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0년 7월 12일 (월)
오전 내내 들뜬 마음에 허둥대다가 점심시간쯤 토오꾜오 나리따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오늘은 가족들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날이다.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나는 비행기 도착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공항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려 허겁지겁 승객들이 나오는 곳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출구가 저만치서 보이기 시작했다.
입국수속을 받고 짐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라는 기대 섞인 예상을 했다. 그런데 웬걸, 하얀색 브라우스와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은 그리스계의 아내가 벌써 저 멀리 눈에 띄었다. 아이고, 비행기가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나 보다. 아내는 두 개의 커다란 짐이 실린 카트 옆에서 두살 먹은 아들을 안고 있었다. 일곱살 먹은 딸은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뛰기 시작하며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딸이 날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번쩍 안아올렸다가 꼭 껴안았다. 두달 만에 보는 나의 딸.
“내 사랑, 보고 싶었어.”
“나두 아빠.”
딸이 날 꼭 껴안았다. 캘리포니아에서 3주 동안 머물면서 거의 매일 해수욕장에 다녔다더니, 딸의 얼굴이 아주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리웠던 딸이 내 귓속에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딸을 껴안고 미안한 마음에 활짝 웃으며 아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들을 안고 있는 아내의 다소 화난 표정이 보였다. 아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다(아빠)”를 연발했다. 이젠 말도 하고, 그동안 많이 컸구나. 딸을 내려놓고 아들을 번쩍 들어올려 꼭 껴안았다.
“왜 이리 늦었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한국 정보부에서 잡아가지 않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잖아.”
아내가 말했다. 연거푸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버스표 사는 곳으로 갔다. 한국 정보부라… 그럴 가능성은 없었겠지만, 사실 나도 겁이 많아 지난 2개월 동안 가끔은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들곤 했다. 이 모든 일을 이해하려면 두달 전쯤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흘러왔는지도 모르게 후딱 지나가버린 날들. 평범한 물리학자에 불과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뭔지 모를 열정에 휩싸여서 동분서주하며 그 시간들을 보내왔다.
제1장
천안함사건과 부닥치다
2010년 5월 10일 (월) ~ 20일 (목)
토오꾜오대학(東京大學)의 한 연구소에 초빙교수로 초청을 받아 올 여름방학을 보내기로 했다. 매년 여름방학에 최소한 두 달은 일본에 있는 대학에 초청을 받아 연구를 하며 지내곤 했다. 작년까지 4년 동안은 줄곧 나의 15년 지기이자 공동연구자인 친구가 교수로 재직중인 토오호꾸대학(東北大學)을 방문했었다. 올해는 10년 넘게 절친하게 지내온 친구 사또오 타꾸(佐藤卓) 교수가 소속한 토오꾜오대학에 초빙을 받게 되었다.
나는 석달이 조금 넘게 토오꾜오 근처에서 아파트를 빌려 지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친구들과 공동연구자들이 많다. 내가 전공하는 엑스레이나 중성자 산란을 이용한 고체물리 연구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버지니아대학에 교수로 가기 전에 미국 국립표준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에서 10년 정도 근무했는데, 그때 일본에서 오는 연구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연구도 꽤 도와주었다. 그때 쌓인 인맥이 일본에 있고 지금도 몇몇 그룹과는 꾸준히 공동연구를 하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토오꾜오대 연구소는 고체물리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구소다. 연구소에는 나와 오랫동안 공동연구를 해온 교수들도 몇몇 있는데 특히 나의 절친한 친구 사또오 교수가 나의 초빙교수직을 지난 겨울에 준비해놓았던 것이다.
버지니아대학에서 학기가 끝나자마자, 여름방학 동안 일본에서 많은 연구를 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내 그룹에 있는 박사과정 학생 L군과 함께 토오꾜오대 연구소로 왔다. 도착한 후 이틀째 되는 날 사또오 교수와 나, 그리고 L군은 토오까이(東海)라는 조그만 도시에 있는 연구소에 같이 실험을 하러 갔다. 일주일쯤 그곳에서 실험을 하고는 5월 20일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 들렀다가 홍콩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내가 천안함사건에 연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5월 20일 (목) ~ 25일 (화)
토오꾜오에서 한국을 들른 이유는 포항에서 열리는 한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동하던 중 라디오에서 나오는 천안함 침몰사건에 관한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를 잠깐 들었다.
백령도 해상에서 천안함이 침몰한 3월말에 나는 미국에 있었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에 매여 수업하랴 연구하랴 너무 바빠서 별로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뉴스도 잘 보지 못했다. 일본에 있을 때도 간혹 뉴스를 통해 듣기는 했지만 별달리 관심을 갖지 못했다. 나에게 천안함사건은 그렇게 잊혀지고 있었던 터였다.
동료 연구자들과 저녁을 먹은 후 다음날에 있을 발표를 준비하느라 거의 밤을 새웠다. 다음날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고향집으로 부모님을 뵈러 갔다. 작년에 이어 부모님과는 1년 만의 재회였다.
저녁 7시 뉴스에 다시 합조단 발표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님이 “북한이 자기들이 했으면 했다고 할 텐데, 이번에는 저렇게 안했다고 하니, 참 누가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평소에 반공 보수에 철저하시던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다니, 아버님이 변하신 건가 아니면 합조단 발표가 그토록 믿음직하지 못한 건가. 하지만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며칠씩 여행을 다니는데, 이번에는 체류기간도 짧고 해서 가까운 곳을 들르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차를 몰아 두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절과 그 근처의 호텔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가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온천탕이 있는 한 호텔을 찾아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조카의 자동차를 빌려 부모님을 모시고 운전을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절이 소재한 도시에 도착하여 내비게이션을 따라 갔더니 영 딴 절이 나왔다. 그 근처 골프연습장에서 나오는 한 중년남자에게 우리가 찾는 절이 어디 있냐고 묻자, 내비게이션 보고 왔냐며 물었다. 내비게이션에 잘못된 정보가 들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본다는 것이다.
그가 일러준 대로 길을 가며, 기계를 너무 믿으면 안된다고 부모님과 농담을 하면서 그 절로 갔다. 한바퀴 둘러보고 절에 딸려 있는 책방 겸 찻집에 들렀다. 차를 시키니, 가게를 보던 보살님이 오늘은 차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부모님을 보고는 어른들과 같이 왔으니 당신들이 마시려고 준비한 차라도 대접하겠다며 자리에 앉으라 했다.
한참 있다 차가 나왔다. 지금은 이름을 잊었지만 아주 향기롭고 맛이 좋은 열매로 만든 보약 차였다. 부모님께서 흡족해하셨다. 보살님께 감사를 드리고 책을 사드려 보답할까 하고 무슨 책들이 있나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대로, 법정스님이 쓴 책 두권과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 『대화』를 샀다. 그후 한달 넘게, 보살님의 친절함이 이끈 그 책들이, 나에게 심적으로 큰 힘이 되어줄 줄은 그때는 몰랐다.
5월 25일 (화) ~ 28일 (금)
공동연구를 목적으로 홍콩과기대학(Hong Ko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홍콩 땅. 공항에 내려 열차를 두번 갈아타며 과기대 근처 역까지 왔다. 홍콩에 대한 첫인상은 도시가 모던하고 깨끗하다는 것. 캠퍼스 내 숙소에 짐을 풀고 물리과 학과장 N교수를 찾아가니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연구실을 내주었다. 거기에 며칠을 묵으며 학과장을 비롯한 다른 한 교수와 그들 학생들과 더불어 매일 공동연구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일과가 끝나면 저녁마다 혼자 있게 되었다. 별로 할 일이 없어 한국 신문들을 인터넷에서 훑어보는데 조선, 중앙, 동아일보에서는 매일 대문짝만하게 북한에 대한 강경한 논조를 펴고 있었다. 천안함사건 때문이었다. 곧 전쟁이 날 것만 같았다.
한겨레, 경향신문은 거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간간이 박선원(朴善源,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 신상철(申祥喆, 서프라이즈 대표), 이종인(李鍾仁,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같은 분들이 합조단 발표에 의문점을 제기한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하루는 <오마이뉴스>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명진 스님이 계신 절에 가서 한 격정적인 강연을 보았다. 청중을 휘어잡는 게 역시 도올 선생다웠다. 헌데 며칠도 안되어, 한 우익단체에서 바로 그 강연을 이유로 그를 고소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참 어이가 없었다.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정신이 언제 실종되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 천안함 특별위원회에서 민주노동당 이정희(李正姬) 의 원이 100m 가량의 물기둥이 없었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김태영(金泰榮) 국방장관을 추궁하는 것도 보았다. 참 당찬 의원이란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와 인터넷전화로 통화를 하면서 문득 나이아가라 폭포의 높이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에서 높이를 검색해보니 50m밖에 되지 않았다. 전에 그 폭포에 가서 배를 타고 폭포 아래의 40~50m 부근에도 못 미쳤을 때, 당시 비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노출된 옷이 홀딱 젖었던 기억이 났다. 만약 100m 물기둥이 있었다면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견시병들은 오죽했을까. 그런데 두명 중 한명의 얼굴에만 물방울이 튀었다니,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프레시안>에서 내가 평소 친분이 있는 존스홉킨스대학 서재정(徐載晶) 교수의 글을 보았다. 천안함의 절단된 단면을 근거로 합조단의 발표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서재정 교수는 한반도 정세에 관한 글을 주로 <프레시안>에 발표하곤 했다. 그의 글을 볼 때마다 항상 간략한 안부 이메일을 주고 받았던 터라 이번에도 나는 글을 잘 봤다는 메일을 보냈다. 곧 그의 회신이 왔다. 그런데 나의 이메일에 대한 그의 회신은 예기치 않은 절실함이 깃든 것이었다.
“격려 고맙다. 나는 벌써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실이 결국엔 이길 거라고 확신한다. 당신이 지난주에 한국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난 지난주도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 있다”라는 답장이었다.
어제 저녁에 유튜브(YouTube) 동영상에서 본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의 어뢰에 의한 배의 폭파실험을 떠올리며 나는 서재정 교수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천안함이 어뢰 폭발로 침몰했다면 당연히 100m 가량의 물기둥이 치솟아서 선상에 있었던 두 병사가 홀딱 젖었어야 하는데 그들은 물기둥을 못 보았고 물에 젖지도 않았으니 어뢰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혹시 물리학자의 의견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참조메일을 받았다. 서교수가 박선원 박사에게 보내는 이메일이었다. 둘 사이에서는 이미 몇차례 연락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선원 박사님, 어뢰 설계도와 사진 비교에 이승헌 교수님 자문을 구하는 게 어떨까요?”
흠, 합조단의 자료들을 볼 수 있겠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라 가슴이 조금 뛰기 시작했다.
(프롤로그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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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승헌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도미, 1996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성자와 엑스레이 산란을 이용한 고체물리학 전공. 1996년에서 2005년까지 미국 국립표준연구소(The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물리학자를 역임했다. 2005년에서 2009년까지 버지니아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국립표준연구소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으며 재미한국물리학자협회의 젊은 과학자상과 미국 중성자산란협회 과학상을 수상했다. 5편의 <네이처 Nature> 자매지 논문을 포함, 현재까지 약 100여편의 SCI 논문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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