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허구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을 결정지은 역사적 환경은 사실이다. N. S. 루바쇼프의 삶은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종합판이다. 그들 중 몇 사람을 작가는 개인적으로 알고 잇었다. 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1938년 10월~1940년 4월, 파리에서
독재 정권을 수립하면서 브루투스를 죽이지 않은 사람, 혹은 공화국을 세웠지만 브루투스의 아들들을 죽이지 않은 사람은 아주 짧은 기간만 통치했을 것이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인간, 인간은 누구도 연민 없이는 잘 살 수 없다.
― 토스토옙스키, 『죄와 벌』
첫 번째 심문
1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다.
― 생쥐스트
감방 문이 루바쇼프 뒤에서 쾅 닫혔다.
그는 잠시 문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른쪽 침대 위에는 꽤 깨끗한 모포 두 장이 놓여 있고, 짚으로 된 매트리스는 최근에 채워진 것 같았다. 왼편에 있는 세면대는 마개가 없지만 수도꼭지는 제대로 돌아갔다. 그 옆의 똥통은 소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양쪽 벽은 단단한 벽돌로 되어 있어서 두드리는 소리를 벽돌이 덮어 버릴지 모르지만, 난방 배관이나 배수관이 지나가는 벽은 회반죽이 발려 있어 소리가 아주 잘 울렸다. 난방 배관 자체가 소음을 전도하는 것 같았다. 창문은 눈높이에서 시작되어 굳이 창살을 잡고 몸을 곧추세우지 않아도 뜰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는 하품을 한 뒤 겉옷을 벗어 둘둘 만 다음 요 위에 베개 삼아 놓았다. 그러고는 창밖의 뜰 안쪽을 내다보았다. 눈이 달빛과 전등에 두 겹으로 어리면서 노랗게 반짝거렸다. 뜰 주변으로 벽을 따라 난 좁다란 길은 매일매일 운동할 수 있도록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새벽 어스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별은 맑고 싸늘하게 빛났다. 루바쇼프의 방 반대편에 위치한 바깥 성벽 담장 위에서는 한 병사가 소총을 비스듬히 멘 채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마치 행진할 때처럼 쿵쿵거리며 걸었다. 때때로 그 총검에서 전기 랜턴의 노란 불빛이 번뜩였다.
루바쇼프는 신발을 벗은 채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바닥에 놓은 뒤 침대 위에 잠시 앉았다가 창가로 돌아갔다. 뜰은 조용했다. 보초가 막 몸을 돌리고 있었다. 기관총 감시탑 위로 은하수 한 줄기가 보였다.
침대 위로 오른 루바쇼프는 기지개를 켠 뒤 맨 위의 모포로 몸 전체를 감쌌다. 새벽 5시였다. 겨울이라서 반드시 7시 전에 일어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밀려오는 졸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사나흘 동안 조사받는다고 불려 가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코안경을 벗어 타일이 깔린 바닥 위 담배꽁초 옆에 놓은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감았다. 모포에 감싸인 덕에 따뜻했고, 그래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그는 자기 꿈이 두렵지 않았다.
몇 분 뒤 교도관이 밖의 불을 끄고 감시 구멍으로 그의 감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전(前) 인민위원인 루바쇼프는 잠들어 있었다. 벽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왼팔을 쭉 뻗어 머리를 받치고 있었는데, 이 팔이 침대 끝에 삐죽 나와 있었다. 팔 끝의 손은 맥없이 매달린 채 그가 자는 동안에도 꿈틀거렸다.
2
1시간 전, 내무성 인민위원회 소속의 두 관리가 루바쇼프를 체포하려고 그의 방문을 쾅쾅 두드릴 때, 그는 자기가 체포되는 꿈을 막 꾸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루바쇼프는 깨어나려고 애를 썼다. 처음 체포당한 상황에 대한 꿈이 지난 수년 동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태엽처럼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데 단련이 되어 있었다. 때로는 강력한 의지로 태엽을 멈추게 하여 자기 힘으로 그 꿈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녹초가 되었다. 자면서도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렸다. 태엽은 째깍거렸고, 꿈은 계속되었다.
그의 꿈은 언제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세 명의 사내가 그를 체포하려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밖에 선 채 문짝을 쿵쿵 치는 모습을 닫힌 문틈으로 보았다. 그들이 입은 새 제복은 독일 독재 정권의 친위대에게나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모자와 소매에는 그들만의 표식이 있었는데, 누군가를 해칠 듯한 갈고리가 그려진 십자가 기장이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 손에는 기이할 만큼 커다란 총을 들고 있었고, 그들의 혁대와 옷에서는 새 가죽 냄새가 났다.
이제 그들은 방 안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두 명은 두꺼운 입술과 물고기 눈을 가진 지나치게 덩치가 큰 시골 청년들이었고, 세 번째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했다. 그들은 손에 권총을 든 채 침대 곁에 서서 힘에 겨운 듯 숨을 내쉬고 있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이 내는 천식을 앓는 듯한 헐떡임 외에는 아주 조용했다. 위층의 누군가가 세면대 마개를 뽑았는지 벽 속의 관을 통해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꿈의 태엽은 다 풀려 가고 있었다. 루바쇼프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를 체포하려고 온 두 사람이 교대로 문을 두드리며 언 손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루바쇼프는 고통스러운 장면(세 명의 사내가 그의 침대 곁에 서 있고 그는 실내복을 입으려고 애쓰는)이 잇따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깨어날 수가 없었다. 소매가 뒤집혀 있어서 그는 팔을 그 안으로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애를 써 보지만 마비 증세가 그를 덮쳤다. 옷을 제때 걸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렸음에도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무기력은 몇 초 동안 이어지고, 그사이 루바쇼프는 관자놀이 부근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멀리서 울려오는 북소리처럼 그의 수면을 관통했다. 베개 아래 있는 그의 팔은 실내복 소매를 찾으려고 애쓴 탓에 쿡쿡 쑤셨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귀 위쪽을 얻어맞는 것으로 그는 마침내 이 악몽에서 풀려났다.
루바쇼프는 수백 번 반복되는 꿈속에서의 일격―이렇게 맞아 그는 귀가 먹었는데―이 주는 익숙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는 잠시 공포로 몸을 떨었고, 그의 손은 베개 밑에서 실내복 소매를 찾느라 계속 애를 썼다. 늘 그러하듯이 완전히 깨어나기까지는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깨어 있는 것이 실제로는 꿈인 듯싶고, 아직 그는 어두운 감방의 축축한 타일 바닥 위에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발치에는 똥통이 놓여 있고, 머리맡에는 물 주전자와 빵 몇 조각이 있었다.
이번에도 넋이 나간 상태가 몇 초 동안 지속되었다. 더듬는 그의 손이 똥통을 만질지, 아니면 침대 옆의 램프 스위치를 만질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불빛이 번쩍였고, 이어 안개 같은 몽롱한 상태가 잦아들었다. 루바쇼프는 서너 번 숨을 깊이 들이쉰 뒤, 마치 회복기의 병자처럼 두 손을 가슴 위에서 마주 낀 채 자유와 안전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즐겼다.
그는 앞이마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난 뒤통수를 시트로 닦고는, 당 지도자인 넘버원의 컬러 초상화를 빈정대는 거동으로 쳐다보았다. 사진은 그의 침대 위 벽에 걸려 있었는데, 위든 아래든 혹은 옆이든, 그 모든 벽에 걸려 있었다. 다시 말해 그가 싸웠고 그로 인해 고통받았으며 그를 지켜 주고 키워 준, 그 집과 마을과 거대한 나라의 모든 벽에 걸려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깨어났다. 그러나 문을 쿵쾅대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3
루바쇼프를 체포하러 온 두 남자는 밖의 어두운 층계참에 서서 서로 상의했다. 위층으로 난 길을 그들에게 안내한 문지기 바실리는 열린 승강기 입구에 선 채 두려움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긴 잠옷 위에 걸쳐 입은 군용 외투의 해진 옷깃 위로 큼직한 흉터가 보였는데, 이 흉터 때문에 그는 마치 연주창(림프샘의 결핵성 부종인 갑상샘종이 헐어서 터진 부스럼)을 앓은 듯한 모습이었다. 흉터는 내전에서 입은 목 부상 때문에 생긴 것인데, 내전 내내 그는 루바쇼프의 게릴라 연대에서 싸웠다. 그 뒤 루바쇼프는 외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바실리는 자기 딸이 저녁마다 읽어 주는 신문을 통해 가끔씩 그의 소식을 들었다.
딸은 루바쇼프가 여러 당 대회에서 행한 연설문을 그에게 읽어 주었다. 그러나 연설문은 길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카산 성모(madonna of kasan,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숭배하는 아이콘의 하나. 16세기에 어린 소녀가 어느 불타 버린 집의 잿더미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원본 성모상은 1904년 분실되었지만, 정교 전통에서는 그 복사품도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된다)마저 미소 지을 만큼 아름다운 그 맹세를 소중히 여기던, 수염을 약간 기른 그 빨치산 사령관의 어조를 그 연설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바실리는 연설문을 듣다 곧잘 잠들곤 했지만, 그의 딸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마지막 문장과 환호 부분을 읽을 때는 늘 깨어났다. “국제 노동자 동맹 만세! 혁명 만세! 넘버원 만세!” 같은 환호에 바실리는 딸이 듣지 못하도록 숨을 죽이며 ‘아멘’을 충심으로 덧붙였다. 그러고는 재킷을 벗고 몰래 성호를 그은 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침대로 갔다. 그의 침대 위에는 넘버원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게릴라 대장 시절의 루바쇼프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만약 이 사진이 발견되었다면 그는 아마 어디론가 끌려갔을 것이다.
춥고 어두웠으며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 내무성 인민위원회 소속의 두 남자 가운데 젊은 사람은 문 자물쇠를 쏘아 박살내자고 말했다. 바실리는 승강기 문에 기대어 섰다. 그는 부츠를 신을 시간도 없었다. 손이 너무 떨려 구두끈조차 맬 수 없었다. 두 사람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은 총 쏘는 것을 반대했다. 체포는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들은 뻣뻣하게 언 손을 후후 불며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개머리판으로 문을 쳤다. 아래층 현관쯤에서 한 여자가 사나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닥치라고 해!”
젊은 사람이 바실리에게 말했다.
“조용히 해!”
바실리가 외쳤다.
“관에서 나왔단 말이야!”
그 여자는 즉시 조용해졌다.
젊은 사람은 군홧발을 바꿔 가며 문을 세게 찼다. 소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마침내 문짝이 떨어지며 열렸다.
세 사람은 루바쇼프의 침대 곁에 섰다. 젊은 사람은 손에 권총을 들고 있고, 나이 든 사람은 부동자세를 취한 듯 뻣뻣하게 서 있었다. 바실리는 그들 뒤로 몇 걸음 떨어져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루바쇼프는 머리 뒤쪽의 땀을 닦는 중이었다. 그는 졸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민 니콜라스 살마노비치 루바쇼프,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소.”
젊은 사람이 말했다.
루바쇼프는 코안경을 쓰려고 베개 밑을 더듬으며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코안경을 쓰자 그의 눈은, 바실리와 나이 든 관리가 이전의 사진과 컬러 인쇄물에서 본 표정이 되었다. 나이 든 관리는 더욱 뻣뻣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새로운 영웅 아래에서 성장해 온 젊은 사람은 침대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가 난처함을 숨기기 위해 무언가 끔찍한 말을 하리라 생각했다.
“동지, 총은 치우게. 대체 무슨 짓인가?”
루바쇼프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체포되었소. 옷을 입으시오, 공연한 짓 하지 말고.”
사내가 대꾸했다.
“영장 있나?”
루바쇼프가 물었다.
나이 든 관리가 호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루바쇼프에게 건넨 다음 다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루바쇼프는 서류를 주의 깊게 읽은 뒤 말했다.
“그래, 좋아. 현명한 자라면 결코 이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제기랄.”
“옷을 입고, 서두르시오.”
사내가 말했다. 그의 잔혹함은 결코 꾸민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잘난 세대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니.’
루바쇼프는 언제나 웃는 모습의 청년 얼굴이 담기곤 하던 선전 포스터들을 회상했다. 문득 그는 피로를 느꼈다.
“총을 만지작거리지 말고 내 실내복이나 건네주게.”
루바쇼프가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얼굴을 붉혔지만 말이 없었다. 나이 든 관리가 루바쇼프에게 실내복을 건네주자, 그는 소매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잘 들어가는군.”
루바쇼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바쇼프가 침대에서 천천히 나와 구겨진 옷들을 한군데로 모아 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전 여자가 소리 지른 이후로 그 집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 모두 침대에서 숨죽이며 깨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잠시 뒤 위층에서 누군가가 플러그를 뽑는 소리와 물이 관을 통해 아래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4
현관 입구에는 관리들이 타고 온 미국제 신형 자동차가 서 있었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운전사는 전조등을 켜 두었고, 거리는 잠들었거나 잠든 체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자동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청년이, 다음에는 루바쇼프가, 마지막으로 나이 든 관리가 탔다. 제복 차림의 운전사가 시동을 걸었다. 모퉁이를 지나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끝이 났다. 그들은 아직 마을의 중심부에 있었다. 주위에는 9층, 10층 되는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서 있었지만, 도로는 얼어붙은 진흙투성이의 시골 마차 길이었고, 갈라진 틈으로 얇은 눈가루가 스며들어 있었다. 운전사는 자동차를 보행 속도로 몰았고, 심하게 뒤뚱대는 자동차는 소달구지처럼 삐걱거렸다.
“좀 더 빨리 몰아.”
자동차 안의 침묵을 참을 수 없었는지 청년이 말했다.
운전사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루바쇼프가 자동차에 오를 때 몹시 냉담하고 불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루바쇼프는 이전에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사람도 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가물거리는 전조등을 켠 자동차를 타고 죽은 거리를 덜거덕거리며 지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나 떨어져 있나?”
루바쇼프는 동석한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하마터면 ‘병원까지 말이오’라는 말을 덧붙일 뻔했다.
“반시간은 족히 걸릴 거요.”
제복 차림의 나이 든 사람이 말했다.
루바쇼프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옆으로 건넸다. 젊은 사람은 퉁명스레 거절했고, 나이 든 사람은 두 개비를 꺼내 그중 하나를 운전사에게 주었다. 운전사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쥔 채 모자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에게 불을 빌려 주었다. 루바쇼프의 마음은 좀 가벼워졌다.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자칫하면 감상적으로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무슨 말인가 해서 주위에 어떤 인간적인 온기를 일깨워 놓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이 자동차가 안됐군. 외제차는 돈이 꽤 들지. 우리 도로에서 반년만 구르면 끝장나니까.”
“당신 말이 옳소. 우리 도로는 아주 거꾸로 가고 있단 말이야.”
나이 든 관리가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 루바쇼프는 그가 자신의 무력증을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루바쇼프는 문득 자신이 누군가가 던져 준 뼈다귀를 받은 한 마리 개처럼 여겨졌다. 그는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이 거칠게 말했다.
“그럼 자본주의 국가에선 도로가 괜찮다는 거요?”
루바쇼프는 씩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밖으로 나가 본 적 있나?”
루바쇼프가 물었다.
“거기가 어떤지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그곳에 대해 내게 이런저런 얘길 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청년이 대답했다.
“자넨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아나?”
루바쇼프는 아주 조용히 묻고는 이어 덧붙였다.
“자넨 당의 역사를 좀 공부해야겠어.”
청년은 말없이 운전사의 등만 주시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운전사는 덜덜거리는 엔진의 초크를 세 번째 당겼다가 욕을 퍼부으며 다시 놓았다. 자동차는 난폭하게 교외를 지나갔다. 나무로 지어진 초라한 집들의 겉모습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읽을 수 없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집 그림자 위로 창백하고 차가운 달이 걸려 있었다.
(제1장~4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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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아서 쾨슬러 (Arthur Koestler, 1905-83)
헝가리 태생의 영국 소설가, 저널리스트, 비평가. 『한낮의 어둠』(1940)은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소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자전적 수기, 르포, 과학사, 신비주의, 심리학 등 폭넓은 관심으로 영감에 찬 책을 많이 썼고, 사형제도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37년 이래 소비에트 정권의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이 점에서 그는 사르트르나 브레히트와 구분된다. 말하자면 그는 사고나 표현에 있어 ‘대양적 감정ocean feeling’을 가진 범유럽적 문화지식인이었다. 『한낮의 어둠』은 이데올로기 비판 차원을 넘어 인간과 권력과 역사의 착종된 관계에 대한 매우 절제되면서도 깊은 성찰로 읽을 만하다. 쾨슬러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았고, 점점 엄습해 오는 육체적 마비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어할 수 없는 모욕으로 고통당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아내 신시아(Cynthia)도 동반 자실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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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문광훈
충분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저서로는 『아도르노와 김우창의 예술문화론』을 포함 김우창론 3권이 있고, 한국 문학 쪽으로 『시의 희생자, 김수영』과 『정열의 수난: 장정일론』이 있다. 미학 쪽으로 『숨은 조화』와 『교감』, 『렘브란트의 웃음』이 있다. 김우창 선생과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 마음-지각-이데아』가 2008년에 나왔다. 역서로 『요제프 수덱』, 페터 바이스의 『소송/새로운 소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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