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서문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
지난 40년은 발전의 시대로 불릴 만하다. 그런데 이 시대가 막을 내리려고 한다. 바야흐로 추도사를 쓸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뱃사람들을 해안으로 끌어들이는 등대와도 같이 ‘발전’은 전후 역사를 항해하는 신생국에게 길잡이가 되는 유일무이한 관념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남반구 나라들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였건 독재를 받아들였건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후로 무엇보다도 발전을 지상 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40년이 흘렀지만 남반구 여러 나라 정부와 시민은 40년 전과 엇비슷한 거리에서 깜박거리는 등대를 여전히 바라본다. 목표에 이르려고 아무리 용을 쓰고 별별 희생을 감수해도 불빛은 어둠 속에서 자꾸만 뒷걸음질한다.
발전의 등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세워졌다. 식민지를 거느린 유럽의 열강이 무너진 뒤 미국은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이 후손에게 남긴 사명, 다시 말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훨훨 타오르는 ‘언덕 위의 횃불’이 되라는 사명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뜨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발전의 깃발을 들고 모든 나라에게 내 뒤를 따르라고 소리쳤다. 이때부터 남반구와 북반구의 관계는 발전이라는 거푸집으로 찍혀 나왔다. 북반구가 남반구를 대상으로 내놓은 정책의 골격은 관용과 수뢰와 억압의 잡탕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발전’은 이런 골격의 주춧돌 노릇을 했다. 반세기 가까이 나라와 나라의 우호 관계는 ‘발전’이라는 불빛으로만 밝혀졌다.
이제 그 등대에 금이 가서 슬슬 무너지려고 한다. 발전 사상은 지성의 지평에 폐허처럼 서 있다. 발전과 함께 어김없이 뒤따라온 것은 미망과 환멸이었고 실패와 범죄였다. 이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결같다. 발전은 틀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전론을 띄워준 역사적 조건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발전은 고리타분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발전론을 하늘 높이 날려 보낸 희망과 소망이 지금은 다 떨어졌다. 발전은 퇴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폐허는 그대로 남아 마치 명소처럼 아직도 풍경을 지배한다. 의혹이 쌓이고 부작용이 여기저기서 느껴지는데도 발전론은 아직도 관리들이 하는 발표는 물론이요 풀뿌리 운동의 언어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런 정신의 구조물을 철거할 때가 왔다. 이 책의 필자들은 수명이 다 된 사상과 단호히 갈라서고자 한다. 새로운 발견에 눈뜰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치우려고 한다.
발전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술 보고서는 그동안 수북이 쌓였고 발전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밝히는 사회 조사도 잔뜩 나왔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발전을 기능성으로도 계급 갈등으로도 다루지 않는다. 발전은 특별한 사고의 틀이라고 이 책의 저자들은 생각한다. 사회경제 활동은 발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발전은 현실을 담아내는 인식이고, 사회를 달래는 신화이고,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이다. 그렇지만 인식, 신화, 환상은 경험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이성으로 이끌어내는 결론과는 무관하게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그런 인식, 신화, 환상이 뜨고 지는 것은 잘잘못이 가려져서가 아니라 싹수가 있어 보이든가 시덥지 않아 보여서다. 이 책은 발전 신조의 비판 목록과 함께 그런 신조가 걸어온 역사와 그런 신조에 숨은 뜻까지 짚어서 거기에 어떤 잘못된 편견이 스며들었고 그것이 왜 시대착오적이고 거기에 깃든 상상력이 왜 그리도 빈약한지를 백일하에 드러내려고 한다. 이 책은 발전 맹신론과 갈라서고 상상력을 해방시켜 새로운 천 년을 앞에 두고 인류가 직면한 난제에 과감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남반구를 ‘저발전 지역’이라고 처음으로 선언한 1949년 1월 20일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시대를 발전의 시대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이 딱지는 그 뒤로도 그대로 남아서 북반구의 오만한 간섭주의와 남반구의 딱한 자기연민을 뒷받침하는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한번 태어났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존속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의 시대는 점점 기울고 있다. 발전의 시대를 떠받쳤던 네 가지 전제가 역사 속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 트루먼은 미국이 다른 공업국들과 나란히 사회 진화의 사다리에서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런 우월성의 전제는 생태 재앙으로 여겨져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미국은 지금도 다른 나라들보다 앞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경쟁을 해봐야 결국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한 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은 과학 기술이 인간을 땀과 중노동과 눈물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약속에 희망을 품었지만, 지금은 특히 부자 나라에서는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이런 희망은 백일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산업화의 열매가 골고루 돌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서 우리는 지구가 백만 년 동안 모아온 것을 일년에 써서 없앤다. 게다가 굉장한 생산성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엄청난 화석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얻어내는 것이 태반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지구에 구멍을 숭숭 뚫어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만들어놓고 또 한편으로는 유독 물질을 계속 밑으로 뿌려대든가 대기로 빨아올린다. 모든 나라가 공업국 흉내를 ‘제대로’ 내면 지구 같은 행성이 대여섯 개는 있어야 광산과 쓰레기 매립장을 모두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진’국이 본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아니, 선진국이야말로 결국은 역사의 흐름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탈선의 사례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진보의 화살은 뚝 부러지고 미래는 어두워졌다. 미래는 약속보다는 위협을 더 많이 간직한 것으로 다가온다. 방향 감각이 오그라들었는데 어떻게 발전을 믿을 수 있겠는가?
둘째, 트루먼이 발전이라는 관념을 내놓은 것은 미국이 자연스럽게 꼭대기에 오는, 기분 좋은 세계 질서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자본주의 바깥에서 처음으로 공업화를 이룬 소련이 점점 영향력을 떨치자 반공 투쟁을 이끌고 나가려면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미끼가 있어야 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발전은 상이한 두 정치 체제가 경쟁을 벌이면서 써먹은 무기였다. 그런데 동서 대결이 끝난 지금은 트루먼식의 세계 발전안은 이념적으로 동력을 얻기 힘들고 정치적 자원도 얻어내기 힘들다. 세계의 중심이 다극화하면서 1950년대 초반 프랑스 사람들이 두 강대국의 교전 지역을 가리키려고 고안한 ‘제3세계’라는 범주도 역사의 폐물 하치장에 버려질 운명에 있다.
그렇지만 동서 대립이 빈부 대립으로 흡수되면서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새로운 발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발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발전의 목적은 진보가 아니라 예방이 되며,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위험의 재분배가 국제 사회의 의제를 지배한다. 발전 전문가들은, 그렇게 떠들던 산업화의 낙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면 낸들 아느냐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를 막기 위해서, 국지전을 억누르기 위해서, 밀무역을 뿌리 뽑기 위해서, 환경 재앙을 억누르기 위해서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들은 구멍을 찾아내서 막지만 트루먼이 큰소리치던 발전은 밑천이 드러났다.
셋째, 발전은 지구의 얼굴을 바꾸어놓았지만 그것은 원래 생각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루먼의 구상은 지금 생각하면 범지구 차원에서 저질러진 실책이었다. 1960년에는 북반구 나라들이 남반구 나라들보다 20배 더 잘살았는데 1980년에는 그 격차가 46배로 벌어졌다. ‘따라잡는다’는 착각은, 백인 정복자 코르테스를 맞아들였다가 봉변을 당한 아스텍의 지도자 몬테수마의 착각이 세계 전역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심한 과장일까? 물론 남반구 나라들도 속도가 붙은 것은 사실이지만 북반구는 더 멀리 내뺐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방식의 경주에서는 부자 나라들이 언제나 더 빠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첨단 기술을 내놓으면서 이전 것을 끊임없이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재주로 치면 그들은 세계 챔피언이다.
나라 안에서도 사회적 양극화가 깊어진다. 실질 소득이 줄어들었다, 형편이 말이 아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전통인을 현대인으로 바꾸려는 운동은 실패했다. 헌 방식은 무너뜨렸지만 새 방식은 자리를 못 잡았다. 사람들은 발전의 암초에 걸려들었다. 농부는 이제 씨앗을 사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씨앗을 살 돈이 없다. 엄마는 동네 여자들이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병원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아니다. 대처에서 용케 일자리를 잡은 사무원은 경비 절감 차원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들은 어디서나 문전박대를 당해 오갈 데가 없는 난민과도 같다. ‘선진’ 영역에서 밀려나고 그렇다고 전통과도 젖줄이 끊기다보니 그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도 외국인처럼 겉돈다. 그들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어중간한 세상에서 죽지 못해 살아간다.
넷째, 발전 사업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꿴 일이었다는 깨달음이 퍼지고 있다. 따지고보면 발전에 실패하는 것보다 발전에 성공하는 것이 더 무섭다. 완전히 발전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따분하고 위험으로 얼룩진 곳이리라. 발전은 ‘앞서 달리는’ 민족들이 보여주는,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는 외길로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예외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과 떼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투아레그 사람, 사포테코 사람, 라자스탄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기자기한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 이룩한 것을 갖추지 못해 어딘지 부족한 민족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당신들의 역사적 사명은 따라잡기라고 못 박는다. 처음부터 발전의 숨은 의지는 바로 세계의 서구화였다.
그러다보니 다양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건축, 의복, 생활용품이 세계 어디를 가도 엇비슷해지면서 눈이 괴로워졌다. 언어, 관습, 몸짓의 다양성도 덩달아 줄어들어서 이제는 줄어들었다는 느낌마저 잘 안 든다. 바라는 것과 꿈꾸는 것의 획일화도 사회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시장·국가·과학은 보편화의 거대한 구심점 노릇을 하고 광고인·전문가·교육자는 자신들의 영역을 무섭게 넓혀나간다. 물론 몬테수마 때처럼 정복자들은 환대받을 때가 많았지만 그들은 곧 자기 색깔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꿈꾸고 움직이는 정신 공간은 이제 서양 이미지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색 문화의 거대한 고랑은 모든 단색 문화가 그렇듯이 척박하고 위험하다. 그들은 사람다움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을 없애면서 이 세상을 모험도 없고 경이도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발전과 함께 ‘타자’는 종적을 감추었다. 뿐만 아니라 단색 문화가 퍼지면서 성장 지향 공업 사회의 대안들을 갉아먹어서 갈수록 종잡기 어려운 미래에 창조적으로 맞설 수 있는 인류의 대응력을 위험한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지난 40년 동안 문화는 진화의 잠재력을 크게 잃어버렸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진화의 잠재력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발전 덕분이 아니라 발전의 공세를 견디고 어렵게 살아남은 것 덕분이라고 말해도 그리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니리라.
트루먼이 저발전을 창안하고 40년이 지나자 발전관을 낳았던 역사적 조건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발전은 형체가 없고 근절할 수도 없는 아메바 같은 개념이 되었다. 워낙 윤곽이 흐릿해서 무엇을 가리키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데도 발전이 사방으로 잘도 퍼져나가는 것은 좋은 말이라면 거기에 다 갖다 붙이기 때문이다. IMF국제통화기금도 교황청도 발전을 똑같이 칭송한다. 무기를 든 혁명 전사도 미끈한 가방을 든 컨설턴트도 똑같이 발전을 칭송한다. 발전은 내용은 없지만 한 가지 기능이 있다.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개입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적들끼리도 똑같은 깃발 아래서 의기투합한다. 발전은 좌와 우가, 엘리트와 서민이 함께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공동의 발판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저자로서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이렇게 자멸로 이끄는 발전 담론을 깨끗이 치우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발전 전문가가 주로 기대는 개념들의 토대를 허물어서 그를 불구로 만들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풀뿌리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에게도 도전하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불구의 발전 담론을 벗어던지고 관점을 분명히 하게끔 만들고 싶다. 발전 담론의 중심 개념들에 대한 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는 사유의 경계를 짓는 무의식 구조를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다. 상상의 나래를 펴서 탈발전 시대를 열어가려면 이런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발전 담론은 핵심 개념들의 거미줄로 짜였다. 빈곤, 생산, 국가론, 평등 같은 개념을 건드리지 않고 발전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개념들은 서양 근대사에서 처음 부각되었다가 나중에야 전 세계로 투영되었다. 이 개념 하나하나에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강화하는 묵시적 전제들이 뭉쳐 있다. 발전이 이런 전제들을 얼마나 많이 구석구석 퍼뜨렸는지 이제 어디를 가보아도 사람들이 자기 현실을 서양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지식은 사람의 관심을 이리저리 몰면서 힘을 휘두른다. 지식은 어떤 현실을 도려내기도 하고 띄우기도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어울리는 다른 방식들을 망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발전이 사회경제 활동으로서 명백히 실패한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휘어잡은 발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책은 현실을 발전으로 보는 모델을 재고해보자고 제안한다. 지금 판치는 발전 담론에 끼어든다면 우리는 단지 색안경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더러운 안경을 쓰는 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유혹한다.
이 책의 각 장은 지적 조망을 할 수 있도록 검토하는 핵심 개념의 고고학으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그 인종 중심적 성격과 심지어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성격을 드러낸다. 또 하나하나의 개념이 지난 40년 동안 발전 논의에서 떠맡은 교묘한 역할도 짚어낸다. 한 개념이 현실의 이 부분은 띄우고 현실의 저 부분은 가리면서 인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이런 편견이 유럽사에서 만들어진 문명 의식에 어떻게 뿌리박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각 장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으로 창을 열려고 애쓰면서 발전과는 무관하게 비서구 문화에 남아 있는 풍요와 축복을 살짝이라도 보여주려고 한다. 각 장을 읽고 나서 전문가도 일반인도 그 헌 단어를 입으로 내뱉으려다가 얼굴이 벌게지거나 말을 더듬거나 웃음보를 터뜨린다면 글을 쓴 보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우정의 결실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지난 세월 우리 저자들은 모두 처지도 다르고 몸담은 조직도 달랐지만 같이 며칠씩 몇 주씩 떠들고 요리하고 여행하고 공부하고 어울리면서 줄기차게 대화를 나누었다. 모르는 것은 나누었고 아는 것은 겨루었다. 우리는 같이 헤맸고 같이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에 도전했고 영감을 만끽했다. 천천히, 가끔은 우연찮게, 같은 준거틀이 떠올라서 각자의 연구를 돌아가면서 살찌우기도 했다. 비강단 지식인은 우정과 공동의 책임감을 빼면 시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수가 아니면서 어떻게 연구를 해나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인간미와 학식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반 일리치 같은 분이 특히 없었더라면 이런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리치는 우리를 하나로 모아서 생각에 활력을 불어넣느라 여러 해 동안 애를 많이 썼다. 1988년 가을 펜실베이니아의 스테이트 칼리지에 있는 바르바라 두덴의 목조 주택 현관에 모여 앉아서 이 책의 골격을 잡았다. 양파를 썰고 포도주 병을 따느라 끊길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 동안의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번역을 도와준 크리스토프 베이커와 돈 리노에게 감사한다. 우리가 여러 번 모여서 협의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과학기술사회 프로그램에 감사한다. 또 내가 편집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보아준 독일 에센의 문화학연구소에도 감사한다.
1992년
볼프강 작스
(초판 서문 전문)
★ 19개의 에세이 키워드와 저자
1_ 발전 두 개로 나뉜 세계 | 구스타보 에스테바
2_ 환경 정치의 영역이 되어버린 자연 | 볼프강 작스
3_ 평등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 | C. 더글러스 러미스
4_ 도움 세려된 간섭 | 마리아네 그로네마이어
5_ 시장 사회를 규제하는 유일한 수단 | 제랄드 베르투
6_ 요구 중독된 욕망 | 이반 일리치
7_ 한 세계 과학·시장·국가가 지배하는 균질한 공간 | 볼프강 작스
8_ 참여 교묘한 통제의 방법 | 마지드 라흐네마
9_ 계획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실천 | 아르투로 에스코바르
10_ 인구 통제해야 할 자원 | 바르바라 두덴
11_ 빈곤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 | 마지드 라흐네마
12_ 생산 개인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새로운 조건
13_ 진보 권력과 종교적 신념의 화학적 변용 | 호세 마리아 스베르트
14_ 자원 재생되지 않는 자연 | 반다나 시바
15_ 과학 이성의 권위를 둘러쓴 권력 | 클라우데 알바레스
16_ 사회주의 오해와 오류의 역사 | 헤리 클리버
17_ 생활 수준 무분별한 환원주의 | 세르주 라투슈
18_ 국가 사회를 세속화하는 수단 | 아시스 난디
19_ 기술 약탈과 희생의 전가로 얻은 번영 | 오토 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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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볼프강 작스 Wolfgang Sachs
저술가이며 독일에 있는 부퍼탈기후환경에너지연구소 연구실장, 그린피스독일 이사장, 정부간기후변화전문위원회 위원, 로마클럽 회원이다. 슈마허 칼리지에서 꾸준히 강의하고 있다. 2003년 녹색평론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세계화 시대의 에콜로지와 정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작스가 엮은 『反자본 발전사전』은 일본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밖에도 『북반구의 녹화: 생태학과 공정을 위한 탈산업주의의 청사진 Greening the North: A Post-Industrial Blueprint for Ecology and Equity』(공저)『행성 변증법: 환경과 발전의 탐험 Planet Dialectics: Explorations in Environment and Development』『공정한 미래: 자원 분쟁, 안전, 글로벌 정의 Fair Future: Resource Conflicts, Security, and Global Justice』(공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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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희재
학부에서 심리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번역의 탄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소유의 종말』, 『문명의 충돌』, 『새벽에서 황혼까지』, 『마음의 진보』, 『마음의 진화』, 『번역사 오디세이』, 『몰입의 즐거움』, 『리오리엔트』, 『히틀러』, 『예고된 붕괴』, 『산티아고 가는 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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