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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동중국해에서 살다가 육지로 놀러온 거북이한테 말했다.
“나는 정말 행복해! 가끔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돌 위에서 쉬기도 해. 물 깊이가 적당해서 수영하기에 딱 좋고, 진흙이 있어서 폴짝폴짝 뛰어도 발바닥이 안 아파. 주위를 둘러봐도, 곤충이든 게든 올챙이든 나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아. 나는 우물을 혼자 다 차지하고 이 모든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니까.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야! 너도 여기 놀러 와서 시야를 좀 넓혀보는 게 어때?”
거북이는 개구리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오른쪽 다리를 우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왼쪽 다리를 마저 넣기도 전에 거북이는 우물 안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깨닫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거북이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바다는 너비가 오천 킬로미터도 넘고 깊이는 이백 미터도 넘어. 호우가 내려서 십 년 중 팔 년 동안 홍수가 났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은나라 탕 임금이 집권하는 팔 년 중 칠 년 동안 가뭄이 들었지만 바다는 마르지 않았어. 앞으로도 바다는 홍수나 가뭄 때문에 넘치거나 마르는 일이 없을 거야. 그게 바로 동중국해에서 사는 즐거움이란다!”
거북이의 말을 듣고 개구리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풀이 죽어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 『장자莊子』
1_ 엄마의 직업을 물려받다
“기회가 있으면 노동자가 될 생각 있니?”
“아뇨, 엄마. 왜요?”
나는 하던 숙제에서 눈도 떼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노동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에 중학교 3학년이고, 학교생활도 잘해나가고 있는데!
엄마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수출품인 이슬람교도 예배용 깔개에 술을 꿰매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가족은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부업을 하고 있다. 일을 도우려던 우리 할머니는 예배용 깔개를 손에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할머니는 정말 자주 주무신다. 침대에서 주무시라고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눈을 번쩍 뜨고 일을 하다가 또 금방 잠이 들고 만다.
“리밍 같은 일류 기업이라도 말이니? 거기에 들어가면 평생 밥 굶을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는 오랫동안 리밍기계공장에서 일해왔다. 리밍은 난징에 있는 관영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다. 항공우주산업부처가 관리하는 리밍 공장에서는 약 1만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규모가 큰 데다 무엇보다 군수 공장이라서 누구나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리밍의 직원은 탁아 시설부터 장례식장까지 모든 시설을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식사도 마음껏 할 수 있다. 게다가 샤워장과 이발소도 무료다.
“리밍이라도 전 싫어요.”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보니 엄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엄마는 예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상 쓸 때만 빼고 말이다. 높이 솟은 광대뼈가 매력적인 데다, 약간 처진 눈은 늘 밝게 빛났다. 그리고 둥근 두 눈썹은 초승달을 닮았다. 엄마의 이름은 구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위팡’인데, 엄마와 정말 잘 어울린다. 난감해하던 엄마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어, 샤오리.”
샤오리小麗는 집에서 부르는 내 애칭이다. 물론 나는 작고 예쁜 아이라는 의미의 그 애칭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1980년 12월 초였다. 그해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나는 동상에 걸려 빨갛게 부어오른 손으로 연습장에 영어 단어를 옮겨 적었다. 영어는 정말 매력적이다! 최근에 학교에서 다시 배우기 시작한 이 언어는 중국어와 완전히 달랐다. 중국어는 그림으로 나타내는 상형문자에서 발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자Jia, 家-옮긴이는 돼지를 보호하는 지붕을 갖추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집을 의미한다. 작업하기에 알맞은 정도로만 빛을 내는, 덮개도 없는 전구 아래에서, 속을 덧댄 무명 재킷과 바지 차림으로 우리 중국인 여자 삼대는 창가를 등지고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지역 특성상 추위를 피할 수 없다. 공산주의 도시 계획자들은 중국의 중앙을 횡단하는 양쯔 강 이남에 중앙난방시설을 건설하지 못하게 했다. ‘남부의 성도省都’ 난징은 양쯔 강의 하류에 있는데, 기온이 북부 도시들만큼 낮아지지는 않아도 눅눅한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우리는 추위와 싸우기 위해 뜨거운 물 주머니를 넣어 속을 따뜻하게 데운 밀짚 바구니에 발을 쑤셔 넣었다. 할머니의 발은 작고 둥글둥글했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이 할머니의 발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세 여자의 돈독한 정이 실내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우리 말고 가족이 더 있지만, 이곳에는 없다. 아빠는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 있고 언니 웨이자는 지역 변두리 대학에 다닌다. 그리고 말썽꾸러기 남동생 샤오스는 리밍의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된 가장 큰 주거 지역인 이곳 우딩신촌武定新村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이 마을은 난징을 지켜온 13개 성문 중 하나인 우딩 문 바로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푸른 들판 위에 도시적인 건물들이 제멋대로 들어서고 있지만, 아직은 시골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이젠 나무들이 몇 그루 남지 않은 데다 푸른 들판도 줄어들어 ‘마을’이라는 단어가 주는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전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3~4층 높이의 건물들이 들어선 수십 개 구역에 모여 산다.
우리 집은 4층 건물의 2층에 있다. 성냥갑처럼 좁고, 천장도 낮은 곳에 안방과 쪽방이 하나씩 있다. 노란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벽에는 거의 아무런 장식도 없고, 언니와 내가 학교에서 받아온 상장 두 개와 공장 달력만 걸려 있다. 안방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침대를 의자 겸 탁자로도 사용했기 때문에 늘 이불을 단정히 개어놓았다. 그리고 엄마가 결혼할 때 외가 친척들이 선물로 준 낡은 옷장에는 전신 거울이 붙어 있는데, 있으나마나였다. 복잡한 무늬들이 조각된 옷장은 마치 힘없는 노파의 얼굴처럼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서랍장에는 언니가 코바늘로 뜬 흰색 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는 겉만 화려한 비스킷 통이 놓여 있다. 통 속에 있던 비스킷은 다 먹은 지 오래였지만 장식용으로 계속 두었다. 또 그 옆에는 “노동자가 진정한 영웅이다”라는 마오쩌둥의 명언이 인쇄된 ‘영웅 시계’가 놓여 있다. 이 시계에는 망치를 든 노동자와 낫을 든 농부, 총을 든 군인이 『마오주석어록』을 하늘 높이 흔드는 모습도 인쇄되어 있다.
시계 속의 노동자를 보며 나는 몰래 비웃었다. 노동자? 내가 작업복을 입고 챙 달린 모자까지 쓴다는 게 말이 돼?
3주가 흘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엄마가 잠깐 얘기 좀 하자며 나를 엄마 방으로 불러들였다. 별 생각 없이 따라 들어간 나는 엄마가 방문을 닫자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 집에서는 방문을 닫는 일이 드물었다. 방문을 마지막으로 닫은 때는 자그마치 4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난징외국어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난징외국어학교는 졸업생이 대학에 입학해서 장차 외교관이나 통역사가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종의 예비 학교로 명망이 매우 높은 곳이었다.
“거기 가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니?”
담임선생님의 말에 나는 너무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정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난징외국어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엄마 방은 늘 침침했다. 불을 밝게 켜두면 전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는 할머니와 남동생이 쓰는 방에 더 이상 나를 같이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를 엄마 방에서 자게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엄마가 옆에서 줄기차게 술 장식을 꿰매는 동안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깜빡거리는 8와트짜리 형광등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 것이다. 나는 무서운 생각을 떨쳐보려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수업 시간에 칠판에 적힌 글자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개미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릿해졌고, 나는 결국 검은 테 안경을 쓰게 됐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된 원인을 알고 나를 다시 할머니 옆으로 돌려보냈다. 할머니 침대에는 굳이 불을 켜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가냘픈 두 다리를 움켜잡고 푹 잘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앉은 엄마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이번엔 무슨 일이지? 침침한 어둠 속에서도 엄마의 잔뜩 찌푸린 얼굴과 두 눈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전에 엄마가 했던 말 기억하지?”
엄마가 차분하면서도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목청을 한번 가다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일을 물려받아라.”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람?
“네? 싫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을 참이었다.
“왜 그래야 해요? 난 아직 어리잖아요!”
나는 울먹이며 애원했다.
“엄마는 네 나이 때 노동자가 됐어. 반 살 더 많긴 했지만.”
엄마는 매정했다. 엄마도 학생 때 공부를 잘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게 자랑삼아 푸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엄마, 우리 집은 학교도 못 다닐 만큼 가난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가난 때문만이 아니야.”
엄마는 차분하게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중국은 대혼란에 빠졌고, 경제도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당시 치솟던 실직자 수를 줄이기 위해 ‘딩즈’, 즉 문자 그대로 ‘일 대신하기’라는 임시 정책을 내놓았다. 부모가 퇴직하면 자식들이 그 일을 물려받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책이 1980년 12월까지만 시행된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줄지어 딩즈를 신청하기 시작했다. 엄마 역시 아직 43세라는 팔팔한 나이보통 여성들이 퇴직하는 나이까지 17년이나 남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이미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조기 퇴직을 신청한 상태였다. 엄마는 위험한 산酸 세척 구역에서 수년간 일해왔다. 이번에도 내 의견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엄마가 제출한 딩즈 신청서가 받아들여졌다.
“노동자 되는 거 싫단 말이에요!”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머릿속에 파란 캔버스 천으로 된 작업복과 엄마의 투박한 손이 떠올랐다. 노동자? 물론 그것이 이 마을 아이들의 운명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에게는 더 큰 꿈이 있다.
“난 기자가 되고 싶어요!”
“전에 말했잖니.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고. 기자? 이 나라에서 글 쓰는 건 위험한 일이야. 아빠만 봐도 모르겠니?”
엄마는 계속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엄마에게 아빠는 모든 면에서 짜증스러운 존재였다.
“기자가 되는 건 네 허황한 많은 꿈 중 하나일 뿐이야. 몇 가지만 말해볼까? 넌 조종사나 의료 보조원, 통역사도 되고 싶다고 했어!”
엄마는 말을 참 잘했지만, 나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나 글 잘 쓴단 말이에요. 국어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종종 내가 쓴 글을 읽어보고 복사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나눠주고는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우선 대학부터 갈래요.”
나는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차라리 천국에 가겠다고 하지 그러니?”
엄마의 언성이 높아졌다.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건 알지만, 학교 수준이 너무 낮아. 올해만 봐도 성적이 그게 뭐니? 대입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한 명도 없잖아.”
엄마 말은 사실이었다. 초등학교도 그랬지만, 지금 다니는 중학교도 리밍에서 직원들의 자녀를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나중에는 학교가 시 교육청 소속이 되어 인근 지역의 아이들도 입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부심 강한 선생님들은 이렇게 외지고 열악한 학교에서 근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는 지난해 입시 결과에서 쓴맛을 보고 나서 새로운 교육 체계를 도입했다. 즉,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반을 나눈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등반 학생인 내가 왜 학업을 포기해야 하나?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엄마는 무미건조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번 되뇌어보기라도 한 듯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네가 입학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시력이 안 좋아서 떨어질 거야. 네 언니를 봐, 점수는 높게 받았지만 결국 교사양성학교밖에 못 갔잖아.”
그건 그랬다. 언니는 싱즈 사범학교行知師范學校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곳은 꿈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정규 대학’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언니처럼 시력이 안 좋거나 몸에 다른 이상이 있으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혼란기가 끝나고 1977년에 대학 입학 제도가 다시 도입되면서 모든 정규 대학에서는 건강한 신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대학 입학 지원자를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중국의 정규 대학에서는 입학시험을 통과한 학생 가운데 4퍼센트 미만의 학생들만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아이들은 600명 중 한 명꼴로 대학 교육을 받는 행운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잖아요. 내가 정말 높은 점수를 받으면, 날 받아주는 대학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삼 년만 기다려주면 안 돼요, 엄마?”
나는 언니네 반 학생 중 중국의 옥스퍼드라고 부르는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력이 안 좋았는데도 말이다. 엄마 역시 대학이 우리처럼 평범한 가정에 성공을 보장해주는 몇 안 되는 길이라는 것은 굳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다려달라고? 엄마는 기다릴 수 있지. 그런데 딩즈는 아냐. 정부 정책이란 게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바뀌는 아이 얼굴처럼 변덕스럽다는 거 알잖니.”
나는 엄마한테 대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착한 아이란 곧 말을 잘 듣는 아이를 의미했고, 중국인은 그렇게 순종적으로 말 잘 듣는 아이를 원하고 또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늘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을, 집에 오면 엄마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엄마가 계속 말하는 동안 나는 이해하는 척 고개만 까닥거렸다. 만약 대입시험에 떨어지면 결국 나는 백수가 되겠지. 내가 정말 행운아라면 지역의 작은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시 리밍에서 일자리를? 그럴 리는 없잖아!
관영기업들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군다나 “노동자가 모두를 이끈다!” “노동자는 우리의 큰형님이다!” “노동자는 국가의 주인이다!”라며 각종 신문에서도 관영기업을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집을 한번 봐라. 이게 사람 사는 집이니?”
엄마가 툴툴거리며 침대 옆에 놓인 탁자를 발로 찼다. 탁자 다리 하나가 지지대에서 힘없이 빠져버렸다. 탁자와 침대는 비좁은 방 안을 채우는 유일한 가구들이었다.
“네 아빠한테 의지할 수도 없어. 무능력한 사람이야. 할머니도 점점 쇠약해지고. 할머니는 뇌졸중 때문에 당신 몸 건사하기도 힘들잖니. 할머니가 새우처럼 구부정하게 앉아서 술 꿰는 걸 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 네가 리밍에 들어가면 엄마는 다른 일을 찾을 거야. 그럼 살림도 좀 나아질 거고.”
점점 경직되어가는 내 표정을 본 엄마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샤오리! 무엇보다 지금 엄마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아둬! 왜 너한테 내 소중한 일자리를 넘겨주면서 이렇게 구걸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코를 한 번 풀고 말을 이었다.
“넌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야. 그래서 뭐가 너한테 정말 좋은 일인지 잘 몰라! 잔말 말고 다음 주부터 공장에 나가도록 해. 더는 토 달지 마!”
엄마는 일어서서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 나갔다. 엄마의 쭉 뻗은 등을 보면 늘 고집스러움과 억척스러움이 느껴졌다. 엄마는 한번 마음을 굳히면 말 네 필이 끄는 수레가 달려와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엄마를 따라 안방으로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할머니의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보였다. 할머니는 잠이 확 달아났는지 늘 앉던 자리에 앉아서 술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엄마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투덜거리다가 곧 엄마 방으로 건너갔다.
“싫다고 했니?”
할머니가 속삭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모자를 공중으로 휙 내던져버렸을 것이다. 싫다고 했느냐고요? 내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이미 다 결정됐는데. 보통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기 마련이지만, 지금 나는 엄마의 그 선택으로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고 학대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한테 짜증을 낼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유일하게 끝까지 살아남은 자식인 엄마를 키우고 나서, 손자 손녀들까지 정성을 다해 돌봐주신 분이다. 보통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중국인이 친할머니를 친근하게 부를 때 ‘나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외할머니를 나이라고 불렀다.
“너한텐 딩즈가 제격이야. 대학에 못 가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니?”
할머니가 철퍼덕 주저앉은 나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자주 깜빡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종종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나한테 이 세상에서 제일 고운 할머니다. 어떤 공장에서도 오른쪽에 단추를 여미는 할머니의 우아한 전통 의상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아직도 나비단추 꿰매는 일처럼 까다로운 수선 작업을 전부 직접 했다. 그럴 때 보면 할머니는 푹신푹신한 담요 위에서 웃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언니와 나는 홍위병이 들이닥쳤을 때도 지켜낸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인 할머니의 젊은 시절 흑백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할머니의 멋진 모습을 물려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누렇게 바랜 사진 속의 할머니는 고전적인 미인의 풍모를 띠고 있었다. 달걀형 얼굴에 매력적인 보조개 그리고 자연스러운 곱슬머리는 1930년대 상하이의 멋진 영화배우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할머니는 아직도 부드러운 피부와 칠흑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간직하고 있었다. 작년에 할머니가 정말 뇌졸중을 앓았나 싶을 정도였다.
할머니가 엄마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할머니에게 엄마를 설득해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엄마는 우리 집 여왕이자 독재자였다. 심지어 아빠가 집에 있을 때도 엄마가 모든 일을 결정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려고요.”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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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장리자 張麗佳, Lijia Zhang
1964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중국과 다른 세계 간의 ‘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한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16세에 학업을 그만두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제작하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10년 가까이 공장 일을 하면서 영어를 꾸준히 공부하였고, 1990년에 마침내 꿈꾸던 영국 유학을 떠나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두 딸과 함께 살면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가디언>, <옵저버>, <뉴욕 타임스>, <인디펜던트>, <워싱턴 타임스>, <뉴스위크> 등에 글을 쓰고 있으며, 영국 BBC 라디오 방송과 미국 NPR 라디오 방송에 중국 전문가로 고정 출연하고 있다. 2010년 TEDx베이징TEDxBeijing의 연사로 나서기도 한 그녀는 현재 중국 사회에 대한 뛰어난 분석과 논평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이다. 그녀의 다른 저서로는 『중국은 기억한다 China Remembers』(공저)가 있다. 『중국 만세! Socialism is Great!』는 미국 출간 시 화제를 낳으며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인도·네덜란드·이탈리아·프랑스 등 전 세계 8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http://www.lijiaz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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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송기정
학부에서 중어중문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뒤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 기획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스스로 깨치는 아이들』『쉿! 인형들이 가출했어』『경제 잡학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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