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랑’이라고 말해 놓고 나면 그 말이 가리키고자 했던 사랑은 벌써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뒤이기 일쑤다. ‘사랑’은 닳고 닳아서 사랑 본연의 무게와 빛깔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다른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낡고 헐거운 말에 의지한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동어반복.
문학작품 속에서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이 책을 낳았다. ‘사랑은 무엇’이라는 연역적 규정 대신 ‘이런 것이 사랑’이라는 예시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귀납해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고나 할까. 서른두 개의 꼭지에 서른네 편의 소설과 시를 초대했다. 2009년 4월부터 2010년 3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했던 칼럼 ‘사랑의 풍경’에 실린 글들이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꼭지마다 국내 시 또는 소설 한 작품씩을 다루는 게 원칙이었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꼭지의 글은 신문 연재가 아닌 다른 계기에 쓰인 것이지만 책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보아 여기 포함시켰다. 외국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언급된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과장이라 할 것도 없이 문학작품의 태반은 사랑을 다룬다. 쓰는 이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사랑이 그만치 지대한 관심사라는 반증일 테다. 문학이 어떤 식으로든 삶을 반영하는 것인 만큼, 우리네 삶부터가 사랑을 중심으로 꾸려진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사랑을 다룬 문학작품을 고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가능하다면 사랑의 다양한 양태를 두루 살펴보고 싶었다. 어린 영혼들의 풋풋한 호감의 표출에서부터 생의 단 맛 쓴 맛 실컷 본 늙다리들의 쭈글쭈글한 감정 놀음까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식의 순연한 열정에서부터 냉소와 배신, 이기와 탐욕으로 얼룩진 위악적 사랑까지, 또는 노인과 소녀나 남자와 남자처럼 세상의 오해와 편견 앞에 상처 입기 쉬운 관계까지…
문학작품에 그려진 사랑의 양태가 다양하다고는 해도 그것들은 순조롭고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다. 세상의 어느 구석, 삶의 어느 국면에 그처럼 복된 사랑이 없기야 하랴만, 그런 사랑이 시인?작가 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 무릇 문학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랑이라면 반드시 고통스럽고 일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듯. 그런 곡절과 수난을 거쳐서야만 사랑의 의미와 가치는 역설적으로 확인된다는 듯!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입맞춤>을 본다. 두 사람의 연인이, 알몸인 채로, 부둥켜안고 입술을 포개고 있는 모습은 분명 사랑의 한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 사십오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운 여자의 상체, 상대방의 목과 엉덩이를 감거나 부축하고 있는 팔과 손은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완벽할 정도로 재현한다. 여기에 대가다운 조형적 아름다움이 더해져 작품은 승화된 에로티시즘의 모범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어쩐지 이 작품에서는 아련한 슬픔이 만져진다. 왜일까? 이 행복한 연인들의 모습 뒤로 로댕과 클로델의 불행으로 마감된 사랑의 역사가 오버랩되어서? 아니, 연인이자 스승이었던 로댕에게 젊음과 영혼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바치고 그 자신은 철저하게 파멸해 간 클로델의 고통과 설움이 연상되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낀 슬픔에 로댕과 클로델 커플의 사랑의 역사가 후광으로서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입맞춤>이 사랑의 절정을 보여준다고는 했지만, ‘사랑의 절정’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지속 가능한 평형의 상태일까, 아니면 솟구쳐 올랐다가는 이내 다시 곤두박질치고 마는 뾰족한 점과 같은 것일까. 사랑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하나의 뾰족점이라 상정한다 해도 우리는 과연 그 점에 이를 수나 있는 것일까? 아니, 조각 속의 두 연인은 그에 이르렀을까?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조각 속 두 인물을 바라볼 때, 나는 그들의 저 끝 모를 갈증을 생각한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고, 이빨과 이빨이 부딪치고, 혀와 혀가 엉키고, 서로의 침을 삼키는 것으로 그들의 갈증은 끝이 날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은 마침내 만족을 찾게 될까? 그들의 혀가 상대방의 식도와 위장과 소장, 대장을 거쳐 다시금 몸뚱이 밖으로 삐져나와 연인의 몸을 한 바퀴 휘감는다 해도, 상대방의 혀를 빨아들여 역시 같은 경로를 거쳐서 제 몸을 한 바퀴 휘감도록 한다 해도, 그들의 사랑이 만족해서 물러나 앉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는 적어도 ‘이젠 됐다’는 자족의 경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지향은 완성이 아니라 좌절이나 파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막 봄볕처럼 찬란한 사랑을 시작한 이들에게, 아니 그런 사랑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말은 용납할 수 없는 패배주의자의 망발로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부질없다는 말이냐?’ 이런 힐문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은 아니다. 어쨌든 사랑을 주제로 삼은 책을 내놓는 계제에 그런 주장을 할 까닭은 없지 않겠나. 오히려 내 말은, 그 때문에라도 더욱 맹렬하게 더욱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오래 전 칼릴 지브란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사랑이 비록 절벽과 칼날과 가시를 예비해 두었더라도 그 길을 따라 가라는. 빛과 어둠, 영광과 굴욕이 공존하는 것이 삶의 진실이거늘, 사랑에서도 밝고 화사한 것만을 좇으려 해서는 반편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게다. 고통스럽고 일그러졌으면 그런 대로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름을 따르라. 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전작 『거울나라의 작가들』에 이어 다시 한겨레출판에서 책을 낸다. 담당 편집자 역시 같은 이길호 씨다. 귀한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진 책 제목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사랑할 때 우리는 전 존재를 바친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존재의 무게 전부를 그 시간에 싣는다. 언젠가 그대가 머물 사랑의 시간들에 앞당겨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2011년 이른 봄,
공덕동에서
최재봉
봄을 데리러 간 사내
윤대녕 「상춘곡」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지만, 더디 오는 봄을 데리러 그예 길을 나서는 마음도 있는 법이다. 이 마음의 주인에게 봄은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끌어오는 것이다. ‘영춘迎春’이 아니라 ‘견춘牽春’이라고나 할까. 윤대녕(1962∼ )의 단편 「상춘곡」(1996)의 사내 이야기다.
열흘 전, 실로 칠년 만에 당신과 해후했을 때 당신은 내게 벚꽃 얘기를 하셨습니다. 4월 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남南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사내는 지금 고창 선운사에 내려와 있다. ‘벚꽃을 몰고 올라갈 작정으로’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벚꽃이 양떼도 아닌 터에 이게 무슨 말?
사내가 말하는 ‘열흘’과 ‘7년’의 시간에 주목하자. 열흘 전에 한 만남이 있었으니 그 만남은 7년 만의 것이었다. 만남의 상대는 ‘당신’. 그리고 다시 헤어지면서 다음 만남을 기약했거니와 그것은 ‘벚꽃 필 무렵’인 4월 말이다(‘당신’이 거주하는 포천의 앞산은 벚꽃 개화 시기가 이토록 늦다). 하릴없이 앉아서 꽃을 기다리기가 힘겨워진 사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수 봄을 데리러 걸음을 놓은 것이다.
사내가 선운사에 내려온 것은 4월의 첫날. 그로부터 다시 선운사를 떠나는 4월 10일까지 열흘 동안 그는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 속에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두 사람의 지난 10년 세월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잖아요. (…)
하필이면 왜 이런 때 사람한테 승부를 걸어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87년 2월 중순의 어느 새벽, 갑작스러운 데다가 다소 거칠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내에게 ‘당신’이 항의조로 한 말이다. 청춘 남녀의 나이는 나란히 스물여섯. 남자는 제대하고서 4학년 1학기 복학을 앞둔 처지이고 여자는 영문과 대학원생이자 ‘현역’ 운동권이다. 여자가 말하는 ‘하필 이런 때’가 박종철 고문치사에서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불의 나날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에 눈먼 남자에게 ‘이런 때’란 다만 사랑할 때일 뿐 다른 아무런 때가 아니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겠노라는 그의 기세는 나름대로 성과로 이어져서, 두 사람은 그해 봄 여자의 고향인 고창 선운사 석상암에서 뜨겁게 몸을 섞는다.
그러나 시절은 역시 그들의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변혁을 향해 용광로처럼 들끓는 사회 분위기 속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여자와, 스스로 “나는 그 시절 시대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토로하는 남자가 사랑을 근거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는 그 와중에 석상암에서 생긴 남자의 아이를 지워야 했다. “나를 사랑한다던 자는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옆에 없었다”고 여자가 말할 법도 하지 않겠나.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을 ‘시대’와 ‘사회’를 사이에 두고 어긋난 사랑이라 부르자.
그 다음은 후일담이다. 여자는 남자를 대신해 낙태 수술을 위한 병원행에 동행했던 운동권 선배를 옥바라지한 끝에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시절은 다시 바뀌고, 다른 ‘기회’를 좇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채 지금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두 사람은 피차 생채기를 안은 채 7년 만에 재회했던 것이다. 그 사이 청춘에서 중년으로 옷을 바꿔 입은 이들이 지난 상처를 봉합하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선운사에서 보낸 사내의 열흘은 그 가능성을 염탐해 보려는 시간인 셈이다.
열흘이 지나 사내가 선운사를 떠날 때까지도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그해의 벚꽃은 꽤 늦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의 ‘봄 몰이’는 실패한 것인가. 사내는 여자와의 재결합 가능성을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선운사를 떠나기 이틀 전 절 앞 식당에서 마주친 노 시인 미당 서정주한테서 사내는 ‘한 소식’을 얻어 듣는다. 선운사 만세루가 불에 타 무너지자 사람들이 타다 남은 목재를 조각조각 이어서 건물을 다시 세웠노라고 미당은 알려주지 않겠는가. 그의 시야가 트인다.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개화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만세루의 어둠 속에서 하얗게 흐드러진 벚꽃을 보았으니까. 그의 벚꽃은 불탄 검은 자리에서 오히려 환하게 흐드러지는 종자니까. 선운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올 때 사내의 마음속에는 머지않아 포천 ‘당신’의 집 앞산에 부려놓을 벚꽃이 벌써 만개해 있었다.
(어디까지나 허구의 장르인 소설 속에 미당이라는 실존 인물이 실물대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미당은 윤대녕의 초기 단편인 「국화 옆에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작가가 사랑하는 시인이며, 선운사가 있는 고창은 미당의 고향이어서 이 절 초입에는 그의 시 「선운사 동구」를 새긴 시비도 서 있는 만큼 이런 설정이 아주 억지스러운 노릇만은 아니다. 그런데 윤대녕의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2010)에 실린 「그때 미당을 만나다」라는 글에 따르면 작가는 1996년 4월 초 선운사 앞 식당에서 실제로 미당을 만나 만세루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0년 전에 헤어진 여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으나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미당을 만나게 되면서 고민이 해결되었노라고. “돌아보니 그때가 내 글쓰기에 있어서도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말하자면 글쓰기를 비로소 내 운명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상춘곡」의 사랑은 질풍노도의 사랑이 아니라 관조와 배려의 사랑이다. 시대의 열기와 청춘의 격정을 두루 통과하고 난 뒤, 사위어 가는 화롯불의 온기를 닮은 미약하지만 따뜻한 사랑이다. 「상춘곡」의 주인공들이 기다리는 봄이 더욱 애틋하고 절실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봄은 청춘의 계절이지만 봄을 탐하는 것은 청춘이 아닌 중년과 노년의 몫이기 십상이다. 청춘은 그 자신이 봄이기 때문에 특별히 봄에 매달리지 않는다. 청춘의 푸른 기상이 꺾여 버린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상춘곡」의 사내가 그러하다. 그가 기다리는 봄은 청춘이 만끽하는 봄과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화려하고 격렬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은은한 향기와 품위를 지닌 것이 그 몫의 봄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진실, 목숨)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대해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서문,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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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거울 나라의 작가들』『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제목은 뭐로 하지?』『에드거 스노 자서전』『클레피, 희망의 기록』『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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