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
한국 사람에게 “좋아하는 시인은?”하고 물어보면, “윤동주”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대가 아니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이 맑고 정갈한 시풍은 젊은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오래 살수록 부끄럼 많은 인생이 되어 영혼까지 맑아지는 이런 시는 도저히 쓸 수 없어진다.
젊어 요절한 시인에게는 요절의 특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킨 것 같은 맑고 깨끗함이 후세의 독자까지 매료시켜 항상 수선화와 같은 좋은 향기가 풍긴다.
요절이라고 하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1945년, 패전되기 불과 반 년 전,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처음에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유학, 이윽고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적을 옮겼고,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시모가모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로 보내졌다.
거기서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다가 죽기 직전, 모국어로 어떤 말을 큰 소리로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이 무엇인지, 일본인 간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주 씨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절명하셨습니다”라는 증언은 남았다.
말하자면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시인 가까이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나도 조금씩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9년째가 되는 1984년에 이취향 씨에 의해 그의 시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완역되었다.
내 의욕은 꺾였지만 이취향 씨의 훌륭한 번역과 연구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동요까지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윤동주의 원시를 아는 사람은 그의 번역이 예사가 아닌 노작(勞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윤동주의 배경을 알기 위해 철저하게 발로 걷고 조사한 그 정열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그가 유학했던 도쿄, 교토, 후쿠오카 형무소 등 그 족적을 거슬러 올라가며 80대가 된 전직 특별 고등 형사와도 만나는 등 모든 노력을 동원했지만 끝내 옥사의 진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안타깝지만 전모를 밝히고자 했던 그 실증 정신은 신뢰할 수 있다. 언젠가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를 찾아 명료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다.
이취향 씨가 보았던 곳, 조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일본 검찰의 높은 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윤동주의 죽음은 40년 전의 일이다. 왜 그렇게 비밀주의, 은폐주의로 일관하는 것일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진지한 연구자에게는 자료를 더욱 많이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윤동주의 예전 하숙집이나 연고지 등을 찾아 증언을 얻으려 해도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는 일본인은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정말 청결한 미청년으로, 결코 엷은 인상이 아니다. 평범하지도 않다. 의아한 일이다.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에 있다. 이렇게 맑고 단아한 얼굴의 청년이 어떤 시를 썼을까에 대한 흥미, 고백하자면 조금은 불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대학생같이 보이는 지적인 분위기,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없을 것 같은 젊은 모습, 내가 어릴 적 우러러봤던 대학생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지, 하는 어떤 그리운 감정. 인상은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하다. 그런데도 일본인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문학 연습 85점, 동양철학사 80점 등 그 성적도 우수했는데, 교수는 기억하지 않았을까. 루쉰(중국의 문학자)에게 있어서 후지노 선생님과 같은 존재도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깊은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6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우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저항 시인인지 아닌지를 두고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조선어 탄압 당시 과감하게 한글로 쓴 이들 시는 편지와 함께 친구에게 전해져 어렵사리 후대에 남겨졌다. 하지만 이들을 전부 모아도 100여 편, 일본 관헌에 압수당한 시는 그 후 행방을 모른다. 당시에는 한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저항이었다고 한다. 남은 반년을 살아남았다면 전후 고국의 제일선에서 곧장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없이, 무명의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유학 시절, 다치하라 미치조(일본의 서정 시인. 스물넷에 요절했다-옮긴이)의 시를 읽었다. 연보를 보고 이를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윤동주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막연히 그 서정적인 분위기가 다치하라 미치조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의 유혹
다치하라 미치조
(전략)
등불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나의 목소리는 한 곡조씩 이쪽저쪽으로…
그러자 너희들은 사과나무에 하얀 꽃이 피고
자그마한 녹색 열매를 맺고 그것이 상쾌한 속도로 붉게 익어가는 것을
짧은 동안 잠에 들면서 보곤 한다
돌아와 보는 밤
윤동주
(전략)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둘 다 사과의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것 뿐 아니라, 언뜻 약해 보이지만 피아노선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는 투명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어떤 공통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윤동주 쪽이 훨씬 울적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들을 길도 없지만, 다치하라 미치조가 시를 어떤 식으로 읽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이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시집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다르다.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는 음악과 같아, 의미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한편 윤동주의 시는 핵이라고나 할까, 정신이 항상 그 속에 집약되어 있어 숨은 의미도 깊다.
유학생이었던 윤동주는 다치하라 미치조가 죽고 나서 몇 년 후에 그의 시를 읽었을 터이지만, 일제에 우호적인 시인이라는 식으로는 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청춘의 애환, 의문 등 오히려 청년들만의 감성을 공감하면서 읽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치하라 미치조의 사진은 대체로 아주 조금 입을 벌린 모습인데, 윤동주의 사진은 언제나 꼭 입을 다물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청아한 얼굴이다.
다치하라 미치조도 윤동주도, 아직까지 각자의 나라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 시가 읽히고 있지만, 그 이유는 사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순수함을 시 속에서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84년 가을, 일본에서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일주 씨는 건축학자로 성균관대학교 교수이기도 한데, 마침 도쿄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 객원 교수로 일본을 찾은 것이다.
윤동주의 시에 「아우의 인상화」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의 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한 편이기 때문에 그 동생과의 만남이 한층 더 감동적이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아우의, 손의 감촉까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사람이 되지”는 “인간이 되지”라고도 번역할 수 있지만, 어쨌든 형의 의표를 찌른 이 대답이 한 편의 시를 완성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개도 개가 되려 하고, 고양이도 고양이가 되려 할까? 사람은 태어났을 때에는 동물에 지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 필시 죽기 직전까지 인간성을 지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이상한 생물이다.
윤동주도 그런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린 아우의 “사람이 되지”라는 대답에 감동을 받아 반응한 것이겠지.
게다가 그 아우가 성장할 즈음, 식민 치하에서의 모국에서는 정당한 인간도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암담한 생각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라는 행이 되어 분출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의 천진한 예언처럼, 동생 일주 씨는 58세의 나이에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 그 시절 형과 나눈 문답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독실하고 음영이 짙은 사람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저는 어째서인지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모양이라…”
웃으며 말했지만, 분명 여러 곳에 흩어져 남겨진 시를 오늘날 보는 것처럼 정연히 그 자취를 더듬어 조사해 시집으로 엮었던 것도 동생이고,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설계한 것도 일주 씨다.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형을 위해 썼을까.
(제5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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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1926-2006)
오사카 출신으로 제국여자약전(현 토호東邦대학의 전신) 약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제국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보고 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 희곡·동화 등을 쓰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결혼 후, 잡지 등에 시를 투고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란 시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국내에선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 문학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0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명시들을 일본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살해사건을 다룬 「장 폴 사르트르에게」, 고대 일본 이주민들의 차별대우를 고발한 「칠석」등 한국을 소재로 한 시를 여럿 발표했다. 대표시집으로는 『자기의 감수성 정도는』『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등이 있으며, 전후 여성 시인 중에서 가장 폭넓은 사회의식과 건전한 비평 정신을 보여 준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시인으로 한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에 기고 활동을 했다. 여기에 엮인 글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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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선영
출판 기획 및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즐거운 색연필 스케치북』『최강 공부법』『최강 속독법』『최강 집중법』『엄마와 아기를 위한 필라테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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