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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
‘리영희인’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의 정신생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내게 접목이 되어 그와 나와는 생명의 합일체가 되었다. 다른 어떠한 작가나 철학자도 그처럼 나의 영혼을 자극하고 나를 끌어올린 사람은 없다. 그를 알고부터 내게서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인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되는 것이다.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이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자예프(1874~1948)는 두 차례의 투옥에 이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에서 머물다가 프랑스 파리로 옮겨 종교철학원을 개설하고 종교기관지 『길』을 발행하였다. 그의 『자유와 정신』, 『노예와 자유』 등 대표작은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베르자예프의 도스토예프스키 평가에 대해 작가 이병주는 베르자예프의 앞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 아래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같은 천체에 사는 인간일 수 없다는 뜻으로 된다. 이것은 내 경험과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주박呪縛과도 같은 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병주, 「도스토예프스키」, 『동서양고전탐사1』, 생각의나무, 2002.)
서두에 베르자예프의 글을 인용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인’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라는 말을 따와 우리의 현실에 대입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군사독재시대에 한국인도 리영희를 아는 ‘리영희인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고 하면 어떨까.
군사독재와 반이성의 광기가 한국사회를 짓누르던 시대에 의식 있는 시민·청년·학생·노동자는 리영희에 주목했다. 그의 글을 읽은 청년들은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에 나서는 한편, 북한·중국·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실정에 ‘눈뜨게’ 되었다. 군사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 어용지식인들과 수구언론인들은 틈만 나면 이데올로기의 색칠을 하고, 검찰과 사법은 법의 올가미로 육신을 묶었다.
지난 10년 민주정부 시절에는 좀 뜸하다 싶었는데 MB정권 등장 이후 ‘한국의 네오콘’이 극악한 말로 다시 그를 매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리영희에 대한 네오콘의 이념 공세를 지켜볼 때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떠오른다. 동독 출신 극작가 브레히트(1808~1956)는 나치를 비판하다 쫓겨나 유럽 각국을 떠돌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숱한 명작을 쓰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귀향하였다. 망명지에서 내내 불의와 싸운 그는 동독으로 돌아가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그의 책이 더 많이 팔릴 정도로 독일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어떤 특정한 세계관을 신봉한 적이 없었고 그와 반대로 통상적인 견해나 의견을 최대한 조롱했던 20세기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역설적이지만 학자들과 독자들에 의해서 항상 상이한 이데올로기에 고정되었다.
유물론자·허무주의자·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 등 브레히트에게 적용되지 않는 ‘주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견해만 가지고는 지속성 있는 작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브레히트 자신은 오히려 사실에 의존했고 투이즘Tuismus 즉 곡학아세에 반대했다. ‘투이Tui'는 ‘intellektuell'을 ‘tellekt―uell―in'으로 도착시켜서, 그 머리글자로 만든 브레히트의 신조어다. (얀 크노프 지음, 이원양 옮김, 『베르톨트 브레히트』, 11쪽, 인물과사상사, 2000.)
얀 크노프가 말했듯이 브레히트는 한순간도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적이 없으면서, 스스로 정치화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리영희 역시 그랬다. 그는 이승만 백색독재 이래 한순간도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적이 없으면서, 그 자신이 어떤 정파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는 “사회주의 지향의 지식인”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일 뿐이다. 브레히트는 1949년 4월 중순 폰 아이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서독이나 동독 중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다른 쪽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될 수 없지 않은가”라고 썼다.
루쉰을
글쓰기와 생활의 은사로 삼다
리영희는 중국의 작가 루쉰魯迅을 존경하고 또 닮고자 했다. 루쉰은 중국인들에게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로망 롤랑, 러시아의 톨스토이에 필적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반면 비판자들도 적지 않았다. 리영희는 루쉰을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다.
나의 글 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루쉰의 그것이에요. 글 쓰는 기법, 문장의 아름다움,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리영희, 「영원한 스승, 루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367쪽, 두레, 1994.)
리영희의 루쉰 닮기는 반대 측으로부터 얻어먹은 갖가지 ‘욕’도 비슷하다.
내가 평론문장 쓰기에서 언제나 명심하는 교훈은, 루쉰이 광명 속에 앉아서 암흑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흑 속에서 암흑을 대상화한 태도다. 그는 값싼 도덕론으로 문제를 논하는 자들을 혐오하고 멸시했다. 나도 그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그 현실상황에서 값싼 동정으로 미래의 행복을 민중의 눈앞에 들어 보이는 대신, 얼룩진 민중의 못남을 가혹하리만큼 밝혀 보이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삶을 따르고자 했다. (리영희, 「영원한 스승, 루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367쪽, 두레, 1994.)
중국의 저명한 현대사상가 리쩌허우李澤厚는 루쉰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는데, ‘반봉건’ ‘반식민지’를 ‘분단’ ‘군사독재’로 바꾸면 그대로 리영희에 대한 평가가 된다.
반봉건·반식민지라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루쉰은 수십 년 동안 시종일관 애증이 분명했고 조금도 모호함이 없었다. 그토록 맑게 깨어 있으면서도 유난히 깊이 사색하는 루쉰의 개성적 특징과 불같은 열정을 얼음 같은 냉정함 속에 담고 있던 작품의 미학적 품격은 바로 생활이 각인시킨 흔적이다. (리쩌허후 지음, 임춘성 옮김, 『중국근대사상사론』, 696쪽, 한길사, 2005.)
리영희가 루쉰의 글을 인용한 다음 한 대목은 바로 자신의 글쓰기 자세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루쉰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 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루쉰은 물론, 당시의 중국사회와 중국인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쓴 것이다. (리영희, 「읽는 이에게」, 『우상과 이성』, 한길사, 증보1판, 1980.)
루쉰은 “나는 한 마리 상처 입은 하이에나다. 홀로 황야를 달리며 자신의 혀로 몸에 난 상처자국을 핥아내고는 다시 전투에 뛰어들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사회에서 독재의 수족이 된 공권력과 수구언론이 민주·통일인사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부정적 의미의 ‘하이에나’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 그대로 리영희에게 투영된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다기보다는 ‘거짓’이 태생적으로 맞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왔나 봅니다. 특히 대중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면서 개인적인 치부나 향락에 몰입하는 권력집단의 거짓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지키려 국민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인간다운 권리와 정체성을 박탈하는 집단이죠. (리영희, 「구속 ? 해직 가시밭서 꽃피운 ‘화려한 금서’」, <대한매일>, 1999년 4월 30일.)
리영희는 삶을 대하는 기본자세에서 루쉰에게 빚을 졌다고 여겼고, 루쉰의 젊은 날의 행적을 더듬으며 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담금질했다. 그래서 『우상과 이성』 첫머리에 루쉰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헌사로 삼아 빚을 갚으려 한다고 했다.
루쉰에게 진 빚은 무엇인가? 그의 삶의 기본자세에서 배운 빚이다. 그는 일본 유학 때 중국인의 몽매함을 절감하고 의학공부로 신체의 병을 고치기보다 동포의 정신의 병을 고치겠다고 문학수업으로 전환한 내력은 모르는 이가 없다. 그는 원래 뜻했던 소설문학으로서보다는 평론으로 중국 민중의 정신적·의식적 몽매를 깨우치는 역할을 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민중과 함께 있었고 민중 속에 있었다. 민중을 속이는 일체의 허위와 권력에 대해서는 용감한 전사였다. 민중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그의 글을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각성으로 이끌었다.
그의 글에는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 고매한 학설이나 이론으로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것은 동포에 대한 지식인의 배신행위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지식인의 전통적 인생관인 “영원히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긴다”는 허황한 생각을 거부하였다. … 나는 노신의 이 점이 좋다. 영원·허망·허영·허식·허욕을 마음에서 떨쳐버리면, 눈앞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자명해진다.
노신이 그 시대의 중국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전통과 지배계급의 허위를 까밝히는 일이었다. 몽매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작업이었다.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 (추상적인)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친다’는 교만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바탕이어야 한다. 이것이 루쉰이었다.
… 내가 이 나라의 한 시대를 사는 ‘반의식’의 철통 속에 갇혀서 사는 학생들에게 어느 만큼의 신선한 공기와 빛을 넣어주었는지는 나도 계량할 수 없다. 하지만 권력을 쥔 쪽에서 말끝마다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미루어 헛수고만은 아니었었다고 자위한다.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해도 참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루쉰처럼 대학시절에 대오각성해서 동포의 정신적 구제에 헌신할 대전환을 할 정열도 의식도 없었다. 해양대학이라는 곳을 꼬박 4년간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7년간을 6.25 속에서 사는 동안 배웠다는 것은 권총사격술뿐이다. (리영희, 『역설의 변증』, 한길사, 1987.)
리영희는 특정 이념의 ‘기수’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거짓’이 맞지 않아서 ‘진실’을 말하고 실천하다가 용공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의식화의 수괴’로 매도당한다. 리영희의 이름 앞에 하나의 관용어만 필요하다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서문」, 『우상과 이성』, 한길사, 1977.)
사회학자 고병권은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아카데미를 세운 플라톤이 아니라 몽매한 아테네 시민들을 날카로운 침으로 쏜 소크라테스라 하겠다.
리영희 선생의 존재는 이런 탐구력으로 언제나 빛난다. 애매모호한 글발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결코 없다. 사회과학자의 엄밀성과 투명성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냉엄하고 뜨거운 진실추구와 민족에 대한 사랑 없이는 감내하기 힘든 작업이다. 지적 겸손에 어긋날까봐 되도록 자기표현을 자제하는 편이면서도,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용기는 곧 시대의 구원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또 듣는 이의 부끄러움이어야 옳다. 막상 부끄럼을 타야 할 위인들의 한결같은 예외는 오만불손으로 들린다. (최일남, 「균형감각의 편안함」, <창작과비평>, 1994년 가을호, 350쪽.)
다들 지조와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현대사의 격동기에 리영희의 진리 추구는 더욱 치열했다. 더디지만 꾸준한 걸음이었기에 1980년대에 거세게 몰아닥친 ‘좌편향’의 목소리에도 경사되지 않았고,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재빨리 변신한 ‘역풍’에도 초연했다. 오히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통찰을 제시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역설하면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 부정하고 사나운 권력의 치맛자락으로 기어든 속물 지식인·언론인이 판치는 가운데 리영희는 시선을 역사의 지평에 고정시킨 가운데 진실을 탐구하고 전하는 데 온 열정을 바친 것이다.
그의 글쓰기 자세는 종교적 엄숙주의에 가깝고 진실 추구의 의지는 혁명가에 가까웠다. 우상이 광기로 몰아치는 사회에서 진실이 설 곳은 바늘 끝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난무하는 우상의 광기와 요설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온갖 우상과 요설이 득세하여 상식과 지성을 마비시킬 때 그의 글은 몽롱한 의식을 깨우는 맑고 차가운 ‘마중물’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운 우상과 요설이 득세하여 그 ‘마중물’이 다시 필요하게 되었으니 시대의 불행이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나 스탈린 시대 소련의 지식인이었다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을 터이고, 문화혁명기 중국에서 살았다면 하방下放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에 머물렀으면 아오지 탄광에 일생을 묻었을 터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출척을 당한 끝에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문난적’으로 내몰린 선비들의 문집이나 문록은 금서 낙인이 찍혀 불태워졌으니, 원천석의 『운곡야사』, 김종직의 『점필재집』, 허균의 『홍길동전』, 박세당의 『사서사변론』, 정재두의 『하곡집』 등이 그것이다.
20세기 한국에서도 ‘사문난적’의 집단폭력은 시퍼렇게 살아 숱한 지성과 양심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저작에 금서 딱지를 붙였다. 해방 후 온통 기회주의와 협잡이 판치던 한국사회에서 신념을 갖고 진실의 편에 선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하고도 외로운 행보였다.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요인들이 5.16쿠데타 정권에 가담하고, 4.19혁명 주동자들이 군사정권과 유신권력에 협조하고 참여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누렸다. 쟁쟁한 반독재 지식인·언론인이 신군부정권에 봉사하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386세대 가운데 다수가 양지를 좇아 수구세력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난장판인 격변기에 진실의 편에 서서 진실을 지키는 일은 구도의 길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단하였다.
진실은 신비롭고 달아나기 쉬운 것이어서
늘 새로이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위험하고 우리를 열광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체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프랑스의 저항 작가 알베르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신비롭고 달아나기 쉬운 진리 수호에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랐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진 진리의 수호자들에게는 모진 탄압과 고난이 함께하였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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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언론인이다. 『민주전선』 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董狐之筆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친일정치 100년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필화사』, 『위서』, 『금서』,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을사늑약 1905년, 그 끝나지 않는 백년』, 『통일론수난사』,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나』, 『종교, 근대의 길을 묻다』,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단재 신채호 평전』, 『백범 김구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안중근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장준하 평전』, 『죽산 조봉암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김대중 평전』,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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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소개
6·25전쟁 시작과 함께 장교(중위)로 입대하여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소령 예편)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입사한 이후 <워싱턴포스트>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1964년 <조선일보> 정치부로 옮겨 이듬해 외신부장이 되었다. 1969년 필화사건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고, 이듬해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복직했으나 1971년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해직되면서 언론계를 떠나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되어 1980년 3월 복직, 그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가을에 다시 복직되었다. 1985년, 일본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독일연방교회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동연구에 종사하였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Peace and Conflict> 특별강좌를 맡아 강의하였다. 1988년 <한겨레> 창간을 주도하면서 이사 겸 논설고문으로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후 1999년까지 동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이러는 동안 독재정권에 의해 수차례 구속되어 모진 감옥살이를 겪었지만 한 번도 지조를 굽히거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분단을 넘어서』(1984),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 『베트남전쟁』(1985), 『역설의 변증』(1987), 『역정』(1988), 『自由人 자유인』(1990),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스핑크스의 코』(1998), 『반세기의 신화』(1999), 『대화』(2005) 및 일본어판 『分斷民族の苦惱』(1985), 『朝鮮半島の新ミレニアム』(2000)이 있다. 편역서로는 『8억인과의 대화』(1977), 『중국백서』(1982), 『10억인의 나라』(198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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