다란 전체의 한 부분이며, 나라는 자아가 나 하나에만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자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즉각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영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이성적인 것이기도 하지요”라고 야코프 폰 윅스퀼은 말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더 큰 전체에 대한 소속감이 다시 인류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면, 정치적인 문제들 역시 고차원적이고 영적인 맥락을 얻게 될 것이다.
지난 세월을 보면, 대안 노벨상이 표방하는 핵심적인 가치란 ‘공감’이었다. 당사자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면서도 겨우 사람들이 지갑을 열어 기부하는 횟수나 늘리게 만드는 ‘연민’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문제를 멀찍이 떨어져 팔짱을 낀 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음을 뜻한다. 그 대신 감정이 다분히 포함된 주체적인 입장을 필요로 한다.
근본적인 태도가 그렇게 바뀌면 국제 시장에서 일등을 차지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기계공학에만 온갖 노력을 투입하는 행위 따위는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지켜본다면, 세계화가 우리에게 들이미는 심오한 질문 또한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자연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새로운 답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세계에 대한 비전 역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제시하는 대안의 폭 역시 그저 그런 것에 머물고 말 겁니다.” 니카노르 페를라스의 말이다.
그러므로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은 자신들의 선구적인 제안과 프로젝트를 총동원하여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상을 선도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대하게 여긴다. 가슴의 정치, 평화로운 해법, 협력의 구조를 말이다.
야코프 폰 윅스퀼은 세계 50여 개국의 혁신가 약 100여 명을 선별하여 이 상을 수여했다.
“염세론자가 되기엔 너무나 좋은 발상들이 많고, 낙관론자가 되기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래서 난 늘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들은 ‘가능주의자들possibilists’이라고. 이들은 뭐가 가능한지 눈여겨보고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라면 그것이 바로 영웅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영웅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활동가들은 경탄의 대상이 되거나 찬양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전례이자 하나의 모델로서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가능주의자로 산다는 건, 이 세계의 위태로운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현재 가능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길 기다리지 않고 그냥 자신이 그 일을 해버린다. 어떻게든, 그러니까 창의력과 재치를 살리되 세상을 곧바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 관념 따위는 없다. 가능주의자들은 그래서, 자연의 숨통을 막아놓은 듯한 두꺼운 아스팔트 포장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작은 틈새를 찾다가 힘겹게 돋아나는 조그맣고 푸른 떡잎사귀와 흡사하다. 그들은 어느 한 순간에 부드러운 힘으로 어떤 두꺼운 벽일지라도 쩍쩍 갈라놓는 풀뿌리와 무척이나 닮았다.
이제 그 뿌리들이 점점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대안 노벨상이라는 영예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프로젝트들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의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들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 곳곳에서 커가고 있는 지속가능한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천 개의 매듭이 모여 이루어진 그물처럼 서로 결속되어 있다. 그중 열네 개의 단단한 매듭에 관한 강연과 인터뷰가 이 책에 실렸다. 그것들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점점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창의력 역시 무한대로 성장할 것이다. 대안은 항상 존재하며, 그중 상당수는 이미 실험과 검증을 거쳤다. 선구자들은 우리 모두가 그 다음을 찾아 나설 의무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외친다. 미래는 열려 있다고.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이 거기 있다고.
게세코 폰 뤼프케Geseko von Lüpke
(두 번째 추천의 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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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소개
게세코 폰 뤼프케
정치학자이자 자유 기고자이자 저술가. 방송 편집 프리랜서 및 일간지와 각종 잡지의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근대 세계관, 전체론적인 과학의 접근법, 대안적인 생활 방식, 다문화 간의 대화, 종교, 생태윤리, 근대적 영성 찾기 역시 주된 관심사다. 2006년, 대안 노벨상 수상자인 이집트의 활동가 이브라힘 아볼레시와 그가 이끄는 세켐 사업단을 취재한 공을 인정받아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과 하이데마리 비초레크 초일 장관이 수여하는 개발정책 언론상을 받았다. 또 같은 내용으로 2007년 1월에 비오(BIO) 기자상을 받았다.
페터 에를렌바인
저술가이자 기자. 사회학과 사회심리학을 전공했고, C. G. 융 연구소에서 초청 강사로 일한다. 다문화 간의 의사소통, 전체론적인 관점에서의 평화 사업, 지속가능하고 심층생태적인 세계윤리 등에 관심이 있으며, 괴테 연구소 등 여러 기관에서 국제 세미나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아내와 함께 ‘통합개발연구소’를 운영하며 전체론적인 관점의 심리학과 치유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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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시형
출판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하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인의 사랑』『똑똑한 대화법』『왜 나는 행복하지 못한가』『심리학을 아는 사람이 먼저 성공한다』『승자의 언어』『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가』『상처주지 않고 아이를 꾸짖는 비결』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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