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왜 다시 시민 혁명에 주목하는가
이 글은 근대사의 기점으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민 혁명’을 개념적으로 정리해보려는 시도이다. 일반적으로 시민 혁명이라 하면 17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왕정 전복, 아니 더 멀리는 16세기 후반 에스파냐의 지배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 반란으로부터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유럽을 요동치게 한 여러 사건들을 범주화한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시민 혁명’이 보편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일부 국가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이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 혁명은 서구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민 혁명은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개념이 아니며, 그 개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잉글랜드의 왕정 전복
1642년 잉글랜드 의회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주의 정책을 강요하는 국왕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젠트리 지주층으로 구성된 의회파는 5년에 걸친 내전 끝에 찰스 1세를 생포했고, 결국 1649년 1월 30일 런던에서 그를 처형했다. 국왕 처형 후 의회파는 크롬웰의 주도 아래 공화정을 수립했다.
네덜란드 반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이 1566년 8월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괴젠Geuzen(거지들)이라 불린 반란자들은 오라녀 공 빌럼의 지도 아래 도시의 상인 세력과 힘을 합쳐 에스파냐에 맞서 싸웠다. 네덜란드 연합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시민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Bourgeois Revolution’의 우리말 번역어이다. 독일에서는 Bourgeois 대신 우리말 ‘시민’에 해당하는 Bürgerliche를 붙여서 Bürgerliche Revolution, 즉 ‘시민 혁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부르주아’와 ‘시민’은 개념상의 괴리가 꽤 커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시민’이라 하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 또는 ‘시민적 권리를 누리는 한 국가의 구성원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원래 이 말은 전자의 뜻을 갖고 있었지만, 요새는 오히려 후자의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부르주아’도 원래는 ‘도시bourg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출발했지만, 역사의 변천 속에서 지리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농촌적이던 중세 봉건 사회에서 상업이 부활하면서 교역의 중심지에 시장과 함께 차츰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최초의 부르주아들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상업의 사회경제적 비중이 커지고 도시의 상공업자들이 귀족 못지않은 부유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부르주아는 부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그중에서도 기업에 투자해 부를 축적하는 자본가가 부르주아라고 불렸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가 지칭하는 대상이 도시민, 부자, 자본가로 점차 축소되었는데, 우리말의 ‘시민’은 오히려 그 지칭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더구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실제와 정확하게 부합하지도 않기 때문에 오해를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다.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하면 보통 부르주아가 일으킨 혁명, 또는 부르주아를 위한 혁명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시기인 19세기에 부르주아는 자본가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잉글랜드 혁명 때인 17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8세기에도 자본가 계급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어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자’로 이해된 부르주아 개념을 적용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가 단독으로 시민 혁명을 일으키고 수행한 것도 아니고, 부르주아들에게만 시민 혁명의 혜택이 돌아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200년 전에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샤토브리앙François Auguste René de Châteaubriand이 “혁명은 귀족이 시작해서 평민이 끝냈다”라고 언명했듯이, 혁명은 권력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어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신흥 계급의 주도로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하고, 여기에 민중이 개입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혁명의 와중에 총칼을 들고 싸우다 거리에서 쓰러져간 사람들은 대부분 부르주아가 아닌 민중이었다. 시민 혁명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도, 농민들이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만큼 많은 혜택을 보았기 때문에, 교조적이라고 비판받는 소불Albert Soboul(1914∼1982)조차 『혁명기 농민문제 1789∼1848 Problèmes paysans de la révolution 1789∼1848』(1976)라는 책에서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농민-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자고 진지하게 제안했을 정도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자본가 계급인 부르주아지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1789년의 혁명으로 프랑스의 산업화가 상당히 지연되어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이 늦어졌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소불
프랑스 혁명사가로 1967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파리 1대학 프랑스 혁명사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58년 『혁명력 2년 파리의 상퀼로트 Les sans-culottes parisiens en l’an II』라는 연구로 국가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줄곧 프랑스 혁명기 민중과 농민에 대해 연구했다. 공산주의자로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강조했기 때문에 퓌레François Furet, 도일William Doyle 등 수정주의자들로부터 교조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과 북아메리카 역사학계의 진지한 학술 논의에서는 더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Britannica 백과사전에도 부르주아 혁명은 더 이상 표제어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폐기해야 하는가? 현재로서는 이에 선뜻 동의하는 역사가들도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혁명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사를 이해하고,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파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민 혁명이 서양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근대 이후 비非유럽 세계가 서양을 모델 또는 반反모델로 삼아 자기 발전을 모색했기 때문에, 시민 혁명은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극동에 위치한 ‘은자隱者의 나라’ 한국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서양을 따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서양의 혁명 전통을 이어받고자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3·1 만세운동, 4·19 학생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양이 시민 혁명을 완수하고 누렸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혜택을 아직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현재 세계에서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모두 시민 혁명을 경험했거나, 적어도 그 혁명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한 세기 만에 후진국에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섰던 러시아도, 2,000년 이상 세계의 으뜸 국가였고 현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근대의 낙오자 신세를 청산하고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하려 하고 있는 중국도 여전히 우리가 말하는 선진국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시민 혁명을 우리의 시각에서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바스티유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요새를 함락하면서 혁명을 일으켰다. 바스티유는 파리 동쪽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서 샤를 5세의 치세인 1370∼1383년에 오브리오Hugues Aubriot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성벽으로 둘러쳐진 가로 66미터, 세로 34미터 규모의 이 요새는 폭 25미터, 깊이 8미터의 해자로 보호되었고, 성벽을 따라 설치된 8개의 망루에는 파리 시가지를 굽어보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스티유는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었다. 요새의 군사적 기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전란을 겪을 때마다, 예를 들면, 1588년 제8차 위그노 전쟁 때, 그리고 1649년 프롱드의 난 때에도 적의 포위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따라서 점차 군사적 용도보다는 왕실 금고 또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리슐리외Rechelieu는 바스티유를 국왕의 봉인장lettres de cachet에 의해 체포된 정치범들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개조했다. 이제 바스티유는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안락한 감옥이 되었는데, 수감자는 난로와 가구가 구비된 넓은 방에서 하인을 거느리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외부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면회도 할 수 있었다. 바스티유를 거쳐 간 죄수들 가운데에는 요새 건설자인 오브리오, 신원을 알 수 없지만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철가면Masque de fer, 루이 14세의 정적 푸케Nicolas Fouquet, 사디즘sadism의 원조가 된 사드Sade 후작,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 목걸이 사건으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로한Louis de Lohan 추기경, 나중에 혁명 지도자가 될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등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7월 14일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를 공격한 것은 바스티유가 ‘전제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요새이자 무기고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바스티유에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수감된 광인이나 방탕한 자 등 7명의 죄수만이 수감되어 있었을 뿐이다. 국민의회를 해산하려는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자위 수단을 찾던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에 저장되어 있는 화약이 필요했고, 요새에 설치된 정부군의 포대가 언제든지 시민을 향해 포탄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에 바스티유를 공격한 것이다.
파리 시민의 수중에 떨어진 바스티유는 이튿날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 해체된 바스티유의 석재들은 기념품으로 팔리기도 했고, 대부분은 콩코르드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라파예트La Fayette 후작은 바스티유 요새의 열쇠 가운데 하나를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게 증정했다. 이렇게 400년 동안 프랑스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던 바스티유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졌다. 현재 바스티유 요새가 있던 자리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기념탑이 서 있고,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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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박윤덕
파리 1대학 프랑스 혁명사 연구소에서 「제헌국민의회 시기의 농촌소요와 농민운동, 1789~1791」이라는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혁명사 및 근대 유럽의 농촌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프랑스 구체제의 권력구조와 사회』(공저)가, 옮긴 책으로 『혁명의 탄생』 등이 있으며, 「프랑스혁명 초기 농민운동의 성격」, 「농촌공동체와 농민혁명―1789년 7월 마코네Maconnais 지방의 농촌폭동 사례 연구」, 「민중의 “도덕경제”와 식량폭동―18세기 말 프랑스의 경우」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younduk@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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