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 파스칼, 『팡세』 ―
1512년 10월의 마지막 날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설레는 가슴으로 성 시스티나 성당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17명의 추기경과 그 수행원들이 바쁜 걸음으로 뒤를 따랐지요.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가 지었다고 해서 시스티나(Sistina)라고 불리는 이 예배당은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고 추기경들이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날 교황은 미사를 드리러 이곳을 찾은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볼일이 있었지요. 그가 지난 4년 1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다리던 성당 천장화가 완성되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날이었거든요.
<천지창조>라고 불리는 이 천장화를 그린 화가는 당신도 잘 아는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B. Michelangelo, 1475∼1564)입니다. 그는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그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천장화 작업을 막 시작한 초반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도와줄 조수도 쓰지 않았다지요. 오직 천재적 재능과 초인적 열정으로 바닥에서 무려 20미터나 높이 붙어 있는, 폭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드넓은 천장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재현했습니다.
이 천장화에는 300명도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고 신을 제외한 상당수가 완전히 알몸이거나 몇 군데만 겨우 천으로 가린 나체로 그려졌습니다. 그들은 성스러운 건물의 천장 위에 걸터앉거나 드러누워 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젖가슴과 궁둥이, 심지어 성기까지 보란 듯 내놓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육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16세기 르네상스의 구호를 거세게 외쳐대는 듯합니다. 그 아래에 선 고매한 추기경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고, 폭군(il papa terribile)이라고 불리던 교황마저 꼼짝없이 숨을 죽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일반에도 공개되었지요. 말굽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각지에서 몰려든 지체 높은 귀족들과 세력가들은 거장의 탁월한 솜씨에 어안이 벙벙해져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방향으로 몸을 비튼 기묘한 자세인데도 자연스러움과 우아함을 잃지 않은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천재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비로소 알아차렸지요.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든 이들은 인간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한 이 화가의 찬미가 신에게 바치는 장엄한 미사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성전 천장에 나체가 그려졌다는 사실에 당혹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지요. 성스러워야 할 예배당을 공중목욕탕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천장화에 그려진 신의 모습에 놀라 시비를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감탄만 쏟아 낼 따름이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이 위대한 천장화의 한 장면인 ‘아담의 창조’에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천장화를 보고 경탄하던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이 그림 속 노인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요? 신은 정말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처럼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나
‘아담의 창조’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벌거벗은 채 비스듬히 누운 사내가 눈에 띄는군요. 아담이지요. 건장하고 아름다운 몸입니다. 땅에 댄 오른팔로 상체를 받쳐 몸을 반쯤 일으켰지만 오른쪽 다리는 길게 뻗었고 왼쪽 다리는 무릎을 세운 채 누워 있어요.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은 정면을 향해 있습니다. 허리는 살짝 뒤틀었고 두 다리는 측면으로 뻗어 상당히 육감적입니다. 햇볕에 잘 그을려 윤기가 흐르는 갈색 피부는 균형 잡힌 골격과 발달된 근육을 매끄럽게 감싸며 탐미적 볼륨을 만들고 있지요.
오늘날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약간 살찐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술사를 통틀어 남성의 육체가 이토록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묘사된 적이 있었던가요? 굳이 경쟁자를 찾는다면 뛰어난 그리스 조각을 몇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예술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요아킴 빙켈만(J. J. Winckelmann, 1717∼1768)이 “고대예술이 이룩한 기적”이라고 극찬한 <벨베데레의 아폴론>이 자웅을 겨룰 수 있겠지요.
그의 육체는 모든 현실성을 초월하여 숭고하고,
그의 자세는 내부에 흐르는 위대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발걸음은 경쾌한 바람의 날개를 갖고 있다.
영원한 봄이 매력으로 가득 찬 남성의 육체에
감미로운 청춘의 옷을 입혀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다.
학자의 자질과 시인의 기질을 동시에 가졌던 빙켈만이 <벨베데레의 아폴론>에 바친 찬사 중 일부입니다. 시적인 글이지요? 독일의 문호 괴테(J. W. Goethe)가 “자연은 이 멋진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며 빙켈만을 칭송한 까닭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화려하고 멋진 수사들이 그대로 미켈란젤로의 아담에게 헌정되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뿐인가요. 아담의 얼굴에도 <벨베데레의 아폴론>상이 지닌 고귀함과 우아함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마에서 코로 흐르는 곧은 선을 보세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평화가 깃들어 있지요. 싱그러운 뺨은 또 어떻습니까? 단 한순간도 식지 않을 것 같은 정열이 자리하고 있지요. 선악을 아직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에는 그리움만 가득하고, 거짓이라곤 아예 모르는 천진한 입술에는 끝 모를 갈망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만일 이 사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면 작품은 더없이 선정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날아오는 한 노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지엄한 신입니다. 한 점 욕정도 없고 오직 성스러운 의지로 충만하여 더없이 숭고한 신은 백발과 흰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데 무척 건장하지요. 범선의 돛처럼 부풀어 오른 커다란 망토 속에 아기천사 푸토(putto,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종교적 예술품에 자주 등장하는 통통하고 예쁜 아기천사)들을 데리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모습이 역동적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는 아담의 정적인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지요.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담을 향해 쭉 뻗은 신의 우람한 오른팔입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뒤로 감춰진 기다란 왼팔이지요. 신은 왼팔로 한 여인과 푸토를 감싸서 데려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상당수 미술사학자들이 여인은 아담의 짝이 될 하와의 영혼이고 푸토는 이제 곧 건네질 아담의 영혼이라고 추측하지요.
신은 빠르게 다가오며 아담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신의 시선은 온통 손가락과 손가락의 만남에 집중되고 있지만 생명을 건네려는 그의 집게손가락은 아직 아담의 검지에 닿지 않지요. 오히려 아담의 손은 아래로 떨어뜨려져 있는 것 같군요. 아직 준비가 안 된 걸까요? 이렇게 뭔가를 건네주려는 능동적 손가락과 그것을 받는 수동적 손의 모습을 통해 동적인 신과 정적인 아담의 대조적 자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
르네상스의 거장은 이처럼 육감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땅의 것과 하늘의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을 한데 아울러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미를 표현해 냈습니다. 어느 때 누가 신과 인간의 만남을 이보다 더 극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했겠어요! 20세기의 탁월한 미술사학자 언스트 곰브리치(E. H. Gombrich)가 이 그림에 대해 “위대한 창조의 힘찬 동작과 신의 전능함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고안해 낸 이 방법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 가운데 하나다”라고 평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작품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신이 흙으로 아담을 빚고 그의 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되어 있는데 왜 손가락으로 생명을 건네주느냐, 신이 흙을 빚어 창조했다면 아담의 배꼽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하는 시빗거리들은 세간 입담꾼들의 수다로 차치해 두지요.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신의 모습입니다. 과연 신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신과 관련해 여느 것과는 달리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할까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렇지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천지창조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고 그들에게 신은 영(靈)입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ûah)는 ‘바람’ 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아요. 그래서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닙니다. 도무지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지요.
그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신이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면 천둥, 바람, 불 같은 것으로 그 위용과 능력을 보여 주고(출애굽기 3:2, 신명기 4:12, 15 등), 어떤 때는 꿈을 통해서(창세기 28:12∼16;37:5∼9, 열왕기상 3:5, 다니엘 2:3 등), 또 어떤 때는 환상을 통해서(에스겔 8:3 등) 나타내기도 합니다. 나아가 신은 외부에서 들리는 음성(사무엘상 3:1 등)이나 천사들을 통해서(다니엘 9:20;10:10∼21 등) 자신을 현현하지요. 따라서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물론 신은 전능하므로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건 아니에요. 가령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창세기 18∼19 등). 또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등). 하지만 이 또한 신이 자기를 현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사자(使者)로 나타난 것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설사 곳곳에서 신이 얼굴이나 등이나 머리털 같은 인간의 신체부위를 통해 묘사되었다고 해도(출애굽기 33:23, 다니엘 7:9 등), 이 역시 신의 영성(靈性)에 대한 상징적 묘사일 뿐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종교들의 공통된 해석이지요.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1서 4:12)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디모데전서 6:16)로 표현됩니다.
영적인 것을 육체적인 형태에
혹시 조금 놀랐나요? 아니면 왠지 서운한가요? 만일 당신이 신을 미켈란젤로가 그린 근엄한 노인처럼 생각했다면 조금은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울 겁니다. 솔직히 나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지혜와 위엄으로 가득 찬 노인 같은 신의 모습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신의 이미지를 뇌리에서 말끔히 지워 버리기는 쉽지 않지요. 이제 곧 당신도 알아차리겠지만, 이처럼 의인화된 신의 모습을 우리 의식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지난 수천 년간 신을 직간접적으로 의인화해서 표현해 온 회화, 조각, 시, 소설, 노랫말 같은 숱한 예술작품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예를 들어 존 밀턴(J. Milton, 1608∼1674)의 『실낙원』을 볼까요?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는 천사 라파엘이 아담에게 천상세계의 존재들을 의인화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이지요.
어느 날, 하늘의 천사대군이
칙령으로 소집되어, 즉시
각자의 수령 밑에 찬란한 대열을 갖추어
하늘 끝에서부터 무수히
전능신의 옥좌 앞에 나타났노라.
… 영원한 성부께서
축복에 싸인 그의 아들을 곁에 앉히고
찬란한 광채 때문에 그 정상이 보이지 않는
불타는 산에서 나오듯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들으라. 너희 모든 천사들, 빛의 아들들이여,
군주여, 지배자여, 영주여, 능력가여, 권력가여…,
변함없이 간직해야 할 내 명령을 들으라.
오늘 나는 나의 독생자라고 일컬을 자를
내놓았노라. 더욱이 이 성스러운 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나니, 그가 내 오른편에 있음을
그대들이 보는 바라.”
… 드디어 저녁이 다가와
(우리에게도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니,
필요는 없으되 즐거운 변화를 위함이라)
즉시 무도에서 식사로 옮겼는데
모두들 식욕을 느껴 원을 그리며 둘러서자
원탁이 놓이고 홀연히 천사들의 음식이 쌓이고
천상의 포도에서 짜 낸 홍옥 빛 영주(靈酒)가
진주와 금강석으로 장식된 금잔에 넘쳤노라.
꽃 위에 누워 맑고 산뜻한 작은 꽃들을 머리에 쓴 채
그들은 먹고 마시고, 달콤한 교제 가운데
영생과 환희를 즐겼노라.
어떤가요? 신이 천사들에게 성자의 탄생을 알리고 잔치를 하는 내용을 담은 이 시구(詩句)들은 로마 황제의 위용과 호화로움을 재현한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요?
거장의 탁월한 솜씨로 다듬어진 이 화려하고 장엄한 장면은 수세기 동안 많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웅대하고 아름다운 묘사들 안에 숨겨진 신학적·종교적 오류와 폐단 역시 세월이 갈수록 더 넓고 깊게 자리 잡았지요. 밀턴 자신은 애초부터 이러한 유감스러운 폐해를 염려해 자신의 표현들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혀 두었습니다.
… 아마도
밝혀지는 것이 옳지 못할 다른 세계의 비밀을
어이 말하리오. 그러나 그대에게는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도록,
영적인 것을 육체적인 형태에 비유하여
묘사하겠노라.
천상세계의 ‘존재’와 지상세계의 ‘존재물’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언어적 묘사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화해서 표현할 테니 부디 새겨들으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입니다. 밀턴의 사려 깊은 경고는 사실상 무시되었고, 그의 탁월한 묘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신을 의인화하는 데 뚜렷한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도 종종 신을 이처럼 의인화한 작품들을 매개로 이야기를 펼쳐 갈 것입니다. 다양하고 풍성한 이들 예술작품은 좋건 싫건 서양문명의 주축을 이루어 왔으며, 우리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로 다룰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층 흥미롭고 진지하게 만들 테니까요. 하지만 그럴수록 앞으로 당신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은 전혀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오해하거나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1부 부분)
--------
저자 소개
김용석
철학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시리즈 1~4』, 『설득의 논리학』, 『영화관 옆 철학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데칼로그』, 『기적의 양피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공저), 『다니』(공저)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