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그를 사악한 천재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천재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람들마다 그를 다르게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력에는 이구동성으로 경의를 표했다. 찰스 다윈만큼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상가는 없었다. 그러나 다윈은 전대미문의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족에 헌신적이고, 자신의 시골집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허식을 싫어하고, 행동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인습적이고, 자신이 내놓은 결과에 대해서는 잰 체하지 않고 겸손한 인물로,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매사에 규칙적인 연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성격은 사람들이 그의 저작들에서 느끼는 예리한 명민함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심지어 다윈조차도 가끔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의구심을 가지곤 했다. 언뜻 보아 가장 평범한 사람들 축에 끼었던 그가 어떻게 19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책들의 목록에 속하는 작품을 내놓음으로써 당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수 있었을까? 자서전에서 자세히 밝힌 자신의 성품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이론들이 몰고 온 변화들을 고려하면, 불충분해 보였다. 그는 생애 마지막 무렵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해력이나 기지에 있어서 그리 민첩하지 못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지는 추상적인 사고를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내 기억력은 광범위하지만 흐릿하다.” 회한에 젖어 그가 떠올린 생각에 의하면, 그는 실제 과학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수룩했다. 그가 아니고는 누구도 노년을, 식물이 바순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를 연구하며 보내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며, 그는 자신이 수년 동안에 저술한 작품 수에 놀라기도 했고, 자신의 저작,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이 낳은 명성에 당혹스러워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Chambers,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k, 그리고 다윈의 조부인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을 포함한 다른 여러 사람들도 모두 진화론을 제시했다. 다윈 말고도 그에 앞서 몇몇 사람들이 자연선택에 대한 견해를 주장했다. 그럼 왜 매닝Manning 추기경은 다윈만이 신에게서 ‘창조의 노동’을 박탈했다고 공공연히 비난했을까? 혹은 다윈의 친구, 윌리엄 휴웰William Whewell은 왜 다윈의 책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도서관 서가의 한 자리를 내주는 걸 한사코 거부했을까? 왜 칼라일Carlyle은 다윈의 견해들에 대해서 다소 치욕적인 발견이므로 말하지 않을수록 좋다며 빈정거렸을까? 다윈은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러 갔을 때 평의원 회관의 지붕에 원숭이를 매단 케임브리지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윈의 저작에 대한 동일한 반응으로 에드워드 불워 리턴Edward Bulwer Lytton은 『그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 What Will He Do With it?』에서 다윈을 삿갓조개에 관해 두 권의 두꺼운 책을 쓴 롱 교수Professor Long로 풍자했고, 찰스 킹즐리Charles Kingsley는 『물의 아이들 The Water Babies』에서 다룬 풍자의 핵심에서 동물의 기원에 관해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만일 머릿속에 다 큰 하마 한 마리를 떠올리면, 당신은 원숭이가 아닐 것이다.”) 다윈은 <펀치 Punch>에 실린 캐리커처들을 보거나 그중 일부를 수집하는 걸 무척 즐겼다.
다윈은 쏟아지는 찬사와 비난 모두에 한층 더 당혹스러워했다. 영국 전역에 걸쳐 교구목사들이 교단에서 다윈에게 맹비난을 퍼붓는 동안에 미국의 신학자들은 그의 말과 성서 사이의 모순들과 씨름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Elizabeth Gaskell은 그를 『아내들과 딸들 Wives and Daughters』의 낭만적인 영웅으로 만들었고, 같은 시기에 마담 블라바츠키Madame Blavatsky는 박제한 비비의 겨드랑이에 모욕적으로 한 권의 『종의 기원』을 끼워서, 신지학이 취하는 반 다윈주의 노선을 표명했다. 그리고 <데일리 텔레그라프 The Daily Telegraph>는 서더크의 유권자들에게 『종의 기원』에 대해 우호적인 논평을 한 헨리 포셋Henry Fawcett을 다시는 의회로 보내지 말 것을 촉구했다. 다윈의 책은 다윈을 과학계의 스타로 만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명성 때문에 석수石手들과 어린 남학생들, 글래드스턴Gladstone,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한 마리의 고릴라’를 자처하는 이로부터 끊임없이 날아드는 원치 않는 편지들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짓고 싶어 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다. 여행자들—그들 중 일부는 다윈만큼이나 유명했다—은 그의 집을 방문해 그를 슬쩍 보고 싶어 하기도 했다. 나중에 레슬리 스티븐Leslie Stephen은 다윈을 “과학계의 고귀한 늙은 영웅”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끝끝내 알려지지 않은 한 찬미자(적당히 리치(부자) 씨라 불렸던)는 존경의 표시로 다윈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이상은 모두 생전에 『종의 기원』의 마지막 판의 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대적 의미에서 ‘진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한 인물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적자생존’이란 말조차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었다. “내게 있는 평범한 능력으로, 상당히 중요한 점에서 과학자들의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니 정말 놀랍다.” 어떻게 19세기는 이처럼 다윈의 세기가 되고 말았던 걸까?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비록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찰스 다윈에 대해서 더 많이 논해지고 쓰였고, 그의 책과 논문들을 보관하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건립되었고, 그의 집은 박물관으로 변신했고, 상당한 비용을 들여 그의 일련의 원고들이 한데 모이게 되었지만 그런 야단법석 뒤에 가려진 개인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 그는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둔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나 후대 작가들이 창조했던 휘황찬란한 우상도 아니었다. 그의 자서전과 그가 밟아간 이력 자체가 마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듯이 효과적으로 연막을 쳤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대답은 한 인간과 그의 사상이 대중과의 사이에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윈주의는 다윈과 빅토리아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다윈의 저작과 다윈이라는 인물에 대한 영속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사회와 자신의 접점에서 삶을 영위해온 길, 즉 과학이 처음으로 영국 사회에서 크게 대두되었던 시대의 신사 계급 박물학자로서의 그는 물론이고, 저명인사들의 친구, 여행자, 남편, 아버지, 베스트셀러 작가, 헌신적인 실험가, 그리고 숄을 두른 빅토리아 시대의 병자로서의 삶에는 아주 작은 주의만을 기울였다. 사실상 많은 현대의 책들은 다윈을 그 자신이 바라보고 싶었던 바대로 받아들여서 비교적 단순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다른 현대의 책들은 목적 의식, 즉 항상 존재했던 것만은 아닌 지적인 일관성을 밝혀내려 하거나 마찬가지로 과장되어 보이는 내적인 고뇌를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다. 그저 소수의 책들만이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인식하고 있었을 모습을 그려내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책들은 『종의 기원』의 저술에 관해 설명한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듯이 다윈의 마지막 20년간의 삶을 그저 짧은 몇 장에 그리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다윈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이었고 나이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면에서 변화를 겪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 Descent of Man』를 쓰고 나서 벌레들에 대한 관찰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다윈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견해는 본질적으로 단순했다. “나는 박물학자로 태어났다.” 마치 이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진술했다. “자연과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없이 열렬했다.”
어떤 점에서 그로서는 그 말 이외에 한 말이 별로 없었다. 다윈이 거리낌 없이 인정했듯 그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항상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집중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의대 친구가 언젠가 말했듯이 지나칠 정도로 생물의 복잡성과 환경과의 관계에 빈틈없이 ‘주의를 집중’한 나머지, 자연의 방법을 설명하는 일이 그가 스스로 부과한 일생의 과제이자 그의 절망과 환희가 되고 말았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의 실존을 지탱해주었던 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역사적 시기의 어떤 영향력 있는 사상가, 과학자, 철학자도 이처럼 간단하게 ‘태어난다고’ 할 수는 없다.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사회 풍조를 신뢰했고, 위대한 인물들과 대중적 영웅들에 대한 숭배—19세기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는 정신의 타고난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다윈은 자신과 같은 인물이 그 시대의 동향과 개인 및 기회의 복잡한 연관성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과학적인 착상과 명성이란 것이 곤충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채집하는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윈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어느 정도 바랐을 희망과는 달리 말이다. 박물학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여자 가정교사나 제재소 노동자가 19세기 지식계의 정상에 오를 수 없듯이 박물학에 대한 사랑, 한 가지만으로는 다윈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다윈 자신에 대한 평가 또한 그 시대의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전통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사망하기 6년 전인 1876년에 가족을 위해 쓴 자전적인 회고록은 현대의 독자들이 애태우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 그랬듯이 동기들에 대한 해석을 꺼려했고, 자신의 “전 생애의 문을 여는 진정한 열쇠”를 주는 걸 힘들어했다. 그는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 자신에게 보낸 질문서를 보자마자 냉정하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결코 내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어.” 다윈은 한을 풀거나 미래에 대한 개인적인 통찰력을 찾으려고 자서전을 쓰진 않았다. 또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박물학에 대한 열정을 정당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인 에마에게조차 그런 열정을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아내는 생애의 대부분을 그의 그런 내면적인 사고로부터 배제된 채 살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윈은 호감을 살 만큼 투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 그의 자서전은 그의 존재의 핵심에 대한 체계적인 설계인 만큼이나 위장—가장—되어 씌어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그가 자서전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야말로 가장 뜻 깊은 것이다. 다윈의 배후에는 빅토리아 시대 신사 계급의 인정되지 않은 거대한 지지 체계가 있었고, 그 체계 배후에는 식민지 시대의 제국적인 영국의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다윈은 사회적으로 안정적이고 유력한 집안의 유복한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도예가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의 딸이었다. 그의 조부와 외조부는 과학과 철학, 과학기술에 기여한 유명인이었다. 그는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관에서 교육받은 것을 포함해 인생에서 많은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은 수년이 흐르는 사이에 유력한 인물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친구들이 세계 전역에 걸친 비글호의 탐험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장을 그에게 주었을 때와 그가 귀환한 후에 런던의 과학계에 수월하게 입회할 수 있게 해주었을 때 그랬다. 비글호 탐사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다윈은 웨지우드 가의 외사촌들 중 한 명과 결혼했다. 그는 아내에게서 상류계급의 조용한 전원풍의 생활이 주는 안정된 안락함을 얻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다윈은 언제나 함께 살기에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에마 웨지우드는 여느 행실이 바른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처럼 다윈이 그의 사유를 과학에 헌신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개인적 기대들을 많이 희생했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래저래 다윈의 과학적 연구 계획에 이끌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와 비글호 항해를 함께했던 동료들, 그의 아내, 친구, 이웃들, 편지를 주고받았던 다양한 식민지에 거주했던 사람들, 비둘기 장수들, 사촌, 숙모, 조카, 지방 정원사, 시골 신사, 집안의 집사, 다윈의 아이들,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 교구목사, 대학 교수들, 식물학자와 생리학자들, 의사, 그리고 경계심을 갖지 않았던 가정의 애완동물들, 이들 모두는 진화론 연구의 진보를 진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조력자들이었다. 다윈의 작품은 이런 점에서 전적으로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었고, 그가 수집했던 ‘사실들’은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광범위한 서신 왕래가 증명하듯이 집합적 노력을 표상했다. 다윈은 그저 그 시대의 지배적인 화제들을 흡수하는 빅토리아 사회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빅토리아 사회가 그를 만들었다. 그는 다른 이론들에서 추출한 실질적인 정보로 자신의 이론들을 세웠다. 그는 사람들을 혹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협력 체계는 대체로 위계적이었는데, 다윈은 이쪽에서 실을 뽑아내 저쪽의 파리를 끌어당기는 탐욕스러운 거미 역할을 했다. 그는 “사실들을 소유한 수전노”였다. 그는 중년에는 그 사실들을 귀중한 보물인 양 축적하며 흡족해 했다. 『종의 기원』은 결코 한 개인의 위업으로 볼 수 없다.
더구나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을 때, 공공연히 진화론 사상을 옹호하는 선봉에 섰던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그의 과학계 친구들이었다. 자신의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위해 싸우기 좋아하는 불독 역할을 한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가 없었다면 다윈은 잇달아 일어나는 충돌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하버드의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Asa Gray 등과 같은 저마다 이런저런 다윈 이론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 심각한 의혹을 품고 있던 저명인사들도 기꺼이 다윈을 대신하여 변호에 나섰다. 심지어 다윈의 악명 높은 질병조차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지식인에 대한 형벌—그가 속한 아주 생각이 깊은 저명인사 집단의 특징으로 여겨졌다—의 구실이 되었고, 그렇게 미화되었다. 다윈도 소심하게 시인했듯이 계속 좋지 못했던 건강이 “사회와 여흥의 불화로부터 그를 구해주었다.”
간단히 말해, 다윈의 실제 생활은 그를 고독한 은둔자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그의 내면에는 그로 하여금 그가 소유했던 장점과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을 대부분 만들 수 있게 해준 얼음 조각이 하나 있었다. 종종 자신의 이론들과 함께 혼자 있었으면서 자연선택의 개념이 근거하고 있는 죽음과 투쟁의 개념에 병적으로 빠져들었고, 자주 출판의 압박감에 대처하지 못했고, 뒤따르는 논쟁을 두려워했으며, 사회적 약속의 요구를 일부러 피했고, 절정에 이른 명성에 싫증을 느끼다시피 하고, 아무 탈 없이 서재를 나와 문을 닫거나 온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영국 사회가 떠받치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이야기이다. 즉, 한 인간이 현재와는 다른 방법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심원한 사상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야기, 누군가가 그 시대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또 그 가설을 뒤엎은 덕분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온화한 성격에 별다른 목표가 없던 한 젊은이가 거의 필적할 상대가 없는 과학계의 거인으로 탈바꿈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는 선원이나 정치가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박물학자’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한국어판 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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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재닛 브라운 Janet Browne
2010년 현재 하버드 대학교 과학사 교수인 재닛 브라운은 생명과학의 역사, 자연사, 생물학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진화학계의 세계적 석학이다. 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종의 기원』과 다윈의 생애를 폭넓은 식견, 독보적 연구, 방대한 문헌을 통해 이 책 『찰스 다윈 평전』을 집필한 저명한 과학 저술가이다. 다윈 혁명의 핵심을 꿰뚫고, 가장 완벽한 다윈의 초상을 거대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 우아한 웅변으로 그려낸 재닛 브라운의 다윈 평전은 다윈과 그의 시대에 바치는 압도적, 매혹적, 기념비적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예술ㆍ사회과학을 전공하고,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과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과학사 저널>의 편집자와 영국과학사 학회 회장을 역임한 재닛 브라운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과학, 생물학, 의학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다윈 평전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찰스 다윈 평전』으로 전국 도서 비평가상, 하이네만상, 왕립문학 학회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과학사학회 파이처상 등을 수상한 브라운은 현재 다윈의 유산인 ‘진화론’의 진화 과정을 역추적하고 21세기 다윈주의의 현주소를 밝히는 데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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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임종기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SF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우주전쟁』, 『타임머신』, 『히든 브레인』, 『빅 스위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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