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기고 보탠 이의 글
눈동자 그려 넣기
표지가 책의 얼굴이라면 제목은 눈동자에 해당한다. 사람의 눈동자만 보고도 그의 됨됨이와 그릇을 얼추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제목만으로도 책의 성격과 형태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본문의 내용을 집약하거나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제목은 책의 본문 내용을 암시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책은 영·미 문학작품들의 제목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명한 제목들이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지, 제목을 짓는 작가들의 버릇과 요령으로는 어떤 게 있는지, 제목을 둘러싸고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어떤 실랑이가 있었는지, 엉뚱하거나 기발한 제목들은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등 제목 이면의 흥미진진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제목들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작가와 제목도 없지 않다. 비록 낯선 작가와 작품이라 해도 제목에 얽힌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나 편집자처럼 제목에 대한 고민이 업무의 일부인 이들에게 이 책에 소개된 일화들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자극을 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보통의 독자들에게도 책의 중요한 부분인 제목의 세계를 깊숙하게 들여다볼 좋은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영·미 문학작품들의 제목에 관한 책을 읽고 번역하다 보니 한국 문학작품들의 제목에 대해서도 비슷한 작업을 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줄잡아 100년의 연륜을 쌓아 오는 동안 한국 현대문학에도 숱한 제목들이 명멸했다. 제목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와 뒷얘기들을 이따금씩 접한 적은 있어도 그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놓은 것은 없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게으름과 능력 부족으로 충분한 작업이 되지는 못한 것만 같아 아쉬움이 크다. 반드시 포함시켜야 했는데 빠뜨린 제목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여기 포함된 제목들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있고 재미있는 설명을 곁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출간 일정을 마냥 늦출 수만은 없어 일단 지금까지의 조사 및 취재 결과를 내보낸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이제 비로소 걸음마를 떼었을 뿐 가야 할 길이 창창하다. 기회가 닿는 대로 보완과 수정을 거쳐 더 풍부하고 알찬 내용으로 업그레이드할 것을 약속 드린다.
최재봉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1952)
“고도란 말로 신을 가리키고자 했다면 그냥 신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말이다. 베케트는 자신의 희곡에 붙인 수수께끼 같은 제목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희곡 가운데 하나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나름대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제목과 등장인물을 연구한 게 웬만한 가내공업 수준의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베케트는 어른이 된 뒤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작품 역시 프랑스어로 썼다. ‘고도(Godot)’는 신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디외(dieu)’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언젠가 베케트는, 아마도 농담 삼아, ‘고도’라는 이름이 목 긴 구두를 가리키는 프랑스 속어 ‘고디요(godillot)’나 ‘고다스(godasse)’에서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연극에서 발이 일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영감의 다른 원천으로 추정되는 것은 그가 어느 길모퉁이에서 연례 행사인 투르 드 프랑스 자전거 경주대회를 보러 나온 대규모 인파와 마주쳤던 일이다(베케트는 이 설을 부인한 적이 없다). 베케트가 사람들에게 왜 나와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지요.”라고 대답했는데, 고도는 경주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가장 나이 든 (그리고 가장 느린) 선수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베케트가 매춘부들로 유명한 파리의 고도 드 모루아 거리 모퉁이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인이 접근해왔다. 그가 거절하자 짜증이 난 그녀는 당신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느냐, “고도를 기다리는” 거냐고 물었다 한다. 베케트가 작품을 쓸 때 매춘부의 엉뚱했던 질문이 떠올라서 그 말을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1919)
서머싯 몸은 자신의 책 제목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대화 도중 맥락에서 벗어나면서까지 그것들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면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성공한 책의 제목이 바로 좋은 제목이야.” 어느 날 몸이 한 친구와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달과 6펜스』를 가리켜 아주 좋은 제목이라고 하자 몸이 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나? 사람들은 제목이 좋다고 하면서도 정작 무슨 뜻인지는 모르거든. 달을 잡으려고 손을 뻗느라 발밑의 6펜스를 놓친다는 뜻이라구.”
윌리엄 새커리
허영의 시장
Vanity Fair(1848)
영국의 사회상을 그린 이 방대한 희비극은 이미 브래드버리 앤드 에번스(Bradbury and Evans) 사에서 출판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새커리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인공 없는 소설―영국 사회의 개략적인 스케치(The Novel without a Hero: Pen and Pencil Sketches of English Society)’라는 제목이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운 데다, 제목도 주인공도 없는 소설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고도 다듬고 혼자 조용히 쉬기도 할 겸해서 바닷가로 갔다. 그곳에서 11월의 어느 습한 밤에 새커리는 적당한 제목을 찾아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어둠 속 침대에 누운 채 잠들지 못하고 있을 때 존 버니언(John Bunyan)의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중 한 구절이 흡사 천상에서 보낸 듯이 홀연히 떠올랐다: “그 시장의 이름은 ‘허영의 시장’이었다. 왜냐하면 그 장이 서는 마을이 허영보다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는 침대에서 뛰어나와 촛불을 켜고 방 안을 돌면서 세 번 소리쳤다. “허영의 시장, 허영의 시장, 허영의 시장!”
고 은
만인보
(1986~2010)
“저 1980년 여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계엄법 교사의 죄명으로 남한산성 밑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는 날들을 지내는 동안 구상한 것에 이 『만인보』가 있다. (…) 살아서 나간다면 몇 가지 일 중 가장 먼저 『만인보』에 매달려 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만인보』 16~20권 ‘시인의 말’)
시인은 5·18이 터지기 전날인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혐의로 경기도 성남 육군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 수감됐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쓰다가 사형당한 방이었다. 창도 없는 데다 40촉짜리 전등은 자주 꺼졌다. 그 관 같은 방을 스크린 삼아 외할머니며 할아버지 같은 과거의 얼굴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고은 시인의 대작 『만인보』는 이렇게 탄생했다.
‘만인보(萬人譜)’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초에는 우리 겨레 성원 1만 명을 시에 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파리의 호적부와 겨루겠노라던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연상시키는 호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만인보』 13~15권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고은은 발자크를 향해 “당신의 단명을 내가 보충하겠소.”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애초의 1만 명은 조금 축소되었다. 시의 편수로 따지자면 서시를 제하고 꼭 4,000편, 시에 그려진 인물들을 놓고 보자면, 조연급까지 포함해 모두 5,600여 명이 『만인보』의 족보에 등재되었다. 4,000이 됐든 5,000이 됐든, 수천 명의 초상화를 모자이크 조각처럼 이어 붙여 그린 겨레의 초상이자 시대의 벽화. 『만인보』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만인보』는 1940년대에서부터 1980년 5·18까지의 시기를 주된 배경으로 삼아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알았던 이들의 삶을 시로 재구성한다. 일관된 줄거리나 방향을 지닌 것은 아니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서 거대한 그림을 이룬다. 그 안에는 잘 알려진 삶도 있지만 역사의 뒤꼍에 묻힐 뻔한 장삼이사 우수마발의 구지레한 삶 역시 당당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삶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의 구슬들처럼 서로의 삶을 비춰준다.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1987)
햄버거와 명상을 결합시킬 생각을 하다니! 1987년에 나온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의 표제작인 이 시는 제목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라는 부제,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그 충격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시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정을 명상의 단계들에 빗대어 쓴다. 가령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지는 과정에는 “잡념을 떨쳐라.”라는 주문이 제기되며, 양파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는 과정에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라는 설명이 따라붙고, 다진 고기와 빵가루, 달걀, 볶은 양파, 양념 등을 손으로 치대어 반죽을 만드는 과정은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그곳을 만지는 일만큼/ 우리의 촉각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에 견주어지며, 빵을 반으로 갈라 버터를 바르고 상추를 깐 다음 마요네즈 소스를 바르는 행위에는 “혹시라도 다시 생길지 모르는 잡념이 내부로 틈입하는 것을 막아준다.”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넣고 브라운 소스를 알맞게 끼얹어 양파, 오이를 끼우는 것으로 햄버거 만들기 명상은 끝이 난다.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장정일의 이 시는 시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림과 동시에, 시란 일상 언어를 가장 낯설게 사용함으로써 미학적 충격을 주는 것이라는 시의 핵심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 훈
칼의 노래
(2001)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이 소설의 제목으로 작가가 애초에 생각한 것은 ‘광화문 그 사내’였다. 말할 나위도 없이 광화문 네거리에 버티고 선 충무공의 동상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이 제목을 생각했을 때 주현미의 노래 「신사동 그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노라고 김훈은 밝혔다. 출판사 쪽에서 그 제목이 너무 장난스럽다고 난색을 표하자 작가가 다음으로 제시한 것은 ‘칼과 길’이었다. 소설의 주제에는 잘 들어맞는 제목이었지만, 너무 심각하고 무겁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결국 좀 더 가볍고 대중적인 제목으로 낙착을 본 것이 편집자가 제안한 ‘칼의 노래’였다.
(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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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앙드레 버나드 André Bernard
미국 출판인. 바이킹, 사이먼 앤 슈스터 등의 출판사와 이달의 책 클럽에서 편집자로 일했고, 하코트 출판사 부사장을 지냈다. 현재는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재단의 부총재. 문예 계간지 <아메리칸 스콜라>와 <케니언 리뷰>의 고정 기고자이기도 하다. 다른 저서 및 편서로 이 책의 자매편인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야: 명작 속 인물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걸 퇴짜 놓다니: 출판사가 후회한 거절 편지들』(편저), 『바틀릿 일화 사전』(공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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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고 보탠 이 소개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한국문학의 공간탐사』, 『최재봉 기자의 글마을 통신』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클레피, 희망의 기록』,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등이 있다. 지금은 시와 소설 속 사랑의 명장면들을 찾아가는 '사랑의 풍경'을 신문에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문학 작품의 제목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리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학과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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