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모터사이클의 왼쪽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30분이다. 시속 60마일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바람은 따뜻하고 습하다. 아침 8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로 후텁지근하니 오후가 되면 어떨까.
길가 근처의 습지에서 피어오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와서 코를 찌른다. 우리는 현재 오리 사냥을 위해 사람들이 찾는 수천 개의 늪지가 널려 있는 중부 평원 지역을 지나고 있으며, 미니애폴리스에서 다코타를 향해 북서쪽으로 가고 있다. 현재 달리고 있는 도로는 콘크리트로 된 2차선의 낡은 간선도로로, 몇 년 전에 4차선 도로가 이 도로에 평행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교통량이 별로 많지 않다. 습지 지역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공기가 서늘해진다. 하지만 습지를 빠져나오자 공기는 다시금 갑자기 후텁지근해진다.
이 지방으로 다시 여행하게 되어 즐겁다. 이곳은 내세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무명(無名)의 땅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이처럼 오래된 길을 따라 달리노라면 긴장감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부들풀 더미와 초원 사이로 뚫린 낡은 콘크리트 도로 위를 덜걱거리며 지나고 나면, 더 많은 부들풀 더미 그리고 습지의 갈대와 만난다. 여기저기에 호수가 널려 있고, 자세히 보면 부들풀 더미 가장자리에 있는 야생 오리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거북이도 보인다. 붉은죽지찌르레기가 한 마리 보이기도 한다.
크리스의 무릎을 치고서 찌르레기 쪽을 가리킨다.
“뭔데요?” 크리스가 소리쳐 묻는다.
“저게 찌르레기라는 거란다!”
그가 뭐라고 말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어 소리쳐 묻는다. “뭐라고?”
내 헬멧의 뒤쪽을 손으로 잡고 크리스가 소리쳐 말한다. “아빠, 저런 새는 수도 없이 보았어요.”
“아, 그런가!” 되받아 소리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열한 살짜리 아이에게 붉은죽지찌르레기는 별로 대단한 것일 리 없겠지.
그런 것들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좀더 나이가 들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없는 갖가지 추억과 뒤섞여 있다. 습지의 갈대가 누렇게 변하고 부들풀이 북서풍에 흔들리던 오래전의 차가운 아침 날들. 해가 뜨고 오리 사냥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장화로 휘저은 진흙 더미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올라왔었지. 혹은 늪지가 온통 죽은 듯이 얼어붙어 있었고, 죽은 부들풀 더미 사이의 얼음과 눈을 가로질러 걸어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잿빛 하늘과 차갑게 얼어붙은 사물들뿐이었던 겨울철의 나날들. 그때는 찌르레기들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지. 하지만 이제 7월이 되어 찌르레기들이 돌아오고 만물은 최고조로 생기를 되찾은 상태다. 늪지의 가장자리로 가면 어느 곳에서나 윙윙거리는 소리와 삑삑거리는 소리, 웅웅거리는 소리,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만 가지의 살아 있는 생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끊이지 않고 온화하게 그들 특유의 삶의 소리를 만들어내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휴가를 가다 보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다. 차를 타고 가면 항상 어딘가에 갇혀 있는 꼴이 되며, 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차창을 통해서 보는 모든 사물이 그저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일종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되어, 모든 것이 화면 단위로 지루하게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보면 그 화면의 틀이 사라지고, 모든 사물과 있는 그대로 완벽한 접촉이 이루어진다. 경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완전히 경치 속에 함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현장감은 사람들을 압도하게 마련이다. 발아래 12~13센티미터 지점의 윙윙거리는 콘크리트 바닥은 발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실재하는 그 무엇, 실제로 바로 발밑에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달리는 중이기 때문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어 바라볼 수는 없더라도 어느 때건 발을 내딛고 그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과 모든 체험은 즉각적인 의식과 결코 격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크리스와 나는 앞서 가는 친구들과 함께 몬태나로 여행 중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몬태나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에 도착하기보다는 여행 자체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확실한 계획을 짜놓고 있지 않다. 단지 휴가를 즐기려는 여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조 도로를 택해 가고 있다. 포장된 시골길이 우리에게는 최상의 길이며, 지방 간선도로도 그럭저럭 괜찮다. 주간(州間) 고속도로는 우리가 여행하기에는 최악의 도로다. 우리는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할 따름이며,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재는 척도란 ‘시간’보다는 ‘즐거운’에 역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처럼 역점을 달리하면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꾸불꾸불한 언덕길이 시간적으로는 더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길이 꾸부러질 때마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자동차 대신, 몸을 옆으로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할 때는 그러한 꾸불꾸불한 길이 한결 더 즐거운 여행길이 된다. 교통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여행길은 더욱더 즐거워지게 마련이며, 게다가 안전해지기까지 한다. 근처에 휴게소나 옥외 광고판이 없을수록 좋은 길이며, 작은 숲이나 초원, 과수원이나 잔디가 갓길에 가급적 맞닿아 있을수록 더 좋은 길이다. 그런 길로 여행을 하다 보면, 지나가는 도중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들과 만나거나 누가 지나가는지를 현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길을 묻기 위해 멈추었을 때 바라던 것보다도 한결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들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 동안 여행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다.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의 친구들이 처음으로 이런 길을 찾아 여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가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또는 다른 간선도로로 가는 지름길을 찾기 위해 이런 길을 택했었다. 그때마다 경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매번 느긋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지나 여행했다. 이 같은 샛길이 주(主)도로와 진정 다르다는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러한 길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삶의 속도라든가 인간성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어디로 떠날 일도 없고, 예의를 차리느라 부산을 떨지도 않는다. 사물들이 현재 여기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이 깨닫고 있는 전부다. 이런 깨달음을 거의 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오래전에 도시로 떠난 사람들과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들의 자녀들뿐이다. 이 같은 사실의 발견은 진정 대단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는 데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사실을 빤히 보면서도 우리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또는 깨닫지 못하도록 길들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사건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대도시에서 일어나며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지루한 것들뿐이라는 투의 속임수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영문을 알 수 없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꺼져, 나는 지금 진리를 찾고 있어”라고 말하자 진리가 가버리는 꼴이다. 왜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를 포착하자 당연히 아무것도 우리를 이 같은 길들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으며, 우리는 주말이든, 저녁 무렵이든, 휴가 때든 항상 이런 길들을 찾았다. 우리는 진정 보조 도로만 찾는 모터사이클광이 되었으며, 이런 여행을 통해 무언가 배우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지도를 보고 어느 길이 좋은 길인지 찾아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일 길이 꾸불꾸불하면 이는 좋은 길이다. 이는 중간에 언덕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길이 마을과 도시를 연결하는 주(主)도로라면 이는 좋지 않은 길이다. 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길은 항상 아무 곳도 아닌 곳과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연결하는 길이며, 좀더 신속하게 어딘가에 도착하고자 할 때 택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만일 규모가 큰 어떤 마을에서 출발하여 북동쪽으로 가는 경우라면, 거리가 얼마가 되든 결코 직선 도로를 이용하여 그곳을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먼저 마을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가게 되면, 곧 시골의 지방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보조 도로에 이르게 된다.
반드시 익혀야 될 주된 기술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눈짐작으로 길을 찾을 수 있는 지방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길들이기 때문에, 갈림길에 도로 표지판이 없다고 해서 아무도 불평하지 않으며, 실제로 도로 표지판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있다고 하더라도 잡초 사이에 얌전하게 감추어져 있는 자그마한 표지판이 하나 있을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시골길의 표지판을 세우는 사람들은 두 번 이야기해주는 경우가 드물다. 만일 당신이 그 표지판을 놓치게 되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일 뿐이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당신은 간선도로용 지도에는 시골길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울러, 당신은 당신만의 “시골길”을 택하는 경우, 길은 두 가닥의 바큇자국이 있는 길로, 이윽고 한 가닥의 바큇자국이 있는 길로 바뀌다가 다시 들판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길이 완전히 끊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농가의 뒷마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부분 추측을 통한 막연한 계산에 의해, 또는 우리가 이미 발견한 단서를 가지고 추론한 바에 따라 앞으로 나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해가 방향을 가르쳐주지 못하는 흐린 날을 대비하여 한쪽 주머니에 나침반을 휴대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연료 탱크 위에 별도로 부착해놓은 주머니에 지도를 준비해 갖고 다니기도 하는데, 바로 이 지도를 통해 마지막으로 지나쳤던 교차로에서 얼마만큼 왔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또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알기도 한다. 이러한 도구들과 더불어 “어딘가 가야 한다”라는 중압감을 갖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은 잘 풀려나가게 되며, 미국의 전역을 대충 우리 수중에 넣을 수도 있게 된다.
노동절이나 현충일의 주말에 이러한 길을 이용하여 여행하면 수 마일을 달리는 동안 단 한 대의 차량도 구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곧이어 주간(州間)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가다 보면 수많은 차량이 꼬리를 물고 지평선 너머까지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얼굴을 찌푸린 채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며, 뒷좌석에서 울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얼굴을 찌푸린 채 서두르고 있는 듯 보이는 대신 무언가 다른 방법도 있음을 말해줄 방도가 있길 바라나, 나에게는 그럴 방도가 없다. . . .
이러한 습지들은 수천 개 보아왔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이 같은 습지들을 온화하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무자비하며 무분별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런 습지지만, 실제로 습지를 접하면 그런 식의 개념화를 중간에 압도해버리는 그 무언가가 있다. 아니, 저럴 수가! 붉은죽지찌르레기 한 무리가 모터사이클 소리에 놀라 부들풀 더미 사이의 둥지에서 날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다시 한 번 크리스의 무릎을 친다. . . . 이어서 새들의 저런 모습을 그가 이전에도 보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뭔데요?” 크리스가 소리친다.
“아무것도 아니다.”
“네? 뭐라고요?”
“그냥 네가 내 뒤에 있나 없나를 확인해본 거란다.” 내가 이렇게 소리쳐 대꾸한다. 그런 다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소리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신, 주위 사물을 의식하고 사물에 대해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보거나 듣는 것에 대해, 날씨의 상태라든가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일에 대해, 기계나 주위의 시골 풍경에 대해,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없이 사물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이용하여 내 마음속에 떠오르게 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주 바쁘게 보내기 때문에 이야기할 기회를 결코 찾지 못한다. 그 결과 하루하루가 항상 깊이를 지니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만다. 수년 후에는 모든 세월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당사자를 의문 속에 빠져들게 하고, 그 모든 세월이 흘러가버림으로써 안타까움에 젖게 하는 단조로움만이 하루하루를 지배하게 될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으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셔토쿼Chautauqua와 같은 형태의 ‘야외 강연’이다. 사실, 미국을, 바로 이 미국이라는 나라 전역을 떠돌곤 하던 ‘이동식 가설 무대에서의 강연’을 뜻하는 셔토쿼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다. 귀를 기울이는 이들의 생각 속에 문화와 계몽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마음을 교화하거나 즐겁게 하고 또 향상시킬 의도에서 기획되었던 대중 강연, 옛날 한때 유행하던 이 대중 강연 속에 우리는 이미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야외 강연’은 발 빠른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으로 인해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해서 생긴 변화가 반드시 진보를 의미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 덕분에 온 국민의 의식의 흐름이 빨라졌고 그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깊이는 한결 덜해진 것처럼 보인다. 옛사람들의 의식이 그 흐름을 이어가며 파놓은 물길들이 새로운 세대의 의식을 수용할 수 없기에,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물길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물길 주변을 따라 점점 더 심하게 파멸과 파괴 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셔토쿼를 통해 새로운 의식이 흐름을 이어나갈 물길을 개설하려는 것, 여기에 내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 생각들 및 너무 자주 되풀이되는 상투어들과 같은 침전물로 인해 막혀버리고 만 옛날의 물길에 대한 준설 작업을 하고자 할 따름이다. “무엇이 새로운가?”는 흥미롭고도 시야를 넓혀주는 불멸의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배타적인 입장에서 추구하는 경우 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지엽적이고 하찮은 것들과 유행들, 이를테면 내일의 침전물들밖에 쌓이지 않는다. 대신 폭보다는 깊이와 관련되는 질문, 또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해 침전물을 아래쪽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질문인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해 나는 관심을 갖고자 한다. 너무 깊이 파여 있어서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물길이 존재하던 시대, 그리하여 그 어떤 새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최선”이 논의의 여지없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도그마로 존재하던 시대가 인간 역사에 존재한 적이 있긴 하나, 이는 현재의 상황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공유하는 의식의 흐름은 양쪽 물가를 깎아먹고, 결국 중심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흘러가다가 낮은 지역들을 흐름 속에 잠기게 하기도 하고 높은 지역들을 서로 끊어놓아 고립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자신의 내적인 힘을 헛되고도 파괴적으로 쌓아가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특정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약간의 준설 작업을 통해 물길의 깊이를 더할 때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앞에 가던 존 서덜랜드와 그의 아내인 실비아가 길옆의 피크닉 구역으로 모터사이클을 몰고 들어가 있다. 이제 쉴 시간이다. 우리가 타고 있던 모터사이클을 그들 옆으로 몰아가는 동안, 실비아는 헬멧을 벗고 그녀의 머리를 흩뜨려서 흘러내리게 한다. 존은 그의 BMW를 세워놓고 있다. 아무 말도 없다. 우리는 수도 없이 함께 여행을 했기 때문에 흘끗 보기만 해도 상대방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곧이어 우리는 모터사이클의 소음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아침 이 시간쯤이면 피크닉 구역의 벤치에는 아무도 없다. 전 구역이 모두 우리 차지가 된 셈이다. 존은 풀밭을 가로질러 무쇠로 된 펌프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마실 물을 퍼 올리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풀이 우거진 둔덕 너머에 있는 몇 그루의 나무를 지나 작은 시냇가로 내려간다. 나는 그저 주위를 돌아볼 뿐이다.
잠시 후 실비아가 나무로 된 피크닉 벤치에 앉아 위를 보지 않은 채 천천히 다리를 한 쪽씩 올려 차례로 뻗어본다. 오랫동안의 침묵은 그녀가 무언가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지 말을 걸어본다. 실비아가 올려다보고는 다시금 눈을 내리깐 채 말한다.
“반대편 차선으로 차를 몰고 오던 사람들 말인데요, 맨 앞의 사람 표정이 아주 슬퍼 보였어요. 그리고 다음 사람 표정도 그렇고, 다음 사람도, 그리고 또 다음 사람도, 모두가 똑같았어요.”
“그 사람들은 일하러 가는 길이지요.”
그녀도 잘 알고 있으며, 그 점에 관한 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다시피, 일하러 가는 길이지요.” 되풀이해서 말하고는 이에 덧붙여 말을 잇는다. “월요일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일하러 가는 거예요. 월요일 아침에 누가 밝은 표정으로 일하러 가겠습니까?”
“그냥,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 멍해 보였던 거예요. 모두가 죽은 사람처럼. 마치 장례식 행렬 같았어요.” 이렇게 말한 다음 그녀는 두 발을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그들은 바로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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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로버트 M. 피어시그
Robert Maynard Pirsig
미국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다. 화학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으나 궁극적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여 한국에서 근무했으며, 이를 계기로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대 후 미네소타 대학에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은 뒤, 인도의 베나레스 힌두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자유 계약 작가로 활동했는데, 잠깐 동안 몬태나 주립대학교에서 영작문을 가르쳤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0년 12월 피어시그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전기 충격 치료까지 받는다. 우울증에서 회복된 뒤인 1967년, 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모태가 된 한 편의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다. 1968년 6월 피어시그는 '정신적 삶과 기술 공학적 삶 사이의 분열'에 관한 책을 쓰고자 한다는 편지를 122개 출판사에 보냈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아들 크리스와 함께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난다. 바로 이 여행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된다. 피어시그는 이후 4년에 걸쳐 원고를 집필했다. 마침내 1974년 윌리엄 모로우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는 출간과 함께 비평적으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 그는 허드슨 강을 따라 여행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두번째 철학서인 『라일라―도덕에 대한 탐구』의 근간이 되었다. 이 책은 1991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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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장경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문과 교수. 문학 비평서로는 『미로에서 길 찾기』, 『신비의 거울을 찾아서』, 『응시와 성찰』이 있으며, 문학 연구서로는 The Limits of Essentialist Critical Thinking (American Studies Institute, SNU), 『코울리지: 상상력과 언어』, 『매혹과 저항: 현대 문학 비평 이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위하여』가 있다. 번역서로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야자열매 술꾼』, 『윌리엄 셰익스피어』, 『먹고, 쏘고, 튄다』, 『아픔의 기록』, 『우리 아기』, 『열정적인, 너무나 열정적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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