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집은 그 이상한 물체가 손을 대면 녹아 버리듯 허물어지며 불길에 휩싸였다. 나무는 굉음과 함께 화염으로 변해 버렸다. (…) 월요일 아침이 밝자, 세계 최대의 도시 전체를 휩쓴 그 엄청난 두려움의 물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피난민들의 물결은 금세 세찬 급류로 변했고, 철도역 근처는 쏟아져 나온 피난민들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 그들은 우리를 몰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허버트 조지 웰스, 『우주 전쟁』
죽음의 세기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출간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1898)은 단순히 상상력 풍부한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다. 『우주 전쟁』은 다윈주의식 도덕성을 다룬 소설이자, 비범한 선견지명이 담긴 작품이기도 했다. 책이 출간된 후 1세기 동안 웰스가 상상한 장면들은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소설의 배경인 런던뿐만이 아니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베오그라드, 베를린, 스미르나(터키 서부에 있는 도시 이즈미르의 옛 이름―옮긴이), 상하이, 서울에서 소설 속 광경이 재현되었다.
침략군이 도시로 접근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지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장갑차에서 화염 방사기, 독가스,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치명적인 무기는 죄다 갖추고 있다. 그들은 이 무기들을 사용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허둥대며 집을 등진 사람들로 도로와 철도가 꽉 막혀 버려서, 사람들을 몰살하는 일은 더욱 쉬워진다. 그들은 결국 짐승처럼 학살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어 연기만 피어오르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린다.
웰스는 새로 산 자전거로 평화로운 마을 처치(Chertsey)를 돌아다니며 이 모든 파괴와 죽음을 상상했다. 화성인들에게 침략자 역을 맡겼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곧이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침략자는 화성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그들은 종종 희생자들을 ‘외국인’이나 ‘인간 이하의 사람들’로 치부하며 살육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20세기 전쟁은 지구와 다른 행성 간의 전쟁이 아니라 지구인들끼리의 전쟁이었다.
1900년 이후 100년은 현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기였고, 절대적인 관점이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 20세기를 지배한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이전의 그 어떤 전쟁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그림 1-1 참조) 19세기에는 ‘열강’ 간의 전쟁이 더 빈번했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그 격렬함(연간 전사자 수)과 집중도(국가별 연간 전사자 수) 면에서 견줄 데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은 어떤 기준으로든, 역사상 인간이 일으킨 최대의 재앙이다. 그런데 역사가들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제외하고도 20세기에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망자 수는 100만 명도 넘을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포트(Pol Pot)는 말할 것도 없고,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청년투르크당(Young Turk) 정권과 1920~1950년대의 소련 정권, 1933~1945년의 독일 나치 정권의 인종 학살, 즉 ‘정치적 학살’로 비슷한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세계 대전 전후 또는 그 사이에 조직화된 대규모 폭력 행위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 특히 1904년에서 1953년까지의 50년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지구 별이 피로 물들었을까? 이 시대만 예외적으로 폭력적이었다는 설명은 불합리해 보인다. 어쨌든 1900년 이후 100년은 전례 없는 진보의 시기였다. 평균 수입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화폐 가치의 변동을 감안하면 1500~1870년에 전 세계적으로 50퍼센트 정도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1870년에서 1998년 사이에는 6.5배가 넘게 증가했다. 달리 말하면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열세 배나 높아졌다는 얘기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기술 발전과 지식의 향상으로 인간은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되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영양 상태가 좋아지고 전염병을 퇴치하면서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 1900년에 영국의 평균 수명이 48세였는 데 비해 1990년엔 76세였다. 영아 사망률 역시 1900년의 25분의 1로 줄었다. 사람들은 더 오래 살 뿐 아니라 몸집도 커졌으며 나이 든 후에도 고통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1990년대에 미국의 60대 남성 중 만성 질환자 수는 20세기 초엽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말한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00년 이후 80년간 대도시 인구는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 사람들은 더 효율적인 노동으로 세 배가 넘는 시간을 여가 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남는 시간에 정치 대표자가 되기 위해 선거 운동을 하고 소득을 재분배한 사람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900년에는 지구상의 20퍼센트만이 민주적인 국가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1990년대엔 50퍼센트 이상으로 높아졌다. 각국 정부는 단순히 국방과 정의라는 기본적인 공공재만을 제공하지 않았다. 1944년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에 설명되었듯이 ‘빈곤과 질병, 무지, 더러움, 나태’를 제거하겠다고 선언한 새로운 복지 국가가 발전했다.
이렇게 진보를 달성한 20세기에 빈발한 전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더 가까이 모여 살게 되었다거나 파괴적인 무기의 발명 때문이라는 설명은 미흡하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사는 전원 지역에서 칼을 휘두르기보다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 고성능 폭탄을 떨어뜨려 대량 살상을 자행하기가 훨씬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면, 20세기 후반엔 20세기 초반이나 중반보다 더욱 강력한 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세계 인구는 사상 처음으로 60억 명을 넘어섰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인구의 세 배가 넘는다. 그러나 실제로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무력 충돌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전체 인구 대비 군사 동원과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때는 분명 20세기 전반기의 세계 대전 때와 그 직후였다. 더욱이 현대 무기는 1900년 수준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그런데 20세기 최악의 충돌에서는 조잡한 무기들인 소총과 도끼, 칼이 주로 사용되었다.(1990년대 중앙아프리카와 1970년대 캄보디아의 전쟁이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모든 무기가 없어져서 다음에 벌어질 전쟁에서는 물어뜯기만이 허용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철저히 무기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정말로 대량 학살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난 100년간 그토록 많은 인간이 죽어 간 이유를 이해하려면 학살 행위의 동기를 찾아봐야 한다.
필자가 학생일 때 읽은 역사 교과서에는 20세기의 폭력성이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있었다. 때로 불황과 경기 침체 같은 경제 위기를 정치적인 충돌의 원인으로 들었는데, 나치 정권의 탄생과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 나아가 2차 세계 대전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업과 결부시키곤 했다. 그러나 필자는 반대로 빠른 경제 성장이 경제 위기처럼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외에 20세기에는 세상이 온통 계급 투쟁에 물들어 있었고 혁명이 폭력 사태의 주요 요인들 중 하나라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투쟁보다 인종 갈등이 더 중요하지 않았나? 20세기의 갈등이 공산주의(극단적인 사회주의)와 파시즘(극단적인 민족주의), 그리고 흉악한 제국주의같이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의 결과라는 주장 또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비정치적으로 보여도 실상은 폭력적인 사상이나 종교 등 전통적인 제도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리고 20세기에 전쟁을 치른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필자가 어렸을 때 읽은 책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의 민족 국가가 주역을 맡았다고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정치 체제들은 어떤 면에서 민족적이라기보다는 다국적이었기에, 국가라기보다는 제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옛날의 역사 교과서들은 20세기를 지난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결국에는 기분 좋은 승리를 서양 세계에 안겨 준 시기로 설명했다. 영웅들(서양의 민주주의)이 악당들(독일인, 일본인, 러시아인)과 잇따라 대결했지만, 결국 언제나 선이 악에 승리를 거두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냉전은 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펼쳐진, 도덕성을 주제로 한 연극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는가? 그리고 서양 세계는 정말로 20세기에 벌어진 10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자였는가?
이런 생각을 엄밀히 평가하자면, 필자는 20세기 전쟁에 대한 역사가들의 전통적인 설명이 진실을 밝히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기술, 특히 한층 더 파괴적인 현대 무기의 등장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더욱 효율적으로 살해하려는 뿌리 깊은 욕망에 대한 응답에 불과했다. 실제로 지난 100년 동안 발생한 폭력과 파괴적인 무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경제 위기로도 지난 세기에 발생한 모든 격변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익숙한 인과 관계는 대공황―파시즘의 등장―전쟁의 발발로 이어지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공황에 타격을 받은 모든 국가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선 게 아니었고, 모든 파시스트 정권이 공격 전쟁에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경제가 대공황에서 회복한 이후 전쟁을 시작했다.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세계 경제 위기로부터 차단된 상태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어떤 참전국보다 큰 희생을 치렀다. 20세기 전쟁에서 일반적인 규칙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경제 성장 후에 전쟁이 발발한 적도 있었고, 전쟁이 경제 위기의 결과라기보다는 원인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심각한 경제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1차 세계 대전이 자본주의의 위기로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반대로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과 낮은 인플레이션을 보인 글로벌 경제 통합 시기가 갑작스레 끝나 버렸다.
물론 전쟁이 경제와는 무관한 이유로 발생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가장 호전적이고 잔인한 종교는 19세기에 형성된 세속 이데올로기였음에도 ‘짧은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를 종교 전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홉스봄의 사상과 반대 입장에 선 폴 존슨(Paul Johnson)은 도덕적 상대주의의 등장, 다시 말해 개인의 책임감 상실과 유대 기독교 가치관의 붕괴로 20세기의 폭력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이나 오래된 가치관의 쇠퇴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할지 몰라도, 그 자체를 폭력의 원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근대에 극단적인 신념 체계들이 여러 번 등장했지만, 이것들은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서만 널리 수용되고 영향을 미쳤다. 이 점에 관해서는 반유대주의가 훌륭한 예이다. 또한 광인이나 악한에게 전쟁의 책임을 돌리는 것도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그토록 비웃었던 실수를 반복하는 짓이다.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러시아 침공을 명령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그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20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원인을 근대 민족 국가의 출현에서 찾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20세기의 정치 조직이 유례 없는 동원 능력을 갖추긴 했지만, 이 능력은 평화적인 목적에도 쉽게 이용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사실 1930년대 국가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뛰어난 사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가는 다수의 공무원과 세금 징수원, 경찰을 부렸다. 교육과 연금을 제공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질병과 실업 보험금도 지급했다. 또한 철도와 도로를 소유하지 않고도 교통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국가가 건장한 성인 남자 전원을 징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실제로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능력이 1945년 이후에 극대화되었음에도 대규모 전쟁은 전보다 덜 일어났다. 사실 1950~1970년대에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가장 적었던 국가는 포괄적인 복지를 제공하는 국가였다. 혁명적인 전투 방식이 초기 근대 국가를 변화시켰듯이, 복지 국가의 탄생은 계획과 지시, 통제 능력을 길러 준 총력전 덕인지 모른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베버리지 보고서나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를 생각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분명 복지 국가가 총력전의 원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통치 방식이 문제였을까?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20세기에는 민주주의가 성장했으므로 당연히 전쟁이 줄어야 했고, 실제로 국가 간의 전쟁은 줄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에 내전이 크게 증가하고 전쟁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갈등을 순수하게 국가 간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고려하면, 국내에서 벌어지는 조직적인 폭력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나치와 그 협력자들이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으로, 600여 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나치는 유대인 집단 외에도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긴 다양한 집단, 대표적으로 병자나 동성애자, 그들이 점령한 폴란드의 엘리트층, 집시로 불리는 로마(Roma)나 신티(Sinti) 같은 집단까지도 없애려고 애썼다. 이들 가운데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스탈린은 반체제 활동을 벌였거나 단순히 그러한 혐의가 있는 러시아인 수백만 명을 처형하거나 투옥했을 뿐 아니라 소수 민족에게는 나치의 악행에 비교될 정도의 폭력을 행사했다.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추방된, 순수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 400만 명 가운데 적어도 160만 명이 정부의 학대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8~1953년에 소련에서 발생한 모든 정치적 폭력의 희생자는 최소한 2100만 명이다. 그러나 계획적인 대량 학살은 전체주의 시대에 앞서 발생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오스만 제국 말기에 시행된 기독교 소수 집단에 대한 강제 이주와 계획적인 살해 정책은 1948년에 내려진 정의에 따르면 대량 학살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하면,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은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 이 폭력은 무장한 사람들의 충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총 사망자 중에서 적어도 절반이 민간인이었다. 때로 그들은 인종이나 계급에 따라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어 희생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 공군이 도시 전체에 폭탄을 투하했을 때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외국의 침략자나 이웃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대량 학살의 순수한 규모를 설명하려면, 진부한 군사적 분석 수준을 능가해야 한다.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성, 특히 1940년대 초 같은 특정한 시기와 중유럽, 동유럽, 만주, 한국 등 특정한 장소에서 폭력 사건들이 다수 발생한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성, 그리고 제국의 쇠퇴이다. 인종 갈등이란, 특정 인종 집단 간의 사회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말하는데, 이는 상당히 진전되던 인종 동화 과정이 와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20세기에 인종상의 차이에 관한 이론에서 유전 법칙이 널리 보급되고(이 법칙이 정치 영역에서 그 힘을 잃고 있긴 했지만), 인종이 뒤섞인 이주 지역의 ‘분쟁지’가 정치적으로 분열되면서 요동쳤다. 경제적 변동성이란 경제 성장률, 가격, 금리, 고용 변화의 빈도와 진폭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압력과 긴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국의 쇠퇴란 20세기 초에 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들이 해체되면서 그들이 새로 등장한 터키, 러시아, 일본, 독일 등의 제국에게 받은 위협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필자가 ‘서양 세계의 몰락’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할 때 염두에 둔 점이기도 하다.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급부상하면서 실질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45년 전의 유럽 제국들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서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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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니얼 퍼거슨 Niall Ferguson
1964년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생.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 1985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근대 제국주의에 관한 정통 학설에 도전한 수정주의 역사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저널리즘에서도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함부르크 및 베를린에서 2년간 연구하였으며, 198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칼리지 연구 교수를 지냈다. 그 후 피터하우스 칼리지와 1992년 옥스퍼드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사를 강의하였다. 2000년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사 및 금융사 교수, 2002년 뉴욕 주립 대학 경영대학원 금융사 교수를 지냈다. 현재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와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의 ‘이 시대 최고 지성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주요 저서로 『제국』, 『현금의 지배』, 『종이와 쇠』, 『실제의 역사』, 『전쟁의 연민』, 『콜로서스』,『』금융의 지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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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현주
<매일경제> 편집국에서 근무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음식은 자유다』, 『브레인 어드밴티지』, 『위대한 연설 100』, 『카리스마의 역사』, 『경쟁사도 탐내는 팀장의 마케팅』, 『CEO가 원하는 팀장의 혁신』, 『상식의 실패』, 『하이퍼컴피티션』, 『탐욕 주식회사』, 『슈퍼클래스』, 『유혹과 조종의 기술』, 『매니저의 업무 기술』(하버드 MBA 셀프마스터 시리즈), 『뉴미디어의 제왕들』, 『에펠』, 『팀장 정치력』, 『2007 세계대전망』, 『2008 세계대전망』, 『2009 세계대전망』, 『혁명적으로 지식을 체계화하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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