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명작의 신화
“아, 이성이여, 진지함이여, 욕정의 지배자여,
성찰이라 불리는 모든 음울한 것들이여,
인간이 지닌 이 모든 특권과 웅장한 것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러야만 했던가!
얼마나 많은 피와 공포의 전율이 ‘선한 것들’에서 빚어졌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1. 「채찍질」의 수수께끼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채찍질」(Geißelung, 국내에는 ‘예수책형’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옮긴이)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에 속한다. 지금까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되어왔지만, 이 명작의 주제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그림 1〕. 이만큼 많이 연구?저술되었을 뿐 아니라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된 그림도 없다. 하지만 제작연도는 물론이거니와 관련자료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67.5×91센티미터 크기의 패널화가 보르고 싼쎄뽈끄로 출신의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에 의해 그려졌다는 사실뿐이다. 매우 드물게도 그는 빌라도의 옥좌 맨 아랫단에 ‘OPVS PETRI DEBVRGO SCI. SEPVLCRI’라는 서명을 새겨넣었다. 이 그림을 제작한 목적과 도상(圖像, Icon) 역시 확실치 않으나, 그림을 주문한 사람으로는 우르비노의 공작인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어왔다. 제작연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대략 1444년에서 1478년 사이로 추정할 뿐이다.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는 대개 작품에 날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연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채찍질」 해석의 핵심문제는, 채찍질당하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왼쪽 후경과 오른쪽 전경의 세 남자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그린 그림은 이전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에도 유례가 없었다.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를 다룬 최근 저작은 이 그림의 도상에 대해 적어도 서른다섯가지 가설들을 열거한다. 이 가설들은 「채찍질」을 봉헌화 또는 몬떼펠뜨로 가문의 자신감을 드러낸 기록으로 해석하거나, 심지어 투르크에 맞선 십자군전쟁을 옹호하고 기독교도의 단합을 요청하는 일종의 선전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림의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시대로 돌아가 역사적 상관관계를 적절히 재구성해야 한다. 수염난 남자는 때로 그리스의 대사나 추기경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선지자나 정치 지도자 혹은 우르비노의 공작이 되기도 한다. 그의 반대편,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 초빠(cioppa, 르네쌍스시대 이딸리아인들이 입었던 외출복—옮긴이)를 입은 은발의 인물에게도 매우 다양한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공작이자 총리, 유대인이자 법률가, 용병대장이자 살인자 등등.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수수께끼 같은 맨발의 청년은 누구일까? 많은 이들이 그를 천사나 알레고리적 인물로 보았다. 루도비꼬 곤짜가의 양자이자 요절한 헝가리왕, 혹은 마찬가지로 요절한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의 후레자식 부온꼰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여러 해석들 가운데 고작 몇가지만을 선별한 것에 불과하다.
2. 살인도(殺人圖)
이 책이 세우는 중심가설은, 「채찍질」의 난해한 도상 뒤에 500년 전에 펼쳐진 한 편의 드라마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르네쌍스식 괴기소설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당연히 이 책에서는 음모와 살인과 전쟁, 그리고 피의 복수와 도망, 망명을 비중있게 다룰 것이다. 르네쌍스시대의 가장 유명한 제후 중 한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바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감각이 섬세한 예술 후원자이자 현명한 정치 지도자라고 칭송한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 백작이다. 나중에 우르비노의 공작이 되는 그가 악당역을 맡는다. 주요 등장인물은 폭군이자 여성 혐오자, 살인자로 비방받은 용병대장, 세번이나 교황이 될 뻔한 막강한 추기경, 궁정인과 인문주의자 들이다. 끝으로 유산과 고향을 빼앗기고 추방된 여성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중심에 있다. 한 사람은 우르비노의 첫번째 공작이자 준수한 외모의 금발 청년 오단또니오 다 몬떼펠뜨로이며, 다른 한 사람은 미술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이자 이 그림을 그린 보르고 싼쎄뽈끄로 출신의 화가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다.
떼베레강 상류의 작은 도시 출신인 이 화가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는 당연히 많지 않다. 게다가 주요한 단서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역사적 상관관계의 아주 작은 흔적들, 즉 오랫동안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이야기의 파편들만이 반짝거릴 뿐이다. 이 자료들은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그림에 관해선 말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다.
범죄학 용어로 말하자면, 「채찍질」 연구가 직면한 딜레마는 범인을 주로 한쪽 방향으로만 추적하려 한 데서 생겨났다. 즉 우리는 먼저 ‘살인자’를 체포한 뒤, 범행에 관한 증거를 끌어모은 셈이다. 그에 따라 완벽해 보이는 증거들이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 서로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료상으로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설명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진술의 과정과 결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숱한 변수들의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그것을 단호히 부정할 문서자료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외에도 전해지는 자료가 워낙 없다보니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면서 수천 갈래로 추정하게 된다.
한가지 미리 경고해두자. 어쨌거나 진짜 범죄 이야기는 단지 행위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즉 이 이야기는 살인과 살해에 관한 숨 막히는 묘사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미세한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일 경우(「채찍질」의 경우, 기둥의 무늬나 그리스풍 수염, 회색 머리), 적절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그것들은 현미경 아래 놓여 정밀하게 조사되고 유전공학적 조사를 받아야 한다. 증거는 여기저기에 사용할 수 있지만, 변호를 맡은 사람은 정말이지 보이지 않는 단서까지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판단을 수정해야 할 위험에 처할 것이다. 요컨대 때때로 ‘범죄술’에나 속하는 증거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독자들은 우리를 따라와야 한다(필요에 따라서는 8장을 참고하라!). 좀더 딱딱하게 말하자면, 나는 엄정한 사료 분석에 따라 「채찍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예술 창조의 모세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고, 르네쌍스 초기의 가장 중요한 그림 한 점이 탄생되는 과정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붉은 옷을 입은 맨발 청년의 정체다. 연구자들은 그가 열일곱살의 젊은 공작 오단또니오 다 몬떼펠뜨로라고 생각해왔다. 화가 요한 안톤 람부(1790~1866)가 우르비노에 머물 때 완성한 복제화에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다〔그림 2〕. 여기서도 이 청년은 ‘오단또니오’로 파악된다. 나는 이 판단이 옳으며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주장이 펼쳐지리라 믿는다. 「채찍질」을 둘러싼 대부분의 혼란은 18세기 이래 정체가 드러난 이 청년이 잊혀진 사실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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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베른트 뢰크 Bernd Roeck
1953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1999년부터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 근대 초기의 도시사 연구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독일학생센터 담당자로 일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그림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역사학의 '도상학적 전환'에 몰두하며 현재까지 연구성과를 쌓아왔다. 2001년 필립 모리스가 수여하는 역사학 분야 학술상을 받으면서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이끌어가는 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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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최용찬
학부와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독일 베를린 기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간 속의 시간』(공저), 『21세기 역사학 길잡이』(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홀로코스트』『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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