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글리츠 보고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나아갈 길
세계 석학들의 격렬한 토론 과정
위원회는 2009년 1월 초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위원회의 연구 프로그램을 협의했다. 네 개의 연구 그룹을 구성했는데, 이것에 따라 연구 결과도 네 개의 주요 장으로 구성된 최종 보고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번 위기의 본질이 단지 금융 위기가 아니라 총체적 경제 위기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금융기관이 자본을 잘못 배분해 엄청난 사회적 부의 손실을 낳았다. 하지만 미국의 부동산 거품이 터지자 세계 각지에서는 실질 생산이 잠재적 생산에 미치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생산에서 실질적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중요한 난관 중 하나는 버블 붕괴가 낳은 여러 가지 파장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래서 첫 번째 연구 그룹은 피투시의 책임 아래 거시경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두 번째 그룹은 퍼사우드가 맡아 위기의 발생과 급속한 전파의 핵심인 규제의 부재에 대해 연구하기로 했다. 한편 위기를 해소하는 데는 국제기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제기구들 자체도 상당한 개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번째 그룹은 필요한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조모가 이 연구 그룹의 팀장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위원회는 더 근본적인 개혁에 관한 논의를 추동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은 즉각 완수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내용들이다. 그래서 네 번째 연구 그룹은 중장기적인 조치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그룹은 오캄포가 맡았다.
우리는 1월 뉴욕 회의에 이어 연구 그룹들과 전체 위원회 모임을 연이어 가졌다. 2월에는 쿠알라룸푸르와 뉴욕, 3월에는 베를린과 제네바, 5월에는 헤이그에서 모였다. 보고서 발표와 관련된 모임은 뉴욕에서 있었는데 3월에 기본 연구 결과 발표가 있었고, 6월에는 세계정상회의에 맞춰서 모임을 가졌다.
우리의 논의는 매우 생동적이고 격렬했지만, 토론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결론적으로 거의 모든 이슈에 걸쳐 놀랄 만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몇몇 경우 원칙과 목표에는 동의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에는 이견이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보고서가 관련 분야에서 논의를 확대시키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안들을 제시하고 각각의 논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광범위한 대표성이 만들어내는 차이
우리의 보고서를 읽고 나면, 전문가 패널의 장점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 분석의 기초가 정부 보고서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질 것이라 믿는다. 이번 위기에 대해 많은 토론들이 초과 유동성과 저금리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의 논의는 왜 미국의 연방준비이사회가 초과 유동성과 저금리 정책을 추가했는가에 방점을 찍고 있다. 여기에는 부시 행정부가 G20에서 논의하는 것을 꺼렸을 만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 불균형에 관한 염려는 넓게 퍼져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IMF와 미국 재무부가 지난번(1997∼1998년) 세계 금융 위기를 처리한 방식을 포함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들까지도 다루었다.
또한 우리는 세계 통화 체제 개혁처럼 주요 강대국들 일부가 불편해할 수도 있는 해결책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합의를 도출해내기 쉽지 않은 여러 정치적 타협의 적합성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를 펼쳤다.
명확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가령 G20보다) 폭넓은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고, 앞으로 우리가 도모해야 할 전 지구적 행정 체제governance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해준다고 믿는다.
이것과 관련해 네 가지 이슈를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G20이 개도국들에 대한 지원을 주도할 국제기구로 IMF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IMF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제 금융과 신용 회복 영역에서 중심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문제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IMF가 개도국을 지원하면서 쓴 구제 방식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이 개도국들의 목소리는 G20 회의에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는다. 일부 가난한 나라들은 외환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에게서 개별적인 도움을 받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IMF는 최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IMF는 오랫동안 위기와 위기의 급작스런 확산에 핵심적 원인이 된 탈규제와 자유화를 지지해왔기 때문에, 신뢰를 많이 잃었다.
문제는 또 있다. 외환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IMF에 투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이 나라들은 IMF가 부적절한 주장을 많이 펼쳐왔고,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으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정책들을 추진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IMF가 전형적으로 단기 부채를 통해 자금을 공급해왔다는 것도 문제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과다한 부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다시 똑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악의 위기 국면은 지나갔지만 세계 경제가 그렇게 빨리 왕성한 성장 궤도로 진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개도국들이 IMF에 도움을 청하기 싫어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과거 위기 때, IMF의 지원은 경기 순응적 조건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즉, 지출을 줄이고 이자율을 높이는 방식이었는데, 이것은 위기 때 선진 산업국에서 취하는 케인지언 정책들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IMF에 의존함으로써 효율적인 다자간 대응책을 약화시킬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IMF 내의 개혁이 (일부는 G20의 노력을 통해 가속화되고 있지만)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이번 위기 때는 IMF도 일부 분야에서 경기 역행적 정책을 지지했다. 때로는 자본을 통제하는 규제에 대해서도 지지를 표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국가의 재정 적자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IMF의 상무이사들이 출구전략을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거나, 경기의 회복력을 GDP의 변화만 가지고서 판단하면 안 되며, 실업률이 평상시 수준으로 감소되는지의 여부를 봐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배 체제 개혁 등 IMF의 내적 개혁이 심도 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어, 단기간에 신뢰를 회복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IMF에 투자되는 많은 자본 중 극히 일부분만 개도국으로 흘러갈 것이 뻔하다. 우리 위원회는 이런 한계에 주목했으며, 개도국에 대한 지원을 배분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무상원조 분담금 형태를 더 늘릴 것과 재원 배분을 담당할 새로운 기구를 창설할 것을 제시했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일부 개도국의 침체 강도가 지금보다는 덜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해외에 개설된 금융센터에 관한 것이다. 해외 금융센터는 조세 포탈과 조세 회피에 관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것 자체는 이번 위기와 큰 상관이 없지만, 세계 금융 체제와 관련해 오랫동안 우려를 일으켜온 원천이었음은 틀림없다.
우리의 논의에서 ‘피고’ 격인 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덕분에, 눈치 볼 필요 없이 비판적 의견이 쏟아져 나온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이었다. 위원회는 첫째 G20이 제안한 대응 조치가 요구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둘째 ‘협조적이지 않은’ 나라를 규정하는 일을 선진국들의 조직인 OECD에 위임하는 것은 부적절했으며, 셋째 G20 국가 중 일부에서는 투명성 부재의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하고, 넷째 조세 회피와 탈루뿐만 아니라, 마약과 연루된 자금세탁 문제, 부패한 독재자들이 강탈한 돈을 비밀 은행계좌에 은닉하는 문제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G20 국가 중 일부는 이런 자금이 발견되어도 이것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의 은행 비밀 유지 원칙을 꾸준히 비판해온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비판적 결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견해가 2009년 6월에 있었던 유엔 정상회의의 결과 보고서에 들어갔으며, 9월에 있었던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에도 반영되었다.
세 번째는 규제에 관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미국과 유럽 사이에 심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프랑스와 영국은 금융계 경영자들의 보너스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꺼려했다. 미국 내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금융계가 반대 로비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G20 내에 이런 상반된 의견이 존재하는 한 이 문제에 대해 강력한 대처 방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하고는 다르게, 전문가 그룹은 전혀 구애받지 않고 이 문제를 논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 참여한 경제학자들은 경영자들을 위한 금융계의 보상incentive 체계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기존의 체계는 근시안적 투자 행위와 과도한 위험 감수를 부추겼기 때문에 위기 발생은 예견 가능했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위원회는 대마불사大馬不死한 은행들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현했다. 은행들은 도박판에 뛰어들어 이길 경우 딴 돈(이윤)을 혼자 챙기면서, 판돈을 날리면 납세자들에게 책임지라고 한다. 이런 보상 제도는 사회적 왜곡을 양산했다. 하지만 초기 G20 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대형 은행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은 전 세계 통화 체제 개혁에 관한 위원회의 제안이다. 현행 체제가 세계적 차원에서 총수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빠른 회복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우리의 염려가 이제는 이 분야에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오늘날 대부분의 외환(준비통화)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신흥 시장이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 자산에 손실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세계 금융 체제가 오랫동안 한 나라의 통화에 의존하는 구조로 유지되어왔다는 사실은 매우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미국이 위기에 대응하면서 오히려 재정 적자가 커지고, 연방준비이사회의 회계 장부가 부풀어 오르자, 이제야 통화 체제와 관련된 문제들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주제가 논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통화 체제가 신흥국에만 불리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도 좋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역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의 무역 적자가 ― 이것은 상대국들의 달러 보유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 미국의 총수요를 약화시킨다. 미국은 이런 단점보다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이 쏠려 있다. 눈에 잘 띄는 단기적 장점만 생각하는 것이다. 즉, 대규모 적자를 메우려면 어떻게든 돈을 끌어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유리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들을 정리해보면, 경제학자들은 선진국과 신흥국을 막론하고 세계 통화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세계 불균형 문제를 다루는 데 핵심이라고 보는 반면, G20은 이 문제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이런 현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이념의 중요성
우리가 위원회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한 이유는 단지 각양각색의 관심사를 알려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광범위한 이념의 다양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이념은 중요하다. 특정한 이념 체계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위기의 원인이 된 탈규제와 여타의 정책들을 만들어냈다. 반대로 이것과 상이한 이념 체계는 위기와 싸우는 강력한 정책들을 제시해왔다. 이제 시장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말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금융시장 안에 있는 자유시장근본주의자들조차 위기가 터지자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시기에 정통 주류 경제학이 너무 극단적인 수준까지 유행했다. 이제 그 이론 체계는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세계 경제를 왕성한 회복 단계로 들어서게 만들고,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려면, 더 폭넓게 여러 견해들을 깊이 고려해봐야 한다. 상이한 관점들의 타당성을 평가하려면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념,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사이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금융시장이 탈규제를 주장하는 데는 사리사욕과 관련이 있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이런 목적에 이바지한다. 경제학이 사회과학으로서 인정받으려면, 그 전제의 타당성이 먼저 검증되어야 한다. 이번 위기는 기존에 널리 인정된 전제들에 대해 전반적인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금융 위기 이후의 상황과 앞으로의 의제
머리말 편집까지 끝내고 출판사로 보내는 데 6개월이라는 (연구를 시작한 지는 1년)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금융 공황의 지옥문 앞까지 갔다가 매우 급속도로 외형적인 회복을 보였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국제 공동체는 이런 성공을 자축할 만하다.
2003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가진 는 유엔이 개발 의제를 설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유엔은 이미 그것보다 3년 앞선 2000년에 새천년 개발 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설정하는 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금융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재정부나 경제부 장관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경제 전반에 관한 이슈들은 더욱 그러하다. G20 정상회의도 이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0년 1월에 세계 경제를 바라보았을 때, 여전히 몇 가지 근거 있는 우려가 남는다. 대부분 나라들의 금융 세력들은 주요한 규제 개혁과 제도 개혁에 관한 시도를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도덕적 해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세계 불균형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시장경제가 여전히 엄청난 변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금융시장은 위기가 발생하기 전 이런 위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오랫동안 개도국들은 환율과 이자율에 관련된 위험성을 모두 떠안아왔다. 이것과 관련해 과거 위기가 주는 교훈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각국 정부들이 부채를 늘리다 보면 시중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이에 따라 이자율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부 국가들은 위기를 겪는 동안 축적된 부채를 갚지 못하고, 위기의 강력한 ‘여진’이 또다시 덮쳐올 수도 있다.
국제사회가 위험의 분산과 수용을 위해 개선된 메커니즘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잘 인식하고 있지만(이 주제는 5장에서 논의된다), 실질적 진전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IMF는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는 몇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각국이 외환보유고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킬 수밖에 없는 현 체제의 한계를 개선해 자신들에 대한 의존성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환보유고 증대는 세계적 차원에서 총수요를 약화시키는 문제로 이어진다.) 문제는 신흥국들이 개별적으로 자국의 외환보유고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할 만큼 IMF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IMF가 뒤에 4장에서 제시한 것처럼 지배 체제를 진작 개선하고 장기적으로 신임을 얻을 만한 실적을 냈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IMF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세계 경제가 활력 있게 회복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세계 공동체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줄여야 하며, 빈곤을 타파해야 하는 등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여러 가지 난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자원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실업률은 10퍼센트를 넘어섰다. 상근 일자리를 원하는 미국인 여섯 명 중 한 명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중국이 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낭비적인 생활 방식을 흉내 내지 말아야 한다. 지구는 그런 생활 방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우리는 필요한 곳에 자금이 재활용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위원회에서 다룬 주요 주제 중 하나로 몇몇 위원들이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이슈와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이번 경제 위기를 개별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최근에 있던 홍수,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등 일련의 위기와의 연관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논의는 ‘출구’ 쪽으로 이동했다. 즉, 대규모 국가 부양정책과 비상 통화정책의 수단들을 줄이는 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이 여의찮아 보인다. 이번 위기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높은 부채 비율은 선진국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안길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베이비 붐 세대가 연로해짐에 따라, 앞으로의 국가 살림을 꾸리는 데 벌써부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사회보험을 삭감하면 이미 은행에 대한 구제 금융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사회 계약은 한층 더 약해질 것이다. 또한 인프라, 교육,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감소는 성장을 둔화시킬 것이다.
위원회는 단기적인 임무를 맡았을 뿐이다. 유엔총회 의장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위원회의 공식 일정은 종료된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직면한 위기와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금융 체제의 붕괴로 인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험하게 된 요즈음의 결과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위기 이후의 세계는 위기 전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이 보고서가 세계 경제가 왕성한 성장세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나 위기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예방할 수 있는 대책에 관한 논의로 국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더 민주적인 행정 체제를 갖춘 새로운 세계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산되길 바란다. 바로 이런 체제에서만이 더욱 안정되고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으며, 성장의 열매가 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을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2010년 1월
(머리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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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조지프 스티글리츠 (유엔총회 전문가 위원회 의장)
1943년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나 암허스트대학을 졸업하고 1967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예일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79년 미국경제학회가 2년에 한 번 40세 미만의 가장 뛰어난 기여를 한 경제학자에게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상을 수상했다. 프린스턴대학, 스탠퍼드대학, MIT의 교수를 거쳐 현재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 정보경제학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구는 시장이 언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정부의 선택적 개입이 어떻게 시장의 기능을 개선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2001년 간행된 『세계화와 그 불만들』은 35개 국어로 번역되어 100만부가 팔렸다. 그 외 지은 책으로 『이단의 경제학』,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시장으로 가는 길』, 『모두에게 공정함 무역』(공저), 『스티글리츠의 경제학』 등이 있다.
세계 통화와 금융 체제의 개혁을 위한 유엔총회 전문가 위원회
제63차(2008.09~2009.09) 유엔총회 의장 미겔 데스코토 브로크만이 자신의 수석 자문 위원이던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협의해 글로벌 위기에 대한 대응방안과 대안적 세계 금융 경제 체제를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기구다. 2008년 10월에 유엔총회 의장의 한시적 직속 기구로 설립된 이 기구는 21명의 위원회 구성원들과 함께 2009년 6월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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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형준
학부에서 토목학을 전공한 뒤, 영국 서섹스 대학에서 사회정치사상 석사학위를 받았고, 캐나다 요크대학에서 국제정치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진보금융네트워크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불경한 삼위일체: IMF, 세계은행, WTO는 세계를 어떻게 망쳐왔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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