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그는 복도에 다른 여행용 가방들과 함께 놓인 베이지색 가죽 트렁크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밴필드 부인, 이 살가운 여인 마르가리다 밴필드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고 온 잔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밴필드 부인이 집을 보러 오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었다. 그는 이미 그 집을 너무도 잘 알았다. 단출한 방 세 칸짜리 집, 그 방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었고 검박하고 촌스러운 세간과 날카롭고 열정적으로 우짖는 새들의 노랫소리, 베란다와 마주 보는 광대한 계곡까지 모두 다 좋아했다. 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더 내려가면 코르코바도 언덕과 팡데아수카르 산(‘설탕빵’이라는 뜻을 지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적인 바위산―옮긴이)이 바다의 섬들 위로 솟은 거석들처럼 우뚝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풍광이었다.
잘 있거라, 알프스의 꼭대기를 감싸던 안개야, 다뉴브 강으로 떨어지던 차갑게 얼어붙은 석양아, 빈의 호텔들에서 누렸던 빛나는 날들아, 발트슈타인 정원의 아름드리 밤나무 아래를 거닐던 저녁 산책아, 비단옷에 휘감긴 미녀들의 행렬아, 죽은 고기와 피에 굶주린 검은 옷 사내들의 횃불 행진아. 페트로폴리스(브라질 남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도시―옮긴이)는 모든 시작의 공간, 기원의 장소가 되리라. 사람이 한낱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가는 곳, 사람의 발길이 아직 더럽히지 않은 원시적 세상, 질서와 확신이 보장되며 영원한 봄이 지배하는 동산이 되리라.
그는 최면을 거는 듯한 적막 속에서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트렁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이러고 있기도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트렁크 열쇠를 찾았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귀한 부적 다루듯 이따금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열쇠였다. 기차역 플랫폼이나 항구의 부두에서, 앞다투는 인파 속에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기차나 배를 기다릴 때마다 그는 항상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마법은 매번 어김없이 통했다. 열쇠를 만질 때면 그는 옛날로 돌아갔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에 힘입어 그는 마차를 타고 링(Ring, 관광명소가 몰려 있는 빈의 중심가를 둘러싼 환상도로―옮긴이)을 한 바퀴 돌아보고, 부르크 극장 일등석에 앉아보고, 마이슬 운트 샤든 레스토랑에서 슈니츨러(1862~1931,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옮긴이)를 만나고, 놀렌도르프 광장의 맥주홀에서 릴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에르제베트 다리를 한가롭게 노닐거나 프라터 공원의 가로수길을 걷거나 금빛 찬란한 쇤브룬 궁을 보지는 못하리라. 다뉴브 강에 길게 드리운 붉은 노을과도 이제는 안녕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이 왔다.
그는 자물쇠에 열쇠를 끼우고 돌렸다. 가방이 열리면서 일종의 순수한 광채가 뿜어 나왔다. 이 브라질 벽촌에 두 번째 태양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꿈 없는 잠에 취해 있던 그의 영혼이 조용한 흥분에 빠졌고 그와 동시에 심장이 힘찬 박동으로 화답했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뒤에 와 있는 것 같은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테가 이 광경을, 고통 속의 평화로운 한 순간을 언제나처럼 말없이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을 줄 알면서도.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순간의 장엄을 나누었다. 로테는 가없는 고통과 도피, 끊임없는 이주, 불확실한 비자 발급, 눈물 젖은 얼굴과 헛된 탄원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끝없는 행렬을 보면서도 그러한 시간을 초연한 숙명론자처럼 묵묵히 견뎌왔다.
이제는 신성한 안식처도, 고정 거주지도 없었다. 삶은 영원한 방랑의 장이 되었다. 기억할 수도 없는 아득한 탈출기가 되었다.
그는 로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함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무슨 권리로 저 눈의 광채를 흐리고 저 청춘의 아름다움을 퇴락시킨단 말인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여로는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밴필드 부인은 차를 준비해 그에게 한 잔 들 것인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의 이 거절은 사소한 초청도 늘 사양하는 습관에서 나온 그렇고 그런 회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급하고 흥분에 들뜬 거절, 미래를 담은 거절이었다.
1941년 가을, 그들은 마침내 짐 보따리를 풀 만한 곳을 찾아냈다. 이미 몇 주째 그들 부부는 같은 장소에서 일몰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주소를 기재할 수도 있었다.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곤살베스 디아스 거리 34번지라는 간단한 주소였지만, 그들은 런던을 떠나온 이래로 줄곧 자신들만의 주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런던에는 진력이 나서 도저히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로테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병중이라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고 어떤 날은 숨을 심하게 헐떡거렸다. 그녀의 천식은 완치가 불가능했고 잦은 피난살이에 더욱 악화되어 간혹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중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로테는 침착하게 말했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눈부신 곳이잖아요. 당신도 그동안 여행으로 지쳤던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걸요… 어쩌면 여기서 우리의 노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 안은 어둠침침했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복도는 마룻바닥에 낡은 양탄자가 깔려 있는 네모반듯한 침실로 이어졌다. 나란히 붙어 있는 철제 골조의 트윈베드 두 개가 침실 구석을 차지했다. 침대머리 탁자에는 성경 한 권과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창 위에 징을 박아 늘어뜨린 하얀 커튼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침실은 욕실과 통해 있었고 법랑을 칠한 지 오래된 고양이발 욕조 가장자리에는 타월 두 장이 걸쳐 있었다. 부엌에도 꼭 필요한 집기들은 다 갖추어져 있는 듯했다. 식당 한가운데에는 떡갈나무 식탁과 엉덩이 닿는 부분에 쿠션을 댄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고, 닳아빠진 칙칙한 색상의 가죽 안락의자와 책장도 있었다. 벽에는 정물화가 몇 점 걸려 있었다. 그는 방 세 칸짜리 작은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갈로처럼 좁아터진 이 집도 고작 6개월밖에 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반 년 후에는 다시 짐을 싸고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1942년 3월에는 이 집에서 내쫓길 것이다. 라우스(Raus, ‘나가’라는 뜻의 독일어―옮긴이)! 츠바이크 부부는 나가시오! 어딘지 모를 곳에 처박힌 이 집에서의 6개월이라. 빛나는 절망의 공간. 하지만 그에게 불평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의 친지들은 지금도 피바다에서 허우적대며 하룻밤 보낼 곳을 찾아 헤매고, 겨울을 나기 위해 100달러를 구걸하고, 이름깨나 있다는 사람에게 제발 비자를 발급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렁뱅이, ‘책’의 사람들(유대인을 가리키는 표현―옮긴이), 작가 나부랭이 족속으로 전락했다. 페트로폴리스의 이 손바닥만 한 집도 더없이 호사스러운 궁전처럼 여겨야 할 판국이었다.
잘츠부르크의 집은 잊어야 했다. 18세기에 사냥채로 쓰였던 웅장한 카푸치너베르크 대저택은 기억에서 몰아내야 했다. 정면에서 본 모습이 노이슈반슈타인 성(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 동쪽에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건설한 성―옮긴이)에 딸린 별관을 연상케 하는 그 대저택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이었다. 글을 쓸 때나 우울증에 사로잡힐 때, 그곳의 두툼한 벽은 그의 고독을 지키는 파수꾼이었고 그 안에 있노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곤 했다. 그 귀족적인 대저택에서 그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잘츠부르크를 잊어야 한다. 이제 잘츠부르크는 없다. 잘츠부르크는 독일 땅이 되었다. 빈도 독일 땅이 되었다. 빈은 대제국의 주州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 이름도 사라졌다. 오스트리아는 길 잃은 이들의 머릿속에 떠도는 유령이다. 몸뚱이는 이미 죽었다. 그 사체는 영웅광장에서 민중이 총통(나치스의 최고 책임 지위로 1934년 히틀러가 대통령, 총리, 당수의 전권을 장악하고 쓴 칭호―옮긴이)을 연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가운데 매장되었다. 총통은 위대한 꿈을 다시 드높이려고, 유대인 냄새에 찌든 빈에 영광과 순수함을 되돌려주러 왔다고 했다.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에게 제 발로 가서 안겼다. 빈, 누구나 마음이 열리는 맑고 깨끗한 거리, 환상적인 광경들이 펼쳐지던 그 도시가 진흙탕에서 뒹굴고 범죄의 공기에 몸을 말렸다. 빈은 광란의 춤을 추고 돌아온 탕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태어난 브라우나우암인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인니처 추기경에게 서임을 받은 베를린의 왕, 유럽의 황제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돌아오면서 환희에 찬 도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안슐루스(Anschuluss, 1938년에 이루어진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의 합병―옮긴이) 이후 3년이 지났다. 그래도 도망칠 수 있었던 이들의 증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들은 굶주림, 고통, 가난을 호소했다. 빈에 사는 유대인들은 죽음을 당했다. 독일 영토에서 일어나는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이 그가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세월을 보냈던 그 작은 수도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상점은 약탈하고 유대 교회당에는 불을 질렀다. 거리에서 사람을 개 패듯 패고 신심 깊은 노인네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책들은 불살라졌다. 그가 쓴 책도, 요제프 로트(1894~1939,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옮긴이)와 호프만슈탈(1874~1929,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옮긴이)과 하이네의 책도… 유대인 아이들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유대계 혈통의 변호사나 기자 들도 다카우 수용소로 끌려갔다. 법이 공포되었다. 법은 유대인이 공원이나 극장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법은 밤낮을 막론하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유대인이 밖에 나다닐 수 없도록 규정했다. 법은 유대인이 벤치에도 앉을 수 없게 했다. 법은 유대인에게 기관에 스스로 신고를 하라고 강요했다. 법은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박탈했다. 법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집에서 내쫓았으며, 유대인 가문들만 도시의 성벽 바깥에 따로 모여 살게 했다.
독일은 법으로 다스리는 자였다.
비극은 그가 태어난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역사상 최악의 대량학살’을 예언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합병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34년에 그가 짐 가방을 쌀 때에도 비겁한 자라는 욕을 먹었다. 그는 빈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외국으로 도망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전처 프리데리케는 “당신은 상상 추방에 시달리는 정신병자예요”라고 했다. 그는 프로이트가 그랬듯이 잠시 지나가는 불행이라고 착각하며 4년을 더 빈에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4년에 그는 미련 없이 떠났다. 오스트리아 경찰이 숨겨둔 무기를 찾는답시고 가택수색을 했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의 기수가 사는 집에서 무기를 찾아내겠다니!
그는 일찌감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독일에서 사악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분노 어린 연설, 과격한 행동은 보는 눈이 있는 자, 말에 의미를 불어넣는 자 들에게 묵시록을 예고했다. 그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쇠락해가는 종족에 속해 있었다. 그는 사태를 파악하는 본능적 감이 있었고 역사에 해박했다. 여러 시대를 아우르며 메리 스튜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 푸셰와 보나파르트, 칼뱅과 에라스무스에 대한 책을 쓴 그였다. 과거의 비극을 거울삼아 앞으로 다가올 참상을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이전에 있었던 전쟁들과 전혀 다를 것이었다.
사촌들과 친구들,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며 남았던 자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는 배척당하는 유대인 중 한 사람이 대담하게 밖에 나갔다가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들었다. 그 유대인은 옛 향기와 바깥공기를 그리워하다가 찬란한 햇빛의 부름에 끌려 빈의 거리로 나갔다. 그는 빛나는 순간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번화가인 알저슈트라세까지 내려갔다. 전해 듣기로는 그때 행인들이 그의 얼굴에 서린 공포와 얼빠진 분위기를 알아차렸단다. 사람들은 그를 불러 세웠고 군중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질서를, 새로운 체제를 상기시켰다. 둥그렇게 모여든 인파 가운데 한 명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 이윽고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따귀를 갈겼다. 분위기에 휩쓸린 군중은 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이 빗발치고 피가 흘러도 사람들은 악에 받쳐 있었다. 어쩌다 링을 돌아다니다가 플로리안가세까지 올라온 SS(나치스 친위대―옮긴이) 요원 하나가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인파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이 일어났다. 유대인 남자를 에워싼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SS 요원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었고 대낮의 빈에서 실탄을 쏘았다. 검은 옷을 입은 요원은 목표를 겨냥하고 다시 한 번 조준했다. 총알이 쉭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랐고 그저 바깥공기를 쐬고 싶었던 그 사내는 죽음을 맞았다.
그의 손까지 들어온 빈의 일간지에 실린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빈 시청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가옥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유대인 거주 가옥에서 잇달아 증가하고 있는 가스 자살이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칠 뿐만 아니라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요소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미지근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도시의 지붕들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녹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정신은 온화한 주변 풍광에 무릎을 꿇었다. 괴로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도망친 세월들을 잊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을 잊었다. 그는 로테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서도 생각하던 바가 있었다. 수치심이 그를 꿰뚫고 지나갔지만 그와 동시에 잘 지내고 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수치를 잊었다. 로테에게 수줍은 미소를 보냈다. 그는 자신도 상태가 몹시 안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때부터 응접실과 통해 있는 베란다가 그를 단박에 사로잡았었다. 그 베란다에는 뭔지 모를 생기가 감돌았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그곳의 친밀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본문 부분)
-------------------------
작가 소개
로랑 세크직 Laurent Seksik
1962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1999년 『나쁜 생각 Les Mauvaises Pensées』으로 문단에 나왔다. 의사이자 작가인 그의 데뷔작은 전 세계 10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2004년에 발표한 『어마어마한 이야기 La Folle Histoire』로 리트레상을 받았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평전을 쓰기도 한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Les derniers jours de Stefan Zweig』을 통해 탄탄한 전기적 고증과 엄정한 문체로 슈테판 츠바이크가 눈감기 전 마주한 180일의 고뇌와 환희를 생생히 되살려내며, 마치 슈테판 츠바이크가 직접 쓴 듯하다는 평을 받았다.
--------
역자 소개
이세진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싸구려 행복』『안나 송의 이중생활』『꼬마 니콜라의 빨간 풍선』『작가의 집』『길 위의 소녀』『유혹의 심리학』『회색 영혼』『데샹보 거리』 등 10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