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리의 붉은 성벽 아래 프랑스 군대가 정렬해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용장들을 사열할 예정이었다. 용장들은 벌써 세 시간 넘게 그곳에서 황제를 기다렸다. 무더운 날이었다. 약간 흐리고 구름이 많이 낀 초여름 오후였다. 갑옷 속은 약한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처럼 달아올랐다. 부동자세로 열을 지어 서 있는 기사 가운데는 벌써 의식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옷 덕택에 그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말안장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나팔이 날카롭게 세 번 울렸다. 그러자 투구 장식 깃털들이 세찬 바람이 불어올 때처럼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들리던 성난 바다 울음소리가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 음울한 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투구에 덮인 전사들의 목에서 울려 나오는 코 고는 소리였다. 드디어 카롤루스 대제가 그들을 사열했다. 마침내 용장들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보통 말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말을 타고 안장 앞머리에 손을 얹은 카롤루스가 맨 끝에서부터 전진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통치를 하고 전쟁을 하고, 전쟁을 하고 통치를 하며 전진, 전진한다. 지난번 전사들이 보았을 때보다 약간 더 늙은 것 같았다.
카롤루스는 장교들 앞을 지날 때마다 말을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장교의 아래위를 살펴보았다.
“자네 이름은 무언가, 프랑스의 용장?”
“브르타뉴의 솔로몬입니다, 폐하!”
장교는 큰 소리로 대답했고 투구를 들어 상기된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근황 몇 가지를 덧붙였다.
“기사 오천 명, 보병 삼천오백 명, 하인 천팔백 명, 전투는 오 년째입니다.”
“브르타뉴인들과 함께 용감히 싸워라, 용장!”
카롤루스는 이렇게 말하더니,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다른 기병대의 대장 쪽으로 가 버렸다.
“자네 이름은 무언가, 프랑스의 용장?”
황제가 다시 물었다.
“빈의 올리버입니다, 폐하!”
용장은 투구 철망을 들어올리자마자 또박또박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엄선된 기사 삼천 명과 부대원 칠천, 공격용 무기 스무 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프랑스인들의 왕이신 카롤루스 폐하의 은총으로 이교도인 ‘잔인한 팔’을 무찔렀습니다.”
“훌륭하다, 장한 빈인이여!”
카롤루스는 이렇게 말하고 계속 다른 장교들에게 일렀다.
“말들이 너무 말랐군. 여물을 충분히 주도록!”
그리고 그는 앞으로 나갔다.
“자네 이름은 무언가, 프랑스의 용장!”
그가 다시 말했는데 언제나 똑같이 ‘탁타— 타타타이타타— 타타— 타타타…’ 하고 박자를 맞췄다.
“몽펠리에의 베르나르입니다, 폐하! 브루나몬테와 갈리페르노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몽펠리에! 여인들의 아름다운 도시지!”
그리고 그는 수행원에게 말했다.
“이 용장의 진급을 고려해 보라.”
황제는 용장들이 기뻐할 말만 했지만 그 말투는 오래전부터 언제나 똑같은 박자를 유지했다.
“내가 아는 문장(紋章)인데, 자네 이름은 무언가?”
황제는 방패에 새겨진 문장으로 기사들을 모두 구별할 수 있어서 구태여 기사들이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름을 밝히고 얼굴을 보이는 게 관례였다. 혹시 사열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 생긴 어떤 기사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갑옷을 입혀 사열 장소에 보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관례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몬 공작의 아들, 도르도뉴의 알라르입니다…”
“힘을 내게, 알라르, 아버지가 뭐라고 했나.”
그러고 그는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탁타— 타타타이타타— 타타— 타타타.’
“마운트조이의 고드프리입니다! 전사자를 제외하고 기사 팔 천 명이 남았습니다”
투구의 장식 깃털들이 물결쳤다.
“덴마크에서 온 휴입니다! 바이에른의 나모입니다! 잉글랜드의 팔머린입니다!”
밤이 되었다. 이제 입 보호대와 눈 보호대로 덮인 얼굴들만으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이 나오고 어떤 행동이 이어질지 이미 모두 예측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이 전쟁에서는 모든 일이 다 그랬다. 규정에 따라 적들과 충돌하고 결투를 벌였기 때문에 내일 전투에서는 누가 승리를 하고 누가 패배할지,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겁쟁이가 될지 오늘 벌써 알 수 있었고, 또 누가 복부 부상을 당할 차례인지 위기를 모면할 차례인지 다 알고 있었다. 밤이면 철공들은 횃불 아래에서 언제나 같은 부분이 부서진 갑옷들을 망치로 두들기곤 했다.
“그런데 자네는?”
왕은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 앞에 당도했다. 검고 가는 선 하나가 갑옷 테두리에 쳐져 있었다. 그 나머지는 순백색이었는데 긁힌 상처 하나 없었으며 갑옷 이음새들은 모두 깨끗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양산 닭 깃털인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지갯빛으로 변하는 깃털이 투구 위로 솟아 있었다. 방패 위에는 문장이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커다랗게 드리운 두 망토 자락 속에 그려진 그 문장 안에는 또 다른 망토 자락 두 개가 있었고 그 망토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문장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문장 안에는 망토로 감싸인 더 작은 문장이 또 있었다. 점점 더 작아지는 그 그림 속에 망토는 계속 등장했는데 망토 하나 속에 또 다른 망토가 계속 펼쳐졌다. 그리고 그 망토 가운데에는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림이 작아져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 있는 자네, 어떻게 그렇게 깨끗할 수 있지…”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지면서 병영에서 부딪히는 용장들의 청결 문제에 차츰 무감각해져 가던 카롤루스 황제가 말했다.
“저는…”
닫힌 투구 속에서 금속성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목구멍에서 울려 나오는 게 아니라 갑옷의 얇은 금속판 자체가 진동해서 울리는 것 같았고, 가볍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기도 했다.
“셀림피아 치테리오레와 페츠의 기사, 코르벤트라츠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니 가문과 기타 가문 출신인 아질울포 에모 베르트란디노 입니다.”
“아하.”
카롤루스 대제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쑥 내민 아랫입술에서는 작은 나팔소리가 새어 나왔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기사들의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할 거야.’
그러나 그는 곧 눈썹을 추켜올리며 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투구를 들어 올려 자네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건가?”
기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팔 보호대에 보기 좋게 연결된 철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말안장 앞 고리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사이 방패를 쥔 다른 팔이 몸을 떨 때처럼 흔들렸다.
“이봐,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용장! 왜 자네의 얼굴을 짐에게 보여 주지 않는 건가?”
카롤루스 대제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폐하.”
투구 턱받이에서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이런! 우리 군대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기사까지 있군. 어디 좀 보세.”
황제가 소리쳤다.
아질울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손을 움직여 얼굴 보호대를 들어 올렸다. 무지갯빛 깃털이 달린 투구와 이어진 백색 갑옷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이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그런데 자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나?”
카롤루스 대제가 말했다.
“의지의 힘으로 했습니다.” 아질울포가 말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성스러운 동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래! 말 잘했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자세라면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겠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니까 자네에겐 빈틈이 없군!”
아질울포는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황제는 이제 사열을 끝냈다. 황제는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천막을 향해 멀어져 갔다. 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는 되도록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했다.
‘열을 해체’해도 된다는 나팔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보통 때처럼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커다란 숲을 이루었던 창들이 밀밭에 바람이 불 때같이 파동을 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기사들은 말안장에서 내려 관절을 풀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고 하인들은 고삐를 잡고 말들을 데려갔다. 용장들은 이런 혼란과 먼지에서 벗어나 색색깔 장식 깃털들을 흔들며 몇몇씩 무리를 지어 농담을 하기도 하고 허세도 부리고 여자와 명예에 대해 잡담도 하면서 꼼짝 않고 서 있던 몇 시간 동안의 긴장을 풀었다.
아질울포는 아무 무리에나 끼여 보려고 몇 걸음 걸었다. 그러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무리 쪽으로 옮겨 갔다. 아무도 그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이 사람 저 사람 등 뒤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다가 혼자 떨어져 나왔다. 어둠이 찾아들었다. 투구 꼭대기에 달린 무지갯빛 깃털들이 이제 모두 하나의 색깔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색 갑옷만은 그 풀밭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아질울포는 갑자기 옷을 다 벗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팔을 꼬고 어깨를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걸어갔다. 성큼성큼 마구간을 향했다. 마구간에 도착한 아질울포는 말들이 규정대로 관리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마부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소년 마부들을 벌주었다. 그는 잡역 순번을 모두 확인하고, 할 일을 다시 할당하고,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 말을 잘 이해했는지 보려고 마부들에게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동료 장교 용장들이 근무를 태만히 하는 게 보이기만 하면, 한밤중이라도 다른 장교들과 한가롭고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냈다. 그러고는 신중히, 그러나 정확하게 그들의 과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떤 장교는 어쩔 수 없이 당직을 서야 했고 다른 장교는 보초를 섰고 또 나머지는 순찰을 돌러 가야 했다. 아질울포의 말은 언제나 옳았기 때문에 용장들은 아질울포가 지적한 일을 피할 수 없었지만 불쾌감을 숨기지는 않았다. 셀림피아 치테리오레와 페츠의 기사이자 코르벤트라츠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니 가문과 기타 가문 출신인 아질울포 에모 베르트란디노는 분명,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불쾌히 여겼다.
(제1장 전문)
----------------------------------------
작가 소개
이탈로 칼비노 Italo Calvino, 1923-1985
1923년 쿠바에서 농학자였던 아버지와 식물학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이주한 뒤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접하며 자랐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전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칼비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교 농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조셉 콘래드에 관한 논문으로 토리노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레지스탕스 경험을 토대로 한 네오리얼리즘 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1947)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당시 이탈리아 문학계를 대표하던 파베세, 비토리니 등과 교제했다. 『반쪼가리 자작』(1952), 『나무 위의 남작』(1957), 『존재하지 않는 기사』(1959)로 이루어진 ‘우리의 선조들’ 3부작처럼 환상과 알레고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과 『우주 만화』(1965)와 같이 과학적인 환상성을 띤 작품을 발표하면서 칼비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비토리나와 함께 좌익 월간지인 <일 메나보 디 레테라투라>를 발행했다. 1964년 파리로 이주한 뒤 후기 대표작인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을 발표했으며 이 작품으로 펠트리넬리 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4년 이탈리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대 대학교의 ‘찰스 엘리엇 노턴 문학 강좌’를 맡아 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강연 원고를 준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85년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소개
이현경
학부와 대학원에서 이탈리아어와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주관하는 1회 번역 문학상과 2009년 이탈리아 정부에서 주는 국가 번역 문학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반쪼가리 자작』, 『보이지 않는 도시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우주 만화』와 『침묵의 음악』, 『바우돌리노』, 『이것이 인간인가』, 『작은 일기』, 『권태』,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미의 역사』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