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인간의 진보라는 관념을 다루고 있는 두툼한 책은 그야말로 잡동사니가 가득한 주머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저술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인상적이고 심지어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피상적인 데다가 (19세기에 그런 것처럼) 우리가 나날이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고 또 나아진다는 식의 낙관적인 전망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특히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진보 같은 문제에 관한 논의, 그리고 예술에서의 진보에 관한 논의에서 드러난다. 사실 지구상의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인간의 전반적인 부가, 전반적인 통치가, 인간의 평균적이거나 또는 전형적인 행위가, 혹은 위대한 예술 작품의 생산이 줄곧 진보를 이루었다는 명제를 효과적으로 논증하기는 어렵다.
때로는 이런 영역들에서 실질적인, 그리고 측정할 수 있는 향상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또 때로는 이와는 정반대가 오히려 맞는 것만 같다. 따라서 가령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처럼, 인간이 노력한 모든 분야에서 진보의 불가피성을 확신하는 저술가들의 강한 신념은 그야말로 근거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한때는 그것이 사실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식에서의 진보
인간의 지식에서의 진보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는 진보라는 것이 사물의 본성 속에 들어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신비주의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각 개인은 나날이 진보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도 항상 진보하고 있으니 (…) 우주가 점점 나이를 먹음에 비례하여 그렇게 된다.” 후세의 역사가라면 아마 이렇게 쓰지 않을까.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이란, 곧 인간이 과거 세대의 경험을 축적하여 자신의 잠재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는 나날이,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우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배운 것 중에 최소한 일부라도 기억하고, 거기다가 새로운 지식을 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 속 집단적 기억에는 과거의 어떤 지식이 최소한이라도 보존되어 있으며, 거기에 모든 새로운 발견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은 쇠퇴하고, 한 사람은 죽어 없어지게 마련이지만, 인류의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최소한 인류가 계속해서 책을 쓰고 읽을 수 있는 한은, 또는 ─ 점점 더 흔해지듯이 ─ 미래 세대를 위해 자신들의 지식을 저장해두는 한은 계속해서 지속될 것이다.
인간 지식의 총체가 증가하는 속도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때로는 (가령 오늘날처럼, 또는 B.C. 5세기처럼) 매우 빠르고 또 때로는 (가령 중세 시대 동안 그랬던 것처럼) 매우 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보는 본질적으로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으며, 인간이 인간인 한에는 결코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식에서의 진보의 종류
그렇게 해서 확장되고 축적되는 지식은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오늘날의 우리는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가령 지금으로부터 100년, 또는 1000년 전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알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노하우나 기술의 경우에는 진보의 관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쉬우며, 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그런 진보가 지속되리라는 낙관을 품기가 쉽다.
또 다른 종류의 지식에서도 진보가 생겨날 ‘가능성’은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학자들이 과거에 관해 자유로이 쓸 수 있는 한, 그리고 독자들이 그런 책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한(물론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상기시키듯, 이 두 가지가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18세기에 영국과 미국과 프랑스에서 있었던 여러 혁명의 와중에 발전되고 쟁취되었던 정당한 통치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통치의 탄생이 항상 불가피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번성하던 옛날, 그 좋았던 옛날을 한숨과 함께 뒤돌아볼 때가 언젠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가 되더라도 우리는 이른바 통치에 관해 예전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
이와 유사하게 위대한 인물들 ─ 가령 소크라테스, 예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마틴 루터 킹 2세 같은 ─ 역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읽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상기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향해 제기한 삶의 본보기를 기억하는 한에는 말이다. 이것 역시 우리가 항상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탁월함이 무엇이고 또한 어디까지 그렇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는 뜻일 뿐이다.
보편사
인류의 기억이 오로지 구전 전통에 의해서만 전해지던 시절에는 지식에서의 진보도 고통스러우리만치 느리기만 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오래전에 어떤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크나큰 적이었던 불을 다스릴 수 있고, 덕분에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음을 발견했다. 체계적 통신수단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새로운 지식이 보편화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글쓰기가 발명되자, 온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의 덩어리를 쌓아놓는 과정에도 본질적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오늘날 인류의 축적된 지식을 저장하고 상기하는 데 사용되는 장비들, 가령 컴퓨터 같은 것들은 그 자체가 발전을 위한 진보적인 노력의 대상이다.
이런 까닭에 인류의 역사는 곧 인간 지식의 진보와 발전의 역사인 셈이다. 최소한 보편사 ─ 즉 개인이나 국가의 행위보다는 오히려 인류 전체의 업적과 실패를 더 많이 다루고 있는 역사 ─ 는 인류의 지식이 시대를 거듭하며 어떻게 해서 성장하고 변화했는지에 관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보편사는 지식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발견과 발명을 열거한 연대기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런 연대기는 상당수가 ─ 어쩌면 대부분이 ─ 궁극적으로는 가치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넓으면서도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보편사란 곧 인류가 여러 시대에 걸쳐 성취한, 그리고 점점 더 자라나는 축적물에 덧붙인 중대하고도 새로운 지식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한 반드시 그런 이야기가 되어야만 한다. 또한 이것은 간혹 지식의 성장보다도 지식의 변화가 더 크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그리고 이후의 세대에는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 지식의 주요 요소들이 완전히 포기되거나 상실되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로마 제국의 멸망은 당시로선 그야말로 광범위한 지각변동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슬픔과 고통이 야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어쩌면 바로 그럼으로 인해, 이후의 세기에는 새로운 종류의 지식이 대두했다. 그 새로운 지식들은 대부분 존속하지 못했고, 비록 한때는 주목할 만했지만 우리가 결국 포기한 삶의 어떤 방식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그런 과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다. 고전 시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 같은 경우도 이처럼 한동안 잊혀 있다가 르네상스 때 재발견되었고, 이후 대단한 영향을 발휘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7세기에는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전쟁과 정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빈번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편의를 증진시키는 데 일조한 비교적 작은 발견이며 발명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그 시대에 이루어진 과학적 방법의 발견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과학적 발견이야말로 이전의 3세기 동안에 있었던 온갖 지식들의 막대한 진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이른바 “지식 폭발”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남김없이 모조리 서술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무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세기에는 앞으로 인류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비록 더 나은 영향까지는 아니더라도)을 끼칠 만한 갖가지 지식에서 상당수의 매우 중요한 발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과거로부터 계속된 지식의 진보적 발전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 발전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들이 실제로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보편사의 일부분이 된다.
지식에서 벌어진 이런 거대한 발전, 변화, 그리고 어쩌면 일시적인 상실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다. 이 책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관해,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에 관해 이룩한 지식 축적의 보편사다. 그리고 때로는 양쪽 모두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사례까지도 이 책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런 축적은 지난 여러 세기 동안의 인식 가능한 어떤 패턴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이 책은 또한 미래에 있을 지식의 진보에 관한 전망을 보여줄 수도 있다. 과거에, 특히 가까운 과거 동안 지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를 보다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에 ─ 최소한 가까운 미래에 ─ 일어날 가능성이 큰 변화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먼 미래, 가령 1세기나 또는 그 이상 가는 시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아마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상황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중략)
이 책의 개요
이 책은 모두 15개 장으로 나뉜다. 제1장 ‘고대인의 지혜’에서는 기록된 역사의 시작점인 B.C. 3000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아스테카와 잉카에 이르는 여러 고대 제국의 사람들이 공유한 보편적 지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본다. 본질적으로 이것이야말로 B.C. 6세기경 그리스의 사상 폭발이 벌어지기 이전에 인류가 알던 지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제2장 ‘고대 그리스의 지식 폭발’에서는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서술하는 한편, 그리스인이 알던 것이 어떻게 해서 이후에 벌어진 지식의 진보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명을 흡수하고 개작했으며, 그리스인이 알던 것 가운데 상당수를 의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은 그리스 지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살아남도록 보장해주었다. 비록 본인들은 그런 요소들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3장 ‘로마인이 알았던 것’은 로마인이 또한 나름대로 중요한 지식을 보유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 우리의 지식 기반을 이루었음을 밝혀준다.
로마 제국은 A.D. 5세기에 유랑하는 야만족 때문에 몰락하고 말았다. 제4장과 제5장인 ‘암흑시대의 빛’과 ‘중세 시대: 거대한 실험’에서는 로마 제국 이후의 세계에 관해 서술한다. 당시의 생활상은 크게 달라졌으며, 지식도 달라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로마의 몰락 이후 1000년 동안에는 지배 체제에서 거대한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간 이 실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겨준 셈이었다.
제6장 ‘르네상스에서는 무엇이 다시 태어났나?’는 무관심의 시대 이후에 고전 문명이 재발견됨으로 인해 산출된 지식의 변화를 서술한다. 이 장은 또한 고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새로 발견된 지식을 중세의 문화와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어떻게 해서 문화를 분열시켰는지, 나아가 인류로 하여금 오늘날을 향한 떠들썩한 여행을 떠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A.D. 1500년경에 이르러 보편사, 즉 지식의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인류의 인구가 1500년 당시의 수준인 4억 명에 도달하기까지는 무려 1만 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지구의 인구가 그만큼 ‘증가’하는 데에는 5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제7장인 ‘유럽의 대외 진출’에서는 이 특이한 변화를 설명하려 했다. 이 장에서는 콜럼버스의 위업을 주로 강조했으니, 그는 분열된 세계를 상속받은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경험되는 세계, 즉 내일은 보다 더 완전해질 통일성으로 향하는 도상에 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단순히 서양인의 지식의 진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50년에서 1700년경 사이 서양인은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발명했으며, 이 방법은 머지않아 지구 전역에서 채택되었다. 제8장인 ‘과학적 방법의 발견’에서 확증되듯이, 이 세상에는 물론 과학적 지식 이외의 다른 종류의 지식도 많지만, 그 어떤 것도 현재의 단계에서는 물론이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과학적 지식에 버금가는 위력과 명성과 가치를 지니진 못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활동이 되었으며, 오늘날 지구상에 거주하는 수십억 명의 생존을 위한 그야말로 불가결한 도구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1687년에 출간되었으며, 이것은 이후의 시대에 기계론적 원칙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생각은 상당 부분 현실화되었으며, 가령 산업혁명이 야기된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18세기를 진정으로 특징짓는 사건은 이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혁명이었다. 제9장인 ‘혁명의 시대’는 1688년의 (영국) 명예혁명을 비롯하여 1776년의 미국독립혁명과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다룬다. 여기서는 통치 체제에 관한 급진적인 새로운 생각들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시대에 와서 궁극적으로 ─ 또는 거의 궁극적으로 ─ 열매를 맺은 지식,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한 지식으로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10장인 ‘19세기: 근대의 서곡’은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1914년의 20세기 대전의 개시에 이르는 다사다난한 10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장은 주로 산업혁명에 의해 비롯된, 또한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이전 세기의 정치적 혁명들로부터 비롯된 사회와 정치제도의 완전한 변화가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새로우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예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의 요소들은 19세기의 사상 속에서 모두 발견된다. 비록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실현은 종종 20세기가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제11장인 ‘1914년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른 장소에서의 사건들에 영향을 준 적은 없었기 때문에, 바로 그해에 시작된 전쟁을 가리켜 ‘세계대전’이라고 지칭하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 과거의 문명이 파괴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지식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제12장인 ‘민주주의의 승리’와 제13장인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제14장인 ‘예술과 미디어’는 20세기를 다루고 있다. 이 세 장은 지식의 발전에서의 위대한 업적들을 다루고 있으며, 부차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개막 이후 약 75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가 익히 아는 이처럼 커다란 변화들이 벌어지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을 것이다. 이 경이롭고 잔인한, 그리고 창의적인 세기에 대해서 전혀 편견 없는 시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의 대두에 관한 부분을 읽고 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중요성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인 제15장은 ‘다음 100년’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식에서의 몇 가지 변화를, 특히 내 생각에는 A.D. 2100년 이전에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지식의 새로운 이용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비록 나도 확실히 장담할 수야 없지만, 그 시기쯤에는 분명히 일어날 법한 사건 몇 가지를 다뤄보았다. 만약 그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인간 지식의 역사, 즉 인간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될 것이다.
* 「들어가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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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찰스 밴 도렌 Charles Van Doren
미국의 저술가 겸 출판 편집자. 유명한 저술가와 지식인을 여럿 배출해 명성을 얻은 밴 도렌 가문에서 1926년 태어났다. 아버지 마크 밴 도렌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컬럼비아 대학 교수였고, 어머니 도로시 밴 도렌은 소설가, 큰아버지 칼 밴 도렌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기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였다. 이러한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밴 도렌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천체문리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훗날 모교의 영문학 강사로 일했다. 이후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퀴즈 쇼 스캔들’인 <트웬티 원>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수년간 칩거하다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편집자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오랜 기간 저술가 겸 편집자로 활동하며 여러 권의 교양서를 펴내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진보의 이념』(1967),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How to Read a Book』(공저, 1972), 『독서의 즐거움』(1985), 『지식의 역사』(199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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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중서
출판기획자 및 번역가. 한국저작권센터(KCC)에서 근무했고, ‘책에 대한 책’ 시리즈를 기획했다. 『멍멍이 호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신화와 인생』, 『불굴의 용기』, 『배트맨 허쉬』, 『끝없는 탐구』, 『셰익스피어&컴퍼니』,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젠틀 매드니스』(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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