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쓸 만한 중고 전동공구를 찾는 사람은 버지니아 리치먼드에 사는 중개상 노엘 뎀시를 찾아가면 된다. 노엘의 정신없이 복잡한 창고에 가면 금속 선반, 밀링머신, 테이블 톱이 가득한데, 알고 보면 그 중 상당수는 한때 학교에서 쓰던 것들이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도 학교에서 나온 공구들이 넘쳐난다. 이 물건들은 대부분 지난 15년간 중고 시장으로 흘러들어왔다. 1990년대에 들어서 교육자들이 학생들을 ‘지식노동자’로 준비시키면서, 기술 수업은 시대의 유물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교육에서 도구가 사라지는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가공품의 세계에 더욱 무지해지는 첫 단계다. 그리고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작업의 흔적 감추기’를 목표로 하는 기술 문화가 생겨나면서, 일상생활에서 의존하는 많은 기구들을 직접 살펴보기 어려워졌다. 요즘 나오는 자동차(특히 독일제)의 엔진 덮개를 열어보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첫 장면에서 원시인들을 완전히 매혹시켰던 반짝거리고 별 특징 없는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엔진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이 덮개 밑에는 또 다른 덮개가 있다. 이런 단계적인 은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작은 기기들을 고정시키는 잠금쇠를 풀려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특수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이것은 분명 호기심 많은 사람이나 화난 사람이 차 내부를 샅샅이 뒤지는 걸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이든 독자들이라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유통업체 시어스의 카탈로그에 모든 가전제품과 그밖의 기계제품들에 대한 부분확대도표와 개략도가 실렸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소비자에게 이런 정보가 필요한 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공구 사용의 감소는 우리가 물건과 맺는 관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보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손수 물건을 고치거나 직접 만들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기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보통 사람들은 한때 직접 만들어서 쓰던 것을 이제는 사서 쓴다. 또 예전에는 혼자 힘으로 고치던 것들을 손쉽게 교체해버리거나 전문가를 고용해 수리하게 한다. 심지어 전문가조차 미세한 부품이 고장 났다는 이유로 전체 기기를 교체하기도 한다.
나는 시대를 초월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을 변호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손을 써서 일하는 능력과 견고한 물질세계를 향해 이 능력이 취하는 태도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은 노동자로서든, 소비자로서든 이런 능력을 발휘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순히 손으로 일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위험이 있다. 빈틈없는 경제학자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직접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의 ‘기회비용’을 지적할 테고, 현실적인 교육자들은 청소년에게 한물간 직업처럼 여겨지는 기술 수업을 받게 하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춰서서 이런 가정이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지, 또 이 가정이야말로 젊은이를 가장 실체가 모호한 직업으로 끌어들이는 기이한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고려해봐야 한다.
1985년 즈음, 교육학 학술지에는 「급부상하는 기술혁명」, 「첨단기술과 전 지구적 미래에 우리 아이들을 대비시키기」 같은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식 미래주의가 특별히 더 새로울 것은 없다. 여기서 새로운 사실은 미래주의가 ‘버추얼리즘virtualism’이라 불릴 수 있는 것과 결합했다는 점이다. 버추얼리즘이란 미래에는 어떤 식이로든 물질적 실체에서 벗어나 순전한 정보경제로 나아갈 거라는 전망이다. 이 생각은 새롭지만,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지난 50여 년간 우리는 ‘후기산업사회’를 향하고 있다고 확신해왔다. 제조업 직종은 불안감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 영토를 떠났지만, 수공업은 그렇지 않다. 만일 목제 테라스를 만들거나 차를 수리해야 한다면, 중국에 있는 기술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실제로 건설과 자동차 수리, 이 두 부문은 만성적인 노동인력 부족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지식인층은 오랫동안 수공업과 제조업을 하나로 묶어 ‘육체노동자의 일’로 취급하고, 이 두 업종이 사라져갈 거라고 이야기해왔다. 최근 들어 이러한 의견에 분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월스트리트 저널』은 “육체노동이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몇 안 되는 확실한 길 중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의 관심은 경제학보다는 물건을 만들고 고치는 경험에 있다. 또 이런 경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멀어질 때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도 생각해보려 한다. 이것이 인간 최대의 번영에 대한 전망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연장의 사용은 우리 본성의 영구적인 요구에 응하는 것일까? 손으로 일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일과 소비를 둘러싼 몇몇 처방들과 대립한다. 따라서 이 책은 어느 정도 문화적 논박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를 속여서 손 쓰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상황을 필연적인 것은 물론, 심지어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게 하는 가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명백히 밝혀낼 작정이다.
나는 내 경험을 자주 언급하려 한다. 가장 최근에는 오토바이 정비 일을 하고 있다. 픽업트럭 뒤에 실려 우리 가게로 왔던 오토바이가 며칠 후 제 동력으로 가게를 떠나는 걸 보면, 설령 하루 종일 콘크리트 바닥 위에 서 있었더라도 피로가 싹 가신다. 한동안 오토바이를 못 탔던 주인의 입가 가득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든다. 그의 한 손은 스로틀throttle 위에, 다른 한 손은 클러치clutch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그가 손을 흔들어 답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회전시키는 스로틀의 힘찬 “부우우우왕! 부릉 부릉” 소리에서 그의 인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그만큼이나 나도 기쁘게 만든다. 그것은 기계의 목소리를 통한 복화술사의 대화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바로 “오~ 예!”다.
내 바지주머니에 들어 있는 지폐뭉치가 예전 직장에서 받던 수표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의 연구소장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나는 항상 피곤했고, 솔직히 월급을 받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누구에게 실질적 상품이나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했단 말인가? 나는 하고 있는 일에 이런 유용성이 없다는 데 낙담했다. 월급은 많았지만 단지 보상금처럼 느껴졌다. 다섯 달 뒤 나는 그 일을 때려치우고 오토바이 가게를 차렸다. 물론 내가 직장 생활에 잘 맞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에서 내가 그렇게 유별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내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그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런 일이 꽤 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직관적 통찰을 제대로 다뤄보고 싶다. 공식적으로 ‘지식노동’으로 인정받는 다른 직업들에 비해, 손으로 하는 노동을 할 때 내가 항상 느끼던 더 큰 행위주체성agency과 능력competence을 이해해보려 했다. 놀랍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자주 육체노동이 지적으로 더 큰 흥미를 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유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다.
사례가 대부분 기계 정비와 건축 기술에 관한 것인 이유는 내가 이 쪽 분야를 잘 알기 때문이다(나는 한때 전기기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주장이 다른 종류의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책에 등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다. 하지만 나는 실용적인 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책에서 일부러 다루지 않은 내용도 있다. 나는 ‘장인기술craftsmanship’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만족감에 대해서는 충분히 평가하지만, 그것에 따라붙는 일종의 신비주의는 피하고자 한다. 이 책은 일본도 제작자 같은 부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책의 주제가 갖는 평범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통 ‘공예craft’ 대신 ‘기술trade’이라는 말을 썼다(이 구별을 엄격히 지키진 않겠지만 말이다). 진정한 장인에 비한다면 내 기술은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내게는 딱 맞는 크기의 장붓구멍에 깃든 더 높은 차원의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만한 근거가 없다. 장인기술이 일의 방식에 대한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거대 시장경제에서 경제적으로 실행 가능한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사람은 기술자다. 기술자는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가 장인기술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만족감을 비슷하게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장인이 자신의 아늑한 작업장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숙련공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의 집 아래로 기어들어 가거나 전봇대 위로 올라가 다른 이들의 물건을 작동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일부 지식인들이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해 갖고 있는 고귀한 이미지를 피하고자 한다.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노동자 계급’이 더 진짜배기고 사회적 평등의 차원에서 더 용감하다고 보는, ‘보다 단순한’ 인생에 대한 동경 어린 시선에도 별 관심이 없다. 사실 나는 기술직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이상은 내 경험에 바탕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내가 함께 일해온 전기기사나 정비사들 중 ‘블루칼라’의 전형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 중 상당수는 보다 얽매인 삶에서 탈출한 괴짜들이었다. 나처럼 그들도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 업계로 흘러들어왔다가 흘러나갔다.
이 책은 진정한 유용성 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들을 옹호한다. 또 ‘정비 및 수리의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을 탐구한다. 그래서 나는 기술직에 몸담지는 않더라도 자립(이를 위해서는 주변의 사물에 집중적으로 관여해야 한다)의 방도를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성가신 물건을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즘 출시되는 벤츠 모델에는 왜 오일 계량봉dipstick이 없을까? 우리가 가진 물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장치가 눈에 덜 띌수록 장치 자체는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소비자 문화에 관한 이 기본적 질문들은 일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 질문을 불러온다. 예를 들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계속해서 복잡해지면서, 그것을 다루는 이들의 일은 어떻게 변화했나? 우리는 기술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노동인력의 숙련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보다 적절한 질문은 이것이다. 21세기 정비사로서 기계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엉터리 전자장비들을 참아내려면 어떤 인격을 갖춰야 할까?
다음으로 ‘의미 있는 일’과 ‘자립’이란 말이 암시하는 바가 서로 겹치는 영역을 분명히 그리려 한다. 이 두 가지 이상은 모두 개인의 행위주체성을 위한 노력과 연결되며 현대 생활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노력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떤 특정한 경험들에 초점이 맞춰진다. 우리는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막강한 외부적 힘이 제시하는 길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점점 더 멍청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머리로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세상을 직접 다루는 데 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의문을 해소하려고 어떤 사람들은 직접 채소를 기른다. 심지어 뉴욕에 있는 아파트 옥상에서 닭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새로운 농민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깊은 만족을 얻는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뜨개질을 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을 입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 할머니들의 가정 경제학이 별안간 최신 유행으로 떠오른 것이다. 왜일까?
경제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절약하려 한다. 절약은 몇몇 자립 수단들, 즉 자기 물건을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자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경제 위기의 망령이 출현하기 전에 생겨난 듯하다. 절약은 어쩌면 더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움직임을 얄팍한 경제적 합리화로 설명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다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균형 잡힌 인간적 시야를 회복하고 세계 경제의 모호한 힘에 의존하는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정생활에서 경험하는 것 같은 책임감을 절실히 바란다. 나는 이것이 일의 세계에서 개인의 행위주체성을 체험하기 어려워지게 된 변화에 대한 반응이 아닌가 생각해보려 한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달성해야 할 인위적인 성과 지표는 늘어났지만, 목수 일에 부여되는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인정받거나 비난받는 데 임의적인 측면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팀워크’가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개개인의 책임을 따지기 어려워졌고, 치료사나 인생 상담가로 가장한 경영자가 노동자를 새롭고 이상한 방식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영자 스스로도 당혹스러워하면서, 자신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막연한 규범 때문에 마음을 졸인다. 한편 대학생들은 지식노동직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면서, 회사의 채용 담당 직원들이 결코 성적이나 전공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지식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면접관이 요구하는 붙임성 있고 공손한 성격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힘들게 했던 공부는 단지 보여주기 위한 것, 엘리트 계층에 편입되기 위한 자격증일 뿐이란 말인가? 이것만 봐도 우리는 형식과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일에 대해 들어온 공공연한 이야기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든다.
이제 이 불안감을 단순히 떨치려고만 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앞으로 경제 위기의 여파가 얼마나 더 커질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점점 더 심각해지는 듯 보인다. 우리 시대의 가장 권위 있는 기관과 직업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신뢰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 위기는 몇 가지 근본적인 가정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좋은 직업이란 어떤 것인가(어떤 종류의 일이 안정된 동시에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예전보다 훨씬 새로운 대답을 향해 열려 있다. 특히 월스트리트는 똑똑하고 야망 있는 젊은이가 향하는 목적지로서의 광채를 잃었다. 우리의 이상과 희망 직업에 대한 현재의 혼란을 틈타, 생산적 노동이야말로 온갖 번영의 기초라는 인식이 조용히 생겨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서 빼돌린 잉여를 중개·거래하는 메타노동meta-work이 느닷없이 그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나 자신을 쓸모 있게 만들자”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다시 한 번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진실을 가리는 덮개에 금이 갔다. 지금 그 덮개를 벗겨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확인하고, 우리가 나서서 바로잡기 시작할 때다.
(머리말 전문)
-------------------------------------
저자 소개
매튜 크로포드 Matthew B. Crawford
시카고대학교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높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워싱턴 싱크탱크의 연구소장을 맡았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고 느낀 뒤, 소장직을 때려치우고 오토바이 수리공이 됐다.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Shop Class as Soulcraft』는 이 과정에서 얻게 된, 연구자나 지적 노동자보다 수리공의 삶이 훨씬 올바르며 지적으로도 풍요롭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는 첫 성과물이다. 현재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오토바이 수리점 ‘쇼코모토’(http://shockoemoto.com/)를 운영하고 있으며, 버지니아대학교 고등문화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역자 소개
정희은
학부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한 후 도미, 미시간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직 해온 것보다 해나가야 할 것이 더 많은 20대다. 다행히 살면서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외국어와 모어 사이의 미로를 정신없이, 그러나 기꺼이 헤매는 번역도 그 중 하나라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 중이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