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은 세상을 바꾸는가
늦깎이 신학생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어느 날 수도원 다락방에서 “오직 신앙에 의한 의로움”이라는 성경 구절에 벼락 맞아 면죄부(면벌부)를 구원의 보증 수표로 선전하는 가톨릭 천년 왕국에 분연히 도전했다.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지동설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2개의 주된 우주 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가 “헛된 야심과 단순한 무지”의 산물이라고 인정하며 종교 재판관 앞에서 비굴하게 병든 늙은 목숨을 구걸해야만 했다. 베를린 대학의 문학 청년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헤겔의 관념주의 철학 서적을 ‘거꾸로’――좌파적으로?――읽어 역사적 유물론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바꾼 결정적 순간의 중심에는 많은 경우 책이 자리 잡고 있다. 책과의 특별한 만남을 계기로 평범한 개인도 역사적 변혁을 주도하는 위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구텐베르크가 없었다면 종교 개혁, 과학 혁명, 혹은 프랑스 혁명이 있었을까?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비판한 루터의 소책자가 빠르게 인쇄·전파되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면 그는 일찍이 유사한 주장을 제기했다가 화형당한 보헤미아의 신학자 얀 후스Jan Hus(1373∼1415)와 같은 종말을 맞았을 것이다. 인쇄술의 발전 덕분에 고대부터 축적되어온 각종 과학 서적들을 한자리에 쌓아놓고 꼼꼼히 상호 대조, 비교, 수정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17세기는 ‘과학 혁명의 세기’라고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류 작가들이 제공하는 ‘불온한 서적’을 탐닉한 대중 독자가 없었다면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하기 위해 폭풍처럼 달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손으로 베껴 쓰기에서 인쇄술에 의한 책의 대량 생산과 보급으로의 전환이 인간과 지식, 인간과 사회, 앎과 삶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이고 급격하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더 이상 책 한 권을 필사하기 위해 15마리의 양, 염소, 혹은 송아지를 죽여 가죽을 얻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도원의 필사실에 갇혀 성서 주석 한 권을 제작하는 데 꼬박 10년을 바친 필경사의 고통스러운 작업――그가 양피지 여백에 남긴 ‘아! 포도주라도 한 잔 마셨으면!’이라는 푸념을 보라――은 이제 기계적인 작업으로 대체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재정 후원자인 요한 푸스트Johan Fust가 파리에 운반해 온 인쇄된 책 더미를 본 필사 길드 조합원들이 “전문가 의견으로 판단하면 이렇게 값비싼 책을 한 인간이 입수한 데는 틀림없이 악마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인쇄술이 몰고 온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1455년경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성경을 인쇄·출간하는 데 성공한 이래 이 놀라운 새 기술은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1465년에는 이탈리아에, 1470년에는 프랑스에, 1472년에는 스페인에, 1475년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각각 최초의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다소 뒤늦게 1553년에는 신대륙 최초로 멕시코시티에, 1638년에는 북아메리카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인쇄기가 도입되었다. 바야흐로 인쇄 혁명의 시대가 서구 전역에서 전개된 것이다.
근대 인쇄술의 출현은 본격적인 사상 검열 시대를 열었다는 역설적인 측면도 있다. 교황의 권위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복음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교황 피우스 4세는 1558년에 ‘금서 목록’을 작성해 공표했다. 1561년에는 성서 관련 도서 출판을 위한 바티칸 출판사가 설립되었고, 1564년에는 금서 목록을 기록한 책 첫 권이 출간되었다. 그 후 기존의 통념과 가치관을 거부하고 시대의 변천을 꿈꾸기를 권하는 많은 저자들이 이 ‘불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갈릴레이, 볼테르, 마르크스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갈릴레이의 경우 그가 종교 재판을 받은 지 200여 년이 지난 1835년에야 그의 『2개의 주된 우주 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가 금서 목록에서 해제되었고, 360여 년이 지난 1992년에야 비로소 교황청이 그의 완전 복권을 인정할 만큼, 자유로운 사상 표현에 대한 억압과 검열은 집요하고도 시대착오적이었다.
종교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은 세속 권력을 통해서도 모방되었다. 왕권신수설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서양의 절대 왕정은 기존의 정치 구조와 사회 질서 및 미풍양속을 의심하는 여하한 가설, 선동, 진리 탐구도 용납하지 않았다. 절대 왕정의 모델을 제공한 프랑스에서는 1642년에 공식적인 검열관 제도가 수립되어 왕, 교회, 도덕이라는 3대 권위에 도전하려는 저자들의 상상력을 옥죄었다. 처음에 4명이던 검열관 수는 1741년에는 79명, 1780년에는 144명으로 늘어났다. 1777년 이후에는 문학과 역사 분야 서적을 검열하는 인원이 전체 검열관의 50퍼센트에 육박했는데, 이것은 당국이 이 분야의 출판물을 ‘가장 위험한 주제’로 인식했음을 방증한다. 1659∼1789년에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 전체 죄수의 3분의 1이 출판 관련 범죄자였으며, 1750∼1789년에 복역한 360명의 출판 관련 범죄자들 중에서 저자가 40퍼센트를 차지했다. 인쇄물을 통한 체제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목의 가시처럼 통치 권력을 위협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젊은 시절에 두 차례나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바스티유 감옥의 ‘하숙생’으로서 맛없는 식사를 견뎌야만 했다.
그러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근대 서양의 정치적·사회적·사상적 진보를 추동한 원인이자 사회 변혁의 씨앗이었는가? 교황청과 절대 왕정 같은 권력의 우려처럼 책은 개인과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물건’이고 독서는 ‘불경한 행위’였는가? 이와 같은 두 상반된 견해와 평가 사이에서 책의 위상과 영향력 및 역사적 유산 등을 근대 서양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이 글의 주요 목적이다. 이를 위해 17∼18세기에 걸쳐 진행된 인쇄 혁명이 동반한 각종 근대적 변화들을 점검해보고 그 변화의 빛과 그림자를 관찰해보고자 한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독특한 독서 유형에 반영된 근대 서양의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책 읽기가 역사 변혁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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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육영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9세기 프랑스 생시몽주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전공 분야는 유럽 근·현대 지성사와 역사 이론이다. 저서로 『서양의 지적 운동 Ⅱ: 르네상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공저, 1998),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공저, 2002), 『21세기 역사학 길잡이』(공저, 2008), 『역사학의 세기: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공저, 2009)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굿바이 E. H. 카』(공역, 2005)가 엮은 책으로는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2008) 등이 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협동 과정 과학문화학과를 거쳐 지금은 문화연구학과 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양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세계사global history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에 골몰하고 있다. 해외 한국학 강의 파견 교수 신분으로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를 방문하여 체류(2009~2010년)했다. 현재 ‘은자왕국의 세상 엿보기 혹은 좌절된 접속―1893년 시카고 박람회와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전시된 세기말 조선’이라는 제목의 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서, ‘이미지와 슬로건으로 읽는 북한의 정치문화 연구―포스터 분석을 중심으로, 1970~2000년’이라는 또 다른 과제도 수행 중이다. 관련 논문 “Historiography and the Remaking of North Korea’s Ideolog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Interpreting the Revised Edition of Ryeoksa sajeon”(2010)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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