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시위,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20년간의 수요일이 만든 소중한 변화
수요일 12시, 그곳에는
서울시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붉은색 승합차 한 대가 대사관 건너편 도로에 정차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이 내립니다. 모두들 반가운 목소리로 할머니들을 맞이합니다. 할머니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다릅니다. 일본인도 있고 금발의 서양인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여고생, 아주머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이기에는 조금 어색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대사관 앞 도로에 폴리스 라인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함성이 일기 시작합니다. 점심때가 다 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성별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공식 사죄하고 배상하라!”
그러나 일본 대사관은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 하나 놀라서 창문을 여는 사람도 없고, 허둥지둥 사태를 파악하느라 분주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사관은 붉은 벽돌로 담을 쌓고 철조망을 두른 채 커다란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습니다. 건물 중앙에 붙어 있는 무인 카메라만이 길 건너 사람들을 살피고, 건물 옥상의 일장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제875회 수요시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일본 정부와 일본 대사관, 그리고 변함없이 평화와 인권을 외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어느덧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거리를 처음 지나가는 행인들은 현장을 생소하게 바라봅니다. “이게, 뭐야? 왜 길을 막고 있는 거지?” 무심한 행인의 한마디에 여름 햇살이 더욱 따갑게 내리쬐는 것 같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폭행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너무 많이 알려진 탓일까요? 역설적이게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수요시위는 일상적인 집회가 되어 버렸고, 일상적인 외침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함성도 커져 갑니다.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던 한 전경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바위처럼」이라는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물론 큰 소리로 우리와 함께 노래하지는 못하지만 입 모양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요시위를 지켜본 대원인가 봅니다. 어쩐 일인지 굳게 닫혀 있던 대사관 창문이 살며시 열립니다. 대사관 직원인 듯한 한 사람이 참가자들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수요시위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대사관에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적극적이거나 공식적인 반응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작은 몸짓 하나도 소중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참가자들을 둘러싼 작은 폴리스 라인, 그곳이 바로 우리의 무대입니다. 작지만 참가자들에게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무더위와 행인들의 무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꾸준히 진행됩니다. 참가자들의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행사입니다. 이번 집회의 주요 행사 중 하나는 ‘극단 수요일’의 짧은 연극 공연입니다. 극단 수요일은 일본의 민간단체가 만든 것입니다. 연극을 통해 할머니들의 억울한 사연을 널리 알리고 수요시위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지요.
이들은 「세나의 소원」이라는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폴리스 라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막극이지요. 음향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한국말도 서툰 일본인들이 뙤약볕 아래서 마이크를 서로 주고받으며 연기를 합니다. 참가자들은 그들의 공연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인공 세나는 일본인 초등학생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조선인/코리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세나는 말합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주위 사람들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고, 그리고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어. (중략) 할머니께서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싸워 온 것, 이것이 나의 희망이야. 할머니가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용감하게 버텨 냈다는 것, 이것이 나의 희망이야.”
20여 분도 안 되는 짧은 퍼포먼스였지만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우리는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실을 위해, 모두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극단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그 여운은 깊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모두가 환호했습니다.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 사람들까지도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연기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전달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몇 개의 질문
“아! 여기다!” 뒤늦게 시위 현장을 찾아낸 여고생 세 명이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종로 거리를 헤맸나 봅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 수요시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시위에 참가해 할머니들을 찾습니다.
문산에 있는 한 여고의 학생들도 방학을 맞아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수요시위에 참가하고 감상문을 제출해야 한답니다. 한국 근현대사 수업의 과제라고 하네요. “학교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있지요?” 주연이라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간단하게 배우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옆에 있던 현아가 거듭니다. “있잖아요, 정신대 할머니들… 끌려가서 고생한 거요.” 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 더 캐물었습니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좀 다른 것 아닌가요?” 주연이와 현아는 알 듯 모를 듯 대답합니다. “네,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립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교과서에서 많은 분량을 다루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선생님은 아마도 이 학생들이 현장에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워 오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과 신문, 그리고 교과서를 통해 아는 것보다 시위에 참가해 한마음 한뜻으로 할머니들을 응원하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취재도 하고 사진도 찍는 학생들이 할머니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째서 할머니들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수요시위에 참가하는 것일까?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주 먼 옛날에 우리 할머니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위안부? 정신대? 할머니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 많은 것이 궁금한 눈치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붙잡고 설명해 주고 싶지만 학생들 스스로가 알아 가겠지요. 멀리서 찾아온 학생들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들이 자라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진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아들과 딸들이 다시 그 진실을 전승해 나가겠지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이뤄져 이러한 시위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고요.
위로가 아닌 격려
한 시간 남짓 신 나는 잔치가 끝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리는 조용해집니다. 한 젊은 청년이 취재할 것이 남아 있는 듯 대사관 앞에서 조용히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시위가 끝난 후에도 열심인 학생의 진지한 모습이 든든합니다. 모 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김상현 씨입니다.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학생은 군 입대를 앞두고 몇 가지 해야 할 일을 정해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요시위라고 하는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하고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입대하게 되면 이렇게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 같아 오늘 참여하게 됐습니다.” 홈페이지에 참가 신청 하는 것을 잊어 짧게나마 발언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고 말합니다. “할머니들, 힘내세요!”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까, 어떠한 말로 용기를 드려야 할까 고심했는데, 시위에 참여하고 보니 제가 더 많은 용기를 얻어 가는 것 같습니다. 시위는 평화롭고 참가자들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것은 항의 집회라기보다는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네요.”
수요시위도 어느덧 900회를 훌쩍 넘기고 1000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요시위에 참가했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인연을 만들었지요. 듬직한 학생도 있었고 딸을 키우는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몸을 보살피기 힘든 장애인도 있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군인도 있었고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와 소중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책임 의식이지요.
세상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를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게 합니다.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서로의 아픈 곳을 보듬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겠지요. 할머니들을 위로하러 왔다가 자신이 위로를 받고 돌아간다는 학생의 말처럼 우리의 역사 수업은 어쩌면 위로와 격려를 반복하며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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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윤미향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 상임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1992년 정대협이 처음 결성되었을 당시 간사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 증언을 녹취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 문제를 알아 줬으면 좋겠다”라는 강덕경 할머니의 유언은 그에게 “믿고 가세요. 끝까지 싸울게요”라는 강한 의지와 소신으로 남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할머니들의 뜻을 받들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유럽 연합 의회의 결의안을 이끌어 내는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고등학생 딸을 둔 어머니이기도 한 그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줄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오늘도 수요시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0년 11월 16일, 37개의 여성단체가 함께 모여 만든 단체로, 1992년 1월 8일부터 수요시위를 개최하고 있으며, 피해자 지원 활동, 유엔 인권 위원회 상정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과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서대문 독립 공원 내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한 시민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www.womenandwa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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