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실화를 담은 9년 간의 기록이다.
| 한국어판 저자 서문 |
나와 당신의 문화 사이
여러분이 이 책을 읽는다는 상상을 하니 기쁘고도 놀랍습니다.
기쁜 것은, 리아의 나라 가 문화 간의 소통을 다룬 책인데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는 것보다 더 나은 본보기가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놀라운 것은, 제가 이 책을 취재하고 쓰는 여러 해 동안, 제 책을 볼 사람이 17명이나 될까 하는 걱정을 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워낙 막연했으니까요! 실제로 제 친구들은 이런 말로 절 놀리곤 했답니다.
“간질 앓는 몽족 어린애에 대한 책을 쓰느라 9년 세월이라… 근데 말이야 앤, 책이 나올 무렵에 간질 앓는 몽족 어린애 분야의 틈새시장이 남아 있을까?”
그때는 이 책이 언젠가 한국어를 포함한 여러 개 언어로 번역되리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어판이 나오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더라면 아주 큰 힘이 되었겠지요.
제 친구들의 말뜻은, 간질 앓는 어린애 이야기는 딱히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주제가 아닌데 하물며 간질 앓는 ‘몽족’ 어린애 이야기야…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만큼 모두의 관심을 벗어난 이야기였으니 제 책을 내겠다는 출판사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몽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멀쩡한 분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몽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요. 몽족은 라오스 출신의 고산민족으로서, 베트남 전쟁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난민이 되어 미국에 왔습니다. (책의 10장을 보면 라오스가 어떻게 전쟁에 끌려들었으며, 몽족이 어떻게 미국의 전사가 되어 고유 문화를 잃었고, 수많은 몽족들이 어떻게 목숨이나 고향을 잃는 희생을 치르게 되었는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나라가 떳떳하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었지요.)
제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결혼이나 직업 등 아주 중요한 일들 중에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게 참 많더군요. 1988년 저는 대학 친구인 빌 셀비지라는 의사와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머세드라는 곳의 군립병원에 근무하고 있었지요. 빌은 당시 머세드에 몽족 난민들이 많이 이주해왔는데, 참 좋은 사람들이지만 일반적인 의료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는 바람에 까다로운 환자들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외과 수술이나 마취, 요추천자 같은 의술을 터부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몽족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이 워낙 부실한 탓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저는 제가 그런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고 양측의 입장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 머세드로 날아갔고, 숱한 실수와 오류를 범한 끝에 리아 리Lia Lee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아이는 이 책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것은, 리아의 사례라는 비극을 낳은 소통의 부실이 언어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 시절 병원에 몽족 통역자들이 매우 부족했던 건 사실입니다. 잡역부가 통역을 하기도 하고, 리아의 열두 살 된 언니가 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말을 완벽하게 통역했다 하더라도, 의사들은 리아 부모의 말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리아의 부모는 의사들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양측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은 ‘문화적’ 통역자였으니까요(나중에 저는 ‘문화 중개인’이란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말의 행간에 놓인 문화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 말입니다.
여기서 ‘문화’란 ‘몽족 문화’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놀랍게도 의료 역시 하나의 문화임을, 다른 문화 못지않게 전통이나 추측이나 터부에 얽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리 부부를 만나는 동안, 저는 이 이야기가 20년 뒤에 미국의 많은 의과대학에서 교재로 쓰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리아의 부모는 리아가 커서 ‘치 넹’, 즉 몽족 샤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샤먼이란 치유자이자 스승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리아는 ‘정말’ 샤먼이 되었습니다. 문화 간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수십만 독자를 가르치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그 가르침을 전해주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고요.
그리고 여러분이(아마도 리아가 사는 곳으로부터 8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리아 가족의 언어도 어쩌면 제가 쓰는 언어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가) 리아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다면, 여러분과 저와 이 책의 번역자는, 문화 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게 가능함을 입증하려는 작은 시도에 동참하여 성공한 협력자일 것입니다.
앤 패디먼
만일 리아 리Lia Lee가 가족·친지들의 고향인 라오스 북서부의 고지대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녀의 엄마 푸아 양Foua Yang은 남편 나오 카오 리Nao Kao Lee가 손수 지은 초가집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그녀를 출산했을 것이다. 초가집의 바닥은 흙이지만 깨끗했다. 먼지가 일지 않도록 푸아가 바닥에 수시로 물을 뿌리고 빗자루로 쓸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만든 대나무 쓰레받기에다 아직 밖에서 용변을 못 보는 어린아이들의 똥을 담아 숲에다 버리곤 했다. 푸아가 유난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갓난 아기를 내버려둬 바닥 흙이 묻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푸아는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전부 자기 손으로 받아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방법은 다리 사이로 나오기 시작하는 아기의 머리를 우선 손으로 빼낸 다음 나머지 부분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곁에서 출산을 도와주는 사람은 따로 없었다. 푸아가 분만 중에 목이 탈 때, 나오 카오가 뜨거운 물을 갖다주긴 했으나 남편이라도 아내의 몸을 봐선 안 되었다.
푸아는 신음을 하거나 비명을 지르면 출산에 방해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따금 조상들께 기도를 할 때 말고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밤에 아기를 낳을 때도 너무 조용해서 얼마 안 떨어진 돗자리에서 자던 다른 아이들은 동생이 태어나 우는 소리에 깨곤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나오 카오는 탯줄을 뜨겁게 달군 가위로 자르고 끈으로 묶었다. 그러면 푸아는 진통 초기 물지게를 지고 개울에 가서 직접 길어다두었던 물로 아기를 씻겼다.
푸아는 쉽게 아기를 갖고 쉽게 낳았지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몽Hmong족이 흔히 쓰는 다양한 요법에 의지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몽족 부부는 ‘치 넹txiv neeb’ 이라는 샤먼무당을 부른다.그러면 치 넹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들어 산모에게 도움을 줄 귀신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열두 개의 산 너머로 날아가 용들이 사는 바다를 건너 (음식이나 돈으로 달래다가 필요하면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 환자의 건강을 관장하는 영혼신령들과 담판을 짓는다. 치 넹은 부부에게 개나 고양이, 또는 닭이나 양을 바치게 하여 불임을 치유하기도 한다. 짐승의 목을 자르고 나서 문설주와 부부의 침상을 밧줄로 묶어 이어놓으면, ‘다dab’라는 악령에게 붙들린 아기의 혼이 자유롭게 이승으로 올 수 있게 된다.
애초부터 불임을 피하도록 조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임신할 나이가 된 몽족 여인은 절대 동굴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살과 피를 먹기 좋아하는 더 고약한 ‘다’가 동굴 안에 살고 있다가 여인을 겁탈해 아이 못 낳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몽족 여인은 임신을 하면 원하는 음식을 먹어야 아기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산모가 생강이 너무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하나 더 달린 아기가 나올 수 있고, 닭고기가 너무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면 귀 가까이 흉이 있는 아기가 나올 수 있다. 또 계란이 너무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면 머리에 혹이 있는 아기가 나올 수도 있다.
몽족 여인은 논이나 양귀비 밭에서 일하다가도 산통이 시작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먼저 자기 집으로 가고, 아니면 적어도 남편 사촌의 집에라도 가야 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데서 아기를 낳다간 ‘다’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만 과정이 너무 길어지거나 힘들어지면 열쇠를 넣고 끓인 물을 마셔서 산도産道를 열어주었다. 가족들이 방 근처에 모여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집안 어른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 해서 문제가 생겼다면, 마음이 상한 어른의 손가락 끝을 씻어주며 지성으로 빌어서 “용서하마”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출산 후 산모와 아기가 화덕 옆에 함께 누워 있는 동안, 남편은 바닥을 60센티미터 깊이 정도로 파서 태반을 묻는다. 딸인 경우에는 부모의 침상 밑에 묻었고, 아들인 경우엔 더 중요한 자리인 집 중심에 있는 나무 기둥 밑에 묻었다. 그 자리는 집의 지붕을 떠받치고 가족들을 굽어살피는 가정의 수호신이 사는 곳이다.
태반은 태아가 배 속에 있을 때 얼굴과 맞닿는 부드러운 부분이 위로 향하도록 묻어야 했다. 반대로 묻으면 아기가 자주 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 얼굴에 뾰루지가 많이 돋으면 묻어둔 태반에 개미들이 침입했다는 뜻이므로 그 자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개미를 없애주어야 했다.
몽 언어로 태반을 가리키는 말은 ‘저고리’라는 뜻이다. 몽족에게 저고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입는 옷이자 가장 좋은 옷으로 여겨졌다. 몽족이 죽으면 그 혼은 자기가 살아온 곳을 되짚어 올라가 저고리인 태반이 묻힌 곳까지 가서 그것을 입어야 한다. 태어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야만 혼이 길을 떠날 수 있다. 흉악한 ‘다’들과 거대하고 독살스러운 애벌레들을 지나, 사람을 잡아먹는 바위들과 넓디넓은 바다를 건너 하늘까지 가야 하는 위험한 여행이다. 혼은 거기까지 가서 조상들과 재결합을 해야 언젠가 다시 아기의 혼으로 세상에 올 수 있다. 죽은 사람의 혼이 자기 저고리를 찾지 못하면, 그 혼은 영원히 벌거벗은 외톨이로 이승을 떠돌게 된다.
리 부부(나오 카오 리와 푸아 양)는 1975년 라오스가 공산 세력에 완전히 넘어가자 살던 땅을 떠나온 15만 몽족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예전에 살던 집이 아직 남아 있는지, 나오 카오가 흙바닥에 묻은 남아 태반 다섯 개와 여아 태반 일곱 개가 아직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태반들 중 절반은 이미 마지막 용도로 쓰였으리라 믿고 있다. 아들 넷과 딸 둘이 미국으로 오기 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죽었기 때문이다. 리 부부는 남은 가족들 대부분의 혼이 언젠가는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국에서 산 17년 중 15년을 지낸 캘리포니아 머세드Merced에서부터 이전에 살던 오리건 주 포틀랜드, 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처음 내린 하와이 호놀룰루, 태국의 두 난민캠프를 거쳐 라오스의 고향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리 부부의 열세 번째 아이 마이Mai는 태국의 난민캠프에서 태어났고, 태반은 그곳 오두막 바닥에 묻혔다. 열네 번째 아이인 리아는 머세드 커뮤니티 의료센터Merced Community Medical Center에서 태어났다. 줄여서 흔히들 MCMC라 부르는 이 병원은 몽족이 많이 정착한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의 농촌 지역을 담당하는 현대식 공립병원이다. 리아의 태반은 여기서 소각되었다. 몽족 여인들 중에는 의사에게 아기의 태반을 집에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의사들은 마지못해 태반을 비닐봉투나 병원 카페테리아의 테이크아웃 포장에 담아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거절했다. 산모가 태반을 먹을 것이라 짐작하거나, 발상 자체가 역겹다고 생각하거나, B형 간염의 감염을(미국에 온 몽족 난민들의 15퍼센트가 보균자라고 한다) 우려했기 때문이다. 푸아는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데다 주변에 몽족 언어를 아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리 부부의 아파트는 나무 바닥 위에 빈틈없이 카펫이 깔린 집이었으니 태반을 묻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리아가 태어난 1982년 7월 19일 저녁 7시 9분, 푸아는 철제 분만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엔 멸균 천이 덮여 있고, 생식기 주변엔 갈색 베타딘 용액이 칠해져 있었으며, 아주 밝은 램프가 회음부를 내리비추고 있었다. 분만실에 가족은 없었다. 분만 담당인 가정의학 전공의레지던트 개리 튜슨은 차트에 해산을 촉진하기 위해 30센티미터 길이의 전용 바늘로 양수막을 파열했다고 기록했다. 아울러 마취는 하지 않았고, 질 입구를 넓혀주는 회음부 절개를 할 필요가 없었으며, 출산 직후 자궁 수축 촉진을 위해 피토신 주사를 놓았다는 기록도 남겼다. 의사는 또 리아가 체중 3.8킬로그램인 ‘건강한 산아’이며, ‘회태 기간에 알맞은’(푸아는 산부인과를 다니지 않았고 자신의 임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몰랐으며, 알았다 해도 의사에게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니 이는 관찰에만 의존한 추정이었다) 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기록했다. 푸아는 자신의 아이들 중에 리아가 제일 크게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른 열세 아기들은 무게를 달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리아의 아프가 점수Apgar score는 좋았다. 출생 1분 뒤에는 10점 만점에 7점이었고, 4분 뒤에는 9점이었다. 6분 뒤 피부 빛깔은 ‘분홍빛’이고, 근육 운동은 ‘크게 울음’이라 할 정도로 활발했다. 리아는 잠시 푸아에게 보여진 다음, 곧장 철과 플렉시 글라스로 만들어진 보온기에 놓였다. 그리고 간호사는 리아의 손목에다 신원 확인용 플라스틱 밴드를 매고, 신생아 신원 확인 서류에 발 도장을 찍었다. 그뒤 리아는 중앙 신생아실로 옮겨져 출혈성 질환 예방을 위해 한쪽 허벅지에 비타민 K 주사를 맞고, 비뇨기에 의한 임균 감염을 막기 위해 양쪽 눈에 질산은 용액을 두 방울씩 적시는 처치를 받은 다음 항균비누로 목욕을 했다.
리아의 분만실 기록에 적힌 푸아의 출생일은 1944년 10월 6일이었다. 사실 푸아는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그뒤 몇 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MCMC의 의사들에게 생년월일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대답하곤 했는데 1942년 10월 6일생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최근에는 1926년 10월 6일생이라고도 말했다. 1926년생이라는 푸아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접수계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푸아가 리아를 낳을 때의 나이가 55세라는 뜻인데도 말이다. 단, 푸아는 자신이 10월생이라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부모님한테서 아편 밭을 두 번째로 김매고, 볏단을 거두어 쌓아두던 철에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1980년 미국에 입국할 때부터 써야 했던 숱한 서류 양식에 공란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많은 미국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리 부부는 생년은 물론 생일도 지어내야 했다. 대부분의 몽족 사람들은 미국인의 이러한 특징에 익숙해져 나름대로 적응했다. 나오 카오 리의 사촌은 이민국 관리들에게 자녀 아홉의 생일이 9년 연속으로 전부 7월 15일이라 했고, 영주권 서류에 그대로 기재되었다.
리아 리가 생후 사흘째 되던 날 MCMC에서 나올 때, 푸아는 다음과 같은 서류에 서명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본인은 퇴원 절차 중 본인의 산아를 살펴보고 본인의 아기인지 확인하였음을 보증합니다. 아기의 손목과 제 손목에 묶어둔 신원 확인 밴드를 살펴보았고, 기재된 두 번호가 5043으로 일치하며 그 내용이 정확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푸아는 아라비아 숫자를 읽을 줄 모르며 배운 적도 없기 때문에 그녀가 서류의 내용대로 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서명하라는 요구를 워낙 자주 받았기에, 자신의 이름 푸아 양의 일곱 개 대문자는 알고 있었다. (양 씨와 리 씨는 몽족의 성씨 중 가장 수가 많은 편에 속한다. 다른 큰 성씨로는 차, 쳉, 항, 허, 구, 로, 무아, 타오, 부, 숑, 방이 있다. 라오스에서는 성姓을 이름 앞에 쓰지만 미국에 사는 몽족은 대부분 미국식으로 성을 뒤에 쓴다. 자녀는 아버지 성씨를 따르지만 여자는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 성씨를 유지하는 게 전통이다. 그리고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기시된다.) 푸아의 서명은 MCMC 전공의들의 서명보다 알아보기 쉽다. 특히 24시간 근무가 끝날 무렵의 전공의들 서명은 마치 뇌파도 腦波圖를 닮아가는 경향이 있다. 단, 푸아의 서명은 적을 때마다 매번 달라 보였다. 이번 서명은 한 단어로 이어 써 FOUAYANG 이었다. FOUA의 A는 왼쪽으로 YANG의 A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Y는 X 같았으며, N은 아이들 그림의 파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병원에서 아기를 낳은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병원의 방식을 크게 탓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성격이 본래 남을 잘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침착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구체적으론 MCMC에, 전체적으론 미국 의학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리아가 병원에 자주 가게 되면서부터였다. 리아를 출산할 때 푸아는 의사가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간호사들이 리아를 항균비누로 씻기는 게 라오스의 개울물로 씻기는 것만큼 깨끗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준 데에 감동했다. 딱 한 가지 큰 불만이 있다면 병원의 음식에 대해서 뿐이었다. 그녀는 출산 직후에 얼음물을 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많은 몽족 사람들은 산후조리 기간에 찬 음식을 먹으면 자궁 속 피가 잘 통해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굳어버리며, 여성이 이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 피부 가려움증이나 설사병을 앓을 수 있다고 믿는다. 푸아는 뜨겁고 검은 물로 기억되는 것만 몇 잔 받아 마셨는데, 그것은 차도 고기 국물도 아니었다. 푸아는 그게 전에 본 적이 있는 커피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했지만 무엇인지 몰랐다. 이 검은 물이 병원에서 나온 음식 가운데 그녀가 먹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오 카오는 몽족 여인들이 산후 30일 동안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을 매일같이 요리해 날랐다. 그것은 쌀밥에다 산후에 꼭 먹어야 하는 다섯 가지 약초(리 부부는 이때 사용할 목적으로 아파트 주차장 주변에다 직접 길렀다)를 넣고 끓인 닭국이었다. 이 식단은 MCMC의 산부인과 병동 의사들에겐 익숙한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몽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꽤 정확한 척도였다. 산부인과 의사인 라켈 아리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몽족 남자들은 언제나 은그릇에다 냄새가 끝내주는 닭 스프 같은 걸 담아 들고 병원으로 오곤 했지요.”
역시 산부인과 의사인 로버트 스몰은 조금 다르게 말했다.
“그들은 항상 죽은 지 일주일은 된 것 같은 닭 냄새가 코를 찌르는 국물을 가져오더군요.”
푸아는 남편이 가져온 음식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았다. 잘못해서 밥알을 닭국에 빠뜨려선 안 된다는 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럴 경우 갓난아기의 코와 볼에 몽 언어로 ‘쌀’과 같은 말인 하얀 뾰루지가 날 수 있었다.
머세드에 사는 어떤 몽족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미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거기엔 흔한 이름 말고도 케네디, 닉슨, 파자마, 기타, 메인(머세드의 메인스트리트에서 딴) 같은 것이 있었고, 간호사가 조언을 해주지 않으면 ‘베이비 보이남아’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어떤 몽족 여인이 자기 아들의 병원 서류에 그렇게 적힌 것을 보고 의사가 아기 이름을 지어줬다고 생각한 경우였다. 리 부부는 딸에게 몽족 이름인 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리아의 이름은 혼을 부르는 의식인 ‘후 플리hu plig’에서 정식으로 받은 것이었다. 라오스에선 이 의식을 언제나 생후 사흘째에 열었다. 이 의식을 거행하기 전까지 아기는 한 식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기가 사흘이 차기 전에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이는 영아 사망률이 50퍼센트나 되는 사회에서 출산 도중이나 직후에 아기를 잃기 쉬운 엄마에게 아기에 대한 애착을 덜 하게 하려는 문화적인 배려였을 것이다. 미국에선 그보다 늦게 의식을 거행하곤 했는데 아기가 출생 후 보통 사흘 동안 병원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리 가족은 리아의 혼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는 데 필요한 자신들의 생활보호수당 수표와 친척들이 선물로 주는 수표를 모으느라 한 달이 걸렸다.
몽족 사람들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병이 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음식을 잘못 먹어서, 오염된 물을 마셔서, 날씨가 바뀌어서, 성교 중에 완전히 사정을 못해서, 조상에게 제사를 제대로 못 올려서, 조상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저주를 받아서, 회오리바람에 맞아서, 악령이 몸에다 돌을 심어서, ‘다’한테 피를 빨려서, ‘다’가 자는 사람 가슴 위에 앉아서, 용이 사는 못에서 빨래를 해서, 보름달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호랑이 닮은 바위에 오줌을 눠서, 집의 수호신 있는 자리에 오줌을 누거나 발길질을 해서, 머리에 새똥이 떨어져서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꼽는 병의 가장 큰 원인은 혼을 잃어버려서다. 몽족은 사람에게 혼이 정확히 몇 개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하나부터 서른둘까지 추정이 다양한데 리 부부의 경우 하나만 있다고 믿는다) 혼이 몇이건 건강과 행복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생명의 혼을 잃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생명의 혼은 화나 슬픔, 두려움, 호기심, 방랑벽 때문에 몸을 떠나버릴 수 있다. 특히 신생아의 생명의 혼은 떠나버리기 쉬운데, 이는 아기가 워낙 작고 약할 뿐더러 그 혼이, 막 떠나온 보이지 않는 자들의 영역과 산 자들의 영역 사이에 불안정하게 있기 때문이다. 아기의 혼은 밝은 빛깔이나 부드러운 소리나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떠나버리기 쉽다. 아기가 슬프거나 외롭거나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떠나버릴 수 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도 겁이 나서 떠나버릴 수 있다. 그리고 ‘다’가 그 혼을 훔쳐 달아날 수도 있다. 몽족들은 아기가 예쁘다는 말을 크게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다’가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몽족 아기들은 흔히 정교한 수가 놓인 모자(푸아도 리아에게 여러 개를 만들어주었다)를 쓰는데, 그래야 탐욕스런 ‘다’가 높은 데서 봤을 때 아기를 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아기들은 또 ‘응야nyias’라는 포대기(역시 푸아는 리아에게 여러 개를 만들어주었다)에 싸여 엄마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이 포대기엔 혼을 가둔다는 의미로 울타리를 상징하는 돼지우리 같은 것이 수놓아져 있다. 비슷한 의미로 혼을 붙들어 매는 자물쇠 달린 은 목걸이를 걸기도 한다. 아기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갈 때면, 부모는 돌아오기 전에 뒤에 남은 혼은 없나 해서 큰 소리로 혼을 부른다. 머세드에서는 몽족이 공원에 소풍을 나왔다 돌아가기 전에 아이의 혼을 부르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애초에 혼을 부르는 의식을 제대로 했을 때만 통하는 얘기다.
리아의 후 플리는 아파트 거실에서 열렸다. 손님이 너무 많아 (모두 몽족이며 대부분이 리 씨나 양 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몸을 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푸아와 나오 카오는 건강하고 예쁜 딸을 얻은 자신들을 축하해주러 많은 사람들이 와준 게 자랑스러웠다. 그날 아침 나오 카오는 조상 한 분의 혼을 모시기 위해 돼지를 잡았다. 배가 고팠을 조상의 혼은 아마도 음식을 차려준 걸 고맙게 생각할 것이며, 곧 리아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날 터였다. 하객들이 오자, 양 씨 집안의 어른 한 명이 아파트 현관문에서 이스트 12번가 쪽을 향해 서서 리아의 혼을 반기는 소리를 읊었다. 그의 옆에는 살아 있는 닭 두 마리가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이윽고 닭 두 마리를 잡아 털을 뽑고 창자를 빼내 살짝 끓인 다음 솥에서 건졌다. 닭의 머리뼈가 맑은 빛깔인지, 혀가 위로 꼬부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리아의 몸에 혼이 자리를 잘 잡았으며 이름도 잘 지어졌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점을 쳐 보고 이상이 없으면 닭들을 다시 솥에 넣었다.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면 혼을 부르는 사람이 다른 이름을 선택하도록 내놓았을 것이다.
나중에 하객들은 이 닭과 돼지고기를 먹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혼을 부르는 사람은 하얀 실 꾸러미로 리아의 손을 쓸며 “병 지나다니는 길을 쓰네”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면 리아의 부모와 방에 있는 연장자들이 실을 한 가닥씩 리아의 손목에 묶었다. 아기의 혼을 몸에 단단히 붙들어두기 위해서였다. 푸아와 나오 카오는 딸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른들은 리아를 축복하면서 아프지 않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서문,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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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앤 패디먼 Anne Fadiman
<아메리칸 스칼러>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자신이 쓴 칼럼으로 두 번 전미 잡지 대상을 수상하였는데, 보도 부문과 에세이 부문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다. 2003년에 그해 가장 뛰어난 에세이를 엄선하여 출간하는 『전미 최우수 수필집』에 수록되었다. 생애 첫 작품인 『리아의 나라』로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고, 각종 매체에서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책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언론을 휩쓸었다. 그 외 작품으로 『서재 결혼 시키기』와 『세렌디피티 수집광』이 있다. 현재 예일대학교에서 명예 거주 작가로 문필 활동을 하면서 겸임 교수로서 논픽션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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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한중
전문번역가. 지속가능한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과 생태, 환경과 관련한 책을 주로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울지 않는 늑대』, 『인간 없는 세상』, 『핸드메이드 라이프』, 『너무 더운 지구』, 『지렁이』,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나무와 숲의 연대기』, 『글쓰기 생각쓰기』, 『안 뜨려는 배』, 『작은 경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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