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불교 강의
【1강】 불교에 오중五重의 관문關門이 있다
불교는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다섯 가지가 어렵다.
1. 시각
근본적인 이유는 그 발상과 시각 때문이다. 불교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본다. 그래서 창시자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법의 바퀴를 굴리기를 망설였고, 선사들 또한 진실의 조갯살을 함부로 열어 보이지 않으려 한다. 불교는 상식과 진리 사이에 아주 깊은 심연을 설정해놓았다.
우리네 속인들은 “삶이란 인간의 욕망을 존중하고 그것을 최대한 만족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상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저편의 언덕을 그리워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지극히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에 접근하기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2. 다양성
산은 산이 아니라 했던가,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 사람들이 불교를 찾는다. 계기는 여럿일 것이다. 지상적 삶이 시시해졌을 수도 있고, 현실의 고통과 부조리에 깊이 좌절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계기로 불교에 눈을 돌릴 때, 두번째 어려움에 직면한다.
불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해온 생명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불교는 고타마 붓다 이후 2500년에 걸쳐 아시아 전역에 걸쳐 발전되어왔고, 최근에는 서양에까지 그 가르침을 전파시켜왔다.
처음 인도 북동부 갠지스 강가 반경 200킬로미터 정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불교로 발전했고, 반야般若 유식唯識 화엄華嚴 천태天台 정토淨土 선禪 등등의 갈래를 낳았다. 인도의 대승은 나중 브라만교와 베단타 철학에 흡수되었고, 법의 등불은 남북으로 갈려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안에 한국불교도 있다. 그 위용은 개략을 말하고자 해도 아찔할 정도이다. 이 앞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불교인가.”
3. 언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경전에 눈을 돌릴 때 세번째 어려움에 봉착한다. 우선 양에 질린다. 경전만 해도 13세기 팔만대장경이 목판 8만 1천 장이고, 20세기 초 일본에서 펴낸 불교전집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은 천여 쪽짜리 55권에 2천여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이들을 담고 있는 언어의 난해함이 버티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한문인데다, 더구나 불교한문은 중국 고유의 한문과는 용어나 어법, 체제가 전혀 다르다.
거기다 이 번역은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의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의미를 정확하게 전해주지 못한다. 복잡하고 치밀한 사유를 담고 있을수록 그렇다. 이를테면 유식唯識의 교설은 한역漢譯으로 읽기가 매우 까다롭고 애매하다. 현장이 굳이 인도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고, 원효가 중국에 유학하고자 한 것도 그 현장의 신역新譯을 통해 불교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팔리어, 산스크리트, 불교한문, 티베트어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근대 일본의 방대하고 치밀한 훈고적 성과와 구미의 불교연구까지 습득해야 한다. 세상에, 그러자면 한 생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그 앞에서 누가 아득하고 막막해지지 않겠는가.
4. 경험
혹, 몇 생을 거치며 이들 언어를 습득해나가면 불교를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불교 언어의 사다리를 어렵사리 올라간 사람에게, 이번에는 불교가 여기 있지 않다고 말한다. 경전은 진실의 그림자, 즉 경험을 지시指示해주기는 하나, 정작 그 경험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황벽의 비유를 들자면, 말씀은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돈”일 뿐, 그것으로는 눈깔사탕 하나 사먹을 수 없다. 지식은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은 앵무새거나 마군이다. 경험을 떠난 소외된 지식은 도그마가 되고 권력이 되어 나와 남을 망친다. 그 비극은 종교의 역사가 보편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혜능이 『육조단경』과 『금강경 구결』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성自性을 직접 보고, 그 금강金剛의 반야般若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가 바로 경전을‘이해’하는 때이고, 불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후퇴 없이 가지는 때이다. 그때 불교는 구구절절 살아 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울린다. 아니, 우리 자신이 곧 말씀이 된다. 이와 더불어 불교의 지식은 단순하고 간명하게 정돈되어간다. 복잡성이 줄어들고, 산만한 것이 중심을 얻어 정돈되며, 거기서 깊이가 자라난다.
그렇게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하게 된다. “소문과는 달리, 불교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군!” 자신감이 깊어지면, “붓다가 쓸데없이 긴 혀를 늘여 48년간 수고를 했네”라며 콧바람을 뿜기도 한다.
5. 표현
그러나, 아직도 어려움은 남아 있다. 불교는 구경究竟이 아니라 방편이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쓰지만,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금강경』이 구구절절 토로하듯이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여기가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다. 불교를 떠나 자신에게로, 삶 속으로 돌아오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선 불교인 것과 불교 아닌 것이 경계를 허물고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때로 불교 밖의 소식이 더욱 불교적이다. 경허 대사가 일찍이 말했다.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
나는 그래서 불교가 좋다. 비억압과 관용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더이상 근엄하거나 딱딱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수행자는 이제 비로소 불교를,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역사상 뛰어난 선지식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만의 언어를 독창적이고 개성적으로 발휘해나갔다. 교화는 그렇게 ‘당대의 언어’를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요컨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아직 불교가 아니다. 대신에, “내가 본 진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곳에 불교가 있다.
이 첩첩 난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다. 돌아갈 길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 불교를 살리려면 이 중중重重의 관문들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들 관문들은 서로서로 물려 있기에 어느 하나에만 집중할 수도 없다. 문들은 서로 물려 있기 때문에, 요컨대 불교는 결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삶의 바깥이나 인격의 높이 이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구체성에 정직해야 희망이 있다.
우리는 늘 물어야 한다. 경전의 말씀이 나의 이해와 체험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관되고 있는지를. 이 구체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나자신 불교와 소외되는 것은 물론, 거시적으로 한국불교 전체가 생명력을 잃고, 이방의 불교 혹은 다른 영적 대안에 점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지금 하버드의 선사와 베트남의 포교사, 그리고 티베트 망명객의 목소리가 한국불교의 하늘을 덮고 있다. 고마운 일이지만 또한 슬프다. 불교마저 수입품으로 채우고 말 것인가.
한국불교가 그 살아 있는 정신과 제도를 이 궁핍한 시대에 인류의 영적 유산으로 되살려 세계에 수출을 하는 것이 도리어 마땅하지 않은가.
지금은 전 세계의 불교 자원이 수입되어 있고, 나아가 다른 정신적 종교적 수련까지 국경이나 문화적 제약 없이 실험되는 ‘자유경쟁’ 시대이다. 이런 종교의 글로벌 시대에, 원효나 지눌처럼, 저 중중 첩첩의 관문들을 깊이 열어젖히고 불교를 새로 쓸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2강】 누구나 불교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 부재
왜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나서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 관한 한 저는 아마추어입니다. 불교학생회나 수련회에도 나간 적이 없고, 불교에 관한 전문적 커리큘럼을 거친 적도 없으며, 더구나 염불이나 참선을 본격 수련해 깨달음이란 것을 얻은 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를 아는 데는 그런 준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육조 혜능은 그런 정규 커리큘럼이나 경전 지식의 권위가 오히려 불교를 아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만 한 가지 조건만이 필요한데, 그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든 불교를 알 수 있고, 누구든 불교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교頓敎의 뜻입니다. 육조 혜능은 이 마음을 알고 닦는 데 있어, 재사在寺와 재가在家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한국불교의 화두
아마추어가 외람되이 나선 것은 전문가의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입니다. 지금 불교가 설정한 목표는 너무 높고 험준해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다 전문가들의 말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버겁습니다. 이렇게 난해와 모호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번에는 너무 격이 낮고 곁가지인 지루한 이야기들이 번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한편에서는 한문 경전의 용어와 어투를 그대로 외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화두선을 중심에 세워 일상의 대화와 상식의 접근을 근본 차단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가 이 소통의 부재입니다. 스님들과 재가 신도들 사이에도 그렇고, 불교학자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최근 그 틈을 메워보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습니다. 불교를 두고 대학에서의 강독이나 대중 상대의 문화강좌가 많이 생기고 있고, 사설 참선 단체들도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그런 벤처의 노력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절간에서도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를 정착시키고, 논강 등을 열어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을 모색하게 된 것은 크게 고무적인 일입니다. 제 소견에, 참선지도나 템플스테이 등 실참 지도나 문화체험 등은 아주 훌륭하고 앞으로 한국불교의 큰 밑천이자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행입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제가 힘을 보탤 곳은 아무래도 이입理入쪽입니다. 저는 불교의 이치를 다루되, 그것도 ‘아주 낮게’, 어디까지나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너무 수준 높은 논의에, 옛 한문의 거친 어법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을 대중들에게 작은 위로와 이해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강의를 시작합니다.
불성은 잊고 있던 옛 추억과 같은 것
무엇보다 불교가 너무 어렵다는 소문에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불교가 가르치는 마음의 진실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내딛자면, 그 마음은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에 새삼 알 필요도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 수는 없습니다. 만일 안다면, 그것은 마군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상대방이 모르고 있는 것을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가르침이란 본시 내 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指示’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발을 찾아 천리 먼 길을 쫓아온 혜명에게 육조 혜능 스님은 분명히 일렀습니다. “비밀은 이미 너에게 있다.”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마음의 소식은 흡사 방 한구석에 먼지 덮여 있는 어릴 때의 장난감 같은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시선은 세상 사는 일에 고착되어 있어, 한때 순수한 기쁨이었던 그 물건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장난감은 늘 그곳에 있었다. 아련한 향수가 밀려들거나, 누군가가 일깨워줄 때, 그는 거기 그 장난감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우리의 불성 또한 그와 같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알려져 있는 것들입니다. 혜능스님의 권위를 빌리면, “보리반야의 지혜는 본래 세인들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菩提般若之智世人本自有之.” 저는 불교가 노리고 있는 그 지식이, 비록 비밀스럽다고들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특별한 오랜 수련을 통해, 그동안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것들이 비로소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마음의 밝음으로서, 욕망과 분노와 무지의 먹구름 틈 사이에서 늘 빛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돈오는 쉬운데…
그것을 일별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심에 찌든 마음이 잠시 숨을 죽이고, 자비와 동정과 기쁨과 공정함 등의 무량한 네 마음들이 문득 피어날 때, 저녁 고요 속에서 들뜬 마음을 참선을 통해 가라앉히고, 그날 지은 죄가 무겁게 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마음이 먹먹히 일 때, 그때 우리 마음의 본래의 빛이 환하게 떠올라 옵니다. 문제는 그 마음의 빛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깊은 평화와 만족 속에서 더욱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쪽에 기웁니다. 돈오頓悟는 쉬운데 정말 점수漸修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또한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돈오를 이렇게 가볍게(?) 해석하는 데 대해 눈을 흘기시는 분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방패막이 삼자면, 이 또한 제 독단이나 창안이 아니라 옛적 지눌 스님께서 돈오를 해석하신 그대로입니다. 스님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知的이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돈오頓悟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에 속합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적 과정입니다. 깨달음 한 번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마치겠다는 턱없는 과욕과 오만을 버리십시오. 그럴 수는 천만 없습니다. 술과 고기를 마음대로 먹는 경허 대사께 진응 스님이 그 방광색放光色의 연유를 묻자, 대사께서는 천연스레 옛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돈오라, 그래 나 이제 부처와 같지만, 다생의 습기가 깊어서… 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 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요컨대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등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 강의는 불교에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여는 괜한 야단에 법석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 그런 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이야기를 골라볼까 하다가 『금강경』을 골랐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가장 알고 싶은 이야기가 이 『금강경』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1강, 제2강 전문)
--------------------------------
저자 소개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띠풀로 덮인, 동아시아 고전의 옛길을 헤쳐왔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왜 조선 유학인가』『왜 동양철학인가』『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주희에서 정약용으로』를 썼고, 콘즈E. Conze의 『불교 Buddhism』와, 카타마 시게오의 『화엄의 사상』을 번역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