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
“난 적어도 책 한 권에 인생이 변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이응준, 「어둠의 뿌리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늘로 간다」)
오래 전에 읽은 시의 한 구절입니다. 보통 ‘내 인생의 책’이니 ‘나를 바꿔준 한 권의 책’ 같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인간이 그렇게 쉽게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공감한 대목입니다. 책에 매혹된 이후로 책을 읽는 일이 제 주업처럼 돼버렸지만, “책이 전부야!”란 말만큼은 피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앉은자리에서 ‘비열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지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책이라곤 읽지 않아!”라고 자랑스레 말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아름다운 서재》를 손에 든 분들이라면 그런 ‘아Q’적 발상을 선택지로 꼽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지요. 맞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충분히 읽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 정도라고 합니다. 책읽기에 관해서 우리는 ‘한 권 읽기’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굳이 각 나라별 비교 수치를 갖고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독서량과 독서 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온갖 종류의 책들을 다 포함한 통계치라서 그 ‘한 권’도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시인의 기준을 조금 비틀어서 이렇게 말해보고도 싶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 비열한 독서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요.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다수의 책을 읽는 일, 그건 독서가 습관이자 문화일 때 가능하겠지요. 우리가 그런 습관과 문화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가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곧 인류가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기는 합니다. 인류가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체 인류사에 견주어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며, 진화적 적응이라고 보기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입니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입니다. 그러니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어”라거나 “나는 책을 못 읽겠어”라는 투정이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독서 능력은 ‘옵션’이니까요. 하지만 강조해야 할 것은 그것이 ‘특별한’ 옵션이란 사실이지요.
불과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대중적 독서’는 불과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독서 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하고 사고 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인류사적 대전환은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니까요. 흔히 인간을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으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습니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집니다. 따라서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마나 한 장신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나 말미잘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똑같이 책을 읽을 줄 아는 다른 사람과는 구별해주지 못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 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아니 지속적으로 발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발달은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질 터입니다(그리고 여기 그렇게 읽을 만한 책들의 목록이 수록돼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말입니다. ‘단순한 생명’을 ‘생존’이나 ‘목숨’으로 바꿔 넣어도 좋겠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생명’으로서 그저 ‘자연사적 삶’만을 영위하는 존재는 아니지요. 간단히 말하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그렇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연어나 날치보다 뭐 그렇게 대수로운 존재인가 의심해볼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의심 자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우리가 ‘단순한 삶’이나 ‘자연사적 삶’을 넘어서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외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전제 아래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것이기도 합니다. 독서는 이 질문의 연속성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를 그러한 질문의 공동체로 묶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혼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서 경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우리’로 확장시켜주면서, 사회역사적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따라서 당위적인 독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습니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의 목록을 마주하면서 긴장과 축복을 동시에 느낍니다.
(<아름다운 서재> 제5호, 2010. 3)
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인간사랑, 2002
『향략의 전이』, 슬라보예 지젝, 인간사랑, 2002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책이 있는 곳에 서평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평은 말 그대로 책의 됨됨이에 대한 평이니까 책이란 물건이 존재하는 이상 서평은 불가피하다. 책에 대한 평이라고 했지만 이때 評은 좋고 나쁨 따위를 평가하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값을 매기는 일이다. 책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풀어서 말하자면 한 책에 대해 품평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원적 의미 그대로 ‘꼴값’을 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판별을 위해서 보통은 책을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적어도 넘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리뷰re-view다.
이 ‘리뷰’란 말 자체에 ‘비평’이란 뜻도 포함돼 있지만 나는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는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 사이가 아닌가 싶다. ‘소개’의 대표적인 유형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와 언론의 ‘신간 소개’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어떤 책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어, 이런 책이 나왔네!”란 반응을 유도한다. 반면에 ‘서평’은 그것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인가를 식별해줌으로써 아직 책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길잡이다. “이건 읽어봐야겠군”이라거나 “이건 안 읽어도 되겠어”가 서평이 염두에 두는 반응이다. 그에 대해 ‘비평’은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을 향하여 한 번 더 읽으라고 독려한다. 그것은 독자가 놓치거나 넘겨짚은 대목들을 짚어줌으로써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자성을 촉구한다.
물론 소개-서평-비평은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에 관한 담화와 담론들은 이 세 요소들을 약간씩이라도 모두 포함하기 마련이다. 다만 분류는 그 비율과 방점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서평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렇게 가늠될 수 있다면 서평의 바람직한 역할이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적어도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다 세분해서 서평의 유형학을 가정할 경우에는 초점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서평의 유형은 다양한 기준에 따라 나뉠 수 있는데, 먼저 그 서평의 주체에 따라서 일반 독자, 전문 독자, 전문가 서평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독자란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책을 사서 읽게 되는 보통의 독자를 가리키며, 전문 독자는 주로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여러 매체에 정기적으로 북리뷰나 칼럼을 게재하는 이들이나 언론의 출판 면 담당 기자들이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란 서평을 정기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지만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서 식견과 조예를 갖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독자 유형 또한 중복 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서평의 주체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바람직한 것은 이들이 유기적인 분업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겠다.
두 번째로, 서평의 또 다른 분류 기준은 분량이다. 원고지 매수로 따지자면 5매, 10매, 20매, 30매 등의 유형학이 가능하다. 분량의 제한이 없는 자유 서평이 아닌 이상 대개의 ‘공식적인’ 서평들은 분량의 제한을 요구받으며 이러한 분량 자체가 서평의 내용을 상당 부분 한정한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평하느냐는 전적으로 이 분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서평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평만큼은 아니더라도 보다 많은 분량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주요한 학술서나 교양서를 평하면서 원고지 10매 분량도 할애하지 않는 것은 ‘서평 문화’ 자체의 피상성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서평을 다루는 매체 또한 서평의 분류 기준이다. 이것은 서평의 주체와도 얼추 상응하는데, 주로 일반 독자들의 서평이 올라오는 온라인서점이나 개인 블로그, 그리고 전문 독자들의 리뷰들이 게재되는 일간지, 주간지 등의 언론매체, 끝으로 전공자들의 학술서평이 실리는 학술지 등이 서평의 유형학을 구성한다. 여기서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각 매체별 서평들의 역할 분담이고 특화이다. 매체에 따라서 요구되는 서평의 성격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그 성격과 내용에 따른 분류이다. 서평은 대상 도서의 학술적, 사회적 의의를 거론할 수도 있고, 도서 상태의 문제점과 오류들에 대한 지적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곧 책에 대한 권유/만류와도 맞물리는데, ‘반드시 읽어보시길’ 권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낭비하지 마시길’이라고 충고를 던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두 가지 양 극단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독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서평이란 그러한 권유/충고가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나열한 대로 우리의 ‘서평 문화’는 다양한 층위의 서평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일률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론 서평의 경우에 신간들 위주의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일정 분량 이상이 전제된 깊이 있는 리뷰들이 보다 많이 다뤄지기를 기대해볼 수는 있겠다. 이런 정도의 소감밖에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주요 서평자’로 거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로 해온 일이 본격적인 서평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서평 혹은 책에 대한 수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모아놓거나 늘어놓는 일을 즐겨 하게 됐고 덕분에 본의 아니게 얻은 직함이 ‘인터넷 서평꾼’에다 ‘북리뷰어’다. 자임한 직함은 아니기에 정확한 규정 근거는 모르겠지만 ‘서평꾼’은 아무래도 ‘서평가’나 ‘서평자’와는 급이 좀 다르다(무슨 학술서평에 ‘서평꾼’이 등장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일도 약간 좀스럽다. 가령 나는 이런 지적들을 늘어놓는다.
국내에 다수의 책이 번역 소개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대표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의 한 대목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 이 경우 나의 의문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 같은 ‘이상한’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가이다. 저자가 멍청이라서? 대개 그런 경우는 없다. 문제는 역자 혹은 편집자의 부주의다. ‘이상理想’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실상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를 옮긴 것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편집자가 부적절한 개입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알고 보면 정상 참작이 가능한 실수이긴 하지만 순진한 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자학하게 만드는 ‘오류’이다.
같은 저자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은 초판의 오역들을 교정한 개역판까지 나와 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을 어느 정도 바로잡았을 뿐 근본적인 교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쿤스투리카’로 개명하고 거기에 ‘Kunsturica’라고 엉뚱하게 병기까지 해놓았다.
이런 지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정작 문제적인 것은 서평이다. 허다한 오류와 오역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은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놓았다(서평자들이 자주 잊어먹는 것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서라는 사실이다). 물론 지면의 성격과 분량의 제약이 서평의 일차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엉터리 책들을 감시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을 통한 학문적 교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교수신문>, 2008. 1)
(프롤로그 전문, 제2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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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현우
‘로쟈’라는 ID 혹은 필명으로 알려진 그는 노어노문학을 전공해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2004)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인터넷서점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꾸리고 있으며, 이른바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고 잇다. 옮긴 책으로 『레닌 재장전』(공역)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2009)가 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저술(교양) 부문]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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