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8월 어느 맑은 날, 나는 탐사대를 이끌고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을 올랐다. 1991년 대규모 폭발이 일어난 뒤로 여전히 증기가 피어오르는 모래가 깔린 강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타는 듯한 열대의 태양 아래 상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때 강바닥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아차 하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모래 속에 발목이 빠지더니, 곧 무릎이, 결국은 허리까지 모래에 빠져 버렸다. 내 방수바지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대학원생 제자들은 사진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처한 곤경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몇 가지 협상을 마치고서야 제자들이 나를 웅덩이에서 끌어냈다.
발밑에서 땅이 꺼질 때처럼 무기력해질 때는 다시없을 것이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몸은 더 깊이 가라앉는다. 몸이 가라앉을 때 할 수 있는 일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순식간에 뜨거운 표사(漂砂)에 빠진 뒤로는 푸석푸석한 강바닥조차 바위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농장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더라도 기름진 땅이 한낱 흙에 지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름지고 싱그러운 땅을 파 보면 그 안에 깃든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영양분이 많은 흙을 한 삽 뜨면 가루처럼 흘러내린다. 흙을 들여다보면 새삼 생명이 생명을 먹는 온전한 세계가 보인다. 그야말로 죽은 것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생물학적 잔치이다. 건강한 흙에서는 매혹적이고 싱그러운 향기가 난다. 그게 바로 생명의 냄새가 아니겠는가.
흙이란 도대체 무엇일가? 우리는 흙을 보지 않으면서 마음에서도 흙을 밀어내어 흙과 멀어진다. 흙에 침을 뱉고 업신여기는가 하면 발을 굴러 구두에 묻은 흙을 떨어 낸다. 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말로도 흙을 존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땅의 비옥함과 침식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농업 문명이 동트던 시기에는 땅을 일구는 이들 98퍼센트가 식량과 자원의 분배를 관장하는 소수 지배계급을 먹여 살렸다. 오늘날에는 미국 인구 가운데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이 땅을 일구고 있는데, 이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몇 안 되는 이런 현대 농부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크게 기대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떻게 흙을 다루느냐가 우리 문명의 장래를 보장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여러 고대 문명은 간접적으로 흙을 고갈시키면서 성장해 갔다. 농사를 지으면서 흙이 생겨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흙이 사라져 간 것이다. 어떤 문명은 땅에 영양을 주어 흙을 보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모든 문명의 운명은 기름진 흙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흙의 비옥함을 높이는 일이 중요함을 알고 있었더라도 또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맨 처음 농업 문명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까지 여러 사회가 멸망하고 그 뒤로 유럽 식민주의가 떠오르고 미국인들이 북아메리카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아간 건 흙이 낭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그저 고대 역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흙을 함부로 다루는 일이 현대사회를 위협한다는 사실은 1930년대 미국 남부 평원의 더스트볼, 1970년대 아프리카 사헬, 그리고 오늘날 아마존 유역에서 생겨난 환경난민들이 겪은 어려움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세계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1970년대부터 생산할 수 있는 농지의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값싼 화석연료는 이번 세기가 가기 전에 바닥날 것이다. 더 많은 재앙에 시달리지 않고서도, 토질 저하와 가속화되는 침식이라는 쌍둥이 문제가 결국 현대 문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라고 공언할 길이 있을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흙이 감당해 온 중요한 역할을 탐구하면서 알게 되는 핵심적인 교훈은 명쾌한 만큼이나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지난 문명들의 멸망을 부채질한 오류들을 위험천만하게도 현대사회가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손들의 미래를 담보로 잡고 흙이 생겨나는 것보다 더 빠르게 흙을 소모함으로써 우리는 때때로 가장 느린 변화를 멈추기가 가장 어렵다는 교훈을 깨닫게 되는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다.
역사 시대를 통틀어 흙은 인류 문화에서 늘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처음 나온 서적들 가운데 일부는 토질과 농법 지식을 전수하는 농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기본 원소인 흙, 공기, 불, 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힌 흙은 우리 존재의 뿌리로서 지구의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다. 우리는 흙을 값싼 공산품처럼 대하면서도 대부분 석유는 전략물자로 여긴다. 그러나 더 오랜 시간을 놓고 보자면 흙은 석유만큼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연 흙을 전략물자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현대의 삶에서도 기름진 땅은 변함없이 우리 행성에 밀집해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바탕이라는 사실을 잊기란 쉽다.
지리학은 흙이 침식되는 원인과 침식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다룬다. 어떤 지역에서는 흙의 보존에 관심을 쏟지 않은 채 농사를 지음으로써 토질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하지만 쟁기질을 기다리는 살아 있는 흙이 매우 많은 곳도 있다. 지질학적 시간은 둘째 치고 인류의 시간 동안이라도 산업적 농업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흙을 만들어 내는 곳은 거의 없다. 지구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천천히 흙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행성의 껍질을 벗겨 내고 있다고 한다면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증거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 건설 현장에서 갈색 물줄기를 토해 내고, 강에는 벌목된 숲에서 흘러나오는 침전물이 그득한 강물이 흐른다. 농부의 트랙터가 에둘러 가야 하는 협곡, 산악자전거가 솟구쳤다가 착지하며 흙길에 내는 깊은 바퀴자국, 폭신폭신한 오솔길을 포장하고 신도시와 스트립몰이 들어선 곳에서 우리는 그 증거를 본다. 이 문제는 상식이다. 흙은 제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하찮게 여겨지지만 없어서는 안 될 천연자원이다.
나는 얼마나 다양한 불행이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 보는 일보다 문명을 지탱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일에 관심이 더 많다. 하지만 지질학자로서 나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앞서간 사회가 그 시대의 흙에 새겨놓은 기록을 살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한때 한껏 꽃을 피운 문명들이 멸망한 원인으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한다. 이를테면 질병, 벌목, 기후 변화 같은 게 있다. 이런 요소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때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 때문에,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문명의 붕괴에 대해서 ‘유일한 총알 이론’(single-bullet theory, 케네디가 암살당할 때 단 하나의 총알이 케네디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코널리 주지사에게 여러 군데 부상을 입혔다는 주장에서 나온 표현—옮긴이)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다. 오늘날의 해석은 특정 지역과 역사적 시점에 나타나는 경제, 환경, 문화적 힘들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하지만 어떤 사회와 땅의 관계(사람들이 발밑의 흙을 다루는 방법)가 말 그대로 근본적인 것이다. 땅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게 되면서 사회 갈등과 정치 갈등이 일어나 사회를 뒤흔드는 일이 거듭되었다. ‘흙의 역사’는 바로 사람들이 흙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문명의 수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얼마나 오랫동안 무엇을 기를 수 있는지는 흙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점을 생각하면 미래 세대 부의 토대를 보존하기 위해 땅을 돌보는 일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문명이 지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여태까지 흙을 보존하는 데 기초를 둔 문화를 생산해 온 인간 사회는 거의 없었다. 문명은 너도나도 높은 기술 수준에 걸맞은 속도로 땅을 고갈시켰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의 어떤 문명들보다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본보기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 또한 알고 있다.
흙의 보존하는 데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 왔지만, 미국 농무부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농지에서 해마다 수백만 톤이나 되는 겉흙이 유실되고 있다고 추산한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이 강은 1초에 덤프트럭 한 대 분량의 겉흙을 카리브 해로 실어 간다. 미국의 경작지에서는 해마다 미국의 모든 가정에 픽업트럭 한 대 분량의 흙을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많은 흙을 잃어버리고 있다. 정말 놀라운 양이 아닌가. 그렇다고 미국이 이 중요한 자원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나라는 아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사라지는 흙은 240억 톤을 헤아린다. 지구에 살고 있는 한 사람당 몇 톤이나 되는 양이다. 그렇게 많은 흙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흙이 침식되는 속도는 사람이 한평생 사는 동안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리다.
하지만 인류가 토질 고갈에 치르는 비용은 오래 전에 생태학적으로 자살한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먼 과거의 토질 저하가 남긴 유산은 심각한 가난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그 지역 전체에 들러붙어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라크 모래폭풍 지역의 이미지는 그곳이 문명의 요람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먹을거리를 구하거나 식량을 기를 수 있는 땅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난 환경난민들 이야기가 수십 년 동안 주요 뉴스로 보도되어 왔다. 고갈된 땅을 소리 없이 증언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흙을 보존해야 할 절박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문화를, 더 나아가 문명 자체를 말해 주는 행동양식이 새겨지는 얇은 켜가 위험에 빠지면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형편이 좋은 곳에 사는 우리는 식품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곧 닥쳐올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잦아든다. 유전학과 화학비료라는 두 가지 기술혁신을 통해서 밀, 쌀, 옥수수, 보리가 지구의 대표적인 곡물이 되었다. 이 네 가지 곡물은 오늘날 5억 헥타르가 넘는 거대한 단일 경작지에서 재배된다. 이 면적은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전체 삼림 면적의 곱절이나 된다. 그렇다면 현대 산업적 농업의 기반은 과연 얼마나 안전할까?
농부, 정치인, 환경역사학자들은 다양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토질 고갈이라는 용어를 써 왔다. 기술적으로 이 개념은 작물 수확이 꾸준하게 줄어든 끝에 더는 수확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경작지에서 알맞은 수확량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알맞은 수확량을 정하는 조건은, 자급할 수 있는 수확량이 더는 땅에서 나오지 않는 한 극단에서부터 오래된 경작지를 버리고 새로 땅을 개간하는 것이 더 이익인 경우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토질 고갈은 사회적 요인들과 경제, 그리고 새 땅의 이용 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문화?경제적 요인에 따라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땅을 다루는 방식과, 사람들이 그 땅에서 먹고 살며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달라진다. 흙을 올바르게 보존하지 않고서 해마다 농사를 짓는 일은 마치 유지보수에 전혀 투자하지 않은 채 공장을 쉴 새 없이 가동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올바르게 관리해야 농토가 개선된다는 사실은 소홀한 관리가 흙을 망친다는 이치만큼이나 분명하다. 흙은 세대를 뛰어넘는 자원이지만, 조심스레 이용되기도 하고 마구 파헤쳐질 수도 있는 천연자원이다. 번영과 멸망 사이에는 고작 60센티미터 두께의 흙이 놓여 있다. 그런데 쟁기질하는 흙 문명은 사라져 가고 있다.
지형학자로서 나는 지질연대를 통해 지형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자연경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연구한다. 연구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기후, 식생, 지질, 지형의 상호작용이 흙의 생성과 증가에 어떤 영향을 주고 땅의 생산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게 되었다. 인간의 행위가 땅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해야 농경 체계를 떠받칠 수 있다. 또 환경과 전체 육상 생태계의 생물학적 생산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형과 그 변화를 연구하면서, 나는 흙을 존중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데 어떤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깨닫게 되었다.
넓게 보자면 문명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도 잠깐 동안 번성하다가 쇠락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문명이 나타난다. 전쟁, 정치, 벌목, 기후 변화 따위가 물론 인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사회활동의 붕괴에 이바지한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마야처럼 서로 관련이 없는 그 많은 문명은 모두 어째서 천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걸까?
어느 문명 할 것 없이 발전과 쇠퇴 뒤에 숨은 이유는 분명 복잡하게 얽혀 있다. 환경 악화만이 이들 문명이 붕괴하게 된 도화선이 된 것은 아니지만, 흙의 역사는 경제와 기상이변, 전쟁 따위가 문명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데 밑바탕을 이룬다. 로마는 한순간에 무너진 게 아니라 침식이 땅의 생산성을 떨어뜨림에 따라 시들어 간 것이다.
넓게 보면 모든 문명의 역사는 공통된 줄거리를 따른다. 먼저 기름진 평야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인구가 나날이 늘면서 구릉에서도 농사를 짓게 되었다. 삼림이 개간되어 농지로 변한 땅의 맨흙이 빗물과 흐르는 물에 노출되면서 비탈진 경작지는 빠르게 깎여 나갔다. 그 뒤로 몇 세기 동안 집약 농업 탓에 양분이 감소하고 흙이 유실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소출은 줄어들고 새 땅을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토질 저하는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 농업 생산성이 떨어졌다는 말이 되고 문명 전체를 몰락으로 이끌었다. 작고 고립된 섬 사회와 여러 지역에 걸친 거대 제국에 비슷한 줄거리가 적용되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중요한 현상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들어지는 것보다 빠르게 흙이 침식되면 문명의 수명은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문명의 기초인 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어떠한 문제를 두고도 과학기술이 해결책을 제시할 거라는 관념을 낳게 한다. 그러나 삶을 개선하는 과학기술의 능력을 얼마나 열렬히 신봉하든, 우리가 자원을 생산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소비하는 문제를 과학기술이 해결할 수는 없다. 자원은 언젠가 바닥나기 마련이다. 날이 갈수록 세계경제가 서로 가까워지고 인구가 늘어 감에 따라 흙에 대한 책임이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군사적인 것이든 그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후손은 가장 기본적인 자원을 둘러싼 갈등과 맞닥뜨릴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더 현명하게 흙을 다루어야 한다.
하나의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흙이 필요한지는 인구 규모와 흙의 생산성, 작물을 기르는 방법이나 기술에 따라 달라진다. 현대 농업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반드시 기름진 땅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만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이렇듯 흙을 보존하는 일이 모든 문명의 수명을 결정하는 데 그만큼 중요하다.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땅의 능력에는 토질과 기후, 식생 같은 환경의 물리적 특성과 농경 기술이나 방법이 포함된다. 특별하게 결합된 그 인간-환경 시스템의 한계에 가까워지는 사회는 침략이나 기후 변화 같은 변동에 취약해진다. 안타깝게도 그 생태학적 한계점에 다가가는 사회는 또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당장의 수확량을 최대화하라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흙의 보존을 외면해야 하곤 한다.
토양은 먼 옛날부터 오늘날 디지털 사회로 넘어오기까지 기름지고 오래된 흙의 중요성을 비춰 추는 지질학적 백미러와도 같다. 토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산업 문명을 지탱하는 일이 과학기술의 혁신만큼이나 흙의 보존과 관리에 기대고 있음이 뚜렷해진다. 계획 없이 지구를 리모델링하면서, 사람들은 생물학이나 지질학적인 변천보다도 심하게 지구 표면을 덮고 있는 흙을 옮기고 있다.
상식에 비추어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서 지난날의 경험을 돌아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명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문명은 몰락을 선택하는 법이 없다. 세대가 바뀜에 따라 흙이 점점 사라지면 문명은 주춤하다가 쇠퇴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문명 종말의 원인을 기후 변화와 전쟁, 또는 자연재해 같은 개별 사건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흙의 침식이 고대사회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자 이제 들어가 보자, 흙 속에 담긴 이야기 속으로.
(제1장 「흙이란 무엇인가」 전문)
--------------------------------------
저자 소개
데이비드 몽고메리
David R. Montgomery
워싱턴대학(시애틀) 지구우주과학부 교수. 스탠퍼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형학연구그룹(Geomorphological Research Group)을 이끌며, 지구의 지형학적 변화 과정이 생태계와 인간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필리핀, 티베트,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등 지구 곳곳을 다니며 현장 조사도 병행하고 있다. 뛰어난 업적과 가능성을 인정받아 2008년에 ‘맥아더 펠로’에 선정되었으며 『흙』은 2008년 논픽션 부문 ‘워싱턴 주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지은 책으로 『물고기의 왕』(King of Fish: The Thousand-Year Run of Salmon, 2004)이 있다.
--------
역자 소개
이수영
진실한 책 한 권이 가진 힘을 믿는 전문번역가이다.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첫 번째 독자라는 설렘을 느끼며 독자로서 느낀 감동을 잘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 『교실의 고백』, 『사라진 내일』, 『사코와 반제티』, 『새로운 빈곤』, 『황금의 땅, 북극에서 산 30년』을 우리말로 옮겼고, 이뉴잇 옛이야기를 엮은 『빛을 훔쳐온 까마귀』를 썼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