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밀버그의 서론
하일브로너 교수는 그의 오랜 이력에 걸쳐 25권의 책을 썼지만, 그가 가장 높은 가치를 두었던 것은 『세속의 철학자들 The Worldly Philosophers』과 이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였다. 로버트 하일브로서는 이 12판을 개정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하일브로너는 사회 과학에 대해서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기초로 삼는 토대였다.
“경제학의 목적은 경제생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하일브로너는 어디에선가 쓴 바 있다. 그는 당대의 사회를 이해하려는 이는 누구든 여러 사회들의 역사와 사상의 역사를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는, 물질적 조달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풀기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에 있어서 독특한 단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다른 사회들이 각각 이 경제적 문제에 어떻게 맞섰던가를 알게 되면 오늘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우리의 노력 또한 큰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곧 아시게 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고유한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다른 사회적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계속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일브로너는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그와 독립적인 여러 사상, 정치적 투쟁, 윤리적 규범들에 의해 좌우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경제적 충동과 경제적 제도들에서 역사의 모든 원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이는 그 경제적 여러 힘들을 길들일 정치적 의지와 정치적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핵심은 경제적 힘들만으로 사회적 변화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제적 변화를 이해하려면 경제가 묻어 들어 있는 사회적 도덕적 맥락을 의식할 필요가 있음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 대부분은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맞추어져 있다. 중세 사회에서의 자본주의의 기원, 새로운 사회 계급들의 창출, 생산물과 생산 과정들을 혁신하려는 성향, 그리고 오늘날 지구화와 정보 혁명에 의해 또 다시 일어나고 있는 소용돌이 등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주제들이다. 자본주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각각의 경우마다 경제적 힘들과 비경제적 힘들이 포진하고 있는 특정한 배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의 로웰Lowell에 있었던 초기 섬유 공장과 21세기 멕시코의 치와와Chihuahua의 자동차 엔진 공장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양쪽 모두 기계적 공장 체제로 운영된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다르다(사용되는 기술, 운영의 규모, 필요한 노동 숙련, 노동 조건, 법적 환경, 외국 경영자의 역할 등). 이로 인해 우리는 경제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장에 기반을 둔 사회의 기원 그리고 오늘날 지구 전반에 공존하고 있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자본주의와 같은 주제들이 여기에 들어갈 것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형태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 각각의 형태 모두가 역동적이라는 점 즉 항상 끊임없는 변화의 와중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종종 긍정적 부정적 요소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경제 성장과 빈곤, 부의 확장과 공해 수준 상승, 기술 혁신과 직업 안정성 감소, 소비의 안락과 보건의 악화 등은 모두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1700년대 후반에 아담 스미스는 이미 이를 경제적 진보의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비용이라는 점에서 “진보의 역설”이라고 포착하였다. 이렇게 사람 정신을 빼놓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하일브로너는 이렇게 요약하였다.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독특함은 그것이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를 발생시킨다는 점이지만, 이러한 역동성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으뜸가는 적敵이다.”
하일브로너는 현대의 경제 이론 대부분을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여러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사회적, 심리적, 도덕적 힘들의 풍성한 지평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복잡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 경제 이론은 이에 대한 해명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대개 회피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관습적인 경제학의 수사라는 베일을 벗겨보고 나면, 우리는 그 아래에 신뢰, 신앙, 정직성 등등과 같은 전통적 행태의 하부 구조가 버티고 있음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은 저 사회의 은폐된 권력 구조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시장 체제 작동에 필수적인 도덕적 기초가 되는 것이다.” 하일브로너는 오늘날 경제학 교과서에서 이 “자본주의”라는 어휘조차 사라지고 있는 사태를 염려하였다. 그는 경제학이 다음과 같은 정치 경제학의 큰 문제들에 답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제를 강력하게 만드는 데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제 발전은 건강한 자연 환경도 함께 생산해낼 수 있을까? 세계적 빈곤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경제적 지구화는 과연 국제 분쟁을 줄이는 데에 기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분쟁들을 낳고 있는가?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목표 하나는 이러한 오늘날의 절박한 문제들에 적실성이 있는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왔던 물질적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극적인 사회적 힘들을 다시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이다. 이 책의 기초가 되고 있는 기초적 생각은, 우리가 현재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고 또 우리가 직면하게 될 미래의 경제적 도전들을 꿰뚫어볼 수 있으려면 역사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일브로너가 이 책에서 이루고자 했던 바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으로서 경제 및 사회생활이 겪어온 극적이고도 때때로 심히 고통스러웠던 변화들을 서술하는 것뿐, 이보다 높은 야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12판 또한 목적이 같다. 중국의 폭발적 경제 성장과 수출의 거대한 성공, 부자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구 증가의 감소와 이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이민 과정에 대한 사회적 압력,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서비스의 아웃소싱 그리고 이것이 선진국 나라들의 노동과 임금에 대해 갖는 의미 등 우리의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 경제의 큰 변화들을 우리는 이 책에서 포착하고자 했다. 이번 판에는 컴퓨터와 통신 기술의 혁신에 기초하여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정보 경제가 가져올 경제적 결과들의 의미를 평가하는 장을 하나 추가하였다. 이 장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18세기, 19세기, 그리고 세계의 각각 다른 부분에서 20세기에 걸쳐 벌어졌던 산업 혁명과 비슷한 제4차 산업 혁명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과 관련하여 최근의 추세를 보여주기 위해 표와 그림을 다시 준비하였다.
나는 나의 친우이자 동료인 로버트 하일브로너를 잃게 되어 큰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놓고 그와 함께 긴밀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하일브로너 교수는 그의 마지막 날까지도 현대 경제학에 대한 엄혹한 비판자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그의 인격적인 따뜻함, 친절함, 인간미, 평등과 기회 균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절박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깊고도 진지한 논쟁을 즐기는 태도 때문에 경제학자, 사회 과학자, 학생들은 물론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대중 일반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제1장 경제 문제
이 책에서 탐구하려는 주제와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곧바로 과거의 경제를 살펴보는 작업으로 들어가자고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기다려주시기를. 경제사를 더듬어 올라가는 작업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는 먼저 경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또 먼저 경제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고, 또 경제의 문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 대답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경제학이란 모든 인간 사회에 나타나게 마련인 과정 즉 사회의 물질적 안녕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단순 명료하게 말한다면, 경제학이란 인류가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확보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런 주제를 그것도 역사적으로 세밀히 살펴본다는 것이 그다지 흥분이 끓어오를 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역사”라고 불리는 것은 보통 엄청난 대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장관의 대행진이니,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조달했는가 따위의 소박한 문제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역사책을 펼쳐보면 권력과 영화榮華, 신앙과 광신, 사상과 이념 등 인간 연대기의 거창한 주제들이 쏟아지지 않는가. 비록 인간 생활의 원동력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는 소박한 노력에 있다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지만, 이는 어떤 철학자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라고 선전되어 온 국제적 범죄와 대량 학살의 역사”라고 부른 것의 뒤편에 꼭꼭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류가 밥만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밥을 못 먹으면 살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모든 생물들처럼 인간도 먹어야 하며, 이것이 존속을 위한 으뜸의 절대 법칙이다. 그런데 이 제1의 전제 조건은 보기와는 달리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 자체가 생존을 위해서 그다지 효율적인 장치가 못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100칼로리의 음식을 먹어봐야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기계적 에너지가 기껏 20칼로리에 불과하다. 제대로 먹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인간이 하루 종일 내놓을 수 있는 일이란 기껏 말이 한 시간 동안 하는 정도의 일과 비슷한 정도이다. 그리고 일을 한 뒤 지쳐버린 몸을 충전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 또한 그 남은 힘으로 조달해야 한다. 마음껏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단 그렇게 배를 채울 식량을 생산하고 남는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존속 자체가 불확실한 나라가 허다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륙에서, 근동지역에서, 심지어 남미의 몇몇 나라들에서, 동물적 차원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아직도 맹수처럼 사람들의 면전에 버티고 서서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오랜 시간 동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이 그렇게 죽어갔다. 매일의 삶에서 굶주림을 일상적인 조건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방글라데시에는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배부르다는 느낌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농민들이 있다고 한다. 많은 소위 저개발underdeveloped 국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미국인 평균 수명의 절반도 못된다. 그다지 옛날도 아니었다. 몇 년 전 인도의 인구학자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100명의 아시아 갓난아기들과 100명의 미국 갓난아기들을 비교해볼 때 미국 아기들 중 65세까지 살아남는 수보다 아시아 아기들이 5살까지 살아남는 수가 적다고 한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통계 수치를 살펴볼 때 우리를 기가 질리도록 압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통계가 아닌 영아 사망률의 통계이다.
개인과 사회
이로써 우리는 경제사의 탐구는 생존이라는 결정적 문제 그리고 인류가 그 문제를 해결해온 방법에서 출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대부분의 우리들은 경제학이란 자신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라고 느끼게 될 것 같다. 우리들 중 계속 숨을 쉬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사투를 벌이는 그런 경험을 비슷하게라도 겪어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인도의 촌사람들과 볼리비아의 농투사니peon들이나 경험할 지독한 굶주림의 고통을 몸소 겪는다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파국적인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모를까 우리들 중 대부분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의 의미를 뼈저리게 알게 되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도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들이 비록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목도하는 순간에 우리는 아직도 생존의 문제가 우리 삶의 밑바탕에 그대로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오늘날 개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원시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부족들로 다가갈수록 이 개인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몇 배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누이트, 부시맨, 인도네시아나 나이지리아의 농부는 자기가 사용하는 연장만 지니고 있다면 홀로 남겨져도 상당한 시간 동안 생존할 수가 있다. 그들은 경작지나 사냥감과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기에 스스로의 삶 ― 물론 여자들은 ‘스스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 을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공동체들은 심지어 무한히 오랫동안 살아갈 수가 있다. 사실 오늘날도 인류의 상당한 부분은 바로 그런 방식 ― 실질적으로 고립된 채 생존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외부 세계와 최소한의 접촉을 갖는 작은 농촌 공동체들을 보라. ― 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심한 빈곤으로 고생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일정한 경제적 독립성을 누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그러한 독립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래전에 절멸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뉴욕 사람이나 시카고 사람을 살펴보면, 그 정반대 상황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들 대부분 일상의 물질생활은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에 지독하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대도시 지역에서는 방금 말한 홀로 사는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가 아무런 타인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상점이나 잡화점을 습격하여 음식과 생필품을 털어가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한 번도 곡식을 재배해본 적도, 사냥을 해본 적도, 가축을 키워본 적도, 밀가루를 빻아본 적도 없으며, 아마도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든가 자기 집을 짓는다든가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절망적일 만큼 훈련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자기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가 조금만 고장이 나도 우리들 공동체 내에서 자동차 수리나 수도관 수리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불러야 하는 판이다. 실로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지만, 아마도 어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그 평균적 거주자들이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생존하는 능력은 확실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노동 분업
물론 이러한 역설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대신 일을 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타인들이 무더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곡식을 재배할 수 없다면, 사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고용하면 된다. 이 엄청난 규모의 노동 분업을 거치게 되면, 우리의 능력은 천 갑절로 늘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의 기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술까지 갖추어 혜택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 장의 논의에서 이 노동 분업이라는 것을 중심적으로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이득에는 일정한 위험이 또한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한 예로, 1억 3천만 명의 노동력이 존재하는 미국의 경우 석탄과 같은 필수품을 우리에게 공급하는 노동력의 수가 2십만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전체 비행 노선의 승무원들의 수는 훨씬 적다(약 6만 명). 온 나라의 철도 화물을 운송하는 기관차 운행 노동자의 수는 훨씬 더 적다. 이러한 소집단들 중 하나라도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바, 간혹 지독한 파업이 벌어져서 경제 작동의 요충지를 맡은 소수 ― 심지어 쓰레기 수거반조차도 여기에 들어간다. ― 가 맡은 바 작업을 중단하게 되면 경제라는 기계 전체가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적 풍요의 삶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취약성이 함께 따르게 되어 있다. 이 몇 개 사단 병력만큼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협력할 것으로 확신하여 의지할 수 없다면 우리가 누리는 풍요 또한 보장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계속 부유한 나라로 살아갈 것이라는 주장에는 현존하는 사회 조직의 메커니즘이 계속 효과적으로 기능해줄 것이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유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당연한 것처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엮어 전체 사회로 만들어주는 유대가 끊어진다면 그 또한 사라져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학과 희소성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우리에게 경제라는 문제를 낳는 주체가 자연이 아니라 인류 자신이라는 점이다. 경제 수준이 일단 기초적 생존의 수준을 넘게 되면 어김없이 그렇게 된다. 물론 경제의 문제 자체, 즉 생존을 위한 투쟁이 필요하게 되는 궁극적인 원천은 자연이다. 만약 모든 재화가 하늘의 공기처럼 공짜라면 경제학 ― 최소한 이 말의 한가지 뜻에서는 ― 도 사회적 관심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의 부족함은 경제의 문제가 펼쳐지는 무대를 제공할 뿐이다. 사람들이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할 굴레는 자연의 부족함뿐이 아니다. 왜냐면 인간이 희소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의 결함에만 원인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들이 멕시코 농부들 수준의 삶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물질적 욕구는 아마 하루에 한두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충족될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희소성이란 거의 혹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경제 문제들도 사실상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산업 사회에서 목도하고 있는 바는 정반대이다. 자연이 더 많은 생산물을 내놓도록 만들 힘이 생겨나게 되면 인간 욕구의 범위도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사실 우리 사회처럼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주로 그 사람의 물적 재화의 소유에 결부되어 있는 곳에서는, 우리가 부자가 될수록 심리적 경험으로서의 “희소성”은 더욱더 두드러지게 된다. 재화를 생산하는 우리의 능력이 점점 쌓여가지만, 자연의 결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여러 욕망이 그보다 훨씬 더 잰 걸음으로 앞질러가는 것이다.
자연이 만족시켜야 할 우리의 “욕구”라는 것은 이처럼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연의 소출 자체도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인간의 에너지와 기술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변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희소성이란 자연nature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본성human nature”에 또한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경제학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환경의 결핍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그리고 공동체의 생산적 능력을 똑같이 관심사로 삼게 되는 것이다.
(서론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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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로버트 L. 하일브로너 Robert L. Heilbroner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사학자. 하버드대학교에서 폴 스위지, 조지프 슘페터 같은 경제학자들 아래서 공부하고 1940년 졸업 후, 2차 세계 대전 동안 제도주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가 지휘하는 연방물가관리국에서 일했다. 1963년 뉴스쿨에서 이 책 『자본주의』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1년에는 미국 경제학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8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여 권의 책을 썼으며 그의 책들은 전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주요 저서로는 『세속의 철학자들』(2008), 『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2009),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2007),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2001) 등이 있다.
윌리엄 밀버그 William Milberg
릿거스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시건대학교 교수,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세계은행IBRD, 국제노동기구ILO 등의 관리를 거쳐 1996년부터 뉴스쿨의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저서로는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2007), Labor and the Globalization of Production(2004), Megacorp and Oligopoly(199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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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홍기빈
학부에서 경제학을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공부한 뒤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지구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자본주의의 소유 구조, 금융 체제, 지배 블록의 역사적 융합을 논한 ‘자본 통합 복합체’ 이론을 구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기적인 관심사는 지구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서구 지배 체제에 맞서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대체 세력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동북아시아 국가들 간의 평화적인 경제 안보 체제 구축과 급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치 경제학에서의 이론적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이다. 현재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자본주의』(2010), 『소유는 춤춘다』(2007),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2006),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2001)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거대한 전환』(2009),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2009),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2005),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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