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체성은 영웅적 조상에 관한 신화의 연속이다.
― 제임스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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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악을 망각하고 왜곡하고 걷어내야 한다는 견해가 자주 나오는 데 놀라게 된다. 우리는 대니얼 웹스터가 주정뱅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고, 훌륭한 변호사였다는 사실만 기억해야 한다. 조지 워싱턴이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은 잊어야 하며… 명예롭고 고무적인 것만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철학의 난점은 역사가 좋은 자극과 본보기로서의 가치를 잃는다는 데 있다. 그런 역사는 완벽한 인간과 고결한 국가를 묘사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W. E. B. 뒤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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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인물을 우상화하면 그 인물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좋지 않다. … 우리도 그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찰스 V. 윌리
이 장에서 다룰 영웅화는 인간을 영웅으로 타락시키는 과정이다. (일종의 화석화나 다름없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교육 매체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개인을 갈등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진실성과 인간적 관심도 가지지 않은 완벽한 인물로 탈바꿈시킨다.
미국사 교과서에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에 관한 짧은 전기들이 많이 나온다. 『희망의 나라』는 모든 대통령의 전기를 상자글로 꾸몄고, 『자유의 도전 The Challenge of Freedom』은 ‘이건 몰랐지?’라는 장치를 만들어 미국 최초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여성인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이나 『태양 속의 건포도 A Raisin in the Sun』의 작가인 로레인 핸스버리Lorraine Hansberry를 다루었다. 그런 전기 자체는 나쁜 발상이 아니다. 인물의 사례를 통해 가르침을 주고, 사람들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 블랙웰과 핸즈버리 같은 인물에 특별한 공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면 교과서의 등장인물은 백인 남성 정치 지도자들로만 단조롭게 이어질 것이다. 짧은 전기는 우리가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보다 교과서에서 다루기에 더 합당한 인물인가? 라이트는 차고를 발명하고 가정의 건축 공간을 변혁시켰고, 아서는 공무원임명법에 서명했다. 누가 오늘날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 블랙웰과 조지 H. W. 부시 중 누구의 삶이 더 극적일까? (부시는 태어나면서부터 상원의원 자리를 꿰어 찼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인물의 업적 자체가 아니라 인물이 그 업적을 이루기 위해 걸어온 길에 의거해 결정해야 한다.
교과서의 영웅전에 오를 명단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논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어떤 인물이 선정되었는지가 아니라 우리 역사 교과서에 들어올 때 그 인물이 어땠는지에 관심이 있다. 이 영웅화의 사례로 20세기 미국인 두 사람을 살펴보자.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과 헬렌 켈러Helen Keller다. 윌슨은 반론의 여지없이 중요한 대통령이었고, 여러 방면에 걸쳐 교과서에 등장한다. 그 반면 켈러는 법을 제정하거나, 과학적 업적을 남기거나,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은 ‘하찮은 인물’이다. 내가 조사한 역사 교과서들 중 그녀의 사진을 실은 것은 단 한 종밖에 없다. 심지어 그녀가 나오지 않은 교과서도 많다. 하지만 교사들은 켈러를 즐겨 이야기하며, 학생들에게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거나 그녀의 전기를 본보기로 추천한다. 이런 관심은 학생들이 그 두 역사적 인물에게 공감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학생들은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한다. 영웅화가 켈러와 윌슨의 삶을 왜곡한 탓에 그들의 진면모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교사들은 헬렌 켈러를 치켜세운다. 맹인에다 농아인 소녀가 신체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는 전 세계 수많은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5학년생이면 누구나 앤 설리번Anne Sullivan이 펌프로 물을 퍼서 어린 헬렌의 손에 부어준 일을 잘 알고 있다. 켈러의 삶은 몇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부 판에 박은 이야기다. 맥그로힐 출판사가 제작한 교육용 영화는 이런 말로 끝난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이 세계에 준 선물은 우리 주변에 늘 기적이 있음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의 의미를 가르쳐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도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방법은 그 사람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역사가와 영화 제작자들은 헬렌 켈러의 삶에서 고작 그 진부한 원칙만 끌어낼 뿐 그녀의 실제 전기를 무시했으며, 그녀가 우리에게 전하는 구체적인 교훈을 누락했다. 말을 배우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켈러는 오히려 역사에 의해 말을 못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그녀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지난 20여 년간 나는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게 헬렌 켈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물었다. 그녀가 맹인에다 농아였다는 사실은 다들 안다. 앤 설리번이라는 교사와 친했고 그에게서 글과 말을 배웠다는 사실도 대부분 기억한다. 켈러의 유년기에 관해 제법 상세하게 아는 학생도 꽤 있다. 그녀가 앨라배마에서 살았고 설리번을 만나기 전까지 거칠고 예의 없는 아이였다는 것도 안다. 켈러가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도 약간 있다. 그러나 그다음의 일, 켈러의 성인 시절에 관해서는 아는 학생이 없다. 겨우 몇 명이 켈러가 ‘유명인’이나 ‘박애주의자’가 되어 맹인과 농아를 위해 활동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혹시 책을 쓰고 강연을 하지 않았나요?” 추측만 무성할 따름이다. 1880년에 태어난 켈러는 1904년에 래드클리프를 졸업했고, 1968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성인 생활에 해당하는 64년을 무시해버리거나, 단지 ‘박애주의자’라는 말 한마디로 축약해버린다면 누락에 의한 거짓말이나 다름없다.
헬렌 켈러는 사실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1909년 매사추세츠 사회당에 가입했다. 래드클리프를 졸업하기 전에도 이미 그녀는 강렬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사회주의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성향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공산주의 신생국을 찬양했다. “동방에 새 별이 떴다! 고통과 고뇌 속에서 낡은 질서가 새 질서를 낳았다! 동방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라! 가자, 동지들아! 러시아의 캠프파이어로 모두 함께 가자! 새벽이 올 때까지 전진하자!” 켈러는 사무실 책상에 붉은 깃발을 내걸었다. 점차 그녀는 사회당의 좌익으로 활동했고, 우드로 윌슨이 탄압한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에 가입했다.
켈러의 사회주의 성향은 장애인으로 자란 자신의 경험과 장애인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맹인들이 배우기 쉽도록 알파벳을 단순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내 맹인만을 상대하는 일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의 치료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조사 결과 그녀는 맹인이 무작위로 생기는 게 아니라 하층계급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난한 남성은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맹인이 될 수 있었다. 가난한 여성은 매춘부가 되어 매독성 맹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이리하여 켈러는 사회계급이 삶의 기회를 지배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시력까지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켈러의 연구는 단지 책에서 배운 게 아니었다.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과 열악한 빈민가를 가보았다. 비록 볼 수는 없었으나 냄새는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무렵, 켈러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는 악명도 떨치게 되었다. 그녀가 사회주의로 전향한 것은 당시 여론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그녀의 용기와 지성을 찬양했던 신문들은 이제 그녀의 장애를 부각시키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녀가 독자적인 감각 정보를 얻지 못하므로 그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브루클린 이글 Brooklyn Eagle>의 편집자는 심지어 “켈러의 잘못은 신체 발달의 명백한 한계에서 비롯된다”라고 썼다.
켈러는 그 편집자를 만났던 일을 기억했다. “예전에 그가 내게 격렬한 찬사를 보냈을 때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니까 그는 나와 대중에게 내가 맹인이고 농아이므로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뒤 나는 계속 지능이 떨어져야 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리석은 <브루클린 이글>이 바로 사회적 맹인이고 농아다! 그들이 수호하려 하는 편협한 제도야말로 우리가 예방하려 애쓰는 신체적 맹인과 농아를 양산하는 원인이다.”
이후 켈러는 미국맹인재단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녀는 자유 언론을 위해 싸우는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창설을 도왔다. 또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100달러를 보냈는데, 1920년대에 앨라배마 출신의 백인으로서는 급진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그녀가 돈과 함께 부친 편지는 그 단체의 기관지인 <크라이시스 The Crisis>에 실렸다.) 그녀는 사회당 대통령 후보인 유진 V. 데브스Eugene V. Debs를 지지했고 그의 선거 유세에 동참했다. 그밖에 여성운동, 정치, 경제에 관해 다양한 글도 썼다. 만년에 그녀는, 미국공산당 지도자로서 매카시 선풍에 휩쓸려 투옥 중이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Elizabeth Gurley Flynn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엘리자베스 플린, 생일 축하해요!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당신의 용감한 마음에 힘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헬렌 켈러의 주장에 꼭 동조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소련을 찬양한 일은 지금 보면 순진한 감이 있고, 어떤 사람은 당혹스러움과 배신감마저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급진주의자였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학교와 매체에서 누락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드로 윌슨에 관해 우리가 몰랐던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대학생들에게 윌슨 대통령에 관해 생각나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윌슨이 마지못해 미국을 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였고 전후 국제연맹을 창설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대체로 윌슨을 여성참정권과 같은 진보적 대의와 연관시킨다. 간혹 윌슨 행정부가 좌익 세력을 탄압한 파머 습격(Palmer raids, 1919~20년에 미첼 파머 검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좌익 세력 검거 작전: 옮긴이)을 언급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나 윌슨이 집행한 두 가지 반민주주의 정책을 말하거나 아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연방정부의 인종차별과 외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다.
윌슨이 재위할 때 미국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자주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했다. 군대를 보낸 일만 해도 1914년 멕시코, 1915년 아이티, 1916년 도미니카 공화국, 1916년 다시 멕시코(임기 말까지 아홉 차례나 더 보냈다), 1917년 쿠바, 1918년 파나마 등 여러 차례였다. 윌슨 행정부 시절 내내 니카라과에 군대가 상주했으며, 미국은 이 군대를 이용해 니카라과의 대통령을 결정하고 미국에 유리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17년 우드로 윌슨은 강대국의 사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러시아 내전의 ‘백군파’(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한 세력: 옮긴이)에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1918년 여름, 그는 소련을 해군으로 봉쇄하는 계획을 비준했으며, 무르만스크, 아르한겔스크, 블라디보스토크에 원정군을 보내 러시아 혁명을 타도하려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비호를 받고 일본군과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까지 진격한 미군은 체코와 러시아 백군파를 지원하고 옴스크에 반공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서쪽 멀리 볼가 강까지 세력을 넓혔던 러시아 백군파가 1919년 말에 붕괴하자, 미군은 결국 1920년 4월 1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후대의 미국인들 중 이 ‘러시아와의 알려지지 않은 전쟁’─로버트 매덕스Robert Maddox가 이 대실패를 다룬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처음에 수집했던 미국사 교과서 열두 종에서는 이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새 교과서 여섯 종 가운데는 두 종에 이 사실이 나온다. 예를 들어 대니얼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과 브룩스 메이서 켈리Brooks Mather Kelley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볼셰비키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 때 탄약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연합국이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를 침공할 때 5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또한 윌슨은 시베리아를 침공하는 연합군에 병력 1만 명을 보내 지원했다.” 미국 학생들이 이 구절을 통해 윌슨이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추론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러시아 교과서들은 그 사건을 다각도로 다룬다. 매덕스의 말을 들어보자. “간섭의 직접적인 효과는 유혈이 낭자한 내전을 연장하는 데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그렇잖아도 피폐해진 사회에 더욱 큰 손상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장기적인 복안이 있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 서구 열강이 기회만 닿으면 소련 정부를 타도하려 한다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간섭은 소련이 냉전시대 내내 미국에 불신을 품은 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붕괴할 때까지 그 침략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계속 주장했다.
윌슨의 라틴아메리카 침략은 러시아 공격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도 어느 정도 나와 있다. 교과서 저자들이 그 사건들을 어떻게 정당화하려 하는지 살펴보면 무척 흥미롭다. 그 침략을 올바로 설명하면 윌슨이나 미국을 도저히 우호적인 견지에서 볼 수가 없다. 윌슨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니카라과에 개입함으로써 결국 바티스타, 트루히요, 뒤발리에 부자, 소모사 가문에게 활동할 무대가 생겼으며, 지금까지도 그 유산을 남기고 있다. 1910년대에도 미국의 대외 침략은 미국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고 해외에서는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1920년대 중반, 윌슨의 후임자들은 라틴아메리카 정책을 바꾸었다. 역사 교과서의 저자들도 그것을 알고 윌슨 이후 한두 개 장에서 미국의 ‘선린 정책’을 찬양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무력을 포기하는 쿨리지Coolidge와 후버Hoover의 방침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에게로 연장되었다.
교과서는 윌슨의 라틴아메리카 정책을 선린과 반대되는 의미로 ‘악린(惡隣) 정책’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옛 교과서와 새 교과서 모두 어떻게든 영웅 윌슨을 구하려 애쓴다. 예를 들어 『자유의 도전』은 이렇게 호도한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우호를 증진하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반하장으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을 비난하는 교과서도 있다. 『미국의 행진』은 이렇게 말한다. “윌슨은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철회했다. 아이티가 정치 혼란에 빠지자 윌슨은 어쩔 수 없이 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약간 물러나 …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해병대를 파견했다.” 이 구절은 완벽한 날조다. 해군장관은 훗날 “윌슨의 명령으로 나는 아이티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윌슨이 마지못해 카리브 해 지역으로 병력을 파견했다고 말하는 문헌은 없다.
내가 검토한 교과서들은 전부 윌슨이 1914년 멕시코를 침략한 사실을 언급하지만, 윌슨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2006년 『미국의 행진』에 따르면, “호전적 세력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윌슨 대통령은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윌슨은 곧 멕시코에 병력을 파견했다. 심지어 의회의 동의도 얻지 않았다. 월터 카프Walter Karp는 윌슨이 억지로 파병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침략은 처음부터 윌슨의 생각이었고 의회와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 당시 멕시코는 내전 중이었으나 윌슨의 개입에 격분한 내전의 양측 지도부는 미군에게 떠나라고 요구했다. 미국과 세계 여론의 압력으로 결국 윌슨은 철병할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 저자들은 흔히 멕시코 파병을 설명할 때 교활한 방법을 쓴다. 윌슨의 철군 명령은 밝히면서 파병은 함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보를 조작하면 역사적 위인의 비영웅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위장할 수 있다.
어떤 교과서는 행위자를 삭제할 뿐 아니라 행위 자체도 누락한다. 윌슨의 아이티 점령을 아예 언급하지 않은 교과서도 절반이나 된다. 1915년 아이티를 침략한 미국 해병대는 아이티의 입법 기구를 윽박질러 미국이 지지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발탁하게 했다. 아이티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자, 미국은 아이티의 입법 기구를 해산해버렸다. 그뒤 미국은 국민투표를 위장해 아이티에 예전보다 덜 민주적인 헌법을 통과시켰다. 투표 결과는 9만 8,225표 대 768표로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피에로 글레이헤수스Piero Gleijesus는 이렇게 지적한다. “윌슨은 이 작은 나라들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가 실패한 게 아니다. 실은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도입하려 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헤게모니였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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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제임스 W. 로웬 James W. Loewen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버몬트대학에서 20여 년간 인종 관계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1997년부터는 미국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로 있다. 스미소니언협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미국 역사 교과서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그릇된 내용으로 가득한지 조사했고, 이를 토대로 저술한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Lies My Teacher Told Me』은 미국에서 10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도 왜곡 없는 진실한 미국 역사를 알리기 위한 강연, 연구, 집필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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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남경태
전문번역가. 1980년대에는 사회과학 고전들을 번역하는 데 주력했고, 1990년대부터는 인문학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들을 쓰거나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 『명화의 비밀』, 『비잔티움 연대기』,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다윈의 플롯』, 『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 『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개념어 사전』, 『역사―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종횡무진 한국사』, 『종횡무진 서양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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