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동기가 주는 혜택
아이들은 아이들다워야 자연의 순리에 맞다. 이 순리를 억지로 거역하면 결국에는 제대로 익지 않아 풍미도 없고 곧 썩어버리는 설익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언제나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느낀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젊음은 빨리 가고, 지혜는 더디 온다.
― 아미시 파의 격언
할머니는(아마 여러분의 할머니도 그랬을 텐데)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이들은 종종 소중한 어린 시절을 함부로 낭비한단다.” 할머니의 이 말씀은 물론, 젊어서 자신이 가진 건강과 활력과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의 진가를 모르는 어리석음에 대한 지적이었다. 좀 더 나이 들어 세상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 헛되이 써버린 젊음의 시간들을 뉘우치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 늦게야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곤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어서야 과거를 돌아보며 놓쳐버린 기회들을 추억하다니, 젊음의 혜택을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혜만이라도 좀 더 빨리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누구라도 하는 말이라서(할머니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깊이 새겨듣지 않는 이 말속에는 사실 철학자, 교육자, 정치가 그리고 심리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들이, 아이들과 아동기에 대해 실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들의 미성숙함이란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아동기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공정이 채 끝나지 않은 ‘불완전’하고 ‘진행 중’인 단계라 인식하고 이 시기를 가능하면 빨리 끝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는 전적으로 온당하다.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기간을 겪어야 한다. 지구상에서(감히 다른 행성은 언급할 수조차 없다) 성숙하기 위해 인간만큼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동물도 없다. 내가 말하는 배움이란 단지 학교교육만이 아니라, 인간이 수천 수만 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했던 모든 총체적인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인간이 만든 사회는 다른 어떤 종들의 사회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사회생활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잠깐 동안의 경험만으로도 금방 익힐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영리한 머리만큼이나 얼마나 오래 배우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반드시 오랜 기간을 거치는 성장 과정을 꼭 겪어야 하는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동물들은 평균수명이 길수록 긴 발육기를 거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란 종은 예컨대 더디게 성장하고 오래 사는 종에 관한 책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하는 많은 기술들을 익히는 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종이므로, 평균수명도 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몸은 좀 늦게 성숙한다 해도 지능은 빨리 발달해서 좀 더 빨리 사회생활을 배울 수 있게 진화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진화했다면 아이들은 세상 사는 지혜를 좀 더 빨리 배워 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의문은 정말 그럴듯하지 않는가? 확실히 지적으로 성숙한 유기체가 그렇지 않은 유기체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식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이 책에서 줄곧 느린 성장이 우연이나 자연이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에 아주 적합하며 호모사피엔스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결코 함부로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아와 아동들은 아동기를 거치며 살아남아, 어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준비하기 위해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들(특히 심리적인 특징들)을 잘 활용할 줄 안다. 젊음의 빛나는 자질을 낭비하는 쪽은 아이들이 아니라 사실 어른들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간의 성장에 대해 일반적이지 않은 의견을 제시한다. 성장이 서두른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렇다. 오히려 느리다는 특징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우성의 자질이었기 때문에 진화 과정에서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각은 생물학적 성장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교육 그리고 그들의 행복에 대한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인간이 느리게 성장하고 긴 아동기를 보내는 특징 때문에 환경에 더 잘 적응하면서 살아남았고, 또한 아동기의 미성숙한 특징들이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성년기에 이르게 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여러 증거들을 살펴볼 것이다.
1장에서는 내 주장의 토대가 되는 몇 가지 전제들을 밝힌다. 먼저, 현대사회는 아이들에게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갖춘 아동기를 오히려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재촉한다는 점을 다룬다. 다음으로 성장에 대한 여러 시각들을 살펴본다. 성장에 대한 시각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므로 중요하다. 단순하게 보면, 유년기와 아동기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나는 확고한 반론을 펼친다. 아동기는 단순히 앞으로 있을 뭔가를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현재 부닥친 환경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기다. 마지막으로 성장이라는 문제를 좀 더 넓게 이론적`―`진화생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다. 진화론적 관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있으며, 현재 행동과학(인간 행동의 일반 법칙을 체계적으로 구명해 법칙성을 정립함으로써 사회의 계획적인 제어나 관리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과학적 동향의 총칭`―`옮긴이)의 최근 경향이기도 하다. 사실 진화라는 관점을 벗어나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 또한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진화의 관점은 성인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발달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둘러 보내는 아동기
아동기는 그 나름대로 고유한 ‘목적’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단순히 성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한 과정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야 타당하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하루빨리 아동기를 벗어나라고 아이들을 다그친다. 아이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학교교육이다. 문화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인간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배워야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기술을 이용해왔으며 이런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데 실제로 인간만큼 영리한 동물도 없다. 그렇지만 요즘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예전 아이들이 부모 밑에서 오랫동안 배워야 했던 사냥법이나 먹을 수 있는 열매를 구별하는 방법 같은 기술이 아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와 떨어져 교실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읽기, 쓰기, 셈하기를 배운다. 그들이 배우는 기술은 생활에 당장 필요한 구체적인 실체가 아닌 추상적인 관념들이다. 역사, 과학, 어쩌면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할 먼 나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결국 아이들의 최종 목표는 전문가다. 단순히 읽기, 쓰기, 셈하기만 배워서는 성공할 수 없고 물건을 생산하는 기술이라든지 배관 기술이나 뇌 수술 같은,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에 정통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경쟁하며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배우려면 학교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교육은 본래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제도다. 인류는 불과 6,000년 전에야 읽고 쓰는 기술을 터득했다. 세상에는 아직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성인 대부분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지는 1,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읽기는 물론이거니와 나란히 놓인 책상에 조용히 앉아 뭔가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교육을 통해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빠르게 발전한 기술은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크게 바꿔놓았다. 예전보다 복잡해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빨리 익히게 한 뒤, 이를 바탕으로 커서 더 복잡한 기술을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오늘날의 삶의 방식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탄식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버지니아의 블루리지 산맥에 자리 잡은 작은 공동체 마을에서 이틀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하이킹도 하고 카누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웠던 건 내가 휴가를 보내고 있어서였다. 만약 나에게 날마다 사냥을 하고, 채소를 기르며, 밤에는 모닥불가에 둘러 앉아 낮에 사냥한 이야기를 하고, 낮에 사냥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 흉을 보고,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모기를 쫓으며 살아보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면 정말 단호히 사양하겠다. 나는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깨끗한 곳에서 자연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런 인적 없는 곳에서 평생 살라면 결코 그러고 싶지 않다. 더구나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진심으로 내가 염려하는 것은, 오늘날 부모들이 날로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 아이들을 잘 적응시키려는 욕심 때문에 옳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이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착각하고 그들을 마치 어른 대하듯 한다. 아이들이 사회에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좀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고, 그래야 어른이 되었을 때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살던 아이들은 걱정 하나 없이 순수하게만 살았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오늘날 선진국 아이들이 누리는 삶은 200년 전 아이들의 삶보다 훨씬 낫다(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부모들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을 기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들은 단순히 크기만 작은 어른이 아니며 그들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아동기에 적응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아이들을 위해 가장 적합한 교육 및 생활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
아이들을 몰아대는 곳이 단지 학교만은 아니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다른 선진국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겪는 아동기는 한 세대 전의 기성세대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들은 학교 수업 후에 테니스, 태권도, 무용, 피아노 등을 배우느라 빈틈없는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오늘은 보이스카우트 또는 걸스카우트 모임에 가고, 내일은 연주회 연습을 하고, 또 다음 날은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친구를 만난다. 요즘은 야구나 축구도 공원이나 운동장에서 어쩌다 만난 친구들끼리 하는 놀이가 아니라, 부모들이 미리 잡아놓은 날짜에 부모들의 응원과 감독 아래 치러야 하는 경기가 되어버렸다. 판정에 문제가 있으면 어른들이 끼어들어 공이 어느 편 것인지, 누가 아웃이고 누가 세이프인지 가려주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한눈팔 새 없이 꽉 짜인 일주일을 보내는 가정과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족한 가정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좋은 사례가 UCLA대학 가정생활지원센터의 엘리노 오크스와 연구원들이 부모 둘 다 직업이 있으며 최소한 두 명의 자녀를 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32가구를 추적 연구한 예다. 연구 결과,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들을 바쁘게 살도록 관리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익히고 배워서(게으름은 악마의 도구이므로)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0대 이전의 자녀 둘을 둔 마흔일곱 살의 한 아버지가 한 말이 그 예다. “옛말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더 먹는다고요. 부지런하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그 사실을 배우는 겁니다. 게다가 바쁘게 살면 성적도 좋아지고 뚱뚱해지지도 않아요. 결국 아이들에게 좋은 거죠.”
물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아이들이 바쁜 생활을 아무리 잘 소화한다고 해도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과 정서가 있고, 더욱이 아이들이 어른의 생활 방식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내 말은, 단순히 아이들은 꽃들이 지천으로 널린 동산에서 큰 귀를 팔랑거리는 강아지와 뛰어놀아야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런 아이들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생각만으로도 행복한 모습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아동기가 단순히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주변 사람과 주변 현상에 대해 어른들과 똑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성장에 대해 나는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지는데, 성장에 대한 관점은 아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이론들
전문가뿐 아니라 비전문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장에 대해 대체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反직관적으로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장을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숙한 단계로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최종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미성숙한 단계인 아동기는 ‘효율적이지 못한 단계’로서 진정한 진보를 이루기 위해 더욱 더 발전해야 하는 불완전한 시기다. 따라서 진정한 진보는 생산을 완수하는 성인이 되어서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다윈에 따르면, 성인이란 자손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생물이 성공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렇게 진화론을 통해 ‘성장’이라는 주제를 들여다보아도 아동기는 성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며, 성인이 된 뒤에는 떨쳐버려야 할 꼬리표 같은 시기일 뿐이다(예전에 나는 소아정신분석가로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느 한 면접관이 했던 인상적인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보죠. 아동에 대한 연구가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요? 어린아이들이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가 점점 영리해져 열여섯이나 열여덟 살쯤 되면 어른과 비슷해지잖아요. 그러니까 필요한 연구는 아동이 아니라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서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은가요?” 물론 그 면접관은 나를 보기 좋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성장을 단순히 미성숙한 단계에서 성숙한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곤충이나 양서류의 변태, 즉 애벌레가 나비(또는 성충)가 되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생긴 것만 봐서는 애벌레와 나비가 똑같은 종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 동물들은 성장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태를 하며 각각의 단계는 불완전함이 없는 완벽한 개체다. 가령 애벌레도 나비만큼 복잡하고 왕성한 삶을 산다. 따라서 곤충학자들은 애벌레를 단순히 덜 자란 나비라고 생각하지 않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고유한 모양과 조건을 갖춘 독립된 유기체로 본다. 다시 말해, 애벌레는 나비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벌레 자체로 살아야 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애벌레는 자라서 나비가 되지만, 애벌레와 나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애벌레를 단순히 나비의 미숙한 상태라고 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사람을 포함한 포유동물은 변태를 하지 않는다. 적어도 외관상으로 사람의 성장은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한 생물들에 비해 따분하고 단순해 보인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갓난아기나 어린아이를 온전한 존재, 즉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가장 알맞은 능력과 특징을 갖춘 온전한 존재로 본다면 미성숙하다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즉, 미성숙함은 필요악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 성장에 적합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보면 아동기 아이들이 갖는 모든 특징과 경험을 단순히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라고만 보지 않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어떤 특징은 미래에 어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그들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견해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많은 심리학자들과 교육자들이 내놓은 성장에 대한 견해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고착된다고 본다. 이런 견해에 나 역시 큰 이견은 없다. 이와 관련된 예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심리적 성장이 반드시 과거에 일어난 일과 관련된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한 견해는 우리의 시각을 충분히 왜곡시킬 수 있다.
앞으로 전개할 논의를 위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동기와 성장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미리 정리한다. 첫째, 인간은 생식의 목적을 위해 약 20년 동안 성장기를 보낸다. 이런 긴 성장기를 보내는 것은 인간의 복잡한 삶, 주로 사회적 복잡성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이라는 맥락에서 고려할 때 아주 당연한 일이다. 둘째, 앞의 첫번째 관점과 관련해 아이들은 외부의 자극과 결과적으로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준비하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되었다. 나는 이것을 ‘지연 적응deferred adaptations’이라고 부른다. 셋째, 유년기나 아동기의 어떤 특징은 어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성장 시기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된 것이다. 이것을 ‘개체발생 적응ontogenetic adaptations’이라고 한다(‘ontogeny’에서 파생된 ‘ontogenetic’은 개체 발달을 의미하며, 종의 발생이나 진화를 의미하는 ‘phylogeny’와 구별된다). 나는 성장에 관한 첫 번째 관점―인간의 긴 성장기는 복잡한 사회생활을 배우기 위해 필요하다―은 그 자체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2장과 3장에서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겠다. 우선 지연 적응과 개체발생 적응에 관해 좀 더 설명한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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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데이비드 F. 비요크런드 David F. Bjorklund
플로리다애틀랜틱대학교 심리학교 교수. 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인지발달과 진화심리학이다. 비요크런드 교수는 간단한 보드게임을 하고 노는 아이들이나,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부모들의 모습과 같은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을 통해 아이들의 심리발달을 연구한다. 지은 책으로 『아이들의 생각: 인지발달과 개인차 Children's Thinking: Cognitive Development and Individual Difference』(2005), 공저로 『인간 본성의 기원: 진화발달심리학적 관점 The Origins of Human Nature: Evolutionary Development Psychology』(2002)과 『사회 정서 발달의 기원: 진화심리학과 아이들의 성장』(2004)이 있다. <아동 실험심리학 저널 Journal of Experimental Child Psychology>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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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최원석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영국 애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티솔TESOL과 번역학 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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