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서
뇌는 삶에 필수 불가결한 기관이다. 뇌 기능의 정지는 그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옛날부터 사람을 죽이려면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칼로 찌르면 된다고 했다. 그런 탓에 사람의 영혼이 둘 중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심장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오늘날에도 사랑하는 연인은 그들의 이름을 뇌가 아닌 심장 모양과 함께 나무껍질에 새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뇌에게 돌아갔다. 이 책이 앞으로 보여주겠지만 그렇게 순위가 바뀌어서 손해인지 어쩐지는 확실하지 않다.
뇌는 몸에서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몸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 뇌이고 인간이 ‘나’라는 말로 지칭하는 고통과 쾌락의 주체 또한 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기억, 존재방식, 행동과 태도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 역시 뇌의 산물이다. 내가 말을 거는 것은 ‘여러분의’ 뇌, 다시 말해 타자의 뇌이다. 뇌는 개인화와 자아를 떠받치고 있다. 또한 뇌는 인간 사회와 ‘우리’를 떠받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주제를 쫓을 것이다. 그 두 방향은 이따금 서로 얽힐 것이다. 첫 번째 방향은 ‘쾌락’과 그의 친구 ‘고통’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의 행위와 세계에 대한 표상 전체를 지배한다. 두 번째 방향은 ‘타자’이다. 타인에 대한 욕구와 인정이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까닭이다.
각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뇌는 지성을 떠받침은 물론이요,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정념이나 추한 짐승 같은 면모가 도사리는 곳이기도 하다. 지능을 갖고 있으며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근간이 되는 뇌는 우리 몸에 자신의 법을 행사한다.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정신은 뇌에게 자신의 결정이나 경향을 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뇌가 독자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우리의 몸은 뇌에게 거부할 수 없는 영향을 행사하기도 한다. 뇌는 육체의 욕구, 욕망, 결핍에 제약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도 제약을 받는다. 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뇌를 영혼과 동일시하면서 영혼과 신체의 케케묵은 이분법과 단절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마치 뇌는 두개골 안에 고립된 채 인간의 지성, 정체성, 위대함을 나타낼 뿐, 육체의 한 부분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이분법일 뿐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생각의 잔재를 몰아내고 싶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나는 뇌가 ‘지적 능력’ 못지않게 먹고 마시고 잠자는 등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활동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우리는 말하고, 생각하고, 책을 쓰고, 교향곡을 작곡한다. 그러나 이처럼 ‘고차원적인’ 생산은 우리가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는, 살과 피로 구성된 존재이기에 가능하다. 뇌는 세상이 표상되는 비육신적 본체가 아니다. 그런 뇌는 아마 몸이라는 기계를 기막히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소프트웨어’ 같은 것이다. 뇌는 세계 속 행동의 중심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러한 뇌의 세계로 여러분을 이끌고자 한다.
앞으로 우리의 여정에서 ‘정신’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정신은 결코 우리가 예상하는 곳에 있지 않다. 장 베르나르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그럼 영혼은 어디 있습니까, 브리지트?”라고 물었다. 브리지트는 여전히 그 대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애들도 낳았다. 한편 ‘생각’을 뉴런의 작용으로 거의 완전히 환원해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뇌영상 촬영기법 연구자들에게는 지도가 현장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뇌를 촬영한 이미지가 결코 정신은 아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오귀스트 포렐은 『영혼과 신경계』라는 책에서 “영혼과 살아 있는 뇌의 활동은 둘이 아닌 하나, 동일한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끝까지 그의 관점을 밀고 나갈 것이다. 그러나 뇌 없는 영혼이 있는지, 영혼 없이 살아 있는 뇌가 있는지, 그런 것은 여기서 증명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활발하게 활동 중에 있는 뇌이다.
1,500세제곱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두개골 안에 어떻게 장대한 대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 수수께끼를 풀러 가보자! 뇌가 끊임없이 성스러운 놀라움과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뇌에 대한 발견이나 탐험은 신대륙 발견보다 한참 뒤에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이 ‘미지의 땅’은 사색과 미신의 소관이었다. 뇌는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아이들이 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긴다. 인간의 뇌는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이라고 둘러대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동하고, 사랑하고, 무엇을 아는 것은 다 뇌라는 도구 덕분이다. 그런데 그 도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는 게 과연 합리적인 행동일까? 그건 마치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아테네에 가서 아크로폴리스를 둘러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뇌를 여행하는 데에도 일종의 가이드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몸을 다스리는 정부政府, 그것도 다양한 제도, 부처, 자문기관, 심판기관을 거느리고 있는 정부의 총사령부인 뇌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브로카 영역 같은 유명한 고장들, 시상하부와 쾌락중추, 해마 따위를 돌아볼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같은 단순한 욕망을 만족시켜주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꺼리는 또 다른 장소도 살펴볼 수 있게 되리라.
우리는 은밀한 행로를 거쳐 저주받은 문들도 살짝 엿볼 것이다. 물론 그 여정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에 대해 제대로 알고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겠다. 뇌는 때때로 여행객이 미처 알지 못했던 오만 가지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인도해주고 싶은 뇌는 바로 여러분의 뇌다. 그 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지만 다른 뇌들과 비슷비슷하다. 자신의 뇌를 좀 더 잘 알게 되면 자기 자신도 좀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머리와 신체의 관계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뇌는 잘 돌보아줌으로써 치료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고통 받는 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도 담고 있다. “자신의 뇌를 잘 알고 건강 관리의 규칙을 존중하라. 그것은 각 사람이 자기 영혼에 대해 지켜야 할 의무다.” 오귀스트 포렐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여행을 시작해보자. 먹고 자고 마시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을 둘러보고,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곳까지 나아가보자. 이 희한한 나라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이 나라에 사는 주민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는 이 책에서 이 작은 고장에 대한 발견과 그에 따른 논쟁의 간략한 역사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장 뇌 발견의 역사
라스코의 몽상가
인간은 자신의 정신이 머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울 때면 본능적으로 이마를 손으로 감싸게 되지 않는가? 깊은 잠에 빠지면 머릿속으로 꿈을 꾸지 않는가? 인간의 밤을 탐험하며 뇌에서 꿈의 원천을 발견한 미셸 주베는 우리에게 알려진 인간의 가장 오래된 표상 중 하나를 두고 통찰력 넘치는 해석을 펼친다. 그건 바로 라스코 동굴에 그려져 있는 우물 그림이다. 이 그림 안에는 새의 머리를 한 남자가 십자가처럼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는 발기 중이다. 그의 몸뚱이 옆에는 그의 머리와 똑같은 새가 돛대에 앉아 있다. 한쪽에는 덩치가 크고 위협적인 들소가 창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 벌어진 상처로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꿈의 생리학자 주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잠자는 동안에 일시적으로 (대략 90분마다) 일어나는 발기 현상은 꿈을 꾸는 주기와 맞아떨어진다. 새는 인간의 신체를 떠나 과거나 미래를 떠도는 정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들소를 잡아서 죽일 것이라는 예고(혹은 욕망)로 해석될 것이다. 민속학자들은 초보적인 문명 단계에 있는 사회에서 영혼 혹은 정신이 신체(머리)를 떠난다는 생각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 크로마뇽인은 발기가 꿈을 꾸고 있음을 충실하게 반증하는 신체적 증거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사실이 2만 년 후인 1965년 뉴욕의 신경심리학자 피셔에 의해 다시 주목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 역시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꿈을 꾸는 동안 성기가 일어선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꿈의 애매한 성격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섹스는 감춤으로써 더욱더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정신
인간은 가엾게도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영혼이라 부르고 때로는 정신이라 부르는 것과 당황스럽게 대면해야 했다. 두 용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불확실하기 그지없다. ‘정신을 놓는다’고 하면 분별을 잃었다는 뜻이고, ‘영혼이 돌아가다’라고 하면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아름답게 여겨지는 그리스 단어 ‘프시케psyché’가 미신의 시대를 지나며 때가 탄 ‘영혼’이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프시케 신화 이야기는 어떤 정의보다 한결 더 명확하게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를 밝혀준다. 프시케는 ‘자아’를, 다시 말해 ‘내 안에서 생각하는 타자’를 뜻한다. 나는 프시케의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프시케는 타자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 욕망을 토대로 달콤한 쾌락과 타는 듯한 증오가 퍼진다. 아담과 이브가 나무 아래서 주고받은 최초의 대화가 “사랑합니다”였다고 생각한다면 인간 뇌의 역사는 분명히 ‘에로스’의 역사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그렇게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두개골에 뚫린 구멍
우리는 선사시대의 두개골에서 구멍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멍들은 어떤 부상이나 손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천두 시술을 한 흔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머릿속에 감추어 있는 것에 대해 품었던 호기심을 입증한다. 마술적인 습속 때문에 이러한 구멍을 냈을까? 아니면 의학적 목적으로 천두 시술을 한 것일까? 대답 없는 이 질문은 식인 습속에 대한 질문과 뒤섞여 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뇌가 가장 진귀한 먹을거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음과 이성
사람이 아무리 유물론자를 자처한들 그의 내면에서는 언제나 마음과 이성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이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이중적 본성(육신과 정신)이 유기체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이다. 육신은 물질에 속하고 정신은 그 자신이 통찰하고자 하나 그럴 수 없는 현상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감정의 리듬에 따라 심장이 다르게 뛰는 것을 느낀다. 어찌 보면 고통 받는 영혼의 자리가 심장에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과연 영혼이 어디에 거하느냐를 놓고서 역사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우리의 감정을 좌우하는 심장이 그 자리인가, 아니면 감각기관이 집결되는 머리가 그 자리인가?
고대 중국에서는 심장이 정신의 기관이요, 뇌는 골이 담겨 있는 일종의 바다, 즉 생이 비약하는 원천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골은 고환이 만들어낸 정자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중국인 특유의 성애 문화가 형성되었다. 중국인은 정자를 아끼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룻밤에 1만 명의 처녀를 범하고도 사정을 하지 않으면 1만 년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한 흐름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화권이나 교권지상주의 그리스도교도에게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일본인은 뇌파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뇌사’를 개인의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장박동이 멎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티칸의 교황청 직속 기구인 생명아카데미는 심장이 뛰는 동안은 아직 영혼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뇌사상태의 환자에게서 장기를 적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교조적 입장 때문에 장기이식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수많은 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뇌와 심장
영혼이 기거하는 위치를 둘러싼 뇌와 심장의 싸움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무려 2,500년가량 이어졌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러 승리는 뇌 쪽으로 돌아갔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도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나왔다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의사들은 처음부터 뇌의 우위를 점쳤다. 알크마이온과 히포크라테스는 뇌가 감각과 의식의 중심기관이라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는 ‘신병(간질)’에 대한 논문에서 뇌는 “의식의 전조”라고 했다. 그는 또한 뇌의 어느 한쪽에 손상을 입으면 신체의 반대편 한쪽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했다. 오늘날의 신경학자도 부인할 수 없는 관찰력이다. 최초의 유물론 철학자라 할 수 있는 데모크리토스는 뇌가 섬유막으로 감추어져 있는 신체의 보초병이요, 지성의 파수꾼이라고 했다.
철학의 양대 산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 ‘뇌 중심주의’와 ‘심장 중심주의’를 설파했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뇌가 인간에게 청각, 시각, 후각 같은 감각을 제공한다는 이론을 밝혔다. 이 이론은 이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에서 발생한 기억과 판단이 안정적인 것으로 되면서 지식이 생성된다. 뇌에서 일어나는 연속되어 있는 심리 능력에 대한 단위적 개념화는 오늘날 뇌에 대해 인지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들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입장과 대립된다. 그는 감정과 관념의 발생 및 조절에서 심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심장은 ‘신체의 아크로폴리스’로서 심장을 지배하는 뜨거운 온기에서 인지적 속성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뇌는 차가운 기관으로서 심장을 식히는 데에만 소용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냉각장치’ 같은 뇌는 인간의 뇌가 보여주는 현실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해부학자들은 실제로 뇌에 기반을 두고 있는 냉각 시스템을 기술한 바 있다. 이 시스템은 정맥혈과 동맥혈이 서로 온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작동된다. 두 발로 보행하는 인간이 거대한 뇌를 이끌고 사바나의 뜨거운 햇볕 아래를 걸어 다녀도 과열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적응 능력 덕분이다.
(프롤로그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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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장 디디에 뱅상 Jean-Didier Vincent
프랑스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뇌 관련 전문 필자이다. ‘신경생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 개척, 의학과 생물학 분야의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현재 파리 쉬드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소CNRS의 알프레드 페사르 신경생물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에 소개된 저서로는 『인간 속의 악마』『생물학적 인간, 철학적 인간』(공저)『인간이란 무엇인가』(공저) 등이 있고, 그 밖에도 『엘리제 르클뤼』『정념의 생물학』『파우스트, 하나의 자연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이 중 19세기 초에 실존했던 지리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를 모델로 삼아 쓴 에세이 『엘리제 르클뤼』는 2010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꼽히는 페미나 상(에세이 부문)을 수상했다. 『뇌 한복판으로 떠나는 여행』은 프랑스 최고의 뇌과학 전문가인 장 디디에 뱅상이 ‘뇌를 여행한다’는 콘셉트로 뇌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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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세진
학부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이싸. 옮긴 책으로 『꽃의 나라』, 『바다나라』, 『무한』, 『천재들의 뇌』, 『돌아온 꼬마 니콜라』, 『유혹의 심리학』, 『회색 영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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