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부름
그것은 내 핏속에서 절박하게 조바심쳤다. 나는 그 부름을 들을 수 있었다. 휘파람 소리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을 어지럽혔고, 울부짖음은 한밤중에도 잠든 나를 깨웠다. 태양의 북소리가 들렸다. 모든 길은 운율에 맞춰 나를 불렀고 모든 새들의 날갯짓은 내게 손짓했으며 얼음 빛깔은 나를 초대했다. 어서 오라. 숲은 기막히게 솜씨 좋은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열정에 넘치는 빛나는 시선을 던지며 민첩하게 춤을 췄다.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모든 나뭇잎은 그 작은 발가락으로 똑같은 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구름을 뚫고 솟아 오른 산봉우리에서 부는 바람은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플루트 연주자였다. 바람이 입술을 적시며 부는 플루트의 소리 없는 멜로디는 나를 위태롭게 유혹했고, 소리의 지평선을 동경하는 내 귀는 그 연주를 들으려 팽팽히 곤두섰다. 그것은 야성의 천사가 보내는 강렬하고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 날아라. 삶, 정신, 언어, 야생적인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 야생의 모든 것은 “원시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아오를 때 공기가 주는 느낌이 어떤지 알고 있다.
이 책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경의 결과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여행을 하면서 점차 뚜렷하게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다. 야생성을 찾아 떠난 이 여행에서 내가 구한 것은 깔끔한 사진첩에 끼워질 멋진 사진 속의 장관이 아니었다. 예술이나 섹스, 사랑 그리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야생성에도 그 속에서 일관되게 고조되는 울림이 있다. 나는 바로 그 속성을 찾고 있었다. 야생성을 마셔버린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야생성에 취해 있었고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아예 흠뻑 취해버렸다.
나는 야생의 의지를 찾아 나섰다. 그 의지가 야성적인 아름다움 속에, 자연력(자연계에 작용하는 온갖 힘―옮긴이)의 생기 속에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고 싶었다. 야생성은 생명에 대해 단호하다. 포획되어 갇힌 야생성은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순수한 자유나 순수한 열정, 순수한 갈망처럼 근원적이다. 야생성은 그 자신의 선언문이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전혀 모른 채 이 책을 시작했다. 얼마나 힘든 여정이 될지, 얼마나 많은 혼란의 나날과 고독한 밤을 마주하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내 근원적인 자아를 믿어야 한다는, 예리한 칼날 같은 요구 외에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무모한 순간에도 예민한 분노를 느끼며 절대 명령의 칼날 위에 살고 싶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짧고도 전격적인 점묘화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 어떤 다른 일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된 길 옆으로 나란히 나만의 길을 깔고, 야생성으로 달아오른 내 열정을 마땅히 속한 곳으로 보내, 그 길고 사랑스러운 비단 실타래를 불과 얼음의 길에 풀어놓으려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피는 붉디붉은 대지에서만 진정으로 세차게 흐를 수 있으며, 한 무리 물고기 떼와 헤엄칠 때만 심오한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히말라야산맥을 쑥 던져 올려 하늘을 찬양하게 한 고대 대지의 힘찬 원기와 마주할 때까지 산을 오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야생성에 대한 향수로 몸이 달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았을 때 매우 친밀하게 하나로 공명하는 소리처럼 내 자신이 그 안에 속해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야생성으로 채워져 있다. 인간의 영혼은 진정으로 살기 위해, 과실을 따서 즙을 흘려가며 입 한가득 빨아먹기 위해 근원적으로 야생성과 충성하는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이미 길들여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페로몬(같은 동물 종의 개체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사용되는 체외 분비성 물질―옮긴이)과 직관에 흐르는 야성, 땀과 공포에서 풍기는 야성, 혀와 언어에서 들리는 야성, 음부와 음경에 고여 있는 야성. 이것이 첫 번째 계명이다. 야성의 천사에게 충성하라.
나는 빙하의 얼음에 뺨을 대보고 온천수를 직접 마시며, 인간의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전망을 보고 싶었다. 이 감정은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맹렬한 감정이었다. 나는 영혼의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삶에 부딪고 싶었다.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 손톱에 낀 딱딱한 진흙 부스러기, 맨살에 내리쬐는 태양, 입술을 찢는 얼음, 몸속으로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조수를 느끼고 싶었다. 완전히 잠기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나는 고대 그리스 땅의 네 가지 원소에 따라 여행의 밑그림을 그렸다. 흙, 공기, 불, 물, 여기에 마치 엄연한 원소 가운데 하나라도 되듯 얼음이 추가되었는데, 사실 얼음은 자연의 중요한 원소 가운데 하나다. 오히려 전혀 쓸 계획이 없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이었다. 마치 제5막이 끝나기 직전 능글맞게 웃으며 그러나 날카롭고 진지한 눈빛으로 무대 위로 뛰어오르는 궁정의 어릿광대처럼, 마지막 장은 스스로 제자리를 헤집고 들어앉았다. 그리고 가장 심오한 질문, 야생성과 생명의 본질적인 관계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시간, 돈, 에너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 부었다. 푸르른 빛깔로 가득한 여행도 있었고, 죽은 듯이 을씨년스러운 여행도 있었다. 아팠다가 나았다. 웨스트파푸아(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원시의 땅으로 뉴기니 섬의 동쪽에 위치하며,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분쟁 지역―옮긴이)의 혁명 전사들을 만났고, 그 고지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쓰러지는 순간도 있었다. 웃을 때도 있었다. 내가 만난 식인종들은 무한히 친절했고 그들을 개종시킨 살인마 같은 선교사들보다 더 믿을 만했다. 월경 중에 여행하기에는 정말 최악인 곳들도 갔다. 반딧불을 등 삼아 글을 썼고 북극곰이 잠든 빙산에 배의 닻을 고정시켰다. 나방의 유충을 먹었고 바다 집시들을 찾아갔다. 나는 그 카리스마의 이면에 언뜻 느껴지는 부드러움에서 야생성의 역설을 발견했다. 야성적인 것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온화하고 또한 관대하다. 기이하게도 달콤한 결말이지만, 결국 나는 야생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단독 탐험’의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복’하고 싶었던 산도 없었고, 어느 사막을 ‘최초로 횡단한 여성’이라는 칭호도 싫었다. 그저 내가 찾아간 장소, 그곳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었다. 그 땅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나는 자연 속에 살았던 원주민들과 우리와는 다르게 자연을 ‘집’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생각을 무시한 채, 많은 유럽-미국계 작가들이 자기 식대로 황야라고 쓰는 것에 대해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분개했다. 그 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연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허”하다며 무식을 드러낸 19세기 유럽인들이나, 더 현대로 와서 원주민들을 ‘감염’시켜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가’ 족속들에게 나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나는 아마존의 주술사로부터 정신의 황무지, 그 어두운 우울함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배웠고 야성의 눈과 재규어의 눈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북극 지방의 이누이트로부터는 복잡한 얼음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모든 지형이 곧 지식임을 배웠다. 고래와 돌고래로부터는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어쩌면 마음에서 내뿜는 소리일지도 모르는 음역계의 폭에 대해 배웠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는 사물의 근원성에 대해, 그리고 땅이 얼마나 심오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지에 대해 배웠다. 웨스트파푸아인에게는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배웠다. 불교 승려에게서는 얼음 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떨어져도 웃는 법을 배웠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입문 과정이며, 영혼의 황무지에서 길을 잃은 젊은이에게 유일한 약은 땅이라는 사실을 나는 전 세계 원주민들로부터 배웠다. 다른 곳에서도 나는 송라인(songline, 땅의 경계표지와 길을 찾아가는 미묘한 기준을 제시하는, 구절이 연속되는 형태의 구전 노래―옮긴이), 즉 땅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음악의 형태로 마음속에 땅을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여정이 깊어질수록 나는 야생의 자연과 황무지를 구별해야 할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 밑동까지 벌목된 숲과 같은 황무지는 비극을 전하는 비문인 반면, 야생의 자연은 풍부한 꾸밈음으로 가득하고 배꼽이 빠져라 웃게 만들며 성욕에 경의를 표하는 희극의 난장판이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정열에 들떠 콧노래를 부르는 인류와 자연의 관능적인 관계와 그리고 물을 갈구하는 모든 뿌리들의 목마름, 봄의 태양을 갈망하는 수선화, 이 모든 종들의 가장 오래된 열정을 품은 야생성은 노골적으로 성적이다.
혹자는 인류를 자연에 찍힌 오점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은 야생성이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형태다. 그것은 얼음 결정체처럼 기묘하게 아름답고 물처럼 생명력이 풍부하며 공기처럼 영감적이다. 친밀한 야생성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달콤한 밤알처럼 핵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반항적 영혼에 담긴 야생성은 깃털 옷을 입을 권리고 별을 마시고 달을 가질 권리다. 야생성은 우리 모두를 향한 원시의 으르렁거리는 인사다. 우리 모두와 어릿광대에게, 방랑하는 건달 예술가에게,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에게, 유랑 악사에게, 화난 집시에게, 피를 흘리는 여자에게, 배낭을 멘 히피 소녀를 부러운 눈길로 슬프게 쳐다보는 친절하고 피곤에 지친 눈빛의 양복 입은 신사에게. 우리 모두에게 야생성은 모든 새벽의 여명이고 행운의 하늘이며 노랫소리다. 들으려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우리의 귀는 그 정도로 예민하다. 우리의 현은 지구와 똑같은 음높이로 맞춰져 있고, 우리의 리듬은 달의 온 구석구석처럼 우아하며 불가항력적이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자연의 힘이다. 때로는 빈들거리는 예술이나 유목민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다시 배울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들을 잊지 않았다. 당신의 악기를 선택하라. 단지 걸으면서 연주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담장을 고치며 Mending Wall」라는 시에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담장을 사랑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내 안에도,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이들의 가슴에도 담장을 경멸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굳이 담장일 필요는 없다. 울타리나 금지구역, 골프장일 수도 있다. 그 무언가는 레이스 커튼이 쳐진 미적지근한 세상을 경멸한다. 또한 그것은 텔레비전을 통해 조장되는 삶의 둔감한 무기력을 경멸한다. 그러한 삶은 두 가지 의미에서 스크린(screen, ‘화면’이라는 의미 외에도 ‘차단하다’의 뜻이 있다―옮긴이)의 경험이다. 하나는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삶 자체가 차단되는 측면에서 그렇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유년기부터 잘 훈련되고 길들여지는 세상, 냉난방기가 끊임없이 가볍게 돌아가고 창문은 영구히 닫힌 이 클로로포름의 세계를 잘 안다. 내게 학교는 우글우글 몰려든 젊은이들에게 세속적 만족을 지향하는 조심스러운 삶을 가르치는 훈련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복도로 나뉘어 있었다. 관습의 복도, 한 학기에서 다음 학기로 연결된 복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통하는 복도, 적당히 수학을 공부하다가 적당한 회계사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복도. 지적인 차원에서 볼 때 복도는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생각들이 진열된 슈퍼마켓의 통로였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 복도들은 기존의 정형화된 우파적 관점을 제공했다. 문밖으로 나서면 이 복도는 모험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사고도 없고 모든 것이 어중간한 비슷비슷한 상태, 말하자면 밍밍하고 항상 미적지근한 반半탈지유로 대표되는 포장도로로 연결된다. 그곳에서 감정은 살균되어 나왔다. 격렬한 슬픔과 즐거움은 어쩐지 불결한 세균 같은 비위생적인 격정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종족의 경계(물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지적 경계까지) 안쪽인 보호구역 안에 머무르며 일상에 의해 바깥의 진짜 세계에 대한 욕구가 질식되는 것을 방관하도록 배웠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저 너머에서 서성거리는 미지의 세계, 저 건너편의 황량한 사막을 두려워하라고 배웠다.
우리는 골프를 배웠다. 골프는 길들여진 세계의 축소판이다. 골프장에서 자연은 거세된다. 잔디를 세탁한 덕분에 잔디에는 진흙이나 벌레, 검은딸기, 쐐기풀, 엉겅퀴 하나 보이지 않고 깨끗하다. 손쉽게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는 기계 덕분에 더러움이든 아름다움이든 생명과 관련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골프는 바깥세상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더는 풀밭이라 할 수 없는 조립식 매트 잔디는 살충제와 제초제로 처리되고 합성수지로 덧입혀져 불임 상태인 가짜 녹색을 띤다. 이 잔디는 노래하지 않는다. 바람은 잔디 사이를 훑고 지나갈 수 없다. 표정을 상실한, 바보스러운 신록은 획일화된 사고에서 나온 활기 없는 단조로운 가락으로 그저 흥얼거릴 뿐이다. 골프티(golf tee, 각 홀에서 제1타를 칠 때 공을 얹어놓는 장치―옮긴이)보다 더 공허한 단어도 없다. 알려진 어원도 없는 이 단어는 쓸데없는 치장에 불과한 언어적 매니큐어다. 전 세계적으로 골프는 막고 둘러싸는 행위의 대표적인 형태다. 원래 공유지였던 공간에 부유층이 울타리를 치고 농노들과 묘목을 짓밟고 뭉개어 정복한 결과다. 이 야생성의 적은 자연에 대한 인류의 절대적인 지배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고전파인 모차르트가 마치 위대한 낭만파의 첫 번째 음악가인 것처럼 차라리 그의 작품을 연주한다. 정말 그랬더라면 아마 더 적절한 음악사적 경계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러다가 피아노가 산산이 부서지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베토벤의 격정과 열정을 (형편없이) 연주했고, 그 차가운 수학 같은 바흐의 작품을 싫어했다. 나는 삶에 제공된 쾌적하고 수월하고 편리하고 편협한 방식에 대해 불가피하고도 확고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인생을 주저하는, 숨 막히는 불감증의 삶을 의미했다.
나는 허기를 느꼈다. 언제나 배가 고팠다. 무엇이든, 나는 더 많이 원했다. 어린 시절 그것은 격렬한 불만으로 표출되었다. 이 작고 좁은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 전부에 가깝기는커녕 충분에서도 한참 모자란다는 느낌. 비록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지만, 바깥세상에는 광활하고 거친 세계가 존재했다. 먼 곳에서 그어진 성냥불처럼 미약하게 흔들리는 불빛이었지만, 그것을 향한 욕구는 나를 꽉 채웠다.
내가 자란 집에는 서재가 있었다. 벽 한 면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책이었다. 아이가 볼 만한 책은 내 손이 닿는 책장 선반에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다 읽었고 언제나 손이 닿지 않는 위쪽의 선반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더 먼 나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노란색 책등에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고 쓰여 있던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위 칸으로 손을 뻗기 위해 서류함을 밟고 책장의 선반을 딛고 올라섰다. 열 살짜리 꼬마가 한 선반에는 손가락 끝을, 다른 선반에는 발가락을 걸친 자세로 3미터 허공에 매달린 채 티베트에 닿았다. 그러나 한쪽 손을 들어 그 책을 집는 순간 난 바닥으로 떨어질 터였다. 오랫동안 나는 그 책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티베트는 내게 말을 걸었다. 팀북투(Timbuktu,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말리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옮긴이)도 마찬가지였다. 라플란드(유럽의 최북단 지역)가 내 욕망의 나라들에 더해졌다. 라싸, 사하라, 히말라야산맥. 시베리아와 만달레이(Mandalay, 미얀마 중부 만달레이 주의 주도―옮긴이)로 가는 길.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외몽골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했을 때, 나는 흥분으로 몸이 짜릿해졌다. 외몽골이라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곳은 갑자기 ‘퉁’ 소리와 함께 이제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외몽골은 세계의 맨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내게 울띠마 뚤레(Ultima Thule, 고대의 항해가가 브리튼 섬의 북쪽에 있다고 상상한 섬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로 세상의 끝이나 아득한 목표, 극한, 극점을 이른다―옮긴이)를 주었고,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백분율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홉 살 때 동네에서 가장 울창한 정원에서 잠을 자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도망친 적이 있다. 1만 2140제곱미터가 넘는 그 정글 속에 한 방랑자가 몰래 숨어 산다고 했다. 열일곱 살 때도 도망쳤다. 히치하이크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밤에는 텐트를 치고 잤다(나는 잘 달린다. 한번은 발에서 피가 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뛴 적도 있다). 열여덟 살 때는 티베트에 가려고 했으나 인도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스물네 살 때는 태국에 가서 미얀마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북부 숲에서 6개월간 카렌Karen 고산족과 함께 살았다.
그 시기는 내게 매우 뜻깊다. 내가 처음으로 건물이나 가게, 돈, 마을, 계획 따위도 없이 진정으로 살았던 때였다. 대지 위에서 계절을 온전히 느끼며 자연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자연이 아닌 것이 없었다. 사냥한 것을 먹었다. 한번은 살쾡이를 먹었고, 대나무쥐와 멧돼지, 그 고환까지 먹어보았다. 모든 것에 밥이 곁들여졌고 때로는 밥만 먹었다. 그 시기 동안 나는 근본적으로 삶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꼈다. 물은 수도꼭지가 아닌 강에서 길어 마시고, 과일은 가게가 아닌 나무에서 따 먹었다. 삶은 그 핵이 보일 정도로 모든 것이 벗겨지고 깎여졌다. 비록 좁은 오솔길이었지만 막힌 곳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불처럼 살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그 불에 크게 데기도 했다. 이질을 앓으면서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돌았고, 결국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에 실려 갔다.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기어 내려오느라 거의 모든 발톱이 빠진 적도 있다. 한번은 동상에 걸렸고, 극단적으로 무모하게 산을 끝까지 오르다가 고산병에 걸리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에 세계 정반대편의 정글에서 철저한 고독 속에 흐느껴 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나는 안다. 혼자서 아플 때 느끼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안다. 라다크에서 갑작스럽게 지독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의식을 잃기 직전에 여권 번호와 아프게 된 경위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의료보험 내역을 휘갈겨 적은 메모를 내 셔츠에 꽂아둔 뒤 문을 열어놓고 이틀간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다행히 친절한 호텔 주인이 나를 발견하고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커다란 생강차 주전자를 가지고 올라와주었다.
야생성 또는 야생의 자연에 이끌리는 내 감정은 무언가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그것을 향한 충동이기도 했다. 해방을 향한 충동이었으며, 그 순수하고 생생한 세계를 향한 충동이었다. 동시에 본질적인 자유와 물, 불, 얼음, 흙, 공기의 자유를 향한 충동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정치적이다. 자유의 관념과 자유가 구현되는 현실의 장소는 둘 다 자연이 자유로울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자연은 도로 건설, 벌채, 채굴에 의해 막히거나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격분했다. 이제 개인적이자 정치적인 나의 감정은 격렬한 사랑이자 맹렬한 분노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생기 없는 소비자 문화를 위해 저질러지는 잔혹함에 대한 분노다. 새들이 먹을 씨앗이나 날개를 쉴 울타리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다. 하늘을 날다가 지친 새가 바싹 마른 땅으로 떨어져 죽게 만드는 공장형 농업에 대한 분노다. 마을 끝자락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10대들이 불장난을 즐기는, 노숙자가 잠을 자고 예술가가 평생 빈둥거리는 자유로운 공간, 이런 공유지의 마지막 남은 틈새까지 비집고 외곽에 들어서는 쇼핑센터에 대한 분노다. 이제 공유지는 판매된다. 또 다른 폐쇄 공간이 생긴다. 공터에 피던 흔한 들꽃이나 짹짹거리는 참새는 이제 보기 힘들다. 아마존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고 북극을 과열된 교외 주거지로 만드느라 배만 불룩 튀어나온 그러나 속은 텅 빈 황무지의 행위자, 인류에 대한 분노다.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의 일이다. 긴 자동차 여행을 하던 한밤중에 오빠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 혼자 잠에서 깨어났는데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나는 몇 시간이고 그 달을 바라보며 황홀감과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빠져들었다. 내가 달의 딸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밤, 모든 사람의 달이기도 한 그 야생의 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만큼이나 온전히 나만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달은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다. 파편 덩어리, 종교, 국수주의적 교만의 깃발들이 처박히는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주 바깥쪽의 궁극적인 공유지, 그 절대 자연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 총부리가 겨누어지고 모든 별들이 탐조등처럼 보일 때까지 무기화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진영만이 존재한다. 불모지의 대리인과 야생의 자연을 사랑하는 자, 생명을 구하는 진영과 생명을 짓밟는 진영이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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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제이 그리피스 Jay Griffiths
2003년 반스앤노블의 디스커버 어워드 논픽션 부문 수상작 『시계 밖의 시간』을 쓴 작가다. 영국에서 “Pip Pip: A Sideways Look at Time”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나온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에 출판되었다. 그리피스는 <런던 북 리뷰 London Review of Books> <가디언 The Guardian> <옵저버 The Observer> 영국의 대안 잡지 <아이들러 The Idler> <와일드 어스 Wild Earth> <와일드 덕 리뷰 Wild Duck Review> 미국의 진보적 잡지 <우트네 리더 Utne Reader> 등에 글을 기고해왔다. 사회주의적이고 페미니즘적이며 생태주의적인 작품을 쓰는 제이 그리피스는 독창적인 작가이자 일급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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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전소영
호주 매쿼리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뒤 호주에 지내며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행복한 순간을 살아라』『마지막 순간까지 행복을 즐겨라』『위대한 영감』『언어의 진화』『경제학이 숨겨온 6가지 거짓말』 등이 있다. 현지 번역가들의 모임인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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