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넬라 메도우즈의 메시지
아무 생각 없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메도우meadow’라는 단어에 눈길이 멈추었다. 이름 없는 잡초와 초목이 꽃을 피우는 강가의 낮은 땅, 풀이 무성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 하나이다. 그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기사는 미국의 여성 인구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즈Donella Meadows의 사망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1972년에 로마 클럽이 출판한 『성장의 한계:인류의 위기에 대한 리포트』의 주요 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순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초원에 쓸쓸함이 감도는 것 같았다.
『성장의 한계』는 그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경제성장 노선을 계속 추진해 가면 인구증가, 자원고갈, 환경오염에 의한 파국이 불 보듯 뻔하므로, 이제 성장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지의 연구 보고서이다.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1973년)와 함께 환경문제와 관련지어 경제를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보려는 움직임을 이끌어낸 획기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그후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성장 일변도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무한성장 신화를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다. 물론 우리는 환경위기라는 말을 날마다 듣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시시각각 변하는 경기의 움직임에 따라 울고 웃으며, GDP와 경제지표가 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이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성장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환경을 운운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 “지구의 환경을 지키자” 또는 “환경 친화적으로”라고 말한다 해서, 환경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고 믿을 수는 없다. 단지 기업의 좋은 이미지 만들기의 일환일 수도 있고, 환경문제 극복 역시 무한성장을 위해서라는 성장논리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도넬라 메도우즈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는 그녀의 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망하기 전까지 약 20년에 걸쳐 ‘바라톤 그룹’이라는 과학자들의 모임을 주재하였다.
“해마다 9월이 되면 헝가리의 휴양지인 바라톤 호수 근처에서 40여 명이 모여 일주일간 자유로운 토론을 가졌다. 근간의 화제는 물과 에너지 그리고 시간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에게 각자 자기 나라의 돌 하나씩을 가져오도록 하여 그것을 테이블 한 곳에 모아두고 회의를 하였다.”
돌이라고 하니 타나카 쇼죠(1841~1913)가 떠오른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아시오 광산이 배출하는 독성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세상에 알리고 국회에 이에 대한 입법을 요구하는 등 평생을 광산과 수질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헌신했다. 그가 죽은 후 발견된 많지 않은 유품 중 하나가 바로 작은 자갈돌이었다. 또한 미나마타 병(중금속인 유기수은에 의한 공해병. 1950년대 초 일본 미나마타 만에서 주민들이 질소비료공장에서 배출된 유기수은에 오염된 어패류를 먹고 처음 발생함)을 앓던 사람들이 간절히 기원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미나마타 매립지의 돌들도 떠오른다.
과연 메도우즈는 어떤 생각을 돌에 담고 있었을까? 물, 에너지, 시간 같은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돌을 앞에 두는 것은 확실히 잘 어울렸을 것이다. 돌을 앞에 두고 게리 스나이더는 시를 읊었으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의 문화를 탐구하였다. 메도우즈는 참가자들과 함께 각자의 지역에서 가져온 돌들을 앞에 두고 지질학적 시간, 지구의 시간에 대해 생각을 몰입해 가면서 인류가 현재 직면한 물, 에너지, 시간이라고 하는 문제를 고민했을지 모른다.
도넬라 메도우즈에 대해 나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생태사상에 관한 기사를 다루는 영국 잡지 『리서전스 Resurgence』에 실린 그녀의 글을 즐겨 읽다가, 불과 몇 개월 전에야 그녀와 간접적인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꾸려가고 있던 ‘나무늘보클럽’(1999년 발족한 환경단체)의 영문 홈페이지에 그녀의 글을 싣기 위해 허락을 구하는 전자메일을 발송했었다. 그녀는 바로 답을 주었고 게재를 허락했다. 그것은 잡지의 한 장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에세이였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때때로 그것을 반복해서 읽어본다. 그리고 때로는 소리를 내서 읽기도 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그것은 이상한 힘으로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한다. 다시 한 번,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다.
좀 더 천천히 Not So Fast
도넬라 메도우즈
세계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환경위기, 지칠 줄 모르는 권력욕과 물욕, 윤리적 황폐, 마약의 만연, 범죄의 증가, 인종차별의 심화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위기와 질병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발생 규제를 위한 과세, 선거법 개정(어쩌면 개악이라고 해야 더 옳을지 모르겠지만), 교육개혁, 세제개혁, 멸종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기 위한 법 등, 규제의 강화나 완화 등을 통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수많은 처방전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멋진 생각들을 짜내고, 또 머리를 맞대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열렬한 환경운동가들이 세계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슬로잉 다운Slowing down’, 즉 속도를 늦추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계를 구하자”고 소리 높여 부르짖고 있는 것은 바로 환경운동입니다. 즉 어머니인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제 성장의 한계를 깨닫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자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다른 운동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벌이는 이 운동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야말로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항상 서두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진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아마 자동차로 가는 대신 걸어가거나, 비행기로 가는 대신 배를 타고 갈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들이면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다시 잘 분류해서 버리게 될 수도 있으며, 불도저로 땅의 모양을 완전히 바꾸어버리기 전에 지역사회 주민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물고기를 앞다투어 잡아먹는 식으로 종을 멸종의 벼랑으로 몰고 가기 전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야 새끼 물고기가 자라 다시 알을 낳게 되는지에 대한 연구를 진지하게 시작할 수도 있겠지요.
상상해볼까요, 천천히 걷고 있다고. 그러면 길가에 핀 꽃의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생활의 리듬을 좀 더 늦추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몸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정표에 빼곡이 적힌 해야 할 일들을 잠시 잊고 아이들과 노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패스트 푸드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넣는 대신 슬로 푸드, 즉 자기가 재배하고 수확한 것을 가지고 요리한 음식을 보기 좋게 그릇에 담아 여유 있게 먹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이런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면 “세계를 위험에서 구하자”라는 구호에서 말하는 그런 위험 따위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천천히 산다는 것은 최신 기술개발을 위해 쏟아붓는 막대한 에너지나 원료 등을 소비하지 않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을 절약해준다는 여러 가지 신제품을 사지 않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동안 시간을 절약해준다고 해서 집안에 사들여 놓은 최신 가전제품들이 절약해준 그 시간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는지를. 모든 것을 천천히 진행시켜나간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실패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말하는 것에 좀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게 되고, 서로 상처를 입히는 일도 줄어들겠지요. 더욱이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 ‘이제 이것 외에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라고 생각될 때조차도 좀 더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하고,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와 역효과가 있을지 다시 검토해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까지 보이는 활동가들의 열정이 평화를 위한 그들의 공헌을 오히려 퇴색시켜버렸다.” 이는 종교가이자 시인인 토머스 머튼이 한 말입니다. 확실히 광기어린 열정은 혁명가의 마음을 너그럽지 못하고 초조하게 하고, 안달하게 합니다. 결국 몸과 마음이 지치게 되고 내면의 평화는 깨집니다. 이는 일종의 폭력과도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한 인도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구로부터 물밀 듯 들어오는 상업광고가 인도 문화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광고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속도 때문이에요. 특히 빠른 속도로 감각을 격렬하고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텔레비전 상업광고는 인도 문화에서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명상이라는 전통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도 인도에 갔을 때 모든 일의 진행이 너무 느려서 안달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것은 모르지만 ‘시간은 생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서두르며 사는 것은 생명의 무모한 소모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해봅시다. 그러고 난 후에 조용하고 신중하게 다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것이 바로 세계를 위험으로부터 구하는 첫 번째 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아직 그 첫 걸음조차도 떼지 못하고 있어 곤혹스러운 심정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바로 세상의 속도에 휘말려 좀처럼 ‘천천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제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 역시 건강한 식생활을 하면서 조용히 유유자적하게 보내기 위해 휴가를 내기에는 너무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날도 있을 정도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생태 사상가인 에드워드 아비는 저와 같은 이러한 환경운동가들을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 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대지를 음미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다.”
좋은 충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너무 바빠서 그럴 때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지금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세계가 있으니까.” 하면서 우리는 그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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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쓰지 신이치 ?信一
‘오이와 게이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인류학자이며 환경운동가로 시민단체인 ‘나무늘보클럽’을 설립하였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16년간 살았으며, 코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2년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메이지가쿠잉대학(明治?院大?) 국제학부 교수로 있다. 일본어와 영어로 약 30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이 중 6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홈페이지 www.keibo.org (영어),
www.sloth.gr.jp/tsuji/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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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권희정
일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인류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앙대학교와 호주 시드니대학에서 일본어 강사를 지냈고, 현재 미혼모권익활동과 더불어 여성환경연대 살림꾼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여성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저서로 『우리 동거할까요』, 『카메라를 든 여전사』, 『두 번째 스무 살』(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80번의 데이트 세계 일주』가 있으며, 다수의 칼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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